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신(花信) 2
다시 찾아온 한파와 눈보라 속에서도
섬진강가의 매화는 피어납니다.
광양 옥곡 나들목 나와
진상 넘어가는 고개 내금마을 길가에는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자란
홍매가 한껏 피어 자태를 뽐내고 있습니다.
진상에서 하동 넘어가는 가파른 매치재 길가에는
성급한 청매가 피었습니다.
한 번의 꽃샘추위로 열매 맺지 못할
가여운 운명이라 가슴에 푸른 멍을 들입니다.
다압 신원 로터리 지나 섬진강 둔치에는
몇 해 전 심어 놓은 어린 홍매가
갓난아기 제 어미 앞섶을 뒤지듯
급하게 피었습니다.
두꺼비 나루 소확정에서부터 피는
늙은 홍매는 매화마을 양지바른 곳을
이미 붉게 물들이고 있습니다.
해마다 매화마을 각설이 품바타령에
귀가 지친 이들은
빠른 걸음 하셔도 좋겠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매향이 그립거든
개밥바라기별 졸고 있는 동틀 녘에
다녀 가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냄새가 깨어나지 않은 그 시간의
매향에 빠지면 매일 새벽길을 나서게 될 겁니다.
강을 거슬러 다압 염창마을을 지나시거든
오래된 솔숲에 부딪혀 우는 바람 소리 들으시고
숨을 크게 쉬어 매향에 호강했던 코와 가슴에
봄바람도 함께 넣으시기 바랍니다.
구례 운조루를 지날 때쯤이면
앙상한 나무에 별이 조금씩 내려앉았습니다.
맞습니다.
산수유도 꽃을 내밀기 시작했군요
꽃에 취해 떠돌다 느껴지는 허기에는
구례장의 국밥만한 게 없습니다.
삼 팔 일이 아니더라도 구례 장터에 가면
오래된 가마솥에 선지와 어우러진 수구레가
더운 김을 내며 펄펄 끓고 있을 겁니다
화신(花信) 3
잘 지내는 게냐
난들 어찌 그 오랜 세월 홀로 품었던
마음을 보이기 쉬웠겠냐만
그날 이후 생전 남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달빛 아래 취하도록 함께 마셨던 소주만 원망스럽다
하지만 어쩌랴
마음에만 가두기엔 벅찬 날들이었다
잊기엔 꽃보다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인생의 가장 맑았던 그때가 떠올라
초승달처럼 수줍은 청매화 몇 잎
새벽 별처럼 반짝이는 산수유꽃 몇 잎
봄 낮 해처럼 맑은 목련꽃 몇 잎
봄바람에 어쩔 줄 몰라
흐늘흐늘 달뜬 내 마음 한 조각
고웁게 담아 보낸다
잊었느니, 꼭 잊으려 하느니
내 마음 네 마음에 담지 말고
저 꽃 지고 떨어져
연둣빛 한숨으로 나기 전에
한 번 다녀가거라
섬진강 2
기억의 더듬이가 다할 때까지
애써 떠올려 추억하고
그리움에 어깨가 들썩일 때는
저물어가는 강가에 앉아
윤슬에 일렁이는 추억을
다시 움켜쥐려 헛손질하다가
강가 외딴 터 어느 집 굴뚝에
밥 짓는 연기 하얗게 올라오면
뿌옇게 흐려오는 빨간 눈시울이며
선연히 시려오는 텅 빈 가슴 부여잡고
가려던 길 되짚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다
언뜻 그녀
춘천 말고 순천 닭갈비 식당에서
아는 형님과 소주를 마시는데
건너편 식탁에 앉은 어떤 여자가
닭 모가지 사이사이 촘촘히 붙은 살을
꼼꼼히 발라 먹는 것을 보다가
눈이 살짝 마주쳤다
오래전 어떤 여자
만난 지 며칠 안되어 벚꽃 피던 날
쌍계사 십리벚꽃길을 걷다가
식당 메뉴에서 가장 비싼 걸로 골랐던 참게탕
스물한 살의 여자와 나는
집게발을 삐걱거리며 나올 것 같은
참게 두 마리가 담긴 뚝배기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몰라 국물만 깨작깨작
떠먹고 말아야 했다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던 사이
손도 제대로 못 잡아보고 헤어진 그 여자
순천으로 시집가서 잘살고 있다는 얘기를
먼발치로 전해 들었다
뼈만 남은 앙상한 닭 모가지를
쪽쪽 빨다가 뼈까지 씹어 먹을 태세인
건너편 테이블의 여자
가만 보니 둥근 얼굴이며 낮은 콧대가
어딘 지 낯설지 않다
언뜻 그녀
덤
마트에서 원 플러스 원으로 산
자반 고등어 두 손
덤으로 묶인 어리고 마른 놈을 골라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굽고 있는데
아까 잘라 버렸던 고등어 대가리
음식물 종량제 봉투에 담긴 채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노려 본다
차마 미안한 마음에 벌어진
종량제 봉투를 살짝 눌러 주었다
제 어미 따라 바닷속을 누비다가
촘촘한 그물에 걸렸을 어린 고등어
죽음도 덤으로 따라와서
죽어서도 눈 감지 못하는
등 푸른 바다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