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씨는 이메일에서 月刊朝鮮 기사에 대한 심경을 밝히면서 자신의 曾祖父(증조부)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어떤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며 『누가 虐政(학정)을 했느냐 하는 것은 역사의 흐름에서 非본질적인 문제에 속한다』고 주장했다.
趙己淑씨가 趙秉甲에 대해 변호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前略) 그 기사(月刊朝鮮 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미 학계에서는 저희 증조부에 관한 역사적 사실이 오류일 수도 있다는 학자들의 논문이 발표된 바 있습니다. 어떤 역사적 사건은 한 개인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고부군수가 고부에 부임하기 직전 김해부사를 지냈고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마을 주민들이 공덕비를 세웠습니다.(中略)
부사는 군수보다 높은 직위인데 왜 군수로 좌천이 되었는지, 다른 곳에 발령 받은 지 2개월 만에 민란이 있는 전라도에 급파가 되었는지, 어머니 상을 당해 관직을 떠나 있다 3년 후에 돌아오면서 곧 동학군을 만나게 된 군수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울 수 있는지 의문을 제기해야 하는 것이 기자의 자세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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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秉甲의 증손녀인 趙己淑 前 청와대 홍보수석. |
군수는 재판을 받고 귀향(「귀양」의 誤字)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으며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가 군수의 인물됨에 반해 사돈을 맺었습니다. 금시초문인 내용도 많아 그 사실관계를 권위 있는 기관을 통해 검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최소한의 반론권도 보장하지 않은 채 무엇을 노리고 이런 기사를 썼는지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後略)>
趙己淑씨는 이메일에서 자신의 증조부인 趙秉甲에 대해 「다른 곳에 발령 받은 지 2개월 만에 민란이 있는 전라도에 급파되었다」, 「관직을 떠나 있다 3년 후에 돌아오면서 곧 동학군을 만나게 되었다」라고 표현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趙秉甲은 民亂(민란)을 야기시킨 주역이 아니라, 그저 「잘못된 시기」, 「잘못된 장소」에 있다가 亂을 만난 피해자가 된다. 趙씨가 사용한 「급파」라는 용어는 문맥상 「조정이 소요가 있는 지역에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趙秉甲을 급히 파견했다」라는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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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 국가사무를 날짜별로 기록한「승정원일기」. 인사이동 사항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어 趙秉甲의 행적을 추적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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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여러 저술과 논문들. |
정읍에서 만난 崔玄植옹의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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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토사학자 崔玄植옹. |
趙己淑씨의 주장대로 趙秉甲은 모든 죄를 뒤집어 쓴 억울한 역사의 희생양인가? 기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趙秉甲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해 지난 10월21일 동학혁명이 처음 일어난 전북 정읍으로 내려갔다. 동학혁명은 원래 고부군에서 발생했으나, 현재 고부는 정읍시가 관할하고 있다.
정읍에서 평생 동안 동학농민혁명 연구에 몸바쳐 온 崔玄植(최현식·83)옹을 만났다.
崔옹은 1960년대부터 동학농민혁명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해 온 향토사학자이다. 그가 1980년에 펴낸 「갑오동학혁명사」(신아출판)는 동학혁명을 연구하는 데 필수자료로 꼽힐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동학 관련 유적을 모두 답사하고, 관련 증언을 모으고, 史料(사료)를 대조했다고 한다.
崔옹은 지금도 동학과 관련해서 등장하는 사람들의 이름과 해당 연도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崔옹에게 趙己淑씨의 이메일을 읽어 주자 『후손된 입장에서 先代를 옹호할 수는 있지만, 순리적인 이야기가 하나도 없다』고 말했다.
―善政碑(선정비)와 수령의 실제 善政은 어떤 연관성이 있습니까.
『당시 군수를 하면 선정비를 세우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퍼졌는데, 그것과 실제 선정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특히 趙秉甲에 대해서는 학정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왈가왈부하는 것은 변명은 될 수 있겠지만, 事實(사실)은 될 수 없습니다』
동학혁명 유적지 몇 군데를 둘러본 후, 서울로 돌아온 기자는 기록을 중심으로 趙秉甲의 행적을 추적해 나가기 시작했다.
趙己淑씨가 『증조부가 김해에서 선정을 해서 주민들이 선정비(공덕비)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부분부터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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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秉甲 아버지 趙奎淳의 선정비(왼쪽)는 전북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內에, 趙秉甲의 선정비(오른쪽)는 김해시 생림면에 있다. |
趙씨의 이러한 주장은 지난 月刊朝鮮 11월호에 보도한 趙秉甲 관련 기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月刊朝鮮은 경남 김해시 생림면에 趙秉甲의 선정비가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 碑(비)를 처음 발견한 창원전문대 송종복 교수의 의견을 소개했다.
宋교수는 月刊朝鮮과 전화 인터뷰에서 『김해지역에 가뭄이 들어서 세금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부사 趙秉甲이 조정에 減稅(감세)를 건의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져 이를 고마워한 지역민들이 군수의 선정비를 세웠다』고 碑의 유래를 설명했다.
趙己淑씨는 김해에 있는 이 선정비를 근거로 「증조부가 선정을 베풀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 碑가 서게 된 내막을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먼저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趙秉甲의 김해부사 부임 이전의 행적을 살펴보았다.
「조선왕조실록」의 첫 번째 사료가 되는 「승정원일기」에는 수많은 朝鮮朝 관리들의 인사이동 사항이 날짜별로 기록되어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趙秉甲은 21세 때인 1865년 규장각 檢書官(검서관)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검서관은 규장각의 각종 문서를 관리하는 雜職(잡직)이다. 正祖(정조)가 학식 있는 庶子(서자: 趙秉甲은 서자임)들을 등용하기 위해 만든 직책으로, 주로 추천에 의해 임명됐다.
자기 손으로 자신의 선정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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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태인면 태창리 피향정 경내에 있는 선정비들. 농민을 수탈해서 세운 趙秉甲의 아버지 趙奎淳의 선정비도 이곳에 남아 있다. |
오랫동안 중앙의 下品(하품) 관리직에 있던 趙秉甲은 1877년 예산현감을 시작으로 지방수령 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그 후 趙秉甲은 천안군수, 직산현감, 보성군수 등을 거쳐 1886년 4월 풍기군수로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趙秉甲은 「갑자기 신병이 위중해서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하면서 풍기로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날 「함양군수 金載舜(김재순)과 서로 바꾸라」는 명령이 내려와 趙秉甲은 함양군수가 된다.
함양군수로 1년 남짓 근무한 趙秉甲은 1887년 6월 김해부사로 발령받았다. 현재 함양에는 1887년 7월 건립된 趙秉甲의 선정비가 있다. 이 碑는 趙秉甲이 김해부사로 발령받은 지 1개월 뒤에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주민들이 趙秉甲의 선정을 못 잊어 그가 떠난 지 1개월 만에 碑를 세운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지방수령들이 새 임지로 발령을 받으면, 떠나기 앞서 「解由(해유)」라는 업무인계서를 작성해서 후임자에게 넘기고, 이를 戶曹(호조)에 보고해야 했다. 이런 절차를 마치는 데 많은 시일이 소요되었다. 「승정원일기」에는 해유가 작성되지 않아 임무교대가 미루어지고 있다는 기록이 숱하게 등장한다.
또한 「경국대전」의 세부 조례를 규정한 「續大典(속대전)」에는 「지방에 있으면서 관직에 제수된 자는 가까운 道는 30일 안에, 먼 道는 40일 안에 謝恩肅拜(사은숙배: 임금에게 인사함)를 해야 한다」고 규정해 놓았다.
후임자에게 업무를 인수하고, 서울에 와서 임금에게 인사한 후, 새로운 임지에 도착하기까지 30~40일 이상이 소요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함양에 있는 선정비는 趙秉甲이 함양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김해부사가 된 趙秉甲은 부임한 지 1년이 조금 지난 1888년 9월 김해시 생림면에 자신의 선정비를 세웠다.
이 선정비가 바로 月刊朝鮮 11월호에 보도된 碑이다. 趙秉甲은 이번에는 자신의 碑뿐 아니라, 경상도 감사(관찰사) 李鎬俊(이호준)과 영의정 沈舜澤(심순택) 등 3개의 선정비를 함께 세웠다.
「승정원일기」에는 이 선정비가 세워진 연유를 알 수 있는 단서가 있다.
趙秉甲이 김해부사로 오기 2년 전인 1885년 김해를 비롯한 경남 일대는 큰 흉년이 들었다. 그해 12월8일 경상도 감사 南一祐(남일우)는 『올해 농사에 대해 온 道를 통틀어 모두 흉년을 면치 못하였는데, 가장 심한 곳은 김해 등 11개 고을』이라고 보고했다.
南一祐 감사는 『경상도 창고는 텅 비어 백성을 구휼할 물자가 없다』고 보고했고, 조정은 급히 10만 냥을 풀어 배고픈 백성들을 구제했다. 다음해인 1886년에는 경남 일대에 홍수가 크게 났고,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김해의 처참한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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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석보 유지비. 동진강 제방 위에 서 있다. |
李鎬俊이 경상도 감사로 부임한 1886년 6월경 경남 일대는 가뭄과 홍수, 전염병으로 거의 쑥대밭이 되었다. 李鎬俊은 김해지역을 돌아본 후 1887년 12월23일 「이 지역의 租稅(조세)를 미루거나 감면해 달라」는 다급한 狀啓(장계)를 의정부에 올렸다. 趙秉甲이 김해부사로 와 있을 때였다.
李鎬俊은 장계에서 「김해 한 고을은 고을이라고 말할 수 없는 형편이다. 놀랍고 개탄스러워 차라리 아무 말도 하고 싶지가 않다」면서 김해가 처한 절박한 상황을 조정에 알렸다.
李鎬俊의 보고에 따라, 김해는 조세로 바치는 쌀과 콩은 10년을 기한으로 時價(시가)에 따라 돈으로 대납하고, 극심한 가뭄과 홍수로 1885년과 1886년 2년 간 거두지 못한 조세미 6999섬과 콩 382섬을 3년간 돈으로 대납하고, 하천이 터져 유실된 토지의 조세를 면제시키는 등의 조치가 내려졌다.
김해의 조세감면은 趙秉甲이 부사로 있을 때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趙秉甲이 김해부사로 오기 거의 1년 전에도 李鎬俊의 보고에 따라 김해의 조세감면이 이루어졌다.
경상감사 李鎬俊은 1886년 10월18일 『재해가 심각했던 巨濟府(거제부)의 납기를 연기시켜 준 을유년(1885) 조세를 내후년 가을까지로, 金海(김해)·熊川(웅천)의 절반을 연기시켜 준 것과 固城(고성)·泗川(사천)의 4분의 1을 연기시켜 준 것은 내년 가을까지로 다시 더 연기시켜 달라』고 요청했다.
李鎬俊의 보고에서 김해를 비롯, 경남 일대는 극심한 흉작으로 조세를 제대로 거두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趙秉甲의 선정 여부와 상관없이 관찰사 李鎬俊은 가뭄과 흉년이 든 지역에 대해 여러 차례 조세의 감면과 연기를 요청해 왔던 것이다.
조선시대 감사나 지방수령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나라에 바칠 조세나 공물을 제때 거두어 올려 보내는 것이었다. 李鎬俊은 2년간의 경상감사와 그 이전에 4년 동안 전라감사를 하면서 힘든 조세업무를 충실히 수행해 왔다.
조세감면 정책이 김해에 국한되어 일어난 것도 아니었고, 백성의 어려움을 빨리 보고해서 해결하는 것은 목민관의 기본 임무에 속하는 것이었지만, 趙秉甲은 조세감면 혜택이 자기 임기 중에 일어났다는 이유로 재빨리 선정비부터 세운 것이다.
李鎬俊이 「김해는 고을이 고을 같지 않게 된 상황」이라고 그 처참함을 보고할 정도였는데, 趙秉甲은 그 와중에 선정비를 세운 것이다. 동시에 그는 자신의 상관인 경상감사 李鎬俊은 물론, 李鎬俊이 업무상 보고할 수밖에 없었던 의정부 최고 수장인 영의정 沈舜澤의 碑까지 세우는 「정치적 순발력」을 보여 주었다.
지방수령들의 선정비(공덕비) 건립의 폐단은 「조선왕조실록」 곳곳에 기록되어 있다.
숙종 45년(1719) 사헌부는 『수령의 공덕비를 세우는 것을 禁(금)하는 조정의 命(명)이 지극히 엄중한데, 비인 현감 韓五章(한오장)이 碑石(비석)을 세워 行人들에게 誇示(과시)하였으니 파직해야 한다』는 보고를 올렸다.
영조도 선정비의 폐단을 보고받고, 『능관도 자신의 선정비를 세우는데, 군수가 무슨 짓을 못 하겠냐』며 개탄했다. 급기야 1789년 정조는 『세운 지 30년 이내의 비석은 모두 철거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나라에서 선정비에 대해 이같이 민감하게 반응한 것은 선정비 건립이 곧 민폐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왕조실록에 따르면 「각 지방수령들은 상관에게 뇌물을 주고 환심을 산 후, 백성들을 동원해 자신은 물론 상관의 碑까지 같이 세운다」고 그 폐단을 지적했다.
19세기 후반으로 가면서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선정비 건립은 더욱 기승을 부렸다. 현존하는 선정비의 상당수가 조선 역사상 어느 시대보다 농민 항쟁이 많았던 시기인 이때 세워진 것이다.

趙秉甲의 주민 수탈 현황
趙己淑씨의 주장대로 趙秉甲은 김해부사에서 군수로 좌천되어 다른 곳에 발령받은 지 2개월 만에 민란이 있는 전라도에 급파되었고, 어머니 喪을 당해 관직을 떠나 있다 3년 후에 돌아오면서 동학군을 만나게 되어 모든 죄를 뒤집어 쓴 것일까?
계속해서 「승정원일기」와 「고종실록」에 기록된 趙秉甲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김해부사 趙秉甲은 1889년 1월 「영동현감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4월에 가서 『저는 부임하는 길에 신병이 갑자기 중해져서 부임할 가망이 전혀 없습니다』라며 부임을 기피했다. 그러자 당일자로 『고부군수 宋秉斗(송병두)와 서로 바꾸라』는 전교가 내려왔다. 1886년 풍기군수에 발령받았을 때처럼 원하지 않는 임지를 피하기 위해 병을 핑계 대면서 「버티기 전법」을 또다시 쓴 것이다.
趙己淑씨 말과는 달리 趙秉甲은 다른 곳(영동)에 발령받은 지 2개월 만에 민란이 있는 전라도에 급파된 것이 아니라, 고부군수 직을 따낸 것이다. 또한 이때는 전라도에 민란이 있지도 않았다.
고부군수로 발령받은 趙秉甲은 마침 모친 喪을 당하여 부임하지 못했다(후임 군수 宋秉弼이 1889년 8월에 부임했으므로, 이때까지는 趙秉甲이 군수직을 역임했을 가능성이 있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趙秉甲은 그 3년 뒤인 1892년 4월28일 고부군수에 다시 임용되었다.
고부郡(現 정읍市 관할)은 전라도의 곡창지대로, 조선시대에는 인근 郡邑(군읍)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바다와 육지의 풍부한 물산 때문에 수령들의 苛斂誅求(가렴주구)가 전국 어느 곳보다 심한 곳이었다.
趙秉甲은 고부에 부임하자마자 貪虐(탐학)을 시작했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洑(보)를 쌓아 농민들로부터 水稅(수세)를 걷는 일이었다.
고부읍에서 동쪽으로 30리쯤 떨어진 동진강 일대에 「배들평」이라고 불리는 비옥한 논이 펼쳐져 있다. 동진강 지류인 태인천에는 「예동보」라는 洑가 있었는데, 이 洑 때문에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배들평에 물을 대어 풍년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洑를 「만석보」라 불렀다.
지난 10월21일 기자는 정읍 이평면에 있는 만석보 터를 찾았다. 지금은 洑의 흔적은 찾을 수 없고, 동진강 제방 위에 만석보가 있었다는 것을 알리는 비석(만석보유지비)만이 저녁 햇살을 받으며 서 있었다. 1973년 동학혁명기념사업회에서 세운 것이다. 제방 양 옆으로 배들평야가 지평선을 그리며 펼쳐 있다.
만석보는 동학혁명이 일어나던 해 농민들이 일차로 부숴 버렸고, 1898년 고부군수로 온 安吉壽(안길수)가 완전히 철거했다.
1892년 5월경 고부에 부임해 온 趙秉甲은 기존의 만석보 아래 필요하지도 않은 새로운 洑를 쌓고(새로 쌓은 洑도 「만석보」라 함) 가을에 가서 수세를 거두었다. 洑를 쌓는 데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고 임금을 주지 않는 등 가혹한 행정을 펼쳤다.
全琫準이 증언한 趙秉甲의 탐학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全琫準(전봉준)은 후일 체포된 후 자신과 주민들이 몸소 겪은 趙秉甲의 탐학행위를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問: 작년 3월에 고부 등지에서 민중을 모았는데 무슨 사연이 있어서 그러했던가.
答(全琫準): 그 무렵 고부군수(趙秉甲)가 정해진 이외에 가렴한 것이 수만 냥이었으므로 민원이 원한에 맺혀 거병했다.
問: 설령 탐관오리라고 할지라도 명목이 있었을 터인데 자세히 말해 보라.
答: 지금 그 자세한 것은 다 말할 수 없으나, 대략을 말하면
첫째, 민보가 이미 있었는데 그 밑에 다시 보를 쌓고, 권력을 남용하여 민간에게 명령을 내려 좋은 논 한 마지기에는 쌀 두 말을, 나쁜 논 한 마지기에는 쌀 한 말을 거두어 모두 700석을 착복했고,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경작토록 하고 관가로부터 땅 문서를 주어 징세하지 않겠다고 말하고서는 추수기가 되자 강제로 세금을 거두어 들였다.
둘째, 부자들에게 2만 냥을 넘게 수탈한 것이다.
셋째, 그 아버지가 일찍이 태인군수를 지낸 바 있으니 그 아버지의 비각을 세운다 하여 1000여 냥을 수탈한 것이다.
넷째, 백성들로부터 대동미를 징수할 때 정백미 16말을 값대로 징수하고서 정부에 바칠 때는 나쁜 쌀로 바꾸어 냄으로써 이득을 취한 것이다. 이 외의 허다한 조목들은 모두 기록하기가 어렵다.
問: 지금 말한 중에 부자들에게 2만 냥을 수탈했다고 하는데, 그 명목은 무엇이었는가.
答: 부모에게 불효하고, 동기간에 화목치 못하고, 간음하고, 도박한 사실 등을 죄목으로 씌워 수탈했다.
問: 그런 일이 한 곳에서만 있었나, 아니면 여러 곳이었나.
答: 이런 일이 있은 곳은 한 군데가 아니요, 수십 처가 된다.
問: 그런 곳이 수십 처라면 그중 혹 이름을 아는 자가 있느냐
答: 지금은 그 이름을 기억할 수 없다.
問: 이 외에 고부군수가 어떤 일을 했는가.
答: 지금 말한 것이 모두 백성을 수탈한 일이나, 보를 쌓을 때 남의 산에 있는 수백 년 묵은 거목을 베어 썼고, 보를 쌓는 데 동원된 백성들에게 한 푼의 품삯도 주지 않고 강제로 부역을 시켰다.
問: 고부군수의 이름은 무엇인가.
答: 趙秉甲이다〉
(신복룡, 「全琫準 평전」 中)
全琫準은 趙秉甲의 농민수탈 현황을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해서 말하고 있지만, 수탈 정도가 한 곳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광범위하게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훗날 조정에서 파견한 按?使(안핵사: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파견된 관리) 李容泰(이용태)는 조정에 「고부의 잘못된 행정 일곱 가지」를 보고했는데, 이를 보면 고부 농민들이 처한 상황은 훨씬 더 심각했다.
李容泰는 全琫準이 말한 것 외에도 『징수 불가능한 결세를 일가친척에게 대신 거둔 것, 轉運所(전운소: 양곡의 운송을 맡던 지방 관아)에서 총량을 늘려 부족米(미)를 세금으로 거둔 것, 개간하지 않은 전답에서도 세를 거둔 것, 진답(未개간지: 원래 조정에서는 진결을 개간하면 5년간 세금을 면제해 주었다)에 대해서도 도지세를 받은 것, 행방불명된 사람의 미납세를 다른 사람에게 부과한 것 등의 잘못된 행정이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고 보고했다.
李容泰가 보고한 이러한 고부군의 弊政(폐정)은 후일 의금부가 趙秉甲을 공초할 때 심문사항에 추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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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된 全琫準. |
수탈한 돈으로 세운 아버지의 碑閣
趙秉甲의 탐학에 더해 호남 轉運使(전운사)였던 趙弼永(조필영)도 농민수탈에 합세하여, 농민들은 이중삼중의 고통을 당했다.
趙弼永은 전라도의 대동미를 서울로 보내는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이의 부족량이 많다는 이유를 들어 농민들로부터 세미를 더 거두어 그 잉여분을 착복 했다. 趙弼永은 趙秉甲과 친척관계여서 고부 농민들이 군수인 趙秉甲에게 갖는 원망은 상승작용을 일으켰다.
全琫準이 말한 내용 중 특기할 만한 것은 「趙秉甲이 태인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趙奎淳(조규순)의 선정비와 그 비각을 세우기 위해 1000여 냥을 수탈」한 사실이다.
趙秉甲 아버지의 선정비는 지금도 태인면 태창리 「披香亭(피향정)」이라는 정자 경내에 남아 있다.
지난 10월21일, 피향정에 있는 趙秉甲 아버지의 선정비를 찾았다. 피향정 뜰에 들어서자 21개의 선정비가 줄지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趙秉甲 아버지의 碑는 이 중 제일 끝쪽인 담벼락 옆에 있었다.
비각과 덮개석은 없어지고, 碑身(비신)만 남았다. 앞면에는 한자로 「현감 趙奎淳 영세불망비」라고 쓰여 있었고, 뒷면에는 「계사년(1893년) 2월 모일 아들 秉甲이 고부군수로서 비각을 다시 세웁니다」라고 역시 한자로 刻字(각자)되어 있었다. 「秉甲」이란 글자는 누군가 심하게 긁어 놓았다.
趙秉甲이 이 비석과 비각을 세우기 위해 수탈했다는 1000냥은 지금 얼마쯤 되는 금액일까?
李憲昶(이헌창) 고려大 경제학과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19세기 초 쌀 한 섬(석)은 쌀 15말(두) 정도였고, 쌀 한 섬의 가격은 5~6냥, 콩 한 섬은 2.5냥이었다. 1냥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약 4만원이라고 한다. 이를 토대로 趙秉甲이 자기 아버지 비각 건립을 위해 강제로 거둔 돈은 오늘날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4000만원 정도 되는 셈이다.
趙秉甲이 자기 아버지의 碑를 세우기 위해 농민을 수탈한 사실만 보더라도 김해부사 시절 주민들이 돈을 내어 趙秉甲의 선정비를 세워 주었다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다.
오랫동안 동학농민혁명을 연구해 온 崔己性(최기성) 前 전북大 교수는 『가는 곳마다 선정비를 세운 趙秉甲의 행태를 봐서 동학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고부에 자기 碑를 세우고도 남았을 것』이라고 했다. 崔교수의 부연 설명이다.
『지금도 대통령이 수도를 옮기겠다고 하면 말 한마디 할 수 없는데, 사람 목숨을 죽였다 살렸다 하는 군수가 하는 일에 반대할 백성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힘 있을 때 송덕비를 세운 것이죠』
趙秉甲에게 맞아 죽은 全琫準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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全琫準 공초록. |
趙秉甲의 수탈이 도를 지나치자, 농민들은 군수에게 訴狀(소장)을 올려 억울함을 호소하기로 했다.
이때 앞장선 사람이 全琫準의 아버지 全彰赫(전창혁)과 金道三(김도삼), 鄭一西(정일서) 세 사람이었다. 全彰赫이 그중에 장두(우두머리)였다. 全彰赫과 주민들은 고부관아로 가서 만석보의 보세감면 등을 요청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익산접주로 참여했던 吳知泳(오지영)의 「東學史」(동학사, 1936)에는 당시 상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부 백성들은 이런 원통한 사정을 들어 군수 趙秉甲에게 연명 소장을 제출했다. 그러나 군수 趙秉甲은 이것을 난민으로 몰아 대표자 세 명을 때려 가두고 전라감영에 보고를 내어 대표자 세 사람을 감영으로 송치하여 버렸다.
이때, 전라감사 金文鉉(김문현)은 이들 대표자 세 사람이 많은 백성들을 충동시켜 난을 일으킨 것이라 하여 엄형으로 대표자들을 징벌한 후 다시 영을 내려 고부 본옥으로 되돌려 보내 嚴刑納考(엄형납고)하라고 했다. 이로 인해 대표자 세 사람은 다시 고부로 돌아와 중장을 맞고 옥중에 갇히어 있던 바, 총 책임자 全彰赫은 마침내 옥중에서 매 맞아 죽고 말았다〉 (최현식, 「갑오동학농민혁명사」 中)
「全琫準實記」가 전하는 全琫準의 恨
정읍에서 태어나 동학에 참여한 사람들의 체험담을 채집해서 기록한 張奉善(장봉선)의 「全琫準實記」(전봉준실기, 1936년)에는 당시 상황이 조금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全琫準實記」는 「趙秉甲이 자신의 모친상 때 부조금 2000냥 모금 책임을 맡았던 全琫準의 부친 全承?(전승록)이 부의금을 모아 주지 않은 데 대한 분풀이로 全承?을 때려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承?」은 전봉준 아버지의 또 다른 이름이다.
張奉善은 1902년 정읍에서 태어나 교편생활을 했다. 張奉善은 1936년 정읍군지를 편찬 발행할 때, 동학운동 참가자의 체험담과 40년 동안 전해 내려오는 촌로들의 증언을 엮어 「全琫準實記」를 썼다.
<당시 고부군수 趙秉甲은 善治에는 用心치 않고 악행을 일삼으며 백성의 재물을 奪取(탈취)키에 눈이 붉었다. 그러다가 母喪을 당하여 辭職奔喪(사직분상: 喪을 위해 사직함)하였으므로, 追勢(추세)를 좋아하는 窮儒吏屬(궁유이속)들이 부의를 主唱(주창)하고, 金 이천 냥을 분배하여 향교 掌儀(장의) 金成天과 前 掌儀 전승록(봉준의 父)에게 收捧方(수봉방: 돈을 거두는 책임자)을 의뢰하였더니 成天이 차를 欠用(흠용)하고 曰 『秉甲은 본군 재직 중 추호의 善治가 없었으며, 기생의 죽음에 무슨 부의냐』 하는 대언을 토하였다.
秉甲이 母喪으로 인하여 퇴관은 하였으나, 고부는 지역이 광활하고 백성이 富饒(부요)하여 財物搾取(재물착취)에 만족함을 당시 생각던 중 兼(겸)하여 이말을 듣고, 含毒(함독)의 餘에 재임을 운동하여 다시 부임하였다. 그러나 金成天은 旣死(기사)하였으므로, 전승록만 捉來(착래: 잡아옴)하여 곤장을 亂打出送(난타출송)함에 歸來 후 一月 내에 杖毒으로 死하였으니, 琫準의 철천의 한이야 어찌 다 말하랴. 그는 무슨 생각이 있든지 兵書를 보기 시작하였다>
정읍의 동학농민운동 연구가인 崔玄植씨는 『村老들에 의하면 전창혁은 掌儀가 아니라 동회의 일을 보는 사람(지금의 里長과 같음)이었는데, 趙秉甲의 부의금을 거두어 주지 않았다 하여 관가에 끌려가 곤장을 맞았다』고 말했다.
「東學史」와 「全琫準實記」에 나타난 全琫準 아버지의 사망 경위에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동학혁명 당시 생존한 사람들이 증언한 토대로 한 史料 모두 「고부군수 趙秉甲이 자신의 失政과 탐학에 항의하는 全承?을 곤장형에 처해 죽게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두 기록을 합하면 다음과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김해부사 趙秉甲이 1889년 4월 고부군수로 발령 받자마자 어머니 喪을 당했다(후임 군수가 동년 8월에 부임). 趙秉甲의 부의금을 걷을 책임을 맡은 全彰赫과 金成天은 이를 거부했고, 이 이야기는 趙秉甲의 귀에 들어갔다.
趙秉甲은 喪 중이라 어쩔 수 없이 참았지만, 이 두 명에 대해 앙심을 품었다. 喪을 마친 趙秉甲은 1892년 4월 고부군수에 다시 부임해 왔다. 마침 全彰赫이 농민들의 대표로 만석보 조세에 대해 억울함을 호소하러 오자 趙秉甲은 이를 곤장으로 다스렸고, 全彰赫은 그 후유증으로 죽었다>
全琫準은 심문과정에서 아버지가 고부군수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언급할 경우, 자칫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거사를 일으켰다는 오해를 받을까 우려한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全琫準은 심문과정에서 『일신의 피해 때문이 아니라, 백성을 고통에서 구하고,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난을 일으켰다(除暴救民, 輔國安民)』고 일관되게 주장했다.
申福龍(신복룡) 건국大 교수는 『全琫準 아버지가 趙秉甲의 탐학에 항의했고 그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했다.
폭발한 민심
申교수는 그의 저서 「전봉준 평전」(지식산업사)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동학사, 전봉준실기, 천도교 창건사, 주한일본 공사관의 기록, 고부 일대에서 수집한 村老들의 증언, 해월 崔時亨(최시형)이 全琫準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비의 원수를 갚으려면…」 표현 등 여러 자료에서 全琫準의 아버지가 장살되었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동학농민혁명은 1894년 1월10일 고부관아를 습격하면서 시작됐다.
全琫準은 훗날 심문 과정에서 『난을 일으키기 전 고부 관아와 전라감영에 수차례 소장(진정서)을 넣었으나 소용이 없었다』고 말했다. 주민들은 40~60명씩 연명을 해서 訴(소)를 제기했으나, 번번이 監營(감영)에 갇히거나 쫓겨났다.
全琫準은 탐관오리를 제거하려면 물리적인 행동에 들어가야 함을 깨달았다. 이에 全琫準은 동지를 모아 1893년 11월, 거사를 알리는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다. 총 20명이 서명을 한 이 사발통문 결의문의 첫째 항이 바로 「고부성을 격파하고 군수 趙秉甲을 효수한다」였다.
한참 거사가 준비 중이던 1893년 11월30일, 趙秉甲이 갑자기 익산군수로 발령받았다. 全琫準은 거사 일자를 확정하지 못하고 사태를 지켜보고 있었다. 한 달 뒤, 익산군수로 갈 줄 알았던 趙秉甲은 무슨 일인지 다시 고부군수로 再발령을 받았고, 드디어 분노한 민심이 폭발했다.
全琫準은 공초에서 『趙秉甲은 오자마자 학정을 했으며, 인민들이 1년간 참고 또 참고 견뎠지만, 더는 못 참아 부득이 난을 일으켰다』고 말했다.
趙秉甲의 든든한 배경
趙秉甲은 어떻게 익산군수로 가지 않고, 다시 고부군수로 再발령을 받았을까? 趙秉甲의 든든한 배경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당시 趙秉甲은 인사권을 쥐고 있던 오늘날의 내무부 장관 격인 이조판서 沈相薰(심상훈)과는 사돈지간이었고, 영의정을 지낸 趙斗淳(조두순)의 조카(庶姪)였으며, 좌의정 趙秉世(조병세: 을사조약 후 음독자결), 前 충청관찰사 趙秉式(조병식: 1889년 함경도 관찰사 재직時 對日防穀令 선포), 충청·전라관찰사 趙秉鎬(조병호)와는 같은 항렬이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한 배경을 가졌던 것이다. 趙秉甲은 이런 배경을 이용해 전라감사 金文鉉에게 고부군수 자리보전을 위한 로비에 들어갔다.
「승정원일기」에 따르면 趙秉甲이 익산군수로 발령받자, 이조에서는 『군수 趙秉甲이 본조의 판서 沈相薰과 親사돈 간으로 서로 피해야 할 혐의가 있는데, 멍청하게 후보자 추천을 해서 낙점까지 받았으니 이를 시행하지 않는 것이 어떻겠냐』고 임금에게 건의를 했다.
전라감사 金文鉉은 1월9일 장계를 올려 「前 고부군수 趙秉甲이 오랫동안 逋欠(포흠: 밀린 세금)한 많은 수를 차례로 메워 장부를 정리해야 하는데, 조세를 받는 일이 한창 벌어지고 있어서 아직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고 있습니다」하면서 趙秉甲을 유임시킬 것을 건의했다.
趙秉甲이 조세 장부를 정리한다면서 아직 고부에 머물고 있을 때, 한 달 동안 무려 6명의 군수가 발령받았으나 이들은 전라감사 金文鉉과 趙秉甲의 배후인물들의 압력에 막혀 한 명도 고부 땅을 밟지 못했다.
趙秉甲 후임으로 처음 발령을 받은 李垠容(이은용)은 안악군수로 再발령을 받았고, 李垠容 후임으로 申在墨(신재묵)·李奎白(이규백)·河肯一(하긍일)·朴喜聖(박희성)·康寅喆(강인철)이 연달아 임명되었으나 모두 신병을 이유로 군수직을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을 볼 때 趙秉甲이 일전에 풍기군수와 영동현감에 제수받았을 때 신병을 이유로 부임을 거부하여 다른 곳에 발령받은 것과, 모친 喪을 당해 쉬었다가 다시 고부군수로 온 것도 그의 든든한 배경과 연관이 있다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한 달 만에 다시 趙秉甲은 고부군수로 유임이 됐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마자 全琫準은 곧바로 행동에 들어가 고부관아를 습격했다(1차 고부민란).
16세에 고부민란을 목격한 박문규는 회고록에서 「말목장날 통문이 왔다. 저녁 후 여러 동네에 징소리며 나팔소리, 고함소리가 천지를 뒤끓더니 수천 명 군중들이 내 동네 앞으로 몰려오며 고부군수 탐관오리 趙秉甲을 죽인다고 민요가 났다」고 당시 상황을 기록해 놓았다.
趙秉甲은 난민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순창을 거쳐 전주로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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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우의정·좌의정·영의정을 지낸 趙斗淳이 趙秉甲의 큰아버지다. |
『趙秉甲은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오라』
1894년 2월15일 趙秉甲의 후임 군수로 발령받은 朴源明(박원명)은 全琫準에게 간곡히 타이르며 「지금까지의 잘못된 것을 모두 시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말을 들은 全琫準은 그해 3월13일 난민들을 해산시켰다(1차 고부민란 종식).
조정은 군수를 교체하고, 동시에 민란의 원인을 조사하고, 난민을 진정시키기 위해 안핵사 李容泰를 고부 현지로 파견했다. 그런데 이 李容泰가 뒤늦게 나타나 말썽을 일으켰다.
그는 민란을 일으킨 동학교도를 찾는다며 군사를 풀어 가옥을 불사르고, 살인과 강간, 약탈을 저지르는 등 고부를 공포 분위기로 만들었다. 李容泰의 행위에 격분한 全琫準은 3월21일 고부 백산에서 또다시 봉기를 하였다(2차 고부민란). 이후 동학농민혁명은 전국으로 번져 1년간 온 나라를 뒤흔들었고, 결국 조선왕조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당시 조정에서 파악한 동학농민혁명의 1차 원인은 수령의 탐학이었다.
「승정원일기」와 함께 국가 공식기록인 「日省綠(일성록)」 1884년 2월30일자 기사에서 고종은 『진실로 탐묵이 없었다면 어찌 민란이 일어났겠는가, 백성들로 하여금 剝割(박할: 탐관오리가 백성의 재물을 강제로 빼앗음)을 견딜 수 없어 오늘날의 모양에 이르도록 한 것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더욱 원통하고 한탄스럽다. 탐묵은 엄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탄을 했다.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 1894년 4월18일자에는 고종의 다음과 같은 전교가 실려 있다.
<근래에 백성들이 소란스럽게 떠들고 정착하지 못하는 것은 백성을 향하는 나의 지극한 마음을 체득하지 못한 수령들의 잔인하고 가혹하기 그지없는 정사로 인해 백성들이 살아갈 수 없게 된 데서 빚어진 것이다. 이 때문에 소란을 일으키는 폐단이 생기고 분수를 어기고 규율을 위반하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이다. 그 행동을 보면 매우 놀랍지만 그 정상에 대해서는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이에 법과 기강을 보임으로써 폐단을 바로잡아 탐오한 관리들을 내쫓고 감독하는 조정의 조치가 있을 것이다>
고종은 이같은 전교를 내림과 동시에 『趙秉甲은 수갑과 차꼬를 채우고 칼을 씌워 잡아 오라』고 특명을 내렸다.
죄를 뉘우치지 않은 趙秉甲
4월20일 趙秉甲은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1월에 민란이 났는데, 趙秉甲이 4월이 되어서야 잡혀 온 것은 전라감사 金文鉉과 이후 파견된 안핵사 李容泰가 제대로 보고를 하지 않거나, 일처리를 못 했기 때문이다.
金文鉉은 趙秉甲을 감싸다 일을 키웠기 때문에 초반에 자기 손으로 고부민란을 어떻게든 진압해 보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그는 2월15일이 되어서야 趙秉甲을 파직시켜야 한다고 장계를 올렸다.
그러자 의정부는 『이번 소요는 실로 원망이 쌓여 조화를 해치게 하는 정사에 기인한 것이니 필시 그 원인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닐 것입니다. 해당 수령(趙秉甲)이 직무를 방치하여 일을 그르쳤음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감사가 처음에는 그를 표창하고 유임시킬 것을 청하다가, 이제 와서 파직하기를 청하니 어찌 이리도 앞뒤가 상반된단 말입니까』라며 임금에게 金文鉉을 처벌하라고 주청했다.
이후 파견된 안핵사 李容泰는 4월이 넘도록 민란 조사 보고서는 올리지 않고, 도리어 고부 군민을 잡아 죽이면서 일을 키우고 있었다. 조정은 『무력을 사용하더라도 과한 형벌을 가해서 안 될 것이니 조정의 이 뜻을 전라감사나 안핵사에게 알려 시행하라』고 했으나, 李容泰는 정반대로 일처리를 한 것이다.
잡혀 온 趙秉甲은 변명하면서 죄를 피하기에 급급했다.
의금부는 1894년 4월23일 「趙秉甲이 입을 제대로 열지 않는다」고 보고했다.
<趙秉甲이 처음 소란은 세금 거두는 문제 때문에 일어났고, 두 번째 난은 자기가 물러난 뒤의 일이라 모르는 일이라 말합니다. 모호하게 공초하고 끝내 사실대로 진술하지 않으니 그 정상을 따져 보건대 지극히 놀랍습니다. 보통 심문으로 자백받을 수 없으니 刑推(형추: 형틀 등을 사용한 좀더 가혹한 심문)하여 실정을 캐내야 합니다>
5월4일에 가서도 趙秉甲이 진상을 제대로 불지 않자, 의금부는 『한결같이 말을 꾸며 대면서 끝내 사실대로 바르게 말하지 않고, 불분명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니 너무도 놀랍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고종은 『이 죄수는 비단 贓罪(장죄: 뇌물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학대한 일도 많아서 남도의 소란이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심상하게 처벌해서는 안 될 것이다. 다시 한 차례 엄히 형신한 뒤에 원악도에 안치하는 형전을 속히 시행하여 당일로 압송하라』고 지시하였다.
고금도로 유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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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주 최시형 |
이리하여 趙秉甲은 전라도 강진군 고금도로 유배됐다.
의금부에서 밝혀 낸 趙秉甲의 부정축재는 쌀 659석 10두 7승 2홉 6작이었다. 의금부는 『趙秉甲이 고부에서 바친 세수 1000석을 관리들 녹봉이란 명목으로 전운소에서 빼내 가져갔는데, 여기서 녹봉을 빼고 남는 세미 660석은 부정축재한 것이니, 지금 趙秉甲이 귀양 가 있더라도 충청도 趙秉甲 집에 사람을 보내 이를 즉시 받아내야 한다』고 보고했다.
趙己淑씨의 『군수는 재판을 받고 귀양을 간 것이 아니라, 무죄선고를 받았다』는 주장은 순전히 거짓말로 드러난 것이다. 趙己淑씨는 또 『재판을 담당했던 판사가 군수의 인물됨에 반해 사돈을 맺었다』고 했는데, 趙秉甲은 판사제도가 생기기 전에 의금부에서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았다.
1894년 말에 全琫準을 비롯한 동학농민혁명 지도자들이 줄줄이 잡혔다. 이들은 이듬해인 1895년 4월경 대부분 처형되었다.
1895년 3월12일 총리대신(김홍집)과 법무대신(서광범)은 「趙秉甲에 대한 처벌이 너무 가벼워 다시 한 번 조사를 해서 처벌할 필요가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때 이들이 고종에게 보고하여 재가를 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작년 호남 지방에서 발생한 비적의 소요는 고부에서 처음 발생했는데, 실로 당시 군수 趙秉甲의 탐학과 불법 때문이었습니다. 현재 비적의 수괴가 차례로 잡혀 한창 조사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고금도에 안치된 죄인 趙秉甲을 관원을 보내 押上(압상: 압송하여 끌고 옴)하도록 하여 査?(사핵: 조사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趙秉甲은 이 보고가 올라온 지 약 4개월 만인 1895년 7월3일 석방된다. 趙秉甲과 함께 석방된 인사들은 전라도 지역에서 탐학을 저질러 민심을 악화시킨 안핵사 李容泰, 전라감사 金文鉉, 전운사 趙弼永을 포함, 다른 지방의 탐관오리, 부정부패에 연루된 민비(명성황후) 일족 등 모두 260명이나 되었다.
趙秉甲의 석방과 부활
趙秉甲이 이렇게 갑자기 석방된 것은 그 사이 국내 정치환경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1895년 10월 을미사변으로 불안을 느낀 고종 황제가 1896년 2월 돌연히 러시아공사관으로 몸을 피하자(아관파천), 김홍집의 親日 내각은 졸지에 역적으로 몰려 붕괴되었다. 이후 이범진(법부대신), 이완용(외부대신) 친러·친미 정권이 들어서면서 과거 부정부패에 연관된 탐관오리들을 모두 석방해 버린 것이다. 비리인사에 대한 일종의 정치적 사면이었다.
1897년 12월10일 趙秉甲은 법부 민사국장 임용 후 고등재판소 판사로 재직했다. 이때 그의 사돈인 沈相薰은 여전히 탁지부대신(現 재무부 장관)·의정부 贊政(찬정) 등으로 건재했고, 같은 楊洲 趙氏인 趙秉式은 법부대신서리로 있었다. 趙秉甲이 어떻게 관직에 再임용됐는지를 밝혀 주는 기록은 찾지 못했으나 그의 이같은 막강한 「배경」이 작용했을 것임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대한제국의 판사로 부활한 趙秉甲은 1898년 7월 동학교주인 崔時亨(최시형)에게 사형 판결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