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토함산
곱던 단풍이 잎을 놓아 겨울의 문턱으로 이어지는 이맘 때가 되면 까닭모를 모를 허전함에 옆구리가 시리다. 휑한 바람에 이리저리 낙엽이 뒹구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깊은 사색에 빠져들기도 한다. 나도 가을타는 남자였던가? 멋진 인생을 꿈꾸며 아름답게 늙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돌아보면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다.
바득바득 이기려 하기보다 그러려니~ 하며 이해하고 덮어주는 마음 한 자락을 갖고 싶으나 늘 턱없이 부족하다. 나를 주장하기에 앞서 하찮은 얘기도 재미있게 들어주며 고개를 끄덕여 주는 그런 여유를 가져보고 싶지만 내 마음에는 여백이 없다. 그냥 가만히 두어도 은은한 향내가 나는 모과의 모습을 기대하기에는 아직도 어림없는가보다.
간밤에 몰아친 바람은 앞마당으로 성큼 겨울을 불러다 놓았다. 두툼한 옷을 껴입고 옷깃을 세워도 “으이 추워~”소리가 절로 나오는 매서운 날씨에도 아랑 곳 없이 마지막 늦가을의 정취를 그냥 놓아버릴 수 없어 정민이네랑 길을 나섰다. 계절은 손바닥 만 한 늦가을의 빛깔마저도 이렇게 시샘을 하는가보다. 오늘은 신라 천년의 발자취를 더듬으며 불국사를 품에 안고 있는 토함산을 올랐다가 드라이브를 겸해 포항의 죽도시장에서 회 맛을 곁들이는 산행을 하고 싶었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지고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이런 날에는 나들이 보다 집에서 느긋하게 휴식을 취하며 게으름에 푹 빠져보는 것도 좋으련만 좀이 쑤셔 결국 산을 찾아 나섰다. 산다는 명분으로 잠시 계절을 잊고 일과 학교생활에 매달리는 사이에 화려하고 곱던 산빛은 어느새 아름다운 빛을 다 놓아버렸다. 신라 천년의 미소가 반겨주는 경주는 요즘 인기드라마속의 선덕여왕이 재림해 있었다. 정민이 아빠와 새로 시작한 운동 얘기를 나누며 들머리로 정한 불국사의 주차장에 이르자 화려했던 늦가을의 풍경이 만추의 서정으로 다가섰다. 매서운 바람은 산을 밀어 넘어뜨릴 기세로 세차게 불었다.
단풍나무 터널로 이어지는 등산로 들머리는 미처 떨구지 못한 남은 단풍이 여전히 고운 빛을 보듬고 있었다. 안간힘을 다해 매달려 있던 나뭇잎이 한 줄기 바람에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의 모습이 흡사 나비의 날개짓을 닮았다. 떨어진 낙엽은 이리저리 바람에 쓸려 다니며 자신이 머물러 썩을 곳을 찾고 있었다. 불국사 담장을 따라 이어지는 화려한 단풍의 색은 아직도 그 아름다운 빛을 움켜쥐고 있었다.
성급하게 잎을 놓은 나무들은 알몸으로 춥고 긴 겨울 앞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돌 틈 사이를 뛰어다니는 다람쥐 한 마리가 헉헉대며 옮겨놓는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길거리에 흩뿌려진 낙엽을 밟으며 살아가는 이런 저런 잡다한 생각에 젖어 산을 올랐다.
산길은 산책로처럼 오르기에 쉽고 편했다. 발걸음 앞으로 툭~ 하고 나뭇잎이 떨어진다. 산모롱이 외진 곳에 홀로 서 있기가 따분해서 내가 오기를 오래 전부터 기다렸었나보다. 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올려다보았다. 나무가 나를 보고 멋쩍게 씨익 웃었다. 키 큰놈 치고 싱겁지 않은 녀석이 없다더니 나무 또한 싱거운 놈이었다. 나뭇가지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맑은 하늘이 시리도록 파랗다. 혹독한 산의 추위를 아는지 바람은 낙엽을 쓸어 나무의 발등을 덮어주고 있었다.
산은 중턱을 지나면서부터 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알몸이었다. 춥고 긴 겨울을 보내기 위해 푸르름과 아름다움을 다 놓아버렸다. 벌거벗은 쇼윈도의 마네킹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돌무더기, 나무 등걸이 드러난 산자락은 황량하고 허전하고 서글펐다. 찬바람이 몰아치는 산에는 시린 외로움이 있었다. 첫 추위는 예상보다 매서웠다. 긴 겨울의 시작이었다.
불국사 입구에서 석굴암 주차장까지는 한 시간 남짓 소요되었다. 산등성이로 몰아치는 바람은 장난이 아니었다. 주차장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줄 알고 입장료를 끊어 산모롱이를 돌아 석굴암으로 향했다. 차가운 날씨에도 석굴암을 찾아온 사람들이 제법 많았고 소원을 빌기 위한 긴 줄이 이어졌다. 우린 등산로를 찾으며 경내를 이리저리 기웃거리다가 다시 입구로 나와 매표소 뒷편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찾았다.
작은 산모롱이 하나를 돌아오르자 미끈한 전나무 숲길이 펼쳐지고 다시 졸참나무 우거진 아늑한 길이 이어졌다. 먹이를 쪼는 곤줄박이의 재롱에 걸음을 멈추고 한참이나 지켜보아야 했다. 스스로 먹이를 찾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새들의 생활이 이 겨울에는 우리네들 보다 더 힘겨워 보였다. 산에서는 나도 산의 일부다. 빈 가슴으로 산을 보고 하늘을 보고 바람을 맞는다.
성화 채화대를 지나 완만하게 이어지는 바람 등진 길에는 낙엽이 수북하게 쌓였다. 서릿발이 솟은 정상부는 벌써 겨울이었다. 천년의 미소를 간직하고 있는 토함산의 머리는 빛바랜 역사에 걸맞게 백발이 성성했다. 헬기장 주변으로 하얀 억새밭이 펼쳐지고 쪽빛 하늘이 손에 잡힐듯이 가깝게 있었다. 마침내 토함산의 정상이었다. 먼 산들이 눈앞으로 다가와 앉았다. 남쪽으로 마석산, 단석산, 통일전, 대재지가 내려다보이고, 북으로는 함월산이 그 멀리 하늘과 경계를 이루는 동해바다가 어렴풋이 보일듯하다. 길게 이어지는 산들이 올망졸망한 봉우리를 이루며 골골이 흘러내리는 모습들이 정겹다.
성난 파도 소리를 내며 몰아치는 산바람은 우리를 동해바다까지 단숨에 날려버릴 기세였다. 헬기장에서 바람을 피해 잠시 정상 주 한잔을 나누고 피곤한 다리를 쉬어 일어섰다. 이토록 좋은 산을 가까이에 두고도 여태 찾을 생각을 못한 것이 미안했다.
산을 오르며 산의 우직함을 배운다. 산의 소리를 듣는다. 참고 견디는 인내를 배운다. 산을 내려서면서는 내가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가를 생각한다. 힘든 세상을 살며 나를 이해하고 위해 줄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기쁨이다. 서로를 의지하며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행복이다. 오랜만에 산을 올라서인지 내려서는 길이 지루했고 무릎도 시큰댔다.
무사히 산행을 마쳤다는 안도 후의 운전은 졸음이 쏟아져 무척이나 곤혹스러웠다. 창문을 열고 쥐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졸음을 쫓으려고 무진 애를 써도 착 달라붙은 졸음은 좀처럼 달아나지를 않았다. 경주의 심장부인 보문단지를 지나 포항으로 향하며 졸음을 쫓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을 다 동원해야 했다.
싱싱한 횟감이 즐비한 포항의 죽도시장은 휴일이라 발 디딜 틈이 없도록 붐볐다. 툭 건드리기만 해도 벌떡 일어나 다시 바다로 뛰어들 것 같은 고등어랑, 갈치, 오징어가 발길을 잡았다. 죽도시장에는 벌써 포항의 먹거리인 과메기가 입맛을 유혹했다.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과메기에 파를 얹어 김에 싸서는 초장에 콕 찍어 먹는 맛은 이 지역사람들 만의 특권이었는데 이제는 전국적인 먹거리가 되어버렸다.
단골로 이용하는 1번 숙모를 찾아 회 한 사라를 시켜놓고 산행의 피로를 달랬다. 회를 보고 너무 많이 시킨 것은 아닌가? 했던 우려도 잠깐이었다. 늦은 점심이어서인지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순식간에 비워지고 빈 그릇만 남았다. 회 맛은 시장 끼에 따라 달랐다.
오상고절에 피어난 국화꽃이 시들어가고 있다. 가슴 태우던 긴 기다림도 이제는 기억속 저만치로 멀어지고 있다. 오늘을 살아가며 순수를 순수로,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게 볼 줄 아는 참마음이 진정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떠남의 계절에서 버리고 놓아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의미 있는 산행과 나들이였다. (2009.11.15).
첫댓글 잠시 짬을 내어 뒤늦은 글을 올려봅니다. ^^
타는 단풍 가는 가을이 서글프기도 하지만 나뭇잎은 마지막을 아름답게 피었다가 많은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주고 떠나는데 우리네 인생은 ~~~~~~~ 까비야 좋은 사진 마음에 와 닿는 자네의 내면세계가 그대로 반영된 아기자기한 글 솜씨에 잠시 넋을 놓고 빠져들었다네 ~~~ 까비야 언제 얼굴 보며 선술집에서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않고 밤새워 가며 우리들이 살아온 야그 살아갈 야그를 실타레 풀듯이 풀어 놓을 날이 있을란가? 이봉오가 한번 뭉치자는 구먼 ㅎㅎㅎ 자네가 한번 장소 시간 정해 봐 서울에 규홍이와 봉오 자네 그리고 박정숙 정춘연 김무희 정경순 그렇게 한번 뭉처 봐야지 ^^^
그리하세나~~ 언젠가는 술잔을 기울이며 잡다한 얘기 털어놓고 밤을 샐 그런 날이 오겠지? 그때까지 우짜든가 건강하세나.ㅎㅎ~~
ㅎㅎ 단풍이 예쁘네요 . 그날 엄청 추웠는데......그전날 문경 다녀와서 전북 장안산에 억새보러 갔다가 눈이 하얗게 쌓여 있어 눈산행하고 왔는데.....잘 보고 갑니다 .바쁘게 사는 도까비님 멋진 산행과 맛있는 회로 여유를 가지셨군요 .
정말 그날은 많이 추웠어요.^^ 바람도 세게 불었고........아마 첫 추위여서 더 많이 추위를 느꼈던가봐요. 먼 곳까지 가서 눈 산행을 하고 왔다니 더 멋진 추억을 담고 왔네요. 이 해가 다 가기전에 한 번 볼 수 있으려나?? ㅋㅎ~~
지난 여름우리가 봤던 녹음짙은 그길을 아름답게 도까비가 색칠해왔네,~~
지난 여름 산행에 함께 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이번에 그 길을 다녀왔습니다. 단풍터널 길이 너무 멋져 내년에는 조금 더 일찍 찾아볼 생각이랍니다. 혹시~~ 친구가 그토록 아름답게 채색을 해 놓은 것은 아니었나요?? ^^
언제꺼고?
고향 잘 지키고 있제? 만경산도 잘 지키래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