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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825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4주)
믿음의 사람-빵을 먹는 사람들(4)
수24:14~18; 엡6:10~18; 요6:56~69
오늘로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세메이온)으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긴 담화,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로 이어지는 요한복음6장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 건너편에서, 큰 무리가 자기에게 모여드는 것을 보시고,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 오천명을 먹이셨습니다. 소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四) 복음서가 모두 기록하고 있을 만큼, 아주 인상적인 예수님의 행적이었습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예수님을 억지로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 오병이어의 기적은 사람들을 흥분시키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의 흥분을 뒤로 한 채, 당신은 혼자서 산으로 물러가셨다고 했지요. 이 대목도 참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산으로 물러가 무엇을 하셨을까요? 무리들의 가치관에 동요하지 않고 다시 “아버지/숨겨진 바탕”에게 안기는 시간을 갖지 않으셨을까요? “진리에의 사랑은 거룩한 한적을 찾고, 사랑의 부름은 마땅한 일을 맡습니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명구가 떠오르는 대목입니다. 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낮에 하늘나라의 말씀을 전하시고 병자를 고쳐주시고 고된 하루를 보낸 후에 종종 밤에 기도하시러 산에 오르셨다고 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아퀴나스의 말은 예수님의 생애를 잘 요약하는 말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거룩한 한적”에서 “진정 내가 누구인가”(바탕, 아버지)를 깨닫고, “마땅한 일”에서 “진정 내가 할 일”, “내 일”(예수)을 맡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날까지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아 헤매다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긴 담화의 말씀을 하시는데, 이것이 바로 “하늘에서 내려온 빵”에 대한 말씀이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생명의 빵, 살아있는 빵,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쭉 따라 읽었습니다. 오늘 말씀에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 때문에 살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런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는 어떤 마음인가요? 오늘 말씀에, 제자들 가운데 여럿이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이 말씀이 이렇게 어려우니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라고 탄식인지 불평인지를 말했는데, 이 말이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는가요?
우리가 매일 밥을 먹지만, 그 밥을 먹는 사람은 실은 그 밥에 먹힌 사람이 되지요. 그 밥은 우리 안에서 살이 되고 피가 됩니다. 우리가 과일의 살을 먹으면, 그 과일의 살이 내 살이 됩니다. 우리가 햇살(햇빛의 살)을 먹으면, 그 햇살은 내 살이 되고, 우리가 가축이나 생선의 살을 먹으면, 그 가축이나 생선의 살이 내 살이 됩니다. 여기서 살[육]은 관념이 아닙니다. 생각이 아닙니다. 그 살은 생명이며 삶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돈을 먹는데 혈안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는 돈에 먹히게 되겠지요. 그러면 우리는 돈이 되고, 그때 우리 눈에는 모든 것이 돈으로만 보일 겁니다. 우리가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을 먹는데 혈안이 되면, 우리는 사람들의 인정과 관심에 먹히게 됩니다. 그러면 생명의 빵을 먹은 사람은 어떻게 될까요? 생명의 빵을 먹는 사람은 그 빵에 먹혀서 생명이 되겠지요.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가 우리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먹는 살이 우리의 살이 됩니다. 여러분, 우리가 계속 걱정을 먹으면 우리는 걱정이 되고, 우리가 계속 환상을 먹으면 우리는 환상 속에 살게 됩니다. 우리가 계속 생각만 먹으면 우리는 생각이 돼서 생각 속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먹으면 우리는 사랑이 됩니다. 우리가 감사를 먹으면 우리는 감사가 되고, 자비와 연민을 먹으면 우리는 자비와 연민이 됩니다. 우리가 고요와 평화를 먹으면 우리는 고요와 평화가 됩니다. 자신이 계속 먹는 것은 걱정과 염려이면서 자신에게 고요와 평화가 없다고 불평한다면, 그런 사람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자신이 계속 게걸스럽게 먹는 것은 사람들의 과도한 인정과 관심이면서 자유롭고 싶다면, 그런 사람을 누가 말리겠습니까? 자신은 계속 불행을 먹으면서 행복해지고 싶다면 그것은 뭔가가 잘못된 것입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나를 먹는 사람은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우리가 먹는 것이 우리를 결정합니다. 우리가 주로 먹는 것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어려운 이야기 때문에 제자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 떠나갔다고 합니다. 사실 그 이전부터 유대인들 사이에 논란이 있었다는 것은 요한복음이 이미 전하고 있습니다. 52절, “그러자 유대 사람들은 서로 논란을 하면서(다툼을 벌이면서) 말하였다. ‘이 사람이 어떻게 우리에게 [자기]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을까?’” 그 유대인들은 이미 예수의 살을 먹는 것으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논쟁 속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생각과 생각의 겨룸이 있을 뿐입니다.
또한, 예수를 찾아 가버나움으로 온 사람들은 “무리”였습니다(6:24). 예수님을 만나 “우리가 무엇을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됩니까?”하고 물은 사람들도 “무리”였고, “주님, 그 빵을 언제나 우리에게 주십시오.”하고 요청한 사람들도, 모두 똑같이 무리였습니다. 예수님을 억지로 왕으로 삼으려고 한 사람들도 “무리”였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로라고 소리친 사람들도 “무리”였습니다.
“무리”로 남아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동의할 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무리”의 가치에 따라 움직이지, 자신의 고유한 삶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군중심리라고 하지요. “무리”는 무리가 원하는 것을 따라 먹는 사람들입니다. 무리가 원하는 것, 그것을 우리는 “문화적 동일시”라고 말합니다. 그 사회가, 그 문화가 정해준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는 모두 “문화적 동일시”에 사로잡혀 살고 있습니다. 큰 것이 좋은 것이고, 많은 것이 좋은 것이지요. 큰 차가 좋고 큰 집이 좋은 것입니다. 돈이 많은 것이 좋은 것입니다. 좋은 직업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것이 좋은 것이고, 다수의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지요.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하면서 한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정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군중이 원하는 것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진정한 동의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동의는 진정한 “내”가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제자들조차 이것을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은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까지도 떠나가려 하느냐?” 이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 이것은 무리의 대답이 아니라, 시몬 베드로의 대답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는 우리가 무엇에 동의하는가를 보여줍니다. 먹는다는 것은 동의한다는 것입니다. 생명의 빵을 먹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말씀에 동의하는 것이고, 동의한다는 것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아멘”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동의는 무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입니다. 가장 진정한 동의는 진짜 “나”로 하는 것이 진정한 동의입니다. 남이 먹은 빵이 내 살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남의 동의가 나의 동의가 될 수 없습니다. 군중의 동의가 나의 동의가 되면, 나는 이름없는 군중으로 살 뿐입니다. 내가 먹어야 내 살이 되고, 내가 동의해야 내 삶이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삶 속에서 동의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다시 말해, 여러분은 무엇을 먹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리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동의는 얼마나 깊어졌습니까? 앞으로 우리에게는 이 동의를 연습할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그렇게 연습하고 나면, 우리가 마지막 날에 “하나님, 감사합니다. 소풍 재미있게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할 수 있을까요?
토마스 키팅 신부님은 그의 인생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자비와 연민을 받아들이고 그것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게 하는 것, 그리고 이것을 멈추지 않고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변화입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무엇을 양식으로 삼으면서 살고 있습니까? 주로 무엇에 동의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무엇을 먹어, 그것이 여러분의 살이 됩니까? 무엇에 동의하여, 그것이 여러분의 삶이 됩니까?
요한복음에서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 풍성한 상징과 이미지를 잘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사람 안에 있다.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 때문에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은 나 때문에 살 것이다.” 우리가 생명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우리가 성만찬의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도, 우리가 매일 들여 마시고 내쉬는 숨도, 우리가 매일 읽고 듣고 귀 기울이는 것 모두가, 바로 우리가 먹고 있고 동의하고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오늘 여호수아기 마지막 장에서도 우리는 동의의 한 전형을 보게 됩니다. 40년 광야생활을 끝내고 가나안에 도착하여 그 땅을 차지하고 나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들은 세겜이라는 곳에 모였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는 말합니다. “당신들은 이제 주님을 경외하면서, 그를 성실하고 진실하게 섬기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여러분의 조상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섬기던 신들을 버리고 오직 주님만 섬기십시오. 주님을 섬기도 싶지 않거든, 조상들이 강 저쪽의 메소포타미아에서 섬기던 신들이든, 아니면 당신들이 살고 있는 땅 아모리 사람들의 신이든지, 당신들이 어떤 신을 섬길 것인가를 오늘 선택하십시오.”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은 무엇에 동의하며 살 것인지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의 삶을 결정한다고 합니다. 이 세겜의 모임은 여호수아가 죽은 후에도 흩어져 살던 이스라엘 백성이 일 년에 한 번씩 세겜에 모여 그들의 약속을 갱신하는 모임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세겜 계약 갱신 축제라고 합니다. 그들은 매년 세겜에서 모여, “우리가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또 아모리 사람들이 섬기는 신을 섬기지 않고 주 우리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재계약의 맺습니다. 동의를 갱신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세상이 주는 가치관, 군중의 움직임에 부화뇌동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의 사랑을 기억하고 살겠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디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겠습니다, 하는 고백이며 동의입니다.
저는 우리에게도 이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매일매일 이런 선택을 해야겠지요. 패스트푸드나 입맛만 돋구는 영양가 없는 것들로 배를 채우지 않고, 정말 신선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을 먹기로 선택하는 것입니다. 배에 좋은 것은 입에 그리 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매일매일 먹는 것을 살펴보십시오. 여러분이 무엇에 동의하며 사는지 살펴보고, 진정 동의할 것을 동의하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선함에 동의하고, 아, 내 삶이 선물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십시오. 여러분의 재능에 동의하고 여러분의 달란트를 묻어두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약함과 질병과 늙음과 죽음에 동의하고, 그것을 여러분의 좌절이나 실패로 여기지 마십시오. 무엇보다도, 여러분의 변형에, 변화에 동의하십시오. 여러분이 동의하여야 하나님도 여러분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간이 날 때마다 좋은 책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겨 몸과 마음에 스며들게 하고, 좋은 음악과 좋은 그림도 보고, 산책하고 운동하십시오. 무엇보다 고요한 침묵의 시간, 기도시간을 가지십시오. 강박적으로 하지 말고, 늘 들숨과 날숨을 알아차리며 하십시오.
그 다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매년 정기적으로 세겜에 모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새기며, 세상의 가치관에 물들지 않겠노라 다짐했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공동체로 함께 모여,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 아모리의 신이 아니라 주 하나님을 섬기겠습니다, 고백하고 동의하는 정기적인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일예배입니다. (테오리아 글)
우리는 주일을 청교도적 관습처럼 지키지는 않습니다. 주일이 몸과 마음이 쉬는 날이지만, 그저 잠만 자면서 쉬는 것이 아닙니다. 주일은 부활의 신비를 다시 맛보는 날이고, 그래서 우리의 본 바탕, 우리의 본디 정체성을 다시 기억하는 날입니다. 분주한 활동과 일을 멈추고 월요일을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 쉬는 날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지나가는 것들을 바르게 알아차리고 우리의 지각을 뛰어넘는 평화를 맛보기 위해서 기억하고 경축하는 날입니다. 일주일 내내 우리가 맛보는 평안의 출처가 주일에서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기 위함입니다.
주일은 생명의 빵을 먹는 날이고, 다시 우리의 동의를 갱신하고 새롭게 하는 날입니다. 이 시간표를 제대로 세워놓을 때, 우리의 삶의 구조가 단단해집니다. 제가 늘 드리는 말이 있지요? 수도원에서 수도승들의 삶은 하루 일곱 번의 기도(성무일도)에서 세워진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생애에서 주일을 바르게 지킴으로 여러분의 삶의 구조가 더욱 단단해지고 든든해지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