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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 신년주일.
예배 시편 / 시편 46편 1-5절
찬송 / 아침 해가 돋을 때 · 358장
성서 / 다니엘 5:18-28, 요한일서 4:16-21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느부갓네살의 아드님이신 벨사살 임금님은 이 모든 일을 아시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낮추지 않으시고, 하늘의 임금님이시요 주님이신 분을 거역하시고, 스스로를 높이시며, 하나님의 성전에 있던 그릇들을 가져 오게 하셔서, 임금님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것으로 술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은 보거나 듣거나 알지도 못하는,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하시면서도, 임금님의 호흡과 모든 길을 주장하시는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이 글자를 쓰게 하신 것입니다. (다니엘 5장 22-24절)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과 관련이 있습니다.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사랑을 완성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요한일서 4장 18-19절)
김윤식 목사
Ⅰ
어릴 적 설교 시간에 들었던 이야기 중에 천국과 지옥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지옥 구경을 하러 갔다고 하지요. 지옥은 먹을 것도 마실 물도 전혀 없는 곳인 줄 알았는데 지옥에도 식사시간이 있더랍니다. 우선 밥상을 보았는데 놀랍게도 맛있는 음식이 가득 차려져 있었지요. 그런데 식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모두 눈에는 살기가 가득하고 피골이 상접했습니다. 왜 그런가 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그들의 팔이 문제였습니다. 팔이 곧아서, 굽힐 수 없어서 음식을 집어서 자기의 입에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차라리 음식이 없는 편이 더 나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그다음 하나님 나라에 갔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 나라에 있는 사람들의 팔도 굽혀지지 않았답니다. 그런데 저들은 곱게 살이 찌고 모두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습니다. 어떻게 된 일일까요? 왜 그런가 하고 또 자세히 살펴보니 하나님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집어서 자기 입으로 가져가지 않고 앞에 앉은 사람의 입에 넣어 주더라는 것이지요. 뺏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 먹는 것이 아니라 먹이는 것, 다른 이를 살리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오래전 김구 선생님께서도 우리 삶을 지옥과 천국으로 만드는 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 모든 일이 가까이에서 시작된다.” 그렇습니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것,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을 통해 내가, 우리가 새로워지고, 그 사랑을 전하고 나누는 것입니다.
오늘은 2022년 새해 첫 주일입니다.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과 은총으로 새해를 열어주셨습니다. 새해의 모든 날이 하나님의 은총 가득한 날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새해에 계획하고 기도하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인도해주셔서 잘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새롭게 열린 새해에는 주님께서 우리를 새로운 마음으로, 열린 마음으로, 사랑 가득하고 따듯한 마음으로 이끌어주시기를 기원합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삶을 작은 사랑과 작은 선행과 작은 용서와 작은 감사로 채워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크신 사랑과 은총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우리를 온전하고 새롭게 변화시켜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Ⅱ
오늘 우리는 새해의 첫 구약말씀으로 다니엘서의 말씀을 받아 읽었습니다. 다니엘서는 구약성경에서 유일한 묵시문학 책입니다. 묵시란 감춰진 것을 드러낸다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무엇이 감추어져 있을까요? 바로 희망입니다. 새벽이 가까워 오는 미명일수록 어둡듯이 역사의 가장 어두울 때, 가장 견디기 어려울 때,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기에 감추어진 희망입니다. 묵시란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암흑과 고난의 시기에 그 절망과 고난의 끝을 선언하고 희망의 시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니엘서의 놀라운 점은 어떤 상황에서도 믿음과 소망을 놓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에게 새날이, 그리고 새해가 올 것이라는 희망이 없다면 어떨까요? 극한 상황, 어려운 상황을 견디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새날과 새해에 대한 믿음이고 희망일 것입니다. 막연할지라도 희망이 없다면 그 삶은 죽음과 같을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같이 더 강력해지고, 도무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제국의 지배 아래, 그 절망 속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것보다도 새로운 날, 새로운 해에 대한 희망만큼 간절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다니엘서는 (유대 사람들의 박해가 극에 달했던 안티파스 4세 때 쓰였지만) 남유다가 바벨론의 침공을 받고 성전이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가야 했던 암울한 시대를 담고 있지요. 다니엘도 그 포로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남 유다가 멸망할 때 바벨론의 왕 느부갓세살은 예루살렘의 성전에 있던 기구들과 그릇들과 식기들을 훔쳐 갔습니다.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말씀에 등장하는 왕이 느브갓네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벨사살입니다. 벨사살은 왕궁에서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른바 벨사살의 연회입니다. 이 잔치는 그야말로 성대했습니다. 왕은 귀한 손님 천 명을 불러 모아서 잔치를 베풀고 술을 마셨습니다. 천 명이 음식과 술을 마셔야 했으니 얼마나 성대한 잔치였을까요? 그런데 벨사살은 이 잔치 자리에서 술을 마시다가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온 금그릇과 은그릇을 가져오게 명령했습니다. 왕 자신과 귀한 손님과 왕비들과 후궁들이 그 그릇에 술을 마시게 하려던 셈이었지요(단 5:1-2).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성전에서 사용하던 소중한 그릇들을 바벨론으로 약탈해 간 것도 모자라, 잔치의 술잔으로 사용한 것은 정말로 참을 수 없는 신성모독이었을 겁니다. 그러면서 왕은 술을 마시며 금과 은과 동과 철과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은 찬양했습니다(단 5:4). 일종의 모독과 조롱이요 과시와 우월감의 표시였던 셈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갑자기 사람의 손이 나타나더니, 한쪽 석고벽 위에 글씨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왕은 그저 놀라 보고 있을 뿐이었지요. 왕은 얼굴빛이 창백해지고, 공포에 사로잡혀서 다리의 힘을 잃고 무릎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벌벌 떨었습니다(단 5:5-6). 더 큰 문제는 왕이 그 글자를 읽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왕은 큰소리를 치면서 주술가들과 점성술사들과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불렀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이 글자를 읽고서, 그 뜻을 나에게 알려 주는 사람은 자색 옷을 입히고, 금목걸이를 목에 걸어주며, 이 나라에서 셋째 가는 통치자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단 5:7). 명예와 돈과 권력 모두를 주겠다는 이 파격적인 제안은 거꾸로 그의 공포와 불안이 얼마나 컸는지 우리에게 가늠하도록 하지요. 하지만 명예와 돈과 권력도 그 불안을 잠재울 수는 없었습니다. 왕궁의 지혜자들이 모두 나왔으나 아무도 그 글자를 읽는 사람이 없었고, 뜻을 왕에게 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단 5:8). 왕은 낙심했고, 왕의 얼굴빛이 변해서 손님들도 당황하게 되었습니다(단 5:9). 이제 잔치는 썰렁한 수준이 아니라 싸늘해졌습니다.
왕과 손님들의 고함을 듣고는 왕의 어머니가 연회장으로 들어왔지요. 왕의 어머니는 왕에게 너무 번민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위로하면서, 글자를 읽고 해독할 수 있는 명철과 총명과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다니엘을 추천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부름을 받고 왕 앞에 나왔습니다. 왕은 다니엘에게 글자를 해석하고 어려운 문제를 푼다면 자색 옷과 금목걸이와 셋째 가는 통치 권한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다니엘은 왕의 선물은 사양했지만, 글자를 읽고 풀이해 보겠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글자를 읽고 풀기 전에 왕의 아버지 이야기를 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왕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에게 나라와 큰 권세와 영광과 위엄을 주었는데, 느부갓네살은 마음이 높아지고 생각이 거만해져서, 교만하게 행동을 하다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왕위에서 쫓겨나 들짐승과 같은 생활을 했다는 것이지요(단 4:19-27, 5:19-21). 하나님께서는 열두 달이라는 기간 동안 느부갓네살이 뉘우치기를 기다려 주셨지만, 그는 헛되이 그 시간을 보냈고, 들짐승처럼 지내야하는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이 사람 사는 세상에서 쫓겨나 들에서 생활하며 풀을 먹고, 몸이 이슬에 젖는 생활을 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인간을 다스리신 다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맞는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세우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단 5:21).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아들인 벨사살은 이 모든 일을 알면서도 마음을 겸손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만하여서, 성전에서 사용하던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금과 은과 동과 쇠와 나무와 돌로 만든 신들을 섬겼다고 다니엘은 비판하며 경고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손을 보내셔서 글자를 쓰게 하신 이유라고 다니엘은 설명합니다(단 5:22-23).
“메네 메네 데겔 바르신” 다니엘은 기록된 글자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은 왕에게 글자의 뜻을 하나 하나 풀어 주었습니다. 메네는 ‘세다’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이미 임금의 시대를 다 세셨다는 것이지요. 임금의 때가 끝났다는 뜻입니다. 그다음 ‘데겔’은 무게를 재다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임금을 저울에 달아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임금의 무게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바르신은 ‘나누다’라는 뜻인데 하나님께서 임금의 왕국을 나누어서 메대와 페르시아 사람에게 넘기실 것이라고 풀이해 주었습니다. 그 날 밤을 넘기지 못하고 벨사살 왕은 살해되었고, 그의 왕국은 페르시아 손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번 더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단순하게 메네, 데겔, 바르신은 세 가지 무게를 재는 단위입니다. 메네는 500그람, 데겔은 10그람, 바르신(베레스)은 데겔의 절반인 5그람입니다. 작은 단위이지요. 우리로 치면, 손이 나타나서 벽에다가 한 근, 한 돈, 한 푼이라고 쓴 것이지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 작은 단위들을 읽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왕, 무수한 지도자들과 지혜자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어쩌면, 벨사살의 연회 이야기는 거대한 연회를 열어 부와 명예를 자랑하는 제국이지만, 아주 작은 것 하나 제대로 보지 못하는 제국의 허상과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은 아닐까요? 막강한 권력을 과시하면서도 아주 작은 것 하나 제대로 재지 못하는 허술함을 풍자하는 것은 아닐까요? 왕이 그토록 자랑하는 돈과 명예와 권력이란, 그 거대한 제국이 자랑하던 지식과 지혜는 왕의 불안을 잠재우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주 작은 것조차 세고 재지 못하는 허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과시와 화려한 우상숭배, 탐욕과 교만으로 가득한 잔치의 결말이 하나님의 심판임을 알려줍니다. 참된 믿음이란 작고 적은 것을 세고 잴 줄 아는 것, 소중히 여기는 것은 아닐까요? 참된 소망은 과시와 교만을 위한 거창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고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아닐까요? 과시와 교만으로 가득한 잔치는 당장 끝내고 멈추어야 합니다.
Ⅲ
오늘 우리가 받아 읽은 요한의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에 대해서 말하는 유명한 편지입니다. 오늘 받아 읽은 4장은 ‘영’에 대한 문제로 시작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말하는 영이 많은데 어떤 것이 참이고 거짓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 방법을 알려주지요. 바로 예수께서 육체, 바로 사람이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영은 거짓이라고, 그 신앙은 거짓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거짓은 바로 영지주의를 말하는 것이지요.
영지주의자들은 이 세상을 불완전한 신이 창조했기 때문에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지요. 사람의 육체도 감옥과 같은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구원이란 육체적인 것은 다 버리고, 영혼만이 하늘로 가는 것을 말했지요. 진짜는 여기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영지주의가, 이러한 신앙의 태도가 교회 안에 침입해서 혼란을 일으키고 있었던 것입니다(요일 4:3). 이러한 태도는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하면서도 과거 악행을 반복하고, 죄를 지었습니다(요일 3:7-10). 사랑을 입으로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이에 있는 궁핍한 형제를 외면하고 마음을 닫고 도와주지 않았지요(요일 3:17). 하나님의 사랑에 머물러 있다고,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가까이에 있는 형제를 미워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혼돈한 세상 속에서 세상을 부정하고, 육체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을 부정하는 풍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편지는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 형제자매를 미워하면 거짓말쟁이라고 말합니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고까지 말합니다(요일 4:20). 그렇습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전하는 사랑이란 ‘저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거창하고 특별한 것도 아니지요. 요한이 말하는 사랑이란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바로 내 눈 앞에 보이는 사람에 대한 사랑입니다. 요한은 우리가 이렇게 사랑할 수 있는 까닭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이고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은 이 세상을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기 아들을 보내어주신 것입니다.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이 되도록 하면서까지 사랑하신 것이 그 증거입니다(요일 4:10).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저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의 구주로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요일 4:14).
요한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하게 만들어간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에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일 때,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눌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하여 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이 커질수록 불안과 두려움은 작아지고, 우리는 조금씩 더 순전하고 온전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담대해지는 것, 그리스도께서 사신 대로 우리도 또한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 내 눈앞의 형제와 자매를 사랑함으로 주님과 함께하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계명이자 소명입니다. 성경이 이렇게 강조하는 사랑은 저 세상에 있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작고 소소한 우리의 일상에, 구체적인 우리의 눈앞에, 우리의 소박한 밥상과 우리가 맺어가는 관계 가운데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작고 적은 것으로부터, 소소하고 소중한 일상으로부터 시작해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새해 첫 말씀으로 우리는 벨사살의 연회에 관한 말씀을 들었지요. 잔치에 나타난 손은 돈과 명예와 권력을 마음껏 휘두르는 제국이지만, 작은 것 하나 제대로 세고 재지 못하는 허상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과시와 교만으로 가득한 잔치는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돈과 명예와 권력도 그 왕의 불안과 공포와 두려움을 쫓아내지는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화려하고 성대한 잔치에 빠진 것, 부족한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겸손과 사랑입니다. 작은 것에 감격하고, 감사하고 기뻐하는 마음입니다.
2022년이 열렸는데, 우리는 여전히 불안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려운 때일수록 작은 것을, 작은 일을, 작은 사람을 소홀히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우리들의 사랑과 따듯한 마음을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통해,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을 작은 사랑과 작은 선행과 작은 용서와 작은 감사로 채워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크신 사랑과 은총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담대하게, 불안과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을 완성해가는 새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