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진감래 없을소냐
김수현 당호(수연당) 원주교구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신갈리 출생
1937년 12월 16일 생 (음)
원주 지부회장
우리가 관광회사를 샀는데 일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사업을 5년 정도 쉬었다가 했거든요.
그래서 기도식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새벽 5시에 청수 모시기가 너무 힘들어요.
잠을 못 자고 비몽사몽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5시 5분 전에 하늘에서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천도교를 하게 된 건 내가 많이 아파서였어요. 기독교 다닐 땐데 기도원이라는 기도원은 다 다니면서 기도하러 다녔습니다. 기독교 병원에 차트도 엄청 많았죠. 그런데 병명이 안 나와요. 그때 목사님이 당신 안수 안 받고 다른 기도원 다닌다고 날 미워하더라고요. 또 기독교 병원에서는 멀쩡한데 아프다한다고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고요. 난 갈비뼈 밑이 도려내듯이 아픈데 의사는 못 찾는 거예요. 그때 우리 친목계원이 침 잘 놓는 유명한 곳이 있다며 가자고 했어요. 그 침을 맞고 나니 좀 좋아지더군요.
그 당시 우리 건물에 다방을 세 주었는데 다방 주인이 몰래 도망 가버렸어요. 다방 문을 닫아버리면 가게가 안 나가니까 전에 일하던 아이들 불러서 월급을 주며 내가 대신 다방을 지키고 있던 중이었는데, 몸이 아파서 침을 맞는 중이니까 맨 날 힘이 없어 다방에 늘어져 있는 거예요.
그때 이소원 원장이 우리 다방에 오셨어요. 거기서 동학, 천도에 대해서 말을 들었죠. 난 성경책에 있는 구약, 신약에만 심취해 있던 중이라 처음엔 말이 잘 안 들어 왔어요. 그리고 두 번째 오셨는데 그때는 원장님 말이 쏙쏙 들어오는 거예요. 그 식구가 되려고 그랬나 봐요. 그래서 원주교구를 갔지요. 터미널에 있더군요. 남자만 네 명 정도 있는데 나한테 이것저것 묻기에 조금 창피한 마음이 들어서 별 대꾸도 안하고 집으로 왔어요.
좀 있으니까 이소원 원장님이 이곳 원주에 선도사로 상주하기 시작했어요. 같이 밥 먹으면서 친형제처럼 지내게 됐지요. 그분이 능력이 있더라고요. 내가 하나하나 깨달으니 알겠어요. 천도교로 올 때 ‘나는 교회 여기 그만 나오고 이제 천도교 갈랍니다’ 하고 하나님께 심고를 하고 왔지요. 그때 교회 짓는데 1천2백만 원을 내놓고 왔어요. 계속 그곳에 있었으면 신나게 다녔을 거예요.
원주교당에 두어 번 나오다가 이소원 원장님과 함께 가리산수도원에 갔어요. 뜻도 모르고 주문만 했어요. 수련하는데 산골짜기에서 어떤 분이 내려오시더니 내 목에 염주를 딱 걸어 주시는 거예요. 너무 감사해서 수련 끝나고 그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대신사님이시네” 그러더라고요. 난 대신사님이 뭔지도 몰랐지요. 그땐 아무것도 몰랐으니까요. 일주일 열심히 하고 집에 왔는데 마음이 부풀어서 잠을 자려고 누워도 주문이 막 나오는 거예요. 큰소리로 하지 말라고 해서 누워서 조용히 마음으로 주문했어요. 매일 주문생활을 했습니다. 새벽 기도식 하기가 힘들잖아요. 그런데도 내가 지금까지 새벽 기도식을 빼 놓지 않고 합니다.
우리가 관광회사를 샀는데 일이 잘 안 되는 거예요. 사업을 5년 정도 쉬었다가 했거든요. 그래서 기도식을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새벽 5시에 청수 모시기가 너무 힘들어요. 잠을 못 자고 비몽사몽으로 자다 깨다를 반복하니, 5시 5분 전에 하늘에서 전화를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5시 기도식을 하기 시작해서 이날 이때까지 부지런하게 됐어요.
내가 다른 큰 일은 못해도 박공주 회장님 때 설교대회에서 2등을 했어요. 그때 여성회원들이 제 말이라면 다 들어줬죠. 그래서 원주지부에서 여성회를 조직했습니다. 그러다 사업상 삼척으로 떠나게 됐는데, 교회도 등한시하고 사업도 잘 안 되고 기독교에서 함께 온 교회 사람들도 하나 둘씩 기독교로 다시 떠나고 그랬어요. 내가 지금은 삼일운동, 신문화운동, 동학혁명, 갑진개혁운동 등 교리와 교사에 대해서 잘 알지만 그때 당시는 정확하게 몰랐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을 다시 챙기지 못했어요. 지금은 떳떳하게 동학·천도교를 믿는다고 말하는데 아쉽게도 포덕 한사람을 못해요.
기독교 할 때는 치악산에 담요 하나 들고 가서 밤새 기도하고 그랬어요. 내가 원래는 천주교 신자였어요. 결혼하기 전까지 천주교에 다녔어요. 남편이 육군 중위일 때 중매로 결혼해서 남편도 함께 천주교를 했죠. 우리 시어머니는 반대를 했어요. 천주교 믿어서 집안 망한다고 성경책도 불살랐어요. 시어머니가 그러시니까 교회에 정이 떨어지더군요. 내가 그때 딸만 넷이었는데 내가 천주교 믿어서 그런가 하는 요사한 마음이 드는 거예요.
남편이 제대를 하고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중앙시장에 옷가게를 했는데요. 그때 우리가게에 제주도 여자가 놀러왔어요. 자기 남편이 소령이고, 택시사업을 하는데 돈을 그렇게 많이 번다고 자랑을 해요. 들어 보니, 내가 하루 버는 것 보다 더 많이 버는 거예요. 그 말에 솔깃해서 택시를 한대 샀는데 괜찮았어요. 트럭을 또 샀지요. 그런데 트럭을 사가지고 오는 날 사고가 난 거예요. 자꾸 사고가 나니 힘들었습니다.
그때 택시 조합 사장이 남편에게 차주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어요. 남편이 점잖고 배운 것도 있으니까 택시 조합을 맡아 달라는 거예요. 남편이 소장으로 운영하니 회사가 잘되고 성실하게 해 돈을 많이 벌어줬어요. 그러니 사장이 회사를 우리에게 넘겨주겠대요. 경합자가 많이 있었는데도 우리가 인수했죠. 650만원에 택시회사를 인수하고 나머지는 대출받아서 택시사업을 했어요.
우리 아이들 가르치고 부족하지 않게 먹고 살았지요. 김경렬 사모님, 한창화 사모님 등 여러분들이 우리 집에 많이 오셨어요. 특히 이경화 사모님은 우리 집에 오시면 보름씩 집에 머물었어요. 천덕송을 참 잘 가르치시고 기독교에서 온 저하고 처지가 같아서 친했어요. 내가 기독교에 있을 때 헌금을 많이 해서 인기가 좋았어요. 우리 집에 기독교인들은 모두 다 들러 갔어요. 지금은 천도교에 헌금을 많이 못해서 미안해요.
우리 둘째딸이 26살에 미국 유학가고, 막내아들은 경원대학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막내아들이 1학년 때 미국 예일대학에 갔어요. 실력이 괜찮았는지 예일대학과 조오지아 공과대학에 원서를 냈는데 둘 다 합격통지서가 왔어요. 의논 끝에 예일대학에 가서 졸업하고, LA에서 직장생활하며 정착을 했죠. 그리고 거기서 3살 때 미국에 이민 간 한국아이하고 결혼 했어요.
지금 미국에 있는 우리 딸은 고생 좀 했죠. 음악을 전공하려고 피아노를 배웠는데 시험에 떨어졌어요. 그때 선생님이 예술계 예비고사를 봐야 하는데 일반계로 원서를 잘못 써서 원하는 데를 못 가고 다른 대학에 갔어요. 미국에 가고 싶다고 해서 안양 성결 신학대학 영어영문학과에 갔다가 졸업 후에 미국으로 갔지요. 아직도 피아노에 집착을 많이 하고 있어요. 집에 피아노가 3대 있어요. 딸은 지금 결혼해서 하와이에서 살고 있습니다.
택시사업으로 돈 많이 벌어서 살림을 키웠다가 삼척에 관광버스 사업을 하면서 돈을 많이 잃었어요. 내가 만날 주문하고 기도하니 그런 마음의 응답이 와요. 내가 잃어버린 재산은 우리 자식들이 다 찾는다고 해요. 그때는 그런가 보다 했는데 지금은 그 말이 맞는 것 같아요. 우리 미국에 있는 딸이 주방에서 청수를 아침저녁으로 모시고 기도식을 해요. 그곳에는 기독교인이 많은데도 절대 기독교에 안가요. 엄마 살아 있을 동안은 천도교 열심히 한대요. 이번에 라이온스 총재가 한국에서 왔는데 우리애가 나가서 통역을 했대요. 하와이에서 잘 대접을 받고 지내요.
또 작년에는 음악 콘서트를 제작했는데 우리 가족 모두 갔어요. 걔는 여자지만 남자처럼 큰일하며 살아요. 삼척에서 사업 할 때 애가 미국에서 왔는데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서 무당에게 갔어요. 지금 같으면 안 갔겠지만 그때는 믿음이 약해서 유명한 무당에게 갔어요. 그 무당이 애를 보고 하는 말이 “아이구, 어머니 대감을 딸이 받네” 하는 거라. 그때는 몰랐지요. 재산을 받는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아마 이 딸이 천도교를 잘할 것 같아요. 딸들 중에 제일 열심히 해요. 미국에서 청수 모실 때 주문 세 번을 하고 그 청수물로 가족들 커피 끓여 먹인대요. 우리 사위는 하와이 사람인데 집 짓는 사업을 해요. 나를 보면 엄마가 기도를 많이 해 자기 사업이 잘된다고 하면서 기도 천천히 하라고 농담을 해요.
천도교 발전은 지위가 있는 사람이 먼저 잘 행해야 하겠더라고요. 경전 가르침대로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아래 사람 믿음이 없어져 떠나거나 잘못된 길을 가는 거예요. 도라는 것은 결국 바르게 가는 길인데 잘못된 길을 가르쳐 주면 안 되잖아요. 가령 잡신을 믿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내가 처음에 천도교 입교 했을 때 집안 어른들이 나를 이상한 곳에 데리고 갔어요. 산신제를 지내는 곳이라며 떡을 해서 가는데 내가 따라 간 적이 있거든요. 지금 생각하면 아찔해요.
우리 집에 팔남매 중에 저만 천도교를 해요. 제 밑에 동생은 기독교에요. 내가 중매를 했는데, 육군소령인 제부가 우리 천도교를 보고 빨갱이라고 해요. 다 넘어갔잖아요. 그래서 제부가 나를 많이 말렸어요. 자꾸 비판적으로 하니 결국 사이도 소원해지더군요. 살면서 이런 저런 풍상 겪다 보니 사람은 주문 이상 더 좋은 게 없다는 것을 느껴요.
천도교 믿으면서 무당을 찾아가면 안 되는데 처음에 신앙심이 부족해서 한번 씩 물었어요. 내가 옆 사람 말에 솔깃해 하는 편이라 그런 유혹에 쉽게 빠졌어요. 삼척 관광사업할 때 잘 안 되니까, 친구가 유명한 스님한테 가자고 그러는 거예요. 그래서 갔더니 촛불을 켜라고 해요. 사업이 힘들다며 돈도 받치라고 하는데,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게 아니에요. 음사를 믿으면 꼭 차 사고가 크게 났어요. 그래서 내가 느끼는 거예요. 음사를 믿으면 안 돼요.
지금 비록 교인이 적지만 나 혼자라도 열심히 흔들림 없이 하는 거예요. 천도교를 열심히 하니까 내 몸도 건강하고 또 영적으로 알려주시니까 거기에 홀딱 반해서 열심히 해요. 우리 양반도 나를 못하게 말리지 않아요.
지금도 보증서고 한 몇 천만 원을 받지 못하고 있어요. 내가 빚보증을 서주는 바람에 고비를 많이 넘었어요. 재산도 많이 날렸고요.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나자빠졌을 거예요. 하지만 천도교 덕에 잘 버티고 있지요.
우리 아들은 보험회사를 다녔는데, 능력 있게 잘했어요. 꼬박꼬박 집으로 생활비도 부쳐주고 했는데 회사를 다니다 보니 술 때문에 몸에 병이 났어요. 아침마다 기도하고 주문했어요. 하루는 꿈을 꾸는데 하얀 천으로 얼굴을 덮는 꿈을 보여 주셔서 깜짝 놀랐어요. 그러더니 아들 배가 불러 오는 거예요. 때마침 명절이라 병원에 못가고 정말 애가 탔어요. 딸한테 전화했더니 그쪽 병원으로 당장 데리고 오라는 거예요. 사위가 의사이거든요. 그리고 치료를 잘 받아 밥도 잘 먹고 차차 병이 나았어요. 한울님 감응이에요. 나는 ‘고진감래 없을 소냐’라는 말을 참 가슴에 새깁니다. 이 고비 저 고비 한울님 감응으로 잘 넘겼습니다.
삼척에서 관광회사를 할 때는 강릉교구에도 가고 동해교구도 갔어요. 그런데 기도를 하니 한울님께서 ‘너희 집으로 가라’고 해요. 원주로 가라는 거죠. 결국 원주로 다시 왔지요. 남편은 교구장을 10년 넘게 하고 계세요. 우리 집 양반 입교 시킬 때 용담성지에 이소원 원장님하고 갔어요. 김근오 원장님 말씀 듣고 올라와서 입교를 했어요. 나중에 수도원도 몇 번 갔는데 원장님께서 사람 셋을 두고도 강의를 하시더래요. 그래서 우리 남편은 교구에 나 한사람이 있어도 강의를 하셔요. 경주 원장 사모님이 내 이야기를 하면서 칭찬을 하더래요.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라고 하니 깜짝 놀라더래요. 일본 애들이 한국 구경하고 싶다고 해서 용담정을 구경시켜주었어요. 그래서 잘 알아요. 이소원 원장님은 저의 전교인이세요. 그래서 엄마 같고 언니 같고 그래요.
나는 천주교, 불교, 기독교 다 하고 천도교 왔어요. 그래서 종교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을 다 겪었어요. 그 중에 천도교가 제일 좋아요. 신앙을 하면서 인과법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기독교에서 신앙체험도 해봤고, 불교에서도 천수경을 잘했어요. 스님보다도 더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내가 무엇이든지 하면 열심히 해서 기독교 할 땐 새벽 3시면 새벽기도를 하고 방언도 했어요. 그런데도 응답을 못 받았는데, 천도교에 오니 경전 말씀이 쏙쏙 들어와요.
사실 난 남의 꼬임에 잘 빠지는 편이에요. 처음에 입교하고 여성회에 갔는데 나보고 어떤 분이 묻는 거예요. 무슨 사업을 하냐고요. 그래서 관광버스를 한다고 하니까 1백만 원을 성금하래요. 그때가 대신사님 태묘할 때인데요. 박공주 회장 때에요. 내가 통장을 만들어 1백만 원을 넣었어요. 그때 인삼장사가 나를 꼬시는 거예요. 저기 용한 무당이 왔는데 삼척에 사업하러 잘 갔는지 못 갔는지 알아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내가 무당의 꼬임에 빠져 무당에게도 1백만 원을 줬어요. 난 굿이라고는 해 본적이 없는데 성황당에서 굿도 했어요. 그때 꿈을 꾸니까 오익제 전 교령이 도복을 입고 나타나서 왜 성금하지 않느냐고 하더라고요. 그게 마음에 걸려서 내가 뒤에 김경렬 회장 때 조금씩 여러 차례 걸쳐 성금을 했어요. 아마 한울님께서 내가 처음이니까 다 용서해 주신 것 같아요. 그게 할 일이 아니었죠. 그 돈을 굿으로 하다니. 내가 아직 뿌리를 못 내려서 그랬던 거예요.
뿌리 내리기가 그렇게 힘든 거였습니다. 뿌리를 내리려고 하면 자꾸 옆에서 초를 치는 거야. 내가 거기에 홀딱 넘어가는 통에 이 고비 저 고비 넘기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요즈음도 혼자 생각하고 혼자 웃어요. 참 고비 많았지, 싶어서요.
사위는 신경외과 부원장으로 잘 하고 있어요. 내가 잃어버린 돈이 1백억인데 아마도 정성이 지극하면 아이들이 잘 찾을 것 같아요. 우리 아들에게도 내가 힘을 많이 줍니다. 한 번 고비를 넘겨서 이제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해요.
원래 내 목소리가 참 고왔는데 천도교 와서 주문을 많이 해서 이제 걸걸한 소리가 나요.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흘렀네요. 사람들이 안 되는 원인을 알아요. 그것이 바로 인과법에 걸린 거예요. 내가 보증도 많이 서주고 돈도 많이 잃었는데 그 사람들 다 잘 안 됐어요. 내가 교인 만들려고 보증도 많이 서주고 돈을 많이 잃었는데 그게 아닌 것 같아요. 꼭 할 사람만 데리고 와야겠더라고요. 그래도 내가 돈을 많이 잃은 덕에 우리 영감하고 건강하게 잘 산다고 생각해요.
언제나 포덕을 못해서 한이에요. 원주뿐만 아니라 지금 모든 교구가 침체됐나 봐요. 속초에 가니 천덕송 하는 것도 녹음기 틀어 놓고 하고, ‘우리의 길’만 하고 있더군요. 우리가 뭐든지 명백하게 부지런하고, 깨끗하게 해서 맞이하고, 진리 그대로만 행하고, 사람을 반갑게 만나고 하면 교회가 잘 될 거예요.
저도 옛날에는 사람을 반갑게 대하지 못했어요. 지금은 아주 부드럽고 반갑고 친근감 있게 인사를 해요. 우리 천도교인들이 그런 점이 많이 부족해요. 울 양반은 애들이고 어른이고 먼저 인사를 해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언제나 서로 인사를 해요. 우리 천도교도 그런 세상이 되어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물질적인 정성에 약해요. 지금 한달에 성미 5천원을 받는데, 한 시람에 오천 원 받아서는 재정이 안 돼요. 그런 방식은 다시 고쳐야 해요. 우리 딸들 보면 목사님께 십일조를 하더라고요. 우리 집 사위가 우리들에게도 매달 통장으로 생활비를 부쳐요. 얼마나 고마운지요. 사위가 어머니를 병원에서 보니 그렇게 점잖고 좋았다고 말을 하더라고요. 아들 때문에 6, 7개월 함께 있었더니 옆에서 느꼈나 봐요. 우리 경전 말씀이 딱 맞아요. 말을 많이 하면 심술에 해롭다고 했어요. 말을 적게 하니 사위가 좋아하지요. 점잖게 보고요.
천도교에 와서 보니 큰 문제가 있어요. 먼저 위에서 잘 해서 좋은 인상을 줘야 합니다. 그리고 후배양성도 잘하고, 개인 하나하나가 기도 많이 하고 오관실행 하다보면 잘 될 겁니다. 우리 남편은 부부가 서로 상의하고 도와주고 대접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 양반 덕분에 내가 힘이 납니다. 살림도 다림질 하나도 다 해주고 청소도 다 해줘요. 내가 어디 갔다 오면 설거지 다 놓으니 너무 고맙지요. 남자가 그런 일을 해야 된대요. 바라만 보고 먹기만 하면 바보라고 옛날식으로 하다가는 대접 못 받는다고 해요. 남편에게 언제나 감사해요. 내가 여러 종교를 많이 했는데도 언제나 나를 믿어주고 따라 주었어요. 그 밖에 다른 일에서도 나를 원망한 적이 없어요. 항상 나를 고맙게 생각하고요. 내가 지금까지 믿음을 굳건하게 한 것은 남편 덕이지요. 천도교를 한 덕에 우리 가정은 어려움이 닥쳐도 그 고비를 슬기롭게 잘 넘긴답니다.
(구술일: 포덕 149(2008)년 11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