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1월 17일 “오늘의 말씀 묵상 편지”
‘성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 ‘차려 놓은 빵(1)’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하나님의 말씀은 출 39 : 32 – 36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이와같이 회중의 장막 곧 성막의 모든 역사를 마치되 주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다 행하고 그들이 성막을 모세에게로 가져왔으니 곧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그 걸쇠들과 그 널판들과 그 빗장들과 그 기둥들과 그 받침들과 붉게 물들인 숫양의 가죽 덮개와 오소리 가죽 덮개와 덮는 휘장과 증거궤와 그 채들과 긍휼의 자리와 상과 그 모든 기구와 차려 놓은 빵과
(Thus all the work of the tabernacle of the tent of meeting was finished. And the children of Israel did according to all that the LORD had commanded Moses; so they did. And they brought the tabernacle to Moses, the tent and all its furnishings: its clasps, its boards, its bars, its pillars, and its sockets ; the covering of ram skins dyed red, the covering of badger skins, and the veil of the covering ; the ark of the Testimony with its poles, and the mercy seat ; the table, all its utensils, and the show bread)”
임마누엘!!
오늘은 한글 개역개정 성경이 ‘진설병’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차려 놓은 빵’에 관한 말씀 탐구를 하고자 합니다.
먼저 차려 놓은‘이란 말씀은 히브리어 'panim(파님)'. ’얼굴(face)을 의미합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2,100회 이상 나옵니다.
1) 이 독특한 단어 파님은 항상 복수형으로 등장하는데 아마 얼굴이 수많은 부분들의 결합체라는 사실에서 연유된 듯합니다.
파님은 ① 사람의 얼굴(창 31:2), "그의 외모"(창 4:5), 한 인간 전체를 뜻하는 대용어(신 7:10)로 사용되었습니다. ② 관찰자에게로 향해진 면, 예를 들어 '지면'(창 2:6), ③ 이 단어는 관계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러 전치사들과 함께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의 면전에서(before the face of)’ ‘~앞에서(before), ’~속으로(into)‘, ’~의 정면에서(in front of)‘, ’~의 반대편에(opposite)‘ 등입니다.
사람의 얼굴은 그 사람을 식별하게 해주고 그 사람의 마음가짐과 감정을 반영해 줍니다. 따라서 파님은 자아 또는 자아 감정의 대용어가 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얼굴은(신체의 여타 부분들과 함께) 사람의 생리 기능을 담당하는 외적 기관으로 묘사될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의 행동 방식과 관계되는 것으로 기술되었으며 따라서 어떤 인격성에 의해 특정 지어집니다. 얼굴이 상대방의 감정, 기분, 성격을 묘하게도 밝혀주는 것으로 생각되었다는 사실은 극히 당연합니다.
"굳은" 얼굴은 반항(렘 5:3), 뻔뻔스러움(잠 7:13), 무자비함(신 28:50)의 표시입니다. "빛나는" 얼굴은 기쁨의 증거입니다(욥 29:24). "부끄러워하는" 얼굴은 패배, 좌절, 굴욕을 가리킵니다(삼하 19:5). "불꽃같은" 얼굴은 공포에 질린 얼굴입니다(사 13:8). "나쁜" 얼굴은 근심 걱정으로 찌든 얼굴입니다(창 40:7). "낙담한" 얼굴은 매우 강렬한 분노와 불쾌감에서 연유힙니다(창 4:5). 누군가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은 그를 달래거나 또는 그의 호의를 구한다는 뜻입니다(하나님께 대해, 왕상 13:6, 왕하 13:4). KJV는 이 마지막 문구를 "~가 여호와께 구했다/탄원했다"
"얼굴을 숨기다"라는 문구는 혐오감을 나타낸다는 의미이며(사 53:3) "얼굴을 돌리다"라는 것은 거부한다는 뜻입니다(시 132:10). 역으로 타인의 "얼굴을 들어 올리다"는 호의, 존중, 수락을 나타내 보인다는 뜻이거나(삼상 25:35, 한글개역, "청을 허락하노라") 또는 편파성 편애를 드러낸다는 뜻입니다(레 19:15, 한글개역, "편을 들지", "두호하지"). 얼굴을 숙인다는 빈번한 표현은 공손하게 인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파님은 동물의 얼굴들에 해당하는 말로 역시 때때로 사용되었습니다(겔 1:10).
2) 파님은 특히 하나님의 얼굴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① 위에서 언급한 인간의 얼굴에 관한 관용구들과 문구들의 대부분이 하나님께도 적용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은 은혜와 신의의 표시로서 "환히 빛난다"(시 4:6). 그의 얼굴이 분노로 "침울해진다"(렘 3:12). 하나님은 그의 얼굴을 "숨기기도" 하십니다(시 13:1).
하나님이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그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평강(즉,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감추거나 돌리실 때 은혜를 거두어가심을 시사합니다.(참조: 시 13:2, 시 104:29). 하나님과의 교제의 행운을 가져오거나 하나님의 진노 하에 머무름을 가져오거나 하는 하나님의 작용과 반작용은, 그러한 신인 동형론적 묘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습니다(창 32:30, 브니엘: 하나님의 얼굴, 창 16:13, 출 24:9 이하, 신 4:12, 삿 6:22 이하도 역시 참조하라).
"하나님의 얼굴을 뵙다"라는 구절이 5회 발견되는데 아마 종교 예배를 위해 성소를 찾아간다는 뜻의 전문 용어일 것입니다. 다섯 구절은 출 23:15, 출 34:20, 신 31:11, 시 42:2, 사 1:12입니다. 이에 대한 몇몇 예외가 있는데 예를 들면 야곱(창 32:30)과 모세(출 33:11)의 경우이다. 그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face to face 보았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을 보거나 또는 그 음성을 듣기만해도 그는 죽게 된다(출 19:21).
하나님 얼굴을 보는 경험이 얼마나 위험스러운지 항상 강조하고 있습니다. 죄많은 인간이 거룩한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출 33:20, 참조: 사 6:
5).
이러한 이유로 모세(출 3:6)와 엘리야(왕상 19:13) 그리고 스랍조차도(사 6:2) 하나님 면전에서 그들의 얼굴을 가렸습니다. 하나님을 본 후에도 살아있는 사람은 놀람과 감사(창 32:30, 신 5:24), 두려움(삿 6:22, 삿 6:23, 삿 13:22, 사 6:5)으로 압도당하게 됩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예수님 안에 출현하셨으며 그만이 아버지를 보았습니다(요 1:18, 요 6:46, 요일 4:12).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는 통로가 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출 33장에서 세가지 세가지 다른 전승들 - 여호와는 인도자로 한 천사를 보내십니다. 성막을 통한 여호와와의 유대 - 여호와의 얼굴(파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동행하십니다 - 는 시내산으로부터 떠난 후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기본적 사상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전승의 셋째번 것에서 파님(출 33:14 이하)은 여호와의 이스라엘에게 현현으로 특이하게 인성화된 것 같습니다. 이것은 해석상에 다양한 시도를 낳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의 파님"을 "나 자신"으로, 즉 여호와의 인격적 임재에 대한 강조적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또 혹자들은 이 구절이 제사장은 제사 때에 가면을 사용했다는 그네들의 주장을 정당화시켜 준다고 말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성소에서 제사를 드릴 때에 여호와의 얼굴이 임재하셨음, 즉 하나님의 얼굴이 인간을 향하셨음을 의미한다고 이 구절을 해석합니다. 이 구절에는 유일하고도 확실한 해석이 제시될 수 없습니다.
② 하나님의 얼굴이 성전과 관련하여 언급되어 질 때, 이 용어는 제사와 관련된 것입니다. 성경의 범위를 넘어선 이 단어의 용법이 여기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성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이를 보고 예배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예배에서 사용되어진 우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이 용어는 예배자가 성전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했을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습니다(시 24:6, 시 42:2 슥 8:21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서 특히 그것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은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끝으로 제사를 아주 떠나서는 이 단어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간구하는 일반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 105:4에서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것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진설병(출 25:30)의 문자적 의미는 "얼굴의 떡"("임재의 떡" RSV)인 것입니다. 이런 떡덩이들이 이교도 제사에도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들의 제사에서는 이 떡들이 신의 음식 역할을 했습니다(참조: 렘 7:18). 이스라엘이 이 관습을 이어받았을 때 떡 Bread(아토스)은 하나님의 얼굴 앞에 음식으로가 아닌 예물로 유향과 함께 특별히 마련된 식탁 위에 놓여졌습니다. 좀 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출 35:13, 출 39:3, 민 4:11, 삼상 21:6, 왕상 7:48, 대상 9:32, 대상 23:29, 대상 28:16, 대하 2:4, 대하 4:19, 대하 13:11, 대하 29:18, 느 10:33, 마 12:4, 막 2:26, 눅 6:4, 히 9:2)를 보참고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서울에서
이 우복 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