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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壬寅年 *정착과 부흥의 해* 5月 ☞가족과 이웃 구령의 달☜ ※보고서를 정직하고 투명하게 기록하여 각 카페에 입력해 놓으면, 6월 30일 복사해갑니다
막7:1-23절) 참된 신앙의 기준
사람들이 종교(宗敎)를 가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는 종교를 가지면, 위기의 순간에 위안(慰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하나는 종교를 가지면 없는 것보다 마음이 안정되고, 어느 때는 신앙적 희열(喜悅)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신(神)의 도움으로 물질의 복(福)을 받기 위해서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종교적 본성이 숨어 있습니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무슨 계기가 없어서 그렇지, 계기가 있으면, 종교를 가지려고 합니다. 더욱이 사람이 종교적인 일에 몰두할 때, 엄청난 희열과 만족감을 가지게 되는데, 이 세상 어떤 곳에서도 경험할 수 없는 신비로운 만족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참된 신앙이요. 종교일까?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참된 신앙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큰일을 겪었습니다. 곧 우리나라에서 *존경받는 추기경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그때 *우리나라 정치인들이나 종교인들 할 것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추기경에 대한 존경과 신뢰를 나타냈습니다.
추기경의 시체가 있는 성당에는 추운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40만 명의 인파가 줄을 서서 추기경의 선종(善終)을 애도했습니다.
물론 돌아가신 추기경이 우리나라가 군사독재 아래에 있을 때, 용감하게 바른 말을 해서 국민들의 마음에 희망을 주었고, 참으로 인간적으로도 겸손하고, 욕심이 없는 삶을 산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으로부터 충분히 존경받을 만한 훌륭한 사람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인격과 희생적인 삶이 *하나님의 진리를 나타내는 것은 아닙니다. 즉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많은 사람이 높이 평가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은 아닌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개신교 목사는 *천주교가 우리 큰집이다라고 괴변을 토해 내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 *참된 신앙의 행실이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질문하게 되는 것은 *과연 우리의 신앙의 유익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에 따른 신앙인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굳이 하나님의 뜻에 따르지 않는 신앙이라 하더라도 모든 종교는 어느 정도는 신비적 만족감이 있고, 종교적 희열이나 윤리적 희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인가 종교적 희열을 체험하거나 도덕적 가성(假聲)의 효과가 있다고 해서 참된 종교라고 말할 순 없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 자체에 헌신하는 이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용납하시고, 우리에게 없는 하나님의 은혜가 축복을 내려주시는 것입니다.
Ⅰ.누구를 위한 신앙인가?
우리는 신앙을 무엇인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감이나 다른 어떤 곳에서도 체험할 수 없는 종교적 희열 때문에 좋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일본 사람들은 절(사찰)에서도 이와 같은 느낌을 충분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특히 오래된 절(사찰)에 가서 밤에 달빛을 받으면서 조용한 분위기에 젖을 때,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희열을 느낄 것입니다 또한 종교적 직책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도 신비감을 느낄 것입니다.
즉 사제나 스님은 이미 입은 옷 자체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고, 사용하는 언어도 일반인은 모르는 언어를 사용하고, 삶 자체도 다른 사람들과는 구별되어 있기 때문에 신비감을 줍니다. 또한 *종교 행위 자체도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줍니다.
예를 들어서 향을 피우고, 기도문을 외운다든지, 큰절을 한다든지, 행진을 한다든지 할 때, 남들이 체험할 수 없는 성별된 사람이라는 느낌과 함께 종교적 희열을 줄 것입니다. 거기에다가 종교인들이 하는 남들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고행(苦行)이라든지, 금식(禁食)이라든지, *가난과 같은 희생적 삶은 참으로 이 사람들이 깨끗하고, 욕심이 없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모든 종교적 노력을 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깨끗하게 살고 싶어 하고, 완전한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갈망이 어느 누구보다도 강한 사람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할 때, 이런 종교적 신비감이나 희열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기준을 채워서 우리를 위해 준비된 복을 임하게 할수 있느냐? 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적 노력이 아무리 성스럽고, 좋아 보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기준에는 전혀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노력은 *오직 스스로 완전해지려는 몸부림이고, 자기 스스로 종교적 희열에 심취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런 것 하나 없이도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이점에서 기독교는 너무나도 신비로운 느낌이 들지 못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어느 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찾아 와서 만났을 때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7:1-2절)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여기에 바리새인 및 명과 서기관 몇 명이 예루살렘에 찾아 와서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 이유는 *예수님의 신앙과 자신들의 신앙이 다르다는 소문을 듣고, 확인하기 위해 내려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신앙이라는 것은 *이미 수천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유대교를 말합니다. 거기에 비해 예수님의 신앙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혼자 떠들고 있으며, 추종자라고해야 몇 십 명 되지도 않는 새로운 복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가복음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는 마가복음은 로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 사람들은 주로 그리스 신앙을 로마식으로 이름만 바꾸어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이 가진 신앙은 다신교(多神敎)여서 신(神)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로마인들의 신앙은 인간을 위한 신앙이었습니다. 즉 *신(神)이 인간이 하는 것을 도와주어야지, 인간이 신(神)의 뜻에 복종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거기다가 유일신(唯一神)사상은 오직 유대교 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인 중에는 유대교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교와 복음이 무엇이 다른지, 그 차이를 여기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단지 *유대교와 복음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복음과 모든 종교의 차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을 그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밖에서 황급히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너무나 배가 고파서 그렇게 했는지, 아니면 평소 습관이 그런지는 몰라도 *손을 씻지 않고, 허겁지겁 떡을 먹었습니다.
이것을 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이주 공격적인 말을 이렇게 했습니다.
7:5절)이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께 묻되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
그들이 이런 말을 하는 설명을 마가는 3절과 4절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7:3-4절)(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어 손을 잘 씻지 않고서는 음식을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와서도 물을 뿌리지 않고서는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그릇을 씻음이러라)”
우리가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손을 깨끗이 씻는 것은 위생적으로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접촉하는 데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너무나도 많은 병균이 득실거리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와서 손이나 발을 씻지 않으면, 병균에 감염될 수 있습니다.
요즘 코로나 시대 여자들은 엘리베이터에 있는 버튼도 여러 사람들이 손을 댄다고 해서 손으로 누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반드시 얼굴이나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하고, 손이나 얼굴을 씻지 않고 급하게 음식을 먹거나 자리에 눕는 것을 비위생적이고, 야만적인 행동이라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밖에 나갔다 들어와서 손이나 머리를 씻는 것은 결코 위생적인 의미가 아니라. 종교적인 의미였던 것입니다. 즉 *사람이 바깥에 나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인들이 만졌던 물건에 접촉하게 되기도 하고, 또 죄인들과 손이 닿을 수도 있는데, 이것을 집에 들어와 씻어야 죄가 전염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바깥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오면, 손이나 머리를 물로 뿌리거나 여러 번 씻었습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죄를 씻는 것이었고. 부정을 씻는 의식이었던 것입니다.
7:4절)....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남의 집에 갔을 때도 그 집안에는 씻는 커다란 물통이 있는데, 그것을 가지고 손이나 발을 씻어야 했습니다. 또 물을 뿌리는 의식도 있었고, 그릇도 씻는 법이 달랐습니다.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당연히 바깥에 나갔다가 들어오면, 씻는 의식을 행하고, 사람들을 만나거나 음식을 먹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죄를 씻는 의식도 행하지 않고. 곧바로 떡을 먹는 것을 보고, 기절할 뻔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공격하기를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전통을 준행하지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느냐?고 따졌던 것입니다. 즉 *당신의 제자들이 장로들의 전통도 모르는 무식한 자들이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당신이 평소에 이런 것을 무시하라고 가르쳐서 그런 것인지, 답변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유대인들이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부지런히 씻는 것은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들을 자주 씻을 때, 마음도 깨끗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깥에서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씻지도 않고, 음식부터 집어먹는 것은 너무나도 *종교적으로 무식한 것 같고, 거룩하지 못한 것 같이 보일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장로들의 전통을 잘 지켜 바깥에서 들어오기만 하면, 정성스럽게 손발을 씻고, 머리에도 물을 뿌리고, 그릇도 정성을 들여서 씻고, 모든 것에 물을 뿌리는 것이 종교적으로 성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예수님은 엄청난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곧 *참된 신앙이 무엇이냐? 는 것을 결정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입니다.
7:6절)이르시되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기록하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예수님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해 말씀하시기를 *사람들이 입술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을 존경하는 것 같지만, 마음으로는 얼마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멀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굉장히 충격적인 사실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입술로 하나님을 공경하면. 신앙심이 굉장히 좋은 줄로 생각합니다. 즉 *입술로 하나님을 존경한다*는 것은 *종교적 행위가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누구든지 거룩한 종교 행위를 하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것 같고, 어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성스러운 세계 안에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신(神)의 조각상에 입을 맞추기도 하고, 두 손을 모아 기도문을 외우면서 염주로 입을 맞추기도 합니다. 또 어떤 형상 앞에서 머리를 땅에 대고 절하기도 하고, 무릎을 꿇고 기면서 고행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행위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성스럽게 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성스러운 느낌을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이런 일을 했을 때, *세상 어떤 일로도 만족할 수 없는 종교적 희열을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이나 만족감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앙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종교적 행위를 하거나, 고행이나 성스러운 행동을 할 때, 만족감이 오기도 하고,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굉장히 성스럽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입으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존경하면서도 얼마든지 마음은 멀 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겉으로 하는 종교 행위의 만족감이나 존경심 자체가 하나님이 받으신 신앙이라는 증거는 아닌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니까 우리도 가슴이 좀 뜨끔 하는 것이 있는데, 사실 *입으로는 찬송하고, 기도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의 몸은 성전에 들어와 있고, 우리의 입술은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우리의 마음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은 곳에 가 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인간 신앙의 실제적 상태입니다. 인간은 종교를 찾으면, 마음이 성스러워지고, 조금 깨끗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희열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기도 응답을 가져오거나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올 순 없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무슨 의도로 제자들에게 유대교의 정결의식을 지키게 하지 않으셨을까? 아니면 오히려 무시하라고 하셨을까? 진정으로 *하나님이 찾는 신앙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잡는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은 *많은 물을 자신에게 뿌리는 것도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무릎을 꿇고 오르내리는 것도 윈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믿음으로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을 알게 될 때,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술이나 손이나 머리카락보다도 마음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에 잠기기를 원하십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너무나도 종교적 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머리에 물을 뿌릴 필요도 없고, 손도 여러 번 씻을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 나와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신앙은 여러 가지 의식이 주렁주렁 붙어있는 형식의 신앙이 아니라, *아무것도 없는 환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믿으라는 이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후에 얼굴에 광채가 나니까 백성들이 지도자를 만날 때, 늘 얼굴에 수건을 썼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는 너무나도 성스럽게 보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제 우리 얼굴을 덮은 수건을 벗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분위기를 잡느라고 일부러 대낮에 방에 커튼을 치고, 어둡게 만들어 놓고 촛불을 켜서 성스러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이 사람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이런 분위기만 잡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와서 *커튼을 확짝 걷어 버리고, 촛불을 끄고, 당장 일어나 밖에 나가 일하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님을 느낌으로 믿으려고 할 때가 많습니다. 즉 촛불을 켜고, 분위기는 컴컴하게 해 놓고, 기분을 좋게 하는 것이 멋진 신앙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런 분위기나 느낌은 필요가 없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생각과 심장(心臟)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의 생각이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종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기독교는 가장 성스럽지 못하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촛불이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어두컴컴한 분위기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환한 태양 같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에 느낌이 없어도, 예배의 분위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성스럽지 않아도. *하나님은 우리 믿음을 받으시고. 복을 내리십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족을 느끼는 자기도취의 종교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앙이냐? 아니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역사하시는 신앙이 진짜 신앙이냐? 하는 것입니다.
Ⅱ.유대교의 변질
그 당시의 많은 사람들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볼 때, 같은 신앙으로 생각할 때가 많았습니다. 같은 구약 성경을 믿고. 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많은 사람들은 *기왕이면 역사와 전통이 오래된 유대교가 더욱 깊이 있는 신앙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한 후에 바리새파의 어떤 사람이 와서 예수만 믿는 것으로는 좀 약하고, 할례를 받아야 제대로 믿는 것이라고 가르쳤을 때, 많은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교가 참 하나님의 신앙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유대교는 변질된 이스라엘의 신앙인 것입니다.
7:7-8절)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느니라.”
원래 *이스라엘의 신앙은 기독교의 뿌리였습니다. 예수님도 설교할 때, 구약 성경의 신명기나 시편이나 이사야를 많이 인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신앙과 기독교는 한 신앙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의 신앙이 뿌리에 해당된다면, *복음은 가지요, 꽃이요, 열매입니다. 그런데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뿌리에서 잘못 생긴 신앙이었습니다. 즉 *죽은 가지가 하나 생겨난 것입니다. 이것이 죽은 것은 참으로 미묘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더 잘 믿으려고 노력한 것이요, 어떻게 생각하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무시한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엄청난 부흥과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했습니다. 작지만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나라가 되었고, 가장 존경받는 나라가 되었고, 가장 부흥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런 엄청난 축복을 받고 난 후에 보니까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는 것이 너무나도 시시하게 느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자기들 생각에 하나님을 더 열정적으로 잘 섬기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감동적인 여러 가지 의식과 행사를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일반 백성들의 반응도 좋아지고, 참여도 높아지고, 모든 것이 좋은 것 같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점점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고, 입술로만 하나님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종교적 흥분이나 성스러운 느낌은 많은데, *진정한 부흥이나 하나님의 능력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너희가 너희 전통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도다”라고 하셨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을 잘 섬기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다보니까 자기들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많은 형식이나. 제도를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나쁜 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으려고 생각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져버리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런 악순환을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반복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가 처음에는 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 결과 부흥이 오고, 축복이 오면,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는 것은 시시해지고, 자꾸 행사를 하게 되고, 자꾸만 의식을 추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얼마나 예민한가 하면, 쓸데없는 의식이나 행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대신 할 때, 부흥이 죽어 버리고, 그 종교는 죽은 종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까지 하나님의 능력을 받으려면, 아무리 부흥을 주시고, 축복을 주셔도 끝까지 *하나님 생명의 말씀 외에는 아무것도 몰라야 하는 것입니다. 즉 무식하게 믿어야 합니다.
제자들이 밖에서 들어왔을 때, 손도 씻지 않고, 떡을 먹었던 것처럼, 유대교의 의식을 무시하고 지키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유대교가 변질된 한 예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7:10-12절)모세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모욕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자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다시 아무 것도 하여 드리기를 허락하지 아니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간단명료하다고 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네 부모의 말씀을 존경하라는 것입니다.*네 부모를 공경하고 복종하면 산다는 것입니다. 즉 *복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유대교에서는 이것을 복잡하게 바꾸었습니다. 즉 고르반 이라고 해서 *성전에 부모님의 이름으로 물질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가르쳤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때의 제도가 워낙 오래된 것이어서 우리가 자세히 알 순 없습니다. 추측건대, 모세의 율법에는
*분명히 부모님를 공경하라는 것이 부모님의 말씀을 존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는 *부모님의 말씀 듣는 것은 시시한 것이니까 부모님의 이름으로 성전에 돈을 바치면, 정성도 들고, 또 다른 사람들 보기에도 낫고, 부모님의 이름도 나니까 얼마나 더 좋으냐? 는 식이었던 것입니다.
요즘 절(사찰)에 가 보면, 식구들의 이름으로 많은 등이나 기왓장을 사서 이름을 붙여놓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참 정성이 좋은 것 같지만, 실제로는 미신적(迷信的)이고, 절(사찰)에서 하는 하나의 돈벌이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부모님을 공경하라고 했으면, 부모님을 공경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돈이 많이 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고르반 이라고 해서 *성전에 부모님의 이름으로 돈을 바치니까 효성이 지극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부모님을 더 공경하지 않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핵심은 *이것을 의식의 종교요, 미신의 종교로 변질시켜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행사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보다 더 우선되어서는 안 됩니다. 즉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는 것이 시시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결국 자기 영혼을 죽게 만드는 것이요. 또한 자기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까지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7:13절)너희가 전한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며. 또 이같은 일을 많이 행하느니라 하시고”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우상시 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가장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말씀을 듣고, 이해해서 믿음을 가지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이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의식이 거창하지 않고, 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아도 우리를 받으시며, 축복해 주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Ⅲ.분명한 죄의 위치
유대교에서 사람이 밖에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을 때, 손과 머리를 씻으라고 한 것은 사람은 얼마든지 죄에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많은 죄가 있고, 우리가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죄에 노출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얼마든지 우리의 영혼을 더럽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언제나 주의해야 하고, 또 이런 식으로 더럽혀진 영혼을 언제나 깨끗하게 해야 한다는 것은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 세상에 나가면, 죄인들이 많이 돌아다니는데, 그들이 만지고 간 물건이나 장소에 접촉함으로써 죄가 전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여기서 죄가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전염되는지를 너무나도 명쾌하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가 인간의 마음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인간들의 *마음에는 이미 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서로 접촉함으로 전염된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이 접촉이라는 것이 신체 접촉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말로 인한 오염이나 행동을 모방하거나, 자주 접촉함으로 무감각해 짐으로 죄가 전염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점을 대하여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7:14-16절)무리를 다시 불러 이르시되. 너희는 다 내 말을 듣고. 깨달으라.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여기서 다시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사람 안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그냥 들으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마치 삼손이 결혼식을 하면서 수수께끼를 낼 때, 삿14:14절)...먹는 자에게서 먹는 것이 나오고. 강한 자에게서 단 것이 나왔느니라.”고 질문한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가 일단 답을 알고 나면 간단한데, 모르면 굉장히 어려운 것이 수수께끼입니다. 이런 것이 곧 하나님의 수수께끼입니다. 즉 *알고 나면, 쉬운데. 모르면 절대로 자기 머리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제자들의 유리한 점은 예수님과 따로 있을 때, 그 의미를 물어볼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7:17-18절)무리를 떠나 집으로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그 비유를 묻자온대.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우리는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노라고 하면서도 거의 깨닫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또 예수님에게 나아가 개인적으로 물어 보이야 하고, 우리의 무지함에 대해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문제는 자기가 모르는 것은 묻지 않고 침묵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이렇게 쉬운 것을 모르면 창피하기 때문입니다.
똑똑한 여러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지 못하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가 무엇일까?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이 음식이라는 생각은 않을 것입니다. -
그 대신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은 배설물(똥)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히지 못하고,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힌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배설물은 더러운 것인데, 사람의 옷이나 몸을 더럽히지 않을까?
이것은 너무나 쉬운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은 절대로 빤하거나 유치하지도 않습니다.
드디어 제자들이 물었을 때, 예수님은 명쾌하게 이렇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7:18-19절)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은 음식물이었습니다. *음식은 사람의 인격을 더럽게 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가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배로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로 싸버리기 때문에 인격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즉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 손을 씻는 문제는 인격이 더럽혀지는 것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잘 하는 것 같지만, 실제도 미신적 행동에 불과합니다. 오히려 *자신의 영혼을 더 속박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진정으로 부패한 것은 사람의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마음의 죄가 사람의 말과 행동과 표정을 통해 다른 사람을 상하게 하기도 하고, 썩게 하기도 하고, 마비시키기도 하는 것입니다.
7:20-23절)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예수님은 인간의 마음은 다 부패했고, 죄 덩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미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들어왔고,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수도원이나 절(사찰)에 들어가도 안 되는 이유가 *이미 마음속에 죄가 들어와 있는 죄는 없앨 순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목록은 십계명에 나오는 죄를 더 실제적으로 이야기 하신 것입니다. 십계명에 보면 제 6계명이 *살인하지 말라*인데, 여기서 예수님은 살인과 악독과 광패라고 했습니다. *살인은 사람을 죽이고 싶은 충동을 말합니다. 또 *악독은 자꾸 악한 쪽으로 자기 마음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광패(狂悖)는 *광기를 부리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무서운 것은 *멀쩡하던 사람이 일단 미쳐서 날뛰게 되면 완전히 딴 사람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인데, 여기서는 *음란과 간음과 음탕과 흘기는 눈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으로 끊임없이 간음을 행합니다. *이것이 발전되면, 다른 사람을 그런 눈으로 유혹하게 됩니다.
그리고 *음란한 사랑을 너무나도 사모하게 됩니다. 나중에는 죄가 너무 아름답고,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게 됩니다. *사람은 죄를 짓기 전에는 상상 속에 많은 간음을 합니다.
제 8계명은 *도둑질하지 말라*인데, 여기서는 *도둑질과 탐욕이 나옵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데, 토개공처럼 자꾸 남이 가진 것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적당한 이상을 더 가질 때, 행복을 느끼고. 그러다가 결국 망하는 것입니다.
즉 *사람은 자꾸 적게 살려고 해야 죄를 덜 짓게 되는데, 그런 사람은 세상에서 바보 취급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 9계명은 *거짓말 하지 말라*인데, 여기서는 *속임과 훼방이 나옵니다. 즉 *남을 속이고 정당한 것을 훼방하고, 방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만과 탐욕입니다.
사람이 결국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 믿는 이유는 종교적 행위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수양으로 자신을 깨끗 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구정물을 잠시 가라앉혀 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즉 종교적 수양은 *잠시 혼탁한 욕망을 가라앉혀서 깨끗하게 보이게 할 뿐, 누군가가 작대기로 휘저어 놓으면, 온갖 더러운 것들이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진정으로 깨끗한 사람이 되려면, *우리 마음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즉 *우리 안에 있는 더러운 마음은 밖으로 내보내고, 깨끗한 새 마음을 넣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느낌이나 감동은 전부 일시적인 정화에 불과합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4:23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느낌이나 종교적 열심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생명의 말씀을 믿어야 하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어야 하고,성령님의 인도로 우리의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든 위선의 수건은 벗어 던지고, 환한 빛 중에서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나고, 축복받는 각 셀(cell)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찬송가 255장 *너희 죄 흉악하나*
site/Kakao 선교회 안내
주님의 선교 명령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가치와 아름다운 가정과 영생을 위하여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대상 : ▷불신자 ▷개종자 ▷코로나시대 바빠서 교회출석 못하는 자 자발적인 전화 신청
▣구원의 확신이 없는 자 ▷영생 받고 사망 후 천국 가길 원하는 자. 즉▷허무에서 가치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멸망에서 영생으로, ▷권태에서 행복으로, ▷염려에서 기쁨으로, ▷어리석음에서 지혜로, ▷저주에서 풍요로, ▷종교인에서 주님의 제자로, ▷죄와 사망에서 구원으로, ▷마귀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지옥불 땔감에서 천국 맨션(mansion)을 원하는자.
물론 각자 의지와 기질과 순종여부에 따라 차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계21:8절)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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