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펀 신작시|박제영
해는 간절곶에서 떠올라 카보 다 호카에서 진다네 외
간절곶에서 애인에게 시를 읊어주었지
“그리하여 여기, 바다가 끝나고 땅이 시작되도다”
애인은 멋진 시라며 모래사장에서 플라멩코를 추기 시작했지
순진한 그녀에게 차마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어
미안해 실은 표절한 거야
춤을 멈춘 애인은 슬픈 표정을 지었지만
그의 고백은 멈추지 않았어
리스본에서 서쪽으로 계속 가다보면
‘카보 다 호카’라는 바다와 맞닿은 땅끝을 만나게 되지
그 곶에 가면 커다란 돌탑에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어
“여기 땅이 끝나고, 바다가 시작되도다”
루이스 카몽이스가 쓴 시의 한 구절이야
실망한 애인은 끝내 그를 버렸지
그땐 몰랐어
애인들은 왜 표절을 용서하지 않는 건지
사랑은 왜 표절해서는 안 되는 건지
그땐 몰랐어
간절곶에서 시작된 사랑은
카보 다 호카에서 몰락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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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믐
쌀을 안치는 저 오래된 애인이
오늘 처음 만난 이국의 여자였으면 좋겠다
아무도 모르는 저 오랑캐 여자와
아무도 모르는 북쪽 오슬로 숲에서
모르는 북쪽 말과 남쪽 말이 서로를 더듬어
낙엽처럼 뒹굴다가 낙엽처럼 붉어져서
벌거벗은 몸 위에 이국의 언어를 필사하다가
통음과 통정으로 마침내 한통속이 되었으면 좋겠다
속으로 하무뭇하니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쌀을 안치는 애인에게 한다는 말이
그런데 애인아, 오랑캐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이상하지 화를 낼 줄 알았던
오래된 애인은 기꺼이 처음 만난 오랑캐가 되었으니
쌀이 밥이 되든 죽이 되든 무에 상관이랴
오늘 밤은 오랑캐의 말을 반드시 배우리라
캄캄한 오슬로 숲이 크엉 크엉
오랑캐의 울음소리로 저물어가다가
달 하나를 낳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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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영 /1992년 《시문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안녕, 오타 벵가』, 『뜻밖에』, 『푸르른 소멸』 외 , 산문집 『사는 게 참 꽃 같아야』 외, 번역서 『어린 왕자』 외 다수가 있다. 현재 달아실출판사 문장수선공으로 일하고 있으며 강원문화예술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