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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한국 대중 음악사를 진정으로 빛낸 뮤지션들은 누구이고, 음반들은 어떤것일까?
우리는 여태까지 'Rolling Stone 선정 100대 명반', 'VOX선정 올해의 음반 100선' 등은 보아왔지만 국내 음악 매체에서 이러한 것을 심도있게 다룬 것을 본 기억은 없다. 국내 대중음악사에서는 명반으로 선정할만한 단 100 장의 음반도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선정 경위에 대한 비난을 감수하면서) 소신있게 음반을 선정할 만한 자신이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러한 관심조차 없다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 연재의 마지막에서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음반들을 살펴보는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다.
여태까지 Sub Special Text에서는 지극히 자의적인 기준의 평가방법으로 70년대 이후 뮤지션들을 정리하였고, 이는 기존에 형성된 뮤지션들에대한 평가도 많이 달랐다. 처음에는 '내가 뽑은 음반 100선' 만을 하고 싶었으나 좀 더 객관적으로 자리매김을하는 방법이 필요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서브 기자들 뿐만아니라 외부 '음악 선정 위원들'로부터 음반 추천을 받는 방식을 택하였다.
그리고 현재 음악 산업계에 관계하는 다양한 직업군에서 어느 정도는 전문성이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이 코너의 '음반 선정 위원'으로 위촉을 하였다. '음반 순위 매김'에 무슨 의미가 있냐고 반문할사람도 있겠지만, 이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음반 선정 방법 >
1. 먼저 선정 위원들에게 100매 이내의 음반 선정을 위촉하였다.
2. 시대/장르는 불문하고, 한 뮤지션에 대해서 복수로 음반 선정을 가능하게 하였다.
3. 반드시 음반 선정시 순위를 매겨달라고 하였다.
< 순위 집계 방법 >
1. 21명에게서 가장 많이 선정된 음반에 먼저 순위를 매겼다.
2. 선정된 음반 횟수가 같으면 개인 순위의 합이 높을수록 상대적으로 높게 순위를 매겼다.
3. 다음 '100대 명반' 순위 옆의 ( )안의 숫자는 선정 위원들에게 지목 받은 횟수를 의미한다.
전체 1위인 들국화 1집의 경우는 선정위원 전부에게서 선정이 되었다.
< 선정 위원(가나다 순임/총 21명 >
고희정(서울스튜디오 마스터링엔지니어), 곽택근(신나라 레코드 영업부대리) ,김기정(펌프), 김민규(서브기자), 김영대(나우누리 뮤즈), 김종휘(팬진공편집인, 인디음반 제작실장), 류상기(다음기획 제작/기획부장), 박민희(한겨레신문 문화부기자), 박상완(기독교방송 PD), 박준흠(서브 편집장), 신승렬(나우누리 뮤즈), 신현준(대중음악평론가), 유현숙(논픽션작가), 이창기(나무를 사랑하는사람들), 조경서(경기방송 PD), 조성희(서브기자), 조원희(카사브랑카,슈거케인), 진용주(우리교육기자), 최순식(하나뮤직 기획/홍보실장), 한유선(자유기고자), 황정(나무를 사랑하는 사람들)
1. 들국화 1집 (1985/서라벌레코드) [전인권(v,g), 최성원(v, g, b, key), 조덕환(g, v), 허성욱(key)]
결코 짧지 않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한 장의 음반만을 고르라는 것은 무리다, 더구나 현실보다 과대포장되어 온 것이 과거이고 보면 그러한 거품을 걷어내고 결과물 자체를 냉정하게 응시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80년대 경제적 여유 속에 도사리고 있던 교묘한 통제에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저항하던 당시의 젊은이들에 대한 회상이 단지 통기타, 청바지 그리고 생맥주로 그쳐진다면, 그리고 80년대라는 시간의 개념을 넘어 의미를 갖는 명제가 한낮 운동권의 회상으로만 그친다면 그 시기 모습을 드러낸 4명의 젊은이들의 이 역사적인 첫 발디딤은 추억으로 남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4가지 독자적인 아이덴디티의 조합으로부터 파생된 들국화라는 록밴드가, 그리고 그들이 내지른 첫 번째 외침이 갖는 의미는 우리에게, 아니 적어도 대중음악에 있어서 적지 않은 것이었다. 호황 뒤로 얼굴을 숨긴 제도권의 입김으로 더 이상의 시도를 포기한 채 안이한 태도로 일관하던 가요계의 자신의 틀에만 안주하고자 하는 록과 모던 포크 등 대학 중심의 음악들이 위와 밑으로 나뉘어 더 이상 공유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할 때, 들국화가 던진 정사각형의 출사표는 긴 동면에 접어든 듯한 대중음악을 깨우게 된다. 들국화의 데뷔 앨범은 각자의 역량이 충분한 4명의 싱어 송 라이터들이 '음악이란 현장에서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 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명제를 이 땅의 음악인들과 청중들의 뇌리 속에 각인시킨 작품이었다.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의 전인권의 절규와 <매일 그대와>에서 보여준 최성원의 감성 어린 목소리, 허성욱의 절제된 건반,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에서 나타난 조덕환의 곡 쓰기 그리고 최구희, 주찬권, 이원재 등 당시 최고의 세션맨 등 이 모든 것들은 얼마나 이 음반이 철저한 싱어 송 라이터의 감각과 역량으로 라이브를 위한 라이브의 감성으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가늠케 해준다. 이로써 한국의 대중음악계는 '밴드'라는 단위의 구성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과 함께 비로서 진정한 의미의 음악인들이 자라날 수 있는 토양을 마련하게 되었다. 그러나 들국화는 1집 이후 실망스러운 후속 작들과 잦은 멤버교체 등으로 호흡을 길게 갖지 못한 채 신화로 남게 되었고 대중음악사에서 이러한 시도들은 답보의 상태를 맞게 된다. 그 이후 철저한 상업논리에 의한 인기곡의 생산과 재생산은 특정 장르에 국한되었고 '노래 만들고 노래 하는' 밴드들은 언더그라운드라는 별칭하에 지하로 가라 앉게 된다. '만일 들국화가 데뷔 앨범과 같은 에너지로 그 생명력을 키웠더라면 대중음악은 다양성과 독자성의 자양분을 충분히 흡수했을 텐데'라는 아쉬움을 갖고 표절과 시스템화되어 버린, 일방적인 한 장르의 득세로 다양성과 함께 그 항체를 잃고 점점 고사해가는 듯한 현 가요계를 바라볼 때 13년 전에 뿌린 이 씨앗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은 더할 뿐이다. 아직 소멸하지 않은 13년 전의 그 씨앗들은 매스미디어와 자본에 지배되는 대중음악계의 변방에 자리하며 마로니에와 신촌, 홍대 근처의 지하에서 다시 제2의 들국화로 피어나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다. 즉, 이들이 바라는 바와 같이 자신의 색깔을 간직한 채 세상에 당당히 평가 받을 수 있는 것이 바로 들국화가 13년 전에 보여주었던, 대중음악사에 있어서 가장 소중했던 가능성이다. (황정)
2. 산울림 1집 (1977/서라벌레코드) [김창완(g, v), 김창훈(b, v), 김창익(d)]
작사, 작곡, 편곡, 연주 등 모든 면에서 진정 '뛰어나다'라는 감정서를 붙여도 손색이 없는 시대의 명작이다. 당시에는 들을수 없었던 최신 조류의 팝/록을 음악 들이 가요에 접목되어 선보여졌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뛰어난 음반이다. 이 앨범이 다른 록 명반들과 그 의미를 달리하는 것은 지극히 '음악적'인 면에서 훌륭했다는 점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사회참여적이지도 않았고, 가사에 과장된 시적 은유를 표현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음악에 과장된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려는 시도는 더더군다나 하지 않았다. 이들 형제들은 솔직하지만 간결하고 아름다운 노래말로 자신들의 순수한 음악적 열정을 가사로 표현하는 동시에 새로운 장르에 대한 탐구와 실험에 입각한 수준 높은 연주력을 한 장의 음반에 담아냈다. 이들에 대한 재평가가 늦어진 것은 그들의 음악에 숨겨진 음악적 역량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단순하고 유치한 듯한 노래말에 숨겨진 독특한 코드 전개와 연주 스타일은 언뜻 지나치기 쉽지만 분명 음악적으로는 높게 평가될 만한 것이었다. 선구자적인 측면으로나 음악적인 천재성으로나, 이를 능가하는 다른 앨범을 찾기 힘든 명반 중의 명반이다. (김영대)
3. 어떤날 1960~1965 (1986/서울음반) [조동익(b, key, pcc, v), 이병우(g, pcc, v)]
어떤날은 한국 대중음악사에서 전대미문의 듀오였다. 소박한 감수성으로 록과 포크 그리고 퓨전 재즈를 지향했던 그들은 번뜩이는 자신들의 천재적 재능을 과시하지 않으면서 조용하게 데뷔 음반을 완성했다. 음악적 출발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조동익의 형이자 70년대 모던 포크의 독자적인 지류였던 조동진과 80년대 전문 세션을 개척한 포크 록 그룹 따로 또 같이의 영향이 느껴지기도 하지만(2집에서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팻 메시니의 영향이 드러난다), 같은 해에 실질적인 데뷔 음반을 발표한 시인과 촌장과 같이 완벽한 자신들의 스타일을 형성한 뮤지션들이다. 데뷔 전해인 1985년에 진정한 의미의 신인발굴 컴필레이션 음반인 <우리노래 전시회1>에 <너무 아쉬워하지 마>를, 들국화 데뷔 음반에 이병우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수록함으로써 대중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린 그들은 8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를 연 일군의 뮤지션들(따로 또 같이, 들국화, 시인과 촌장 등) 중에서 막내격 이었다. 비록 80년대에 노래했던 그들이지만 통시적인 감성으로 어느 시대의 여린 젊은 가슴일지라도 울릴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는 어떤날의 노래들은 부드러우면서도 전율적이다. 그리고 그 노래들은 바로 <하늘>, <그 날> 등이다. (박준흠)
4. 델리 스파이스 Deli Spice (1997/도레미레코드) [김민규(g, v), 윤준호(b, v), 이승기(key), 오인록(d)]
"반항이다! 아니다!"의 '뻣뻣한 록 담론'으로부터 도망하고 싶어하는 모든 모던 로커들의 고민대로 그들은 자신의 음악을 '그냥 팝'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사실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은 어떻게 보면 아직 듣지 못한 이들에게 '선입견'을 만들어주는 위험한 행동이지만, 너무나도 이 앨범과 잘 어울리는 주장이다. 한국 대중음악의 이디엄으로부터 몇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 그들의 음악관은 당연한 것이고, 또한 그러한 주장에 어울리는 트랙들을 선보이고 있는 점이 바로 그 증거물이 된다.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중요한 트랙 중의 하나인 <챠우챠우>만으로도 이 앨범의 가치는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연주력의 과시'도, '상업적인 안배에 의한 곡 구성'도 없는 이러한 앨범이 그렇게도 대중친화적인 용어인 '팝'과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승리'다. '통신상의 공간'으로 부터 출발했다는 꼬리표를 항상 달고 다니는 그들이지만 앨범의 완성도는, 어쩌면 경멸적이거나 핸디캡일지도 모르는 그런 꼬리표를 어느 곳에 달아야 할지 궁금하게 만들어 버린다. (조원희)
5. 시인과 촌장 푸른 돛 (1986/서라벌레코드) [하덕규(v, g, har), 함춘호(g)]
여린 듯하지만 날카로운 비수를 폐부 깊숙이 감춘 시인과 촌장의 목소리는 들국화와는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감성을 표출한 80년대 젊음의 뒤틀린 희망가였다. 시인과 촌장은 조동진을 수장으로 하는 70년대 모던 포크의 맥과 닿아 있지만 하덕규 특유의 동화적 상상력 (손수 그린 파스텔화 앨범 재킷과 <얼음 무지개>같은 곡에서 잘 드러나는)과 세상에 대한 치열한 시각(<매>, <비둘기 안녕>), 그리고 함춘호의 전통적이지 않은 기타 플레이 등으로 일반적인 시각의 포크 듀오의 이미지에서 멀리 벗어나 있던 이들이었다(이 시절 누가 <고양이>와 같은 곡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이미 <푸른 돛> 이전에 <내 고향 동해바다>, <재회> (남궁옥분이 불렀던 그 곡) 등이 실린 앨범을 발표했던 하덕규는 함춘호와 짝을 이룬 이 앨범에서 '아무래도 친구 푸른돛을 올려야 할까봐 (<푸른 돛>)' 라고 나즈막히 얘기하며 '제자리로 돌아오는 풍경(<풍경>)'을 희망했다. 따스한 감성의 <사랑일기>와 <우리노래 전시회 1>에 실렸던 <비둘기에게>가 주로 알려 졌지만 지독한 연가 <진달래>와 자아에 대한 이중적 태도가 담긴 <떠나가지 마 비둘기>, <비둘기 안녕> 등의 여운은 당시의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을 부여했다. (김민규)
6. 어떤날 2집 (1989/서울음반) [조동익(b, key, pcc, v), 이병우(g, key, v)]
들국화 데뷔 앨범의 한 켠을 차지했던 <오후만 있던 일요일>과 우리노래 전시회의 <너무 아쉬워하지 마>는 당시의 상식을 벗어난 구성의 곡이었다. 굳이 클라이막스를 강조하지 않는, 그 흔하던 '뽕' 멜로디를 거세한 어떤날의 곡은 다분히 조동진의 영향력하에 놓인 가사 쓰기(국내에서 리리시즘을 이야기 한다면 이들을 빼놓을 수 없다)와 함께 당시 어느 누구도 실현하지 못했던 새로운 영역의 것이었다. 소박했던 1986년의 데뷔 앨범 이후 3년만에 발표된 이 앨범에는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도입하여 보다 세련된, 그러나 여전히 도심 변두리 골목을 연상시키는 사운드의 곡들이 풍성하다. 조동익의 <초생달>, <하루>, <그런 날에는>과 이병우의 <출발>, <취중독백>, <11월 그 저녁에> 등이 동등하게 실려 있지만 이 둘의 곡은 미묘한 차이를(정서적으로나 곡 구성으로나) 보인다. 이 앨범을 마지막으로 조동익과 이병우는 나름의 길을 걸으며 솔로 뮤지션 세션, 프로듀서 등으로 활약하고 있다. 비슷한 시기에 발표되었던 장필순 4집과 한영애 4집은 조동익과 이병우가 각각 프로듀서한 앨범으로, 이를 통해 이들의 변화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다. (김민규)
7. 유재하 1집 (1987/서울음반)
앨범 발표 직후 사고를 당해 단 한 장의 앨범이자 유고작이 된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는 천재 뮤지션을 잃었다는 깊은 아쉬움을 남긴 앨범이다. 그는 천상에 있지만 그가 남긴 흔적은 지금까지도 후배 뮤지션들에게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이는 유재하 추모앨범에 참여한 명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지금의 '발라드' 진영의 발군의 주자들 모두는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유재하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거친 후 (조용필 7집 당시 조용필과 흡사한 목소리로 백보컬을 넣던 이가 바로 유재하였다) 원 맨 밴드나 다름없는 세션으로 발표한 이 앨범은, 클래시컬한 구성이 제공하는 매력도 무시할 수 없지만 <가리워진 길>,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에서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맑은 정서가 주는 신선한 충격에 비할 바가 못된다. 베이스 라인과 피아노가 묘하게 엇갈리던 <우울한 편지>가 던져준 감동을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이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유재하의 곡으로는 <그대와 영원히>(이문세 3집, 문과철 1집), <비애>(한영애 2집)가 있다. (김민규)
8. 봄 여름 가을 겨울 1집 (1988/서라벌레코드) [김종진(g, v), 전태관(d)]
봄·여름·가을·겨울의 등장은 우리 음악의 범위를 넓힌 쾌거이다. 이들은 연주 음악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고, 기교없이 기본을 지키는 연주가 오히려 더 어렵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진리를 깨우쳐주었으며, 보컬이 반드시 귀에 쏙 들어오는 목소리가 아니라도 좋은 멜로디와 진실한 가사만으로 사람들에게 울림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지금 그들이 처한 음악적 정체의 위기는 초기의 이 소박하고 욕심없는 자세를 유지하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알루미늄 케이스와 동영상 CD로 포장된 6집의 호화 재킷보다 첫 앨범의 소박한 재킷이 더 정감어리고, 이현도나 김세황, 이주노, 김현철, 이소라 등이 참여한 6집보다 오직 이 둘이 만들어낸 1집의 곡들이 더 많이 애창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모든 스타 음악인들 에게는 처음 시작할 때의 기분으로 돌아가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람들은 모두 변하나 봐>라는 노래는 그들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것임을 그들은알까? (신승렬)
9. 이상은 공무도하가 (1995/폴리그램)
이상은은 현재 한국에서 가장 독특한 음악세계를 지닌 여성 아티스트다. 예전의 '가수'였던 그녀의 자격에 현재는 '음악감독'으로서의 자격이 훨씬 더 두드러 진다. 그러한 그녀의 변신은 5집 <언젠가는>에서부터 본격화되었으며, 결국 이 앨범에서 꽃을 피웠다. 한국 대중음악사상 유례없는 실험성을 간직했으며, 토속적인 동시에 유려한 가사들과 이제는 '자신만의 것'이 되어 버린 듯한 독특한 멜로디라인이 매우 훌륭한 앨범이다. 특히 <새>에서의 사운드 응용은 이상은을 '스타일리스트'로 규정할 수 있게 할 뿐 아니라 '대단한 음악감독'으로도 규정할 수 있게 한다. 그래도 누군가 이상은의 '전력'에 대해 물고 늘어진 다면 나는 그들에게 피치카토 파이브의 노미야 마키도 어린 시절 머리에 꽃핀을 꽃고 아무 생각 없는 댄스뮤직을 부르던 TV용 아이돌 스타의 일원이었으며, 여전사 커트니 러브조차 알렉스 콕스 감독의 기억에 따르면 '스타가 되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는 드럭정키'였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 (조원희)
10. 한대수 멀고 먼-길 (1974/신세계레코드)
김민기가 한국 모던 포크의 신화라면 한대수는 개척자였다. 1968년 귀국하여 국내 음악활동을 시작한 이후 6년만에 내놓은 이 음반에는 그의 초기 대표곡들이 실려있다. <물 좀 주소!>에서 "물 좀 주소/물은 사랑이요", <바람과 나>에서 "야! 자유의 바람/저 언덕 위로 물결같이 춤추는 임", <행복의 나라>에서 "창문을 열어라/춤추는 산들바람을 한 번 더 느껴보자"를 외쳤던 그는 자유와 이상을 꿈꾸는 몽상가였다. 미국에서 태어났다면 밥 딜런 정도의 위상을 획득 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땅에서 그는 날개 꺾인 한 마리 날짐승이었다. 무한한 음악적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당시 단연 빛나는 존재였지만 활동의 제한을 받는 뮤지션 이었고, 어처구니없게도 이 데뷔 음반은 금지음반이 되었다. 정성조 쿼텟이 세션으로 참여하여 <바람과 나> 같은 곡에서는 당시 흔히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느낌의 세션을 들려주고 있고, 나중에 해금되어 정식으로 재발매된 음반에는 <하루 아침>의 오리지널 버전이 실려 있다. (박준흠)
11. 작은거인 2집 (1981/오아시스) [김수철(v,g, g, b, key)]
단연 최초의 하드 록 명반이다. 초기 대학가요제 출신의 밴드로서는 활주로, 마그마와 함께 가장 뛰어난 재능을 과시했던 그는 1979년 <일곱색깔 무지개>, <내일>, <세월> 등이 담긴 데뷔 음반을 발표했고, 1집의 밴드 체제에서 원 맨 밴드 형식으로 변화하여 이 역사적인 음반을 녹음했다. 그는 신중현 이후의 기타 히어로였고, 대중앞에서는 엔터네이너를 자처했다. 하지만 당시 대중음악계의 판도와 전체적인 수준으로 볼 때 그는 너무 앞선 뮤지션이었고, 그래서 이 음반은 실험적인 앨범으로까지 비추어졌다. 이는 작은거인 1집 수준의 연주와 녹음이 주류였던 당시 우리 음악계의 역량과 90년대에 내놓았어도 전혀 부끄럽지 않았을 훌륭한 완성도를 가진 이 음반 사이에 존재하는 상당한 간극이 만들어낸 현실이었다. 여기에는 후반부를 블루지한 패턴으로 선회하는 하드 록 <새야>, 진정한 실험지향적 연주곡 <어둠 속에서>, 호쾌한 기타 플레이의 진수를 보여주는 <알면서도>, 1집에 비해 그의 음악적인 역량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단적으로 보여 주는 리메이크곡 <일곱색깔 무지개> 등 빛나는 트랙들이 실렸다. 이후에도 이런 질감으로 연주하는 뮤지션은 이 당시의 김수철 밖에는 없었다. (박준흠)
12. 부활 Rock Will Never Die (1986/서울음반) [김태원(g, v), 이지웅(g), 이승철(v), 김병찬(b), 황태순(d)]
가장 촌스러운 재킷 디자인상 1등으로 뽑힐 만한 이 앨범은 그러나 그 시절, 들국화의 첫 번째 앨범과 함께 록 음악을 80년대 주류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걸작이다. 10년이 넘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부활을 지켜오고 있는 김태원의 출중한 기타와 곡 쓰기는 이승철의 다듬어지지 않아 더욱 매력적인 보컬과 만나 이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어 낸다. 정말로 아쉬운 것은 이 두 사람 모두 10년이 넘게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대중 음악판을 지켜왔지만, 다시는 대중적으로나 실험적으로나 이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는 점이다. 부활과 이승철의 다른 곡들이 모두 잊혀진다 해도, 종소리를 그대로 재현하는 인상적인 기타 인트로로 시작하는 <희야>의 부르짖는 애절한 목소리는 결코 잊혀지지 않을 것이다. 의심할 바 없는 한국 최고의 록 발라드 넘버로서, 이 앨범의 진짜 백미이자 당대 가장 실험적인 음악 이었던 <비와 당신의 이야기>가 또한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는 것은 당대의 대중이 음악을 받아들이는 눈이 지금보다 결코 낮지 않았음을 입증하는 것이 아닐까. (신승렬)
13. 김민기 1집 (1971)
1971년 약관을 갓 넘긴 한 섬세하고 문약해 보이는 청년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에 내뱉은 조용한 목소리는 그 즉시 대중가요의 판도를 뒤흔들었고 곧 제3 공화국 정권에 의해 신화로 사라져갔다. 대중가요사에 있어서 형식적인 면에서의 혁명이 신중현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김민기의 치열한 가사 쓰기는 그것들이 내포하고 있는 비판과 도전의 메시지를 대중가요계에 또 하나의 화두로 던져놓았다. 자의든 타의든 간결한 멜로디에 얹혀진 시들은 시인을 신화적인 사회 운동가로 바꾸어놓고 말았다. 이렇듯 그의 노래들은 미학과 저항성을 따지기 이전에 당시부터 지금까지를 아우르는 저항적 성향의 가요들에 미쳤던 영향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나의 노래가 우리 나라에서 가질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을 <아침 이슬>을 비롯한 그의 노래들이 보여주었고 또한 그 과정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부표처럼 떠도는 어설픈 낭만주의가 만연하던 당시 대학, 즉 지성의 중심에서 뚜렷한 방향을 제시하는 이정표로서 자리매김했던 이 자그마한 노래들에 대한 추모는 바람결을 타고 떠도는 민들레처럼 아직까지도 그 씨앗들을 뿌리고 있다. (황정)
14. 김현식 3집 (1986/서라벌레코드)
죽음 후에 갑작스러운 인기는 그를 꾸준히 보아온 사람들에게 오히려 회의적으로 보였으리라. 비록 가장 인기를 얻은 것은 사후에 나온 6집이지만, 그의 음악적 절정은 이 3집이 아니었을까. 최고의 명곡 중의 하나인 <비처럼 음악처럼>에서의 힘과 애절함을 겸비한 보컬은 그 누구도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참으로 진부 해진 표현이지만) 보컬의 '지존'이 바로 그임을 들려준다. 그러고 보면 80년대에는 정말 노래 잘하는 가수들이 사랑받았었다. 모두 밑바닥에서 시작했고, 라디오를 통해 곡 자체로 평가받었고, 서서히 스타덤에 올랐다. 그건 (또 한번 진부한 표현을 빌리자면) 정말로 진검승부 그 자체였다. 가수보다 팬클럽이 먼저 등장하는 따위의 온갖 암기가 난무하는 90년대의 무림과는 격이 틀렸단 말이다. 그가 이런 혼탁한 무림을 보지 않고 <떠나가 버렸네>를 부르며 사라져간 건 어쩌면 그 자신에겐 다행인지도 모르겠다. (신승렬)
15. 김광석 다시 부르기 2 (1995/킹레코드)
이만큼 명쾌한 한국적 어법의 포크 록 세션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4집 이후 완벽한 아티스트로 성장한 김광석은 자기성찰적인 고감도의 노래들을 4집에서 보여주었고, 여기에 90년대의 독보적인 음악감독인 조동익의 편곡과 그의 밴드가 펼친 소박한 세션이 보태지면서 감동적인 앨범 하나가 탄생되었다. 90년대 모던 포크의 적자로서 '한국 모던 포크 베스트 모음집'을 만들고 싶었던 그는 이 음반으로 완벽한 결실을 보았고, 여기에는 한대수의 <바람과 나>, 이정선의 <그녀가 처음 울던 날>, 양병집의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김의철의 <불행아>, 김창기의 <변해가네>, 유준열의 <새장 속의 친구>, 한동헌의 <나의 노래>, 자신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등이 실렸다. 특히 동물원의 <새장 속의 친구>와 자신의 4집에 수록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은 편곡자의 역량에 따라 얼마나 노래가 다르게 바뀔 수 있는지를 보여준 조동익 편곡의 승리다. 역사상 가장 훌륭한 모던 포크의 진품이며, 두고 두고 들어도 질리지 않을 이 음반은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소장해야 할 가치를 갖고 있다. '명반'은 명예의 전당에 보관된 먼지 쌓은 음반이 아니라 가까이 두고 듣는 음반을 지칭한다. (박준흠)
16. 동물원 1집 (1988/서울음반) [김창기(v), 김광석(g, v), 유준열(g, b, v), 박경찬(v), 박기영(key), 이성우(g)]
일상적인 언어, 따뜻하면서 낙관적인 시각, 아름다운 멜로디로 대표되는 동물원의 데뷔 앨범이다. 앨범 전편에 녹아 있는 평범하지만 시적인 언어로 쓰여진 노래말은 이후 수많은 사랑이야기의 모델이 된다. 보통 사람들이 평소에 표현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담고만 있던, 지나치기 쉬운 일상의 세세한 감정들을 글로 옮겨낸 김창기의 작사실력은 돋보였고, 쉽게 따라 부를 수 있지만 결코 평범하거나 진부하지 않았던 그의 작곡실력 역시 뛰어났다. 또한 비록 한 곡밖에 부르지 않았지만 김광석의 목소리는 눈에 띄는데, <거리에서>에서 그가 부르는 고독과 사랑의 감정들은 작곡가 김창기의 곡의 느낌을 배가시키고 있다. <변해가네>와 <잊혀지는 것>, <그리움>으로 이어지는 삶에 대한 잔잔한 감정들에 대한 표현이 비록 저항적이거나 사회비판적인 당대 운동가요와 언더그라운드 정신과는 대립되는 요소들을 많이 담고 있기는 하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삶에 대한 희망과 긍정이 아름답고 쉬운 멜로디에 담김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었다. 또한 유재하, 이문세와 함께 동물원이 이 앨범을 통해 발라드 음악들의 대부분의 아이템을 제공했다는 사실 또한 주목할 만하다. (김영대)
17. 듀스 Force DEUX (1995/월드뮤직) [이현도(v, all inst, prog), 김성재(v)]
댄스 그룹 듀스가 '뮤지션'으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게 되는 앨범이자 국내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힙합 음악을 제대로 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앨범 에서 비로서 작사가로서의 이현도는 제대로 된 자기 목소리를 내게 되며, 독특한 그만의 리듬편곡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아류라는 편견을 일순간에 지우게 만든다. <굴레를 벗어나>, <이젠 웃으면서 일어나>에서 그들은 이제 그들만의 작곡/편곡 스타일을 확립하면서 비로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된다. 한국어 랩의 창작에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뛰어난 각운은 작사가로서의 이현도의 뛰어난 역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보코더를 비롯한 다양한 악기와 편곡 스타일을 적극 활용한 앨범의 수록곡들은 그의 음악적인 성숙과 자신감을 대변한다. 무엇보다 이 앨범이 중요한 것은 하나의 유행으로만 받아 들여지던 힙합을 음악적이고 문화적인 차원에서 지속적으로 도전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는 점과 그것이 주류의 두 댄스 듀오인 이현도와 김성재의 손으로 만들어짐으로 인해 힙합 문화의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다는 점이다. <굴레를 벗어나>의 그루브와 <사랑하는 이에게>의 서정성을 고루 갖춘 이현도의 음악적 감각은 발군이다. (김영대)
18. 서태지와 아이들 4집 (1995/반도음반) [서태지(v, prog, key, g, b), 이주노(v), 양현석(v)]
서태지의 모든 앨범은 명반으로 불러도 아깝지 않지만 이 4집아야말로 비로소 서태지의 음악적인 모든 재능이 집결된 명반 중의 명반으로 불러 마땅하다. 시대의 반항 정신과 젊음의 감수성을 갖춘 음악 장르로서 당대 팝음악의 최신 조류였던 갱스터랩과 얼터너티브 록을 전면으로 부각시킨 이 앨범에서 서태지는 자신의 창작능력의 극한점을 귀로 확인시켜준다. 3집 이후 이미 그 영향력을 상실한 두 댄서 양현석과 이주노의 정체성 문제는 팀의 해체로 이어지며 서태지와 아이들이라는 팀이 가지는 한계점을 보여주게 되지만, 단지 음악적인 면으로만 평가할 때 이 앨범은 단연 최고 수준이다. 특히 과 <필승> 등에서 나타나는 서태지의 장르에 대한 이해력은 천재적인 감수성의 결과물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이 불가능하다. 서태지는 이미 <교실 이데아>가 담긴 3집을 통해 놀랄 만한 변신을 시도했지만, 개인적으로 3집보다 4집을 높게 평가하는 이유는 이 앨범이 보다 '대중적'이면서 간결하기 때문이다. 큰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서 구석구석 시대에 대한 비판과 냉소가 어려있는 이 앨범 수록곡들의 가사는 매우 독특한 것이다. 특히 방송금지와 판금을 거치면서 연주곡만 수록 되는 해프닝을 낳은 <시대유감>은 가사가 다시 실려 다시 발매된 이후 싱글 앨범보다도 그 저항의 의미가 더욱 남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김영대)
19. 시인과 촌장 숲 (1988/서라벌레코드)
시안과 촌장만큼 아쉬운 그룹이 또 있을까? 실제적으로 혼자 시인과 촌장을 이끌었던 하덕규는 종교에 귀의해 CCM에 전념하는 지금이 더 보람있다고 단언 하지만, 귀를 베일 듯한 <가시나무>, <비둘기 안녕>의 감성이나 <새봄나라에서 살던 시원한 바람>, <사랑일기>의 건강한 노래말과 멜로디를 사랑하던 사람들 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인과 촌장의 두 앨범은 어느 한 곡도 가볍게 넘어가지 않는, 머릿곡만 중요시 여기던 당대의 관행에서는 이례적인 앨범이다. 비록 그에게는 지금 대중음악의 장이 환멸만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로 보일지 모르지만 진정한 '사도'라면 그 속에 뛰어들어 자신의 음악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 올바른 태도가 아닐지. 그가 속한 '하나음악'의 뮤지션들(한동준, 장필순, 조동익 등)이 종교적인 음악활동과 더불어 대중음악에서도 90년대 까지 꾸준하게 수작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은 그 모범적인 예가 될 것이다. (신승렬)
20. 산울림 2집 (1978/서라벌레코드) [김창완(g, v), 김창훈(b, v), 김창익(d)]
산울림 음악의 정점이자 70년대 한국록의 최고작이다. 전해에 <아니 벌써>가 담긴 폭발적인 데뷔 음반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더니 <이 기쁨>, <어느 날 피었네>, <안개 속에 핀 꽃>이라는 최고의 완성도를 보여주는 명곡으로 록 매니아들을 흥분시켰다. 김창완의 퍼지 톤 기타와 그의 사촌동생 김난숙의 고풍 스러운 올겐 사운드로 특징지워지는 산울림 초기(1~3집)는 그 사운드의 독자성으로 먼저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70년대 말 암울한 유신시대(비록 김창완은 아니라고 했지만)에 세속을 벗어난 듯한 천진난만한(?) 노래들이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사실 의아하고, 그 시대를 생각한다면 언밸런스한 면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는 어쩌면 김창완이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국내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인정하는 고유의 사운드 정체성을 갖는 명반이 탄생되었다. 하지만 이 음반의 가치는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인정되었다. 당시 산울림은 아이돌 그룹(?)이었고, 이 음반은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 <노래 불러요>, <나 어떡해>의 엄청난 성공으로 그저 잘 팔리는 음반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한국 록, 특히 록 밴드를 얘기할 때 가장 먼저 거론해야 할 뮤지션은 산울림이고, 그 결과물은 당연히 그들의 본작이다. (박준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