|
逢別記
愚谷 林明三 詞伯
서울에는 눈이 온단다, 이곳 평은 하늘은 낮게 깔린 겨울 구름인데. 바람 같은 사람,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가다니, 내 술 한 잔 내 안주 한 접시 한 소반 차려 대접해 드리지 못했는데.
일요일 저녁에 집에서 아들과 산머루주와 오디주를 나누며 부자유친 하다니 9시 조금 넘어 전화가 왔다. “나 혜봉인데 안동 우물가에 있으니 오게. 좀 전에 서정오 한테도 전화했지.” 아내의 눈치를 살피니 대뜸 인상이 찌푸려진다. 급히 “지금 아들 녀석과 대작 중이라 못 나가니더. 언제 가시니껴?” 다행히 내일이나 모레 간단다. 삼 년 전엔가 우곡 사백이 예천 보문사에 잠시 거하던 시절, 영주에서 임우곡 권서각 서지행 박양백, 이제 지천명을 훌쩍 넘긴 네 옛벗이 모여 한바탕 가무음주 질탕하게 논 이후 소식이 끊어졌다가 기별이 불쑥이다.
월요일 아침 출근길에 ‘이 사람이 어찌 왔을까, 활활 타오르는 가슴불을 냉철한 머리얼음으로 식히기 위해 평생을 분주히 다니는 사람. 마침 영주 양백암이 비어 있는데 거기 머물며 글이나 쓰도록 할까? 어제 김치를 해서 차로 날라 두 단지나 묻었고 광에 연탄이 많으니 쌀이나 한 푸대 사 들라주면 동안거 안 되겠나’라 생각한다.
뒤뜰에서 출근 담배 한 개비를 피우며 “어이구우 임 형 오랜만일시더. 어찌 지내셨는지. 운수행각 중이시껴? 마침 양백암에 중 하나 들이려 했더니 잘 됐네요.” 하고 전화하니, “지금 거기 갈 시간은 없고 다음에 가지. 내가 있지, 송병준이 자료 조사하러 곧 일본 가는데 있지, 가서 한 사오년 있다 오는데 있지, 가기 전에 사람들 좀 만나보려고 왔지. 있지, 《친일인명사전》에 불교 친일 승려 58명 썼더니 있지, 원고료 420만원 주데. 있지, 그 정도면 노자는 되겠지. 있지, 퇴근 하거든 우물가로 오게. 권석차이 임관혀기 김진태기 조영이리 등 있지 오만사람 다 불러 놓았네.” 그 특유의 ‘있지’ 화법,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여전히 걸걸낭낭하다.
내가 “야 오늘 중 술 좀 얻어먹겠네.” 했더니, “허참, 술값이야 오는 사람이 갖고 와야지.” 한다. 80년대 초 안동에서 한창 ‘말쌈’ 동인 활동을 하다가 뿔뿔이 흩어진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지만, 예순 셋 나이를 잊을 만큼 그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당당했다.
퇴근하여 아내에게 저녁 빨리 먹고 외출해야 한다 하니 인상이 잔뜩 찌푸려진다. 우물가로 가긴 가야 하는데 아내의 강짜를 감수하면서까지 갈 용기가 안나 밥 달란 말도 못하고 아내의 눈치를 보며 한게임 장기를 몇 판 두다니 벌써 일곱 시가 되었다. 어떻게 빠져나갈까 우물가로 향하는 마음을 추스리며 화장실에서 소변하다니 갑자기 전화가 왔다. 우곡 형의 독촉 전화이지 싶어 “가만 놔둬!” 소리 질렀는데도 아내가 뚜껑까지 열어 가지고 갖다 준다.
전화 안 받아도 몇 번 더 올 터, 공처가 핑계 대기도 좀스럽고 꼭 얼굴 한 번 보고 싶은 마음에 아내에게 술 안 먹고 10시 쯤 온다 몇 번 다짐하며 급히 밥을 먹곤 《2009년 경북작가 시선집》과 《양백집 춘》 초간본을 챙겨 끼고 초겨울 바람 부는 운안동 길에 올랐다.
우물가, 우곡의 소리가 들리는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내 셋이 앉아있다. 들어서며 인사를 하니 대뜸 “허, 머리 다 빠졌네.”하는 임우곡의 인사말이 날아온다. 임관혁 형에게 악수 인사를 하고 난 다음 우곡 형에게 처음으로 큰 절을 올렸다. 임 형은 합장을 하며 “내가 스님이니 절을 받지.” 한다. 나는 “그 게 아니고요, 예전에 많이 연장인 임 형께 버릇없이 대했던 걸 사죄하는 절이시더.” 하며 정중하게 큰절을 올렸다. 그렇다, 그는 나보다 칠 년 연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유풍 질풍노도의 시절에 만취하면 “어이, 임명사미 임명사미.”하며 말을 크게 놓았었다. 그래도 그는 불쾌한 기색 하나 없이 “응 그래 박희요이.”하며 큰 웃음을 지었다. 임우곡이 경기도로 떠난 다음 글밭 시절에 어울렸던 사람, “어이, 병호야 병호야.”하고 마구 불렀던 시인 임병호는 고인이 된지 벌써 5년 여가 지났다. 둘 다 나보다 칠 년 연장, 허나 오성과 한음 역시 칠 년 나이 차이였지 아니 한가.
함께 자리 한 사내, 40대 중반 쯤 온순한 모습인 문학박사 김순석을 소개 받았다. 연구원으로 불교사학을 전공한다고 한다. ‘아 좋은 사람 만났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 좋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거란 예감에 마음이 들뜬다.
“임 형, 삼년 전엔가 티벳 가신다고 한 다음 기별이 없어 서지행과 나는 임 형이 티벳에 그냥 눌러앉았는줄 알았니더.”했더니, 안주 챙겨오던 우물가 김 여사가 “어디 술 마시느라 티벳 될리껴?”한다.
막걸리 몇 잔을 함께 나누며 근황을 물었더니, 그동안 이천 지족암에서 주욱 있었는데, 내년 2월에 일본 오사카 어느 절에 가서 기거하며 한일 불교 교류사를 연구한다고 한다. 특히 송병준에 관한 글을 지금 한 800매 정도까지 썼으나 국내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어 글이 막혔는데 거기 가서 송병준 등에 관한 자료를 섭렵하여 글을 완성하겠다고 한다.
"어이쿠 이제 일본 불교 절단 났네. 임 형, 거기에 뼈 묻겠네요. 사람의 명은 한치 앞을 모르는데 거기서 사오년 산다하시니 한 칠십 되지요? 칠십이면 살만큼 살았는데요, 그러니 일찍 돌아오세이. 그래야 다시 만나지.”했더니 좌중은 히히 웃고 임우곡은 “응 응.” 그의 표정이 굳어진다.
임우곡 특유의 다변과 음량으로 자기가 쓴 책과 글 자랑, 특히 친일 인명사전 친일승려 분야의 필자임을 강조하며 이동인 이회광 송병준 다께다 등 등 개화기 조선과 일본의 승려들의 행적을 종횡으로 파헤친다. 좌중을 석권하며 거침없이 기염을 토한다. ‘기염’, 그것이 바로 임우곡의 장점이다. 옛날과 하나도 변한 게 없이 기염과 큰소리 뻥뻥, 자기 생각을 다변으로 요란스럽게 표출하는 그를 보며, 역시 그릇이 크고 기가 들끓어야 그게 동력이 되어 큰 글을 꾸준하게 쓸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박사는 친일승려 세 명에 대해 긴 글 세편을 썼다고 한다. 겨울바람을 받으며 오늘 이 자리에 잘 왔구나 하는 생각이 다시금 들었다.
《친일 인명사전》은 참으로 귀한 책이다. 육신은 죽어 썩어 없어져도 그 행적은 기록으로 남는 것, 이름 석 자 역사의 비석에 뚜렷이 새겨져 청탁을 증거 하는 법, 보복한들 무엇 하며 몰수한들 무엇 하랴, 다만 후세인들이 정확하게 기억하도록 저렇듯 책 한 권 남기는 게 가장 무거운 징벌인 것. 임우곡과 김석순 두 사람, 그 작업에 필자로 참여했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칠년 전 편찬위원회가 발간 기금 모금 때에 나, 딸 효선, 아들 준현 이름으로 참여했다.
준비해간 두 권 책을 주었더니, “응 그래 읽어보지.” 한다. 내가 “바랑만 무거우이더.”라고 했더니, “무슨 말씀을. 자네 책이라면 필히 읽어 봐야지.”한다. 내년 1월 하순 경에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1천여 쪽 책 출판기념회를 한다며 꼭 오라고 한다. 옛 벗이 이래서 좋은 거다, 속마음과 행로를 허심탄회하게 묻고 답할 수 있으니까. 《양백집 춘》 초간본이 네 권인데, 서지행 한 권, 임우곡 한 권 주고 이제 두 권 남았다.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무슨 작업을 어떻게 하였는지, 근황 문답이 설왕설래 하다니 40대 후반 쯤 되는 낯선 사내 한 사람이 들어온다. 그는 임우곡이 몇 년 전 무릉 검암에 우거할 때 한 방을 쓴 사람으로 태권도장 관장이라고 한다. 조금 있다가 김지섭 시인이 오고 장종규 서예가가 왔다.
우물가 사랑방은 사내 일곱이 앉아서 나누는 대화 소리로 따뜻했다. 주로 불교사학 분야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사이로 막걸리 잔이 비워지고 채워지고 했다. 내가 “불교계에 큰뱀이 들어왔는지 큰용이 들어왔는지, 몇 백 년 뒤 후학들이 평가 하리.” 했더니 임우곡은 묵묵이나 좌중 모두가 크게 웃었다.
불교학 분야에선 인도학자들이 배우러 갈 정도로 일본이 앞서 있다고 한다. 중국은 공산통치와 문화대혁명 등 정치적 핍박으로 불교 등 학문 분야의 연구업적이나 자료들이 대부분 인멸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불교는 자료 보관이 잘되어 풍부할뿐더러 학문적 깊이가 대단하다고 임우곡과 김 박사가 몇 번 말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다니 태권도 관장이 “저는 이런 자리 처음이고 말씀들 하시는 걸 보니 주눅이 듭니다.” 한다. 임우곡이 “뭘 그래, 똑 같아 똑 같아.”하며 위무한다. 내가 “원래 문무가 함께 하는 것 아니이껴.” 하니 그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김 박사가 일어서더니 카드를 긁었다. 술값 혼자 다 낸다고 여러 사람들이 사례를 하는데 임우곡이 “김 박사 오늘 술값 다 내도 돼. 다음에 만나면 구면이고 다른 사람 내면 돼. 어제는 김윤환이가 술값 여관값 다 냈지.”한다.
참으로 뻔뻔스러운 사내다. 바람처럼 안동 땅에 나타나 우물가에 죽치고 앉아 오만 사람 다 불러내는 그 뻔뻔함. 그러나 그의 전화 한 통에 찾아 온 시인들과 서예가 문학박사 등 옛 벗들. 어찌 임우곡의 기력과 필력을 증거 하는 아름다운 풍경이 아니겠는가. 내 어찌 전화 한 통화로 저렇듯 안동 지방의 문화적 지성인들을 불러 올 수 있으랴.
마주앉은 임우곡과 김 박사는 주로 구한말 개화기, 일제초기 조선과 일본의 불교 지도자론을 주고받았다. 김 박사가 “모든 종교나 사상, 철학이 일정한 경지에 오르면 생각하는 점이 같다. 그런 점에서 유학의 대동사상은 수월하고 불교 교리 또한 초국가적인데, 불교가 ‘민족’이란 카테고리 안에 머물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라는 말을 하였다. 이어서 내가 “복택유길이는 퇴계학을 하였고 강유위는 수승한 유학자였는데, 그들의 학문이 결국 일제 팽창주의와 중화 팽창주의의 이론적 토대 역할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좌중에 던졌다.
임우곡은 “이 땅에 태어났기 때문에 민족을 먼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지만, 민족을 넘어서 ‘국제주의’ 또한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성리학이나 불교학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그의 제자들의 사상을 들여다보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분석과 처방이 매우 정교함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김 박사는 “공산주의는 ‘인간은 원래 미흡하고 나빠지기 쉬운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그것을 치유하는 방법으로서 ‘교육’을 매우 중요시 한다. 그래서 집단 강화나 노래, 무용, 연극, 영화 등을 중요시한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래 ‘교육’, 좋은 말이나 그것이 오용될 땐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공산주의의 실패는 ‘인간관의 오류’에 기인한다. 인간을 교육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라 교정의 대상으로 본 것이 잘못인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갖는 엘리트 의식, 선민의식의 출발점이 바로 ‘교정 대상자로서의 인간’이기 때문에 무오류, 무결점인 자기들은 당연히 권력을 맡아야 하고 오류와 결점 투성이인 대중들은 교정과 지도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공산주의자들이 갖는 이미지, 그들의 얼굴 표정의 공통점이 ‘날선 응시’인 까닭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는 증오가 훨씬 강하기 때문이다.
김 박사는 “19세기 우리 한국 사상사에서 무엇이 문제였기 때문에 20세기 그 고통을 당하였나?”라는 나의 물음에 대하여, 삼국시대부터 근대까지의 정치적, 사상적 흐름을 개괄적으로 설파한 다음, “성리학의 왜곡과 실학의 실패가 문제였다.”라고 결론지었다.
나는 성리학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으며, 40대엔 실학에 관심을 가졌으나50대 넘어서면서 퇴계집과 율곡집, 화담집을 논주하면서 성리학을 다시 궁구하게 되었다고 말한 다음, 학자들과 사상가들이 갖는 ‘아집과 오만’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하였다. 어느 분야든 오랜 세월 동안 적공을 한 다음 나이 한 오육십이 넘으면 자기 사고의 세계를 철옹성 같이 지키려고 하고, 어느 자리에서나 원로로서 태두로서 대접 받으려고 하는 그런 태도가 결국 자기 자신에게는 폐쇄적 퇴영 현상을 일으키고 제자들과 후학들에게는 스승의 학문을 맹종토록 하여 끝내 학문의 화석화를 가져왔다는.
‘교육’과 ‘교정’에서 ‘육’과 ‘정’의 글자 한 자 차이가 결국 이념 투쟁, 무장 투쟁으로 확산되어 엄청난 폭력과 살육을 초래하고야만 역사적 사실을 반추해 보면, 각 진영 지식인들이 인간과 사회를 보는 의식의 밑바닥엔 인간에 대한 기본 관점의 차이가 깔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차이, 인성의 묘한 구성과 색깔을 가장 명료하게 들여다보는 학문이 바로 성리학이다. 양명학이나 실학, 예론이나 수신처세론 등 형식적인 분야, 껍데기만 보고 유학을 논할 게 아니라 알맹이, 그 정수인 성리학을 논하는 것이 시대와 역사를 바로 깊이 보려고 노력하는 지성인의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지식인들의 생각의 차이가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역사는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아집과 오만’에 이어 ‘겸손’을 얘기했다. 불치하문이라고, 내가 다 익었다고 자만하지 말고 늘 열린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자세가 중요함을.
“맞아요. 퇴계 선생의 자세가 그러했지요. 경!”하고 김 박사가 맞장구를 쳤다. “예, 성과 경.” 오랜 시간의 담소 과정을 거치더니 김 박사가 드디어 내 말의 뜻과 흉중을 이해한 것 같았다.
임우곡이 불쑥 “나는 겸손 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 해, 겸손을 강조하면 괜히 힘이 빠져, 남이 무어라 해도 열심히 써서 나중에 책으로 말할 거야.” 하고 말한다. 언뜻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일반론을 말하는데 임우곡은 자기에게 하는 말로 듣는 게 아닌가 하는, 임우곡이 가진 자신감에 괜히 제동을 거는 게 아닌가 하는.
밤이 깊어지면서 술과 나지막한 목소리의 담소가 익어간다. 잠시 숨 쉴 틈을 이용하여 “임 형 고향이 원천인가 거기지요?”하고 물었다. “아니 평은 천본 430번지이지.” 옳지, 걸려들었다.
“임 형, 영주댐 된다는 거 알지요?” “응, 알지. 하마 오래 전에 댐 들어선다고 했지. 위치도 아마 거기일걸?”
“4대강 하면 물이 그득할 건데 영주댐이라니, 아마 보에 물 공급하기 위해서 영주댐 하는 모양이지?” 하고 그동안 듣기만 하던 김지섭 시인이 한 말씀 한다.
“임 형! 임 형의 고향이 수몰 되니더. 고향에 대한 글을 쓸 기회가 있으면 영주댐이 들어서선 안 된다는 글 꼭 좀 부탁 하니더. 그리고 여기 계신 안동 분들도 영주댐이 들어서선 언 된다는 걸 좀 널리 알려 주시더.”
발이 넓고 필력이 좋은 임우곡이 영주댐에 대한 글을 쓴다면 평은강에 살고 있는 생물들, 특히 하늘 밖에 모르는 미물들이 영원토록 안온하게 사는 데 큰 도움이 되지 않으랴.
10시 쯤 되자 화장실에 가려고 일어 선 우곡이 “내일 출근할 사람 셋, 안 해도 되는 사람 셋인데 이제 이 집 일어설 때 되었네.” 한다. 주고받는 막걸리 잔의 회수에 비례하여 담론이 이제 본격적으로 무르익기 시작하는데 아쉽다. 몇 마디 더 하고 싶어 “퇴계와 율곡이 다 파먹은 아담한 광산이라면 화담학은 입구만 겨우 판 커다란 광산입니다.”라는 말을 하며 남은 술을 나누어 마신 다음 모두 일어섰다.
“전부 큰 도적일시더, 야망들이 대단하니. 지류가 모여들어 큰 강을 이루듯이 남은 세월 더욱 분발 노력하여 모두 큰 강을 이룹시다. 장유유서 임 형, 이제 큰 강이 되셨네요.”
“임 형, 바랑만 무거우이더.”.
“어, 무슨 소리.”.
마당으로 내려서며 임우곡이 “쎄느강 미라보 다리, 전에 김주영이 있을 때 지었지.” 하자, 김 박사가 “아 젊었을 때의 문학과 쎄느강.” 한다. 김 박사도 문학이 조금은 그리운가 보다. 70년대와 80년대를 관통하며 안동의 젊은 문인들은 지금은 복개되었지만 안기천가 사장둑 포장주점에 모여앉아 막걸리를 마시며 개천을 ‘쎄느’로, 공구리 다리를 ‘미라보’로 부르며 프랑스식 로맨티즘을 노래하였다.
우물가 대문 앞에 부는 겨울바람이 차가웠다. 승려 하나 시인 셋 서예가 하나 문학박사 하나 태권도 관장 하나, 다시 어느 세월에 이런 자리가 다시 펼쳐지랴. 담소화락 고담준론의 묘미, 한 사내로 살며 한 선비로 살며 수많은 좌석을 가졌으나 오늘 이 자리처럼 아름다운 자리는 드물었다. 유유상종, 좋은 선비들은 마음의 키 높이를 서로 재면서 상장한다고 했던가, 다시 어느 세월에 이런 자리가 펼쳐지랴. 한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 모처럼 가진 세 시간 좀 덜 되는 향그로운 시간, 오가는 대화 사이에 간간이 목을 축이는 술이다 보니 열 몇 잔 넘게 마셨는데도 취기가 안 오른다. 원주장 여관 저쪽으로 가는 임우곡에게 “임 형! 일본 갔다 일찍 오세이.”하니 모두들 크게 웃는다.
“임 형이 친일승려 58명을 썼다. 행적이 탄로 난 그 사람들 칼을 갈지 않을까. 임 형이 일본 건너가면 이제 일본 불교 사람들 절단 났네.”하자 이쪽으로 함께 걷는 남천 장종규가 히히 웃는다.
주미취는 했으나 화반개를 아니 보았으니, 휭 하니 부는 겨울바람에 펄럭이는 포장 아래 불 꺼진 북문시장 주점들을 보며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한참을 궁리해 봐도 집 밖에 좋은 곳 없어 귀가하니 열한시 다 되어간다.
화요일 정오, 평은 하늘은 회흑색 구름으로 음습한데 서울에는 눈이 온단다.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서라진 스님 임우곡, 따뜻한 내 술 한 잔 안주 한 접시 대접하지 못하고 보낸 마음이 애잔하다. 그래서 인생은 만날 봉, 헤어질 별, 합해서 봉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