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농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김겨리
분홍잠
고수레로 남겨 둔 홍시의 밀린 잠이 붉은 저녁이다
마당을 쓸던 노인이 허리를 굽히자 짧은 옷단 아래로 살짝 드러나는 등골,
그 깊은 계곡까지 노을이 들었다
무너지는 한쪽 벽에 봉창 달빛을 빚어 얽는 거미가
바람이 들지 않도록 거미줄을 암팡지게 엮는다
명아주 이파리 스적거림으로 창문을 단 집
구절초 꽃대로 세운 배흘림기둥에선 풍경(風磬) 소리가 향긋하다
노인이 굽혔던 허리를 펴면 가을볕이 어리광처럼 달려든다
도돌이표만 있는 가을볕은 노인의 십팔번이다
음정은 새털구름이고 박자는 떨어지는 은행잎,
아무나 풍월로 읊어도 진양조 장단*
지붕엔 말표고무신 한 짝이 노을로 배꼽만 덮고 누워 있다
갈기털 다 빠진 목덜미에 솟대 그림자를 괴고 잠든 말굽은
아직도 따스한 발걸음을 기억하며
지붕에 올라가 누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긴 한숨을 쉬는 노인의 호흡이 가늘게 떨린다
허공에 써 놓은 점자로 되짚어 가는 길에도
과속방지턱이 있는지 바람도 잠시 주춤하는 법인데
어느새 성성해진 백발과 그믐달만 뜨는 눈썹
슬하에 노을 닮은 은행나무 한 그루만 달랑 둔 노인의 가계(家系)
입술에 허옇게 일어나는 각질을 옷소매로 쓱 훔치니
노을이 찍 묻어난다
노인의 등뒤로 달이 뜬다 어쩌면, 오늘밤
은행잎 한꺼번에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
노을의 끄나풀이 길다
*진양조 장단:판소리에서 가장 느린 박자
신춘문예-시 당선 소감 / “참 아렸던 시간들…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갈 것”
업무회의 중에 당선 통보를 받았다. 잠시 숨이 고르지 않을 때 창밖엔 혹한에 끌려가는 바람의 이마가 보였다.
지금은 오히려 내가 그 무엇인가에 의해 여기까지 이끌려 온 것 같은데, 무엇이었을까. 12월의 침엽(針葉)은 날카로웠지만 뭉툭한 그 무엇을 찌를 수는 없었다. 나를 들춰내는 일이란 참으로 아린 일이었다.
침잠해지는 시간이면 습관처럼 끼적이던 습작들을 꺼내놓고 물끄러미 바라본다. 저 여린 살갗으로 무엇을 치대고 누구를 감싸안을 수 있을까. 종내 허기진 등골처럼 움푹 파인 상념으로 자판에 올려놓은 손가락들이 가늘게 떨리곤 했다.
가끔씩 머리맡에 쌓이는 잠들을 흔들어 깨우다 내가 잠들곤 했다. 검은 비닐봉지로 나무젓가락으로 구겨진 종이컵으로 가위눌리던 시간들. 빈 들에 서 있는 허수아비가 떠올랐다. 바람을 견디고 이슬을 견디고 어둠을 견디는 것보다 더 힘겨운 건 내가 빈 들의 일부도 되지 못한다는 거.
내 시의 여백이 되어주신 홍·정·심 시인과 당진 시인들께도 감사드리며, 아내와 군복무 중인 두 아들, 어머니, 항상 뭉클한 감동입니다. 모든 지인들께 소박한 덕담이고 싶은 겨울, 얕은 시심을 헤아려 주신 농민신문사와 손해일· 황인숙 심사위원님께도 감사드리며, 이제부터 내딛는 한발 한발 정갈한 보폭으로 걸어가겠습니다.
●김겨리(본명 학중) ▲1962년 경기 안성 출생 ▲홍익대학교 졸업 ▲현대로템㈜ 근무
신춘문예-시 심사평 / “시각·청각·촉각 생생…풍부한 언어구사 인상적”
총 열여덟명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전반적으로 농촌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 많았는데, 자연 풍광을 그리기보다 사소한 자연 하나하나를 씨앗으로 사람살이를 싹틔워 형상화하려는 자세가 마음에 와 닿았다. 다들 알다시피 농촌의 삶이란 평화롭기만 한 게 아니라 고된 것이고, 그 고된 만큼의 보상은 없어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기 쉬운 것이다. 그로 인한 서글픔이나 분노와 절망감을 ‘세월호’ 등으로 외연을 확대한 작품, 그리고 현란하나 발랄한 어법으로 자신의 내면에 집중한 작품도 눈에 띄었다.
최종심에 오른 이는 김학중·조미희·장서영·이복희 등 네명이다. 모두 시 쓰기가 몸에 익은 솜씨로 저마다의 삶의 결을 보여주는 바여서 당선작 하나를 고르기는 지난한 일이었다. 재치있는 어법으로 말을 꼬고 비트는 조미희의 언어에 대한 감수성, 감칠맛 나게 시어를 운용하는 장서영의 우아하고 발랄한 정신, 오브제(사물)마다 생의 질척거림을 겹쳐 보여주는 이복희의 웅숭깊음, 제쳐두기 아쉬운 이들의 재능은 언제라도 빛을 볼 것이라 믿는다.
당선작은 김학중의 <분홍잠>이다. 가을 정취 물씬한 농촌 풍경을 배경으로 홀몸어르신의 하루 일상을 담았다. 내용이나 시어를 군더더기 없이 길게 끌고 나가는 힘이 있다. 줄글인데도 운율이 만져질 듯하다. 즉 언어구사가 풍부하고 내재율이 있는 시다. 농촌 홀몸어르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이 시각 청각 촉각에 생생히 스치는 듯하다. 배경은 농촌이지만 홀몸어르신 문제가 어찌 농촌만의 문제일까.
시적 대상에 제 감정을 흘리지 않고 객관적 거리를 두어야 독자를 보편적 감정으로 이끈다는 걸 익히 아는 시인이다. 축하드린다!
손해일<시인>·황인숙<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