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7.16. 스물아홉 번째 주. 설교문
묵상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모두 장님입니다.(1장)
신앙고백
찬송 23 만 입이 내게 있으면
기도 김복순 권사(549)
성경말씀 빌립보서 1:9~11
찬양 샤론 중창단
설교 붉은 동백
찬송 363 내 모든 시험 무거운 짐을
광고 장마에 안전 건강 조심하세요. 진교희 권사 남편 쾌차 위해 기도
새 가족 정귀자 권사
가족방문 백춘자 권사 가족, 이정석 집사 가족, 김정수 권사 가족(외식)
정구섭 장로 따님
찬송 464 곤한 내 영혼 편히 쉴 곳과
축도 아프니까 그만하세요. 주님도 아프고, 나도 아프잖아요.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어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었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10절,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11절,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에 사흘 동안 최대 429㎜ 폭우가 내렸습니다.
군산시는 도로가 침수되고
전주도 주민들을 위한 대피소까지 마련했습니다.
우리 요양원도 창틀로 비가 스며들어 한참을 고생했습니다.
그래도 우리 선생님들의 노련한 대처로 피해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추적거리는 방에서도
우리 권사님들도 우리 박영숙 집사님도
그냥 흥겹게 웃어 주니 고맙기만 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목사님은
이런 폭우를 전혀 피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냥 머리며 속옷까지 젖을 각오로 이리저리 다니며
곳곳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이럴 때 울고 싶을 만큼 울어도 표가 나지 않습니다.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우들을 위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는 셰익스피어 명작 <율리우스 카이사르>에도 나옵니다.
너는 나를 빌립보에서 다시 보게 되리라.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개선장군으로서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또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세계사적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22세)와 황홀한 사랑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최후는 비참했습니다.
부귀영화를 누렸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결국 암살당하고
세계사적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는 독사에 물려 결국 자살했습니다.
성경은 이를 예언하기를
그에게 무익하리라. (다니엘서 11:17)
이렇듯 우리 인생도
부귀영화가 무슨 유익이겠습니까?
그리고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양자였던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옥타비아뉴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때 인두세를 받기 위해서 인구조사를 했습니다.
이때부터 성경적 배경은 예수 탄생 이야기입니다.
누가복음 2장 1절입니다.
그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2절, 이 호적은 구레뇨가 수리아 총독이 되었을 때에 처음 한 것이라
3절,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
4절, 요셉도 다윗의 집 족속이므로
갈릴라 나사렛 동네에서 유대를 향하여 베들레헴이라 하는 다윗의 동네로
5절, 그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하러 올라가니
마리아가 이미 잉태하였더라
6절, 거기 있을 그 때에 해산할 날이 차서
7절, 첫아들을 낳아 강보로 싸서 구유에 뉘었으니
이는 여관에 있을 곳이 없음이러라
빌립보는
사도바울이 최초로 유럽에 복음을 전파한 도시입니다.
알렉산더 대왕(BC 336~BC 323)의 아버지인 빌립 Philip왕이
빌립보를 건설했습니다.
그래서 빌립보입니다.
9절입니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세계사적 절세미인 클레오파트라와 황홀한 사랑이야기도 있지만
오늘 말씀의 복음은 아가페(사랑)입니다.
물론, 사도바울이 빌립보 성도들을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우리 요양원 뒤뜰에 홍목련이 피었습니다.
이를 두고 철부지 꽃이라 합니다.
이처럼 순진무구한 철부지 사랑도 있습니다.
목사님도 살아보니 그렇습니다.
사도바울도
순수한 사랑만 가지고는 복음을 전파하는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쓰잘데기도 없이
비방하고
방해하는 사람들을 수도 없이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목사님도 이런 경험이 있습니다.
목사님도 잠시 정치를 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을 한 번도 만나지도 못한 사람들이
편견을 가지고 덩달아서 비방합니다.
이것을
허위 합의 효과 False Consensus Effect라 합니다.
이것을
비논리적 군중 심리 mob psychology라고도 합니다.
그냥 무턱대고 따라서 비방하는 동조화 현상 coupling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지부조화 cognitive dissonance입니다.
사실에 대한 지각, 판단, 사고 등이 다른 인지들과
논리적으로 불일치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이 무어겠습니까?
결국,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 때문에 사도바울이
에베소 감옥에서 빌립보 교우들에게 눈물로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그 참혹함이 데살로니가전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 2절입니다.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이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사도바울은
이런 능욕과 설움을 통한 깨달음으로 지금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엔
지식과 총명함도 필요하다.
지식은
열심히 공부하며 노력해서 얻어진 상식과 전문적 식견입니다.
그래서 사도입니다.
그래서 목사입니다.
총명함이란
세상을 사랑해서 겪는 고뇌에서 깨달아지는 영감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곧, 어머님의 이마에 깊이 파인 주름살입니다.
오늘 대표 기도를 하신 우리 김복순 권사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백내장 수술을 하고 거울을 보았더니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만 가득하더랍니다.
이것이 사랑의 멍에이고 이를 통한 총명함입니다.
이 눈물의 편지를 쓸 때 사도바울의 나이가 60 즈음 일 겁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아픔과 시련 속에서 홍시처럼 익어졌겠습니까?
고린도 전서 13장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그래서 노사연 가수도 사랑의 아쉬움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 손에 잡은 것이 많아서 손이 아픕니다
등에 짊어진 삶의 무게가 온몸을 아프게 하고
매일 해결해야 하는 일 땜에 내 시간도 없이 살다가
평생 바쁘게 걸어왔으니 다리도 아픕니다
내가 힘들고, 외로워질 때 내 얘길 조금만 들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에 한복 판에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지친 나를 안아 주면서
사랑 한 다 정말 사랑한다는 그 말을 해 준다면
나는 사막을 걷는다 해도 꽃길이라 생각할 겁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 ♪♩<바램>
10절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사도바울의 중보기도가 이렇게 아름답고 심오합니다.
지식과 총명은
분별할 수 있는 지혜의 눈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선한 것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근본인가를 분별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을 견지망월見指忘月이라 합니다.
목사님이 새벽마다 가는 사우나에 까까머리 스님도 옵니다.
사우나 입구에서 승복을 입고서 담배 한 대 피우고
사우나를 마치고 나가면서 담배 한 대 피우고 갑니다.
검은 차 안에는 골프채도 보입니다.
그러나 이런 스님이 아니고
도를 많이 쌓은 고승께 신도가 찾아와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러자 고승이 말하기를 나는 글을 알지 못하네.
그 말을 들은 신도는
일자무식쟁이가 무슨 고승이냐고 실망했습니다.
실망하는 신자를 보고 고승이 말하기를
진리는 하늘에 있는 달과 같고,
글은 그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다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키지만,
손가락이 없다고 달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세.
달을 보라고 손가락을 들었더니
달은 보지 않고
손가락만 쳐다보다니 안타깝기만 하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어제 정귀자 권사님이 오셨습니다.
그 연세에 이리여고를 졸업하시고
섬기는 교회에서 많은 사역을 담당했다고 합니다.
참 귀한 권사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왜 예배당에 다닙니까?
우리 염성섭 장로님이 의사입니다.
목사님이 우리 염 장로님 병원에 가면 의사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래야 병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오면 누구 말씀에 순종해야겠습니까?
10절입니다.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이 말씀에 고구마 먹다 체한 것처럼 답답합니다.
참으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종말론적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께서 오시는 그날처럼
진실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잖습니까?
허물없이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잖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행실은
양푼 밑구멍처럼 뻔뻔하기조차 합니다.
그래도 목사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래도 장로권사집사인 것을 어찌하겠습니까?
그래서 무식하면 용감합니다.
11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오늘 이 마지막 말씀에 위로를 받습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너무나 뻔뻔스러움에
슬프고
아파서
목사직을 내려놓을 뻔했습니다.
세계 75억 인구 중에 법 앞에 누가 자유롭겠습니까?
검찰총장 출신 윤 대통령이라고 법 앞에 자유롭겠습니까?
여기에 허물이 없는 사람 누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누구에게 손 가락 질 한다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입니다.
그러니 누가 누구를 정죄하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의 행실로는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
곧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목사님은 이 詩를 대하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꽃들이 다 지고 난
추운 겨울에 홀로 피는 붉은 동백을 보면서
죽음을 어떻게 이렇게 거룩하게 노래했을까? 싶은 생각에서
마치 오늘 말씀의 종말론적인 주제 같기도 해서 소개합니다.
나는 저 가혹한 확신주의자가 두렵다
가장 눈부신 순간에
스스로 목을 꺾는
동백꽃을 보라
지상의 어떤 꽃도
그의 아름다움 속에다
저토록 분명한 순간의 소멸을
함께 꽃 피우지는 않았다
모든 언어를 버리고
오직 붉은 감탄사 하나로
허공에 한 획을 긋는 단호한 참수 (생략) / 동백꽃, 문정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