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멘솔
유달리 비가 많이 내렸다. 그것을 동반한 바람은 창문을 깨부술 듯이 흔들어댔다. 바람은 조금이라도 틈새가 있으면 놓치지 않고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와서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곤 했다. 이따금 내리치는 번개에 텔레비전은 검은 낯만을 내비치고 있었다. 몇 번이고 전원을 눌러보기도 하고 심지어는 두들겨보기도 했지만 노이즈만 잠깐 내비칠 뿐, 곧 꺼진 뒤로는 반응이 없었다. 리모컨을 내던지고, 벽에 기댄 채 담배를 꺼내들었다. 멘솔의 민트향이 입안을 가득 메우고, 폐를 간지럽게 했다. 얼마나 깊게 들이마셨던 것인지 담배는 벌써 센티 단위에 가깝게 타있었다.
“안테나 좀 고쳐줄 수 있어?”
방에서는 어떤 대답도 들리지 않았다. 바깥에서는 폭풍우로 난리였고 거실은 바람소리로 시끄러웠지만, 방문 주위만큼은 조용했다. 가까이 가기도 힘들고, 가서도 안 되고, 만약 갔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이, 불안감마저 조성시키는 적막감이 방문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담배를 깊게 빨아들였다. 결국 텔레비전을 포기하고 필터까지 타버린 담배를 끈 채 바닥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래도 만족치 않아, 또 다시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였다. 뭉게구름마냥 짙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렇게 담배 한 개비가 더 타갈 때였다. 정적만 흐르던 방 쪽에서, 비바람이 내뱉는 소리와 비슷한, 그러나 그보다 작은 비명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역시나 문이 조금 열려있었다. 문틈은 새까만 어둠만이 있었지만, 그 틈은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며, 최대한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과 어투를 골라 입을 열었다.
“이제 일어난 거야?”
그의 머리는 지저분했다. 여기저기 눌리고, 붕 뜨고, 기름기까지 맴도는 머리는 보는 것만으로도 구역질이 느껴졌다. 그런 머리가 아래로 단 한 번 내려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는 내 뒤를 지나가, 화장실 쪽으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무언가가 썩는 것 같은 불쾌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애써 코를 막지 않은 채로 냄새를 맡지 않으려고 숨을 참았다.
그가 밖으로 나온 것은 얼마나 오랜만일까. 그가 우리 집에 얹혀살게 된 지 꽤 됐지만, 오늘 본 것까지 합하면 기껏해야 아홉 번 정도로 그는 쉬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언제나 저 방, 본래 내가 잠을 자고 생활해왔던 방에서 틀어박힌 채 있었다. 무엇을 하는 지 알 수도 없었다. 이따금씩 무언가를 중얼거리는 소리도 들렸지만, 귀를 기울여도 말 한마디 하나 제대로 들을 수가 없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세수를 했는지, 콧등까지 내려온 앞머리가 흠뻑 젖어있었다. 다닥다닥 붙은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반가운 얼굴이 형광등 아래에 내비쳤다. 그러나 거기에도 본래의 그는 없었다. 볼까지 볼썽사납게 자라난 수염이 기름진 머리보다도 지저분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나는 애써 웃어보였다. 오로지 그를 달래고, 위로해준다는 생각만을 하며 입을 열었다.
“배고파? 밥 줄까?”
다시 방으로 느릿하게 걸어가던 그는 우뚝 멈춰 서서 나와 눈을 마주했다. 죽은 동태처럼 희뿌옇기만 한 그의 눈동자에서는 그 어떠한 생기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답답할 정도로 느리게 고개를 가로 젓고, 다시 방으로 향했다. 벌어진 어둠의 틈으로 들어간 그는 문을 닫았고, 다시 방문 주위에는 정적이 맴돌았다. 한동안 그 문을 바라보았다.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를 다시 부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왠지 모를 답답함을 한숨에 섞어 내뱉은 뒤, 꺼져버린 텔레비전을 다시 보았다. 그가 들어간 방처럼 어둠만을 내비추고 있는 텔레비전을, 오래오래 지켜보았다.
“바보.”
그가 이 집에 온 것은 삼 주 정도 전의 일이었다. 지금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는 매우 힘들고 지쳐 보이는 몰골로 찾아왔다. 마침 그 날도 오늘처럼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었기 때문에, 그는 온 몸이 젖어있었다. 그리고 그는 결코 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꽉 메인 목소리로, 단 한 마디만을 내뱉었다.
“당분간 지내게 해줘.”
나는 바보처럼 멍하니, 젖어버린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처음 초인종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을 때의 두근거림이 좀처럼 사라지지가 않았다. 그에게 왜 그러는 지,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런 간단한 것도 물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비에 젖은 그가 멋있다는 생각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주었다. 정리정돈을 안 해서 너저분하게 보일 거라는 걱정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정리하는 동안, 그가 떠나버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도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그를 들어오게 하고 싶었다. 그가 젖은 신발을 벗고, 젖은 발로, 젖은 몸으로 안에 들어와, 현관을 빗물로 흥건히 적시는 순간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가슴의 두근거림이 멎질 않았다. 더욱 빨라지기만 했다. 그가 떨어트리는 물방울이 가속도를 붙이며 떨어지듯.
그가 처음 내 방에 들어와서 한 것은 씻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아니었다. 그는 거실 바닥에 내동댕이치듯 주저앉아서 고개를 푹 수그리고 물을 떨어트리고 있었다. 마치 짐승처럼,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이.
나는 무슨 말부터 꺼내야 좋을지 잠시 생각했다. 그러고 있으면 감기에 걸린다고 해줘야하는 걸까? 아니. 내가 얕보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다. 조금 부드럽게, 물기라도 좀 닦으라고 말할까? 아니, 아니. 오히려 이쪽이 더 건방진 말투이다. 어떤 말을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 중에서 무엇을 먼저 입에 담아야 좋을 지 도무지 선택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고민하는 도중에, 짤막한 기억 하나가 스치듯 지나갔다. 그것은 처음 문을 열어줬을 때 비쩍 말라있던 그의 얼굴이었다. 밥을 못 먹은 것 같다. 피곤해 보인다. 나는 그런 이미지를 가진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가장 무난한 주제를 꺼냈다.
“밥은 먹었어?”
동면기의 곰처럼 웅크린 그는 대답이 없었다.
“라면이라도 끓여줄까?”
그래도 그는 조용했다. 마치 그의 눈에 내가 비춰진 것은 처음 문을 열어줬을 때, 그 때 빼고는 없었다는 것 같은 기분이 조금씩 가슴을 갉아먹었다. 아랫입술이 아팠다. 옅은 피의 맛과 냄새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무슨 일 있었어?”
그제야 그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겹쳐 울리며, 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너무 직접적으로 물은 걸까, 그런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라도 내 말에 반응을 보였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나는 그의 곁에 다가갔다. 그의 등이 아니라 얼굴을 보며 얘기하고 싶었다.
“무슨 일이야. 말 해봐. 무슨 일인데 그래?”
입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고개를 숙인 채 흠뻑 젖은 그의 얼굴은 처음 문을 열고 봤을 때보다 더욱 안 좋아보였다. 시선은 바닥을 향해 있었지만, 그 눈에 비춰지는 것까지 바닥일 거라고는 장담할 수가 없었다.
“말하기 힘든 거야?”
“……끝났어.”
겨우 열린 그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자신이 두르고 있는 물기만큼이나 젖어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데. 해달라는 거 다 해줬는데…….”
울음과 함께 나온 목소리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 채, 점점 잠겨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빗방울과는 다른 것을 흘리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을 적시고 바닥에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과연 비인지, 눈물인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그에게 있어서 친구에 지나지 않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직 하나. 그가 토해내는 서러운 울음소리만을 받아들이며, 어깨를 두드려주는 것뿐이었다.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고, 그는 지쳤는지 벽에 기댄 채 그대로 잠에 들었다. 많이 피곤했는지 외투를 벗겨주는 동안에도 숨소리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았다. 마른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주고, 입구서부터 그가 남기고 간 물길을 하나하나 깨끗하게 지웠다. 마지막으로 보일러를 틀고, 그리고 담요를 하나 가져와 젖은 그의 몸 위에 걸쳐주었다. 그의 잠자리를 모두 마련한 뒤, 맞은편 벽에 앉아 잠든 그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전히 피곤함이 묻어있었지만, 그래도 아까보다는 한층 더 나아보이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표정에서 내가 얻는 것은 지독하기만 했다.
그에겐 애인이 있었다. 사귄 지 1년이 좀 넘어간다고 했던가. 그 애인이라는 사람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와 만날 때마다 애인 자랑을 하는 것을 들어보면 그가 그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정도는 알 수가 있었다. 그냥 먹는 밥도 그 사람과 먹으면 또 다른 맛이 느껴진다고도 했고, 언제나처럼 손을 잡더라도 더운 날에는 시원해지고, 추운 날에는 따뜻해진다고도 했다. 정말로 당연하고 사소하다고 생각될 정도로 평범한 일들인데도, 그는 모든 일을 새롭게 얘기했다.
내가 파고들 틈은 전혀 없었다. 애당초 나는 그에게 어떠한 말도 전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내가 친구 이상의 관계를 원한다고 입을 여는 순간, 그가 나를 경멸하고, 벌레 보듯 바라볼 것이 불 보듯 뻔했다. 때문에 나는 언제나 그의 친구일 뿐이었다. 항상 친구로 만족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비록 그가 나를 애정의 대상으로 봐주지 않아도, 그와 문자를 하고, 그와 전화를 하고, 그가 가끔 우리 집에 놀러왔을 때 두근거림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가 애인과 헤어졌다고 말했다. 집이 아닌 이곳에 온 이유는, 집에는 그녀와의 추억이 너무 많이 남겨져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슬픔. 안타까움. 동정심. 그런 감정들이 섞은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복잡한 시선의 끝에, 단 한 가지, 확실한 감정이 있었다. 그것은 ‘기쁨’이었다. 스타트라인조차도 가질 수 없었던 나에게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여느 만화, 소설, 드라마에서 나오듯이, 지치고 힘들고 상처받은 그를 내가 다독여주면,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 이전 일은 없었다는 듯이, 싹 잊어버리고.
천천히, 한 손 한 손 바닥을 짚으며 잠든 그에게 다가갔다. 물기를 닦아내긴 했지만 아직 조금씩 젖어있는 그는 막 만들어진, 투명하고 정교한 유리세공품 같았다. 넓은 이마를 타고 내려온 콧대는 오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높았고, 시원했다. 벌써 말라버렸지만, 살짝 벌어진 채 도드라진 살굿빛 입술이 그의 얼굴에서 가장 멋졌다. 낮은 능선 같은 그의 뺨을, 거친 호선을 그리는 턱을 어루만졌다. 남자답지 않게 부드러운 살결이 손끝을 간질였다. 문득, 키스를 할 때 이 얼굴을 양손으로 잡고 한다면 더 기분이 좋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 킥, 하고 실소가 흘러나왔다.
내 웃음소리에 깬 건지, 그는 낮게 앓는 소리를 내며 어깨를 들썩였다. 덮어준 담요가 살짝 흘러 내렸다. 아쉬움 속에서 그의 뺨에서 손을 때며, 흘러내린 담요를 다시 추슬러주었다.
“하영아…….”
나지막하게 흘러나온 그의 말에는 무슨 마법이 걸려있던 걸까. 담요가 너무나 무거워져서, 원래의 위치로 돌려놓을 수가 없었다. 집어든 담요 끝을, 종잇장처럼 잔뜩 구긴 채 안간힘을 써도 할 수가 없었다.
웃음만 나왔다. 그렇게 뜻도 모를 웃음만 흘리며, 담요를 놓았다. 떨어진 담요가 그의 넓은 어깨를 다 덮지 못하고, 가슴 언저리에 볼품없이 펼쳐졌다.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향했다. 그를 안고 방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곤히 잠든 그를 깨울 수는 없었다. 어차피 보일러도 틀었고, 물기도 닦아냈으니 감기는 안 걸릴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갑자기 찾아온 이 피곤함을 떨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자자. 얼른 내일 아침이 오길 바라자. 나는 방문을 닫았다.
다음 날, 창밖의 빗소리가 알람이 되어 눈을 떴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다. 대충 머리를 빗어 넘기고, 옷을 갈아입었다. 저녁도 먹지 않은 그가 배고파할 게 분명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요리라고는 그렇게 많지는 않았지만, 하다못해 라면이라도 그에게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나마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더라? 계란부침, 계란말이, 볶음밥……. 그래. 볶음밥에 계란부침을 올려서, 오므라이스를 만들자. 자는 동안에 요리를 해서 주면, 그의 마음에 무슨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 때문인지, 거울에 비춰진 내 입술은 옅은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졸린 기색을 지우고, 문을 열었다. 그가 내 오므라이스를 먹는 모습을 생각한 탓일까. 요리를 하기 전부터 즐겁고, 두근거렸다.
그러나 내 생각과는 달리, 그는 깨어있었다. 그는 어제 잠들었던 그 자리에, 똑같은 자세로 벽에 기댄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에게 덮어주었던 담요는 발치에 보기 싫게 구겨져서 제멋대로 구르고 있었다.
“일어났어?”
그는 여전히 아래를 바라보았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그 애인? 앞으로의 행보?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에 내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바람은 있었다.
“배고프지? 조금만 기다려. 곧…….”
갑자기, 그가 튀어 오르듯 움찔했다. 그는 옆에서 무언가를 급하게 집어 들었다. 핸드폰이었다. 핸드폰은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거친 소리를 내며 진동하고 있었다. 그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핸드폰을 꽉 쥔 채 액정을 노려보았다. 눈동자에는 어제까지 보이지 않았던 생기가 거칠게 소용돌이 치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눈에 보였던 모든 것이 사라졌다.
“……하영아.”
그는 또 다시, 어제처럼 고개를 떨어뜨렸다. 핸드폰을 으스러뜨릴 기세로 거세게 쥐고 있던 손아귀는 이미 반쯤 힘이 빠져있었다. 핸드폰은 그의 검지와 엄지손가락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진 채,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만 같았다.
차라리 떨어져버렸으면. 그녀에게 후회 섞인 문자가 와도, 그가 모르게, 강하게 떨어져서 액정이 산산조각 났으면.
끝났다면서, 스스로 그렇게 말을 해놓고 계속 마음에 담아두는 그가 이해되질 않았다. 대체 무엇이 아쉬운 걸까. 진심으로 사랑했는데 끝나서? 줄 것 다 줬는데, 해달라는 것 다 해줬는데 끝나서? ……그렇게 나쁜 여자라면, 오히려 배신감 때문에라도 빨리 잊어버리는 게 더 좋을 텐데, 왜 그는 모르는 걸까.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서지 않은 채, 다시 문을 닫았다. 잔뜩 굶주린 아우성도 창밖의 빗소리에 휩쓸려 가라앉아갔다. 그에게 해주기로 한 요리가 무엇이었더라. 기억나지 않았다. ……그다지 기억을 해낼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아무리 노력해서 요리를 하고, 그와 내가 같이 밥을 먹어도, 누구도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는 끝끝내 맛있게 먹어주지 않을 테니까.
정오가 지났을 즈음, 그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내 방에서 지내는 게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이 집의 구조상, 방은 정말 잠만 자는 공간이어서, 대부분의 생필품이나 옷가지들은 거실에 두었기 때문에 나는 거실에 지내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나도, 이 집 어디도 아닌 다른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그래도 내 말을 듣긴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겐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았고, 때문에 확 트인 거실보다는 문을 닫을 수 있는 방이 더 좋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 내린 판단이 아니었다.
단지 이틀 지났을 뿐인데, 고개 숙인 채 거실 벽에 자리 잡고 앉아있는 그를 보기 싫어하는 내가 있었다. 내가 아는 그는 언제나 깔끔했고, 단정했으며, 매사에 당찬 사람이었다. 지금처럼 의기소침한 그는 그가 아니었다. 그저 ‘한심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 사람만을 사랑하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는데. 바로 옆에, 자신을 죽도록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걸 모르는 한심한 그가 너무나 서운했다. ……아니. 서운함을 넘어서, 싫었다.
아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위로해줘도 그가 나를 봐주지 않는다면, 대체 그를 이 집에서 머물게 해줘서 내가 얻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남는 것은 상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럴 바에는, 차라리 그를 집에 돌려보내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래도 참았다. 언젠가는 그가 날 봐주겠지. 나를 사랑해주진 않더라도, 내가 당신을 위해 이렇게까지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봐주겠지. 그런 가느다란 희망을 안고서.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가 지나고, 그런 식으로 오늘까지 왔다. 그의 생활에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내 방으로 옮겨간 후부터, 더욱 한심해져만 갔다. 방에서 잘 나오지도 않았고, 밥도 잘 먹질 않았다. 때론 화도 내봤고, 타이르기도 했고, 억지로 끌어내려고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는 귀찮아했다. 제발 혼자 둬달라며, 내 잔소리와 붙잡음을 뿌리쳤다.
일을 하고 돌아와서 집안 곳곳을 살펴보아도 그가 밖으로 나온 흔적은 그다지 보이질 않았다. 기껏해야 화장실을 쓰거나, 물을 마신 흔적뿐이었다.
밤만 되면, 방 안에서는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가 보면, 그는 이틀 째 되던 날처럼 핸드폰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얼마나 어루만졌는지, 핸드폰의 액정과 버튼은 이미 닳을 대로 닳아있었다. 그에게 생기가 돋는 것은 이따금씩 핸드폰이 울릴 때뿐이었다. 항상 멍하니 있다가도 진동소리만 나면 어깨가 들썩였고, 배터리가 떨어질라치면 잽싸게 충전을 해서 다시 울리기만을 기다렸다.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는 망가져만 갔다. 망가진 그를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친구였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위로해줬어도, 그에게 나는 친구였다. 그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사람’으로서 노력했어도, 그의 눈동자에는 헤어진 그녀만이 비쳐질 뿐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왜냐면 그는 정상이고, 나는 비정상이니까. 때문에, 결국 지쳐버리고 말았다.
그가 아홉 번째로 모습을 내비치고 방으로 다시 들어간 후, 화장실로 가보았다. 세면대 위에, 그가 씻은 흔적이 남아있었다. 하지만 흔적은 그것뿐이었다. 그를 위해 사준 치약은 어디 한 곳 구겨지지 않은 채로 있었다. 칫솔은 한 모 한 모가 빳빳하게 서있었다. 수건은 아직도 새로 샀을 때의 섬유냄새를 간직하고 있었고, 물 컵에서도 플라스틱 냄새만이 지독하게 풍겼다.
……오늘도 역시, 그에게 나는 보이지 않았다.
화장실 문을 닫으면서, 문득 텔레비전 아래에 펼쳐진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첫날 그에게 덮어주었던 담요이기도 했지만, 둘째 날에 그가 내팽개친 담요이기도 했다. ……나는 그 담요였을 지도 모른다. 아무리 따뜻하게 해주려고 해도, 결국에는 바닥에 내팽개쳐지는, 그런 담요.
성큼성큼 걸어서, 그가 닫은 방문을 거칠게 열었다. 동굴처럼 어두컴컴한 방 가운데에, 그가 처음 우리 집에 찾아왔을 때처럼, 촉촉이 젖은 채 웅크리고 있었다. 이제 모든 일을, 모든 감정을 내려놓고 싶었다. 혼자 끙끙거리고 앓는 것도 지겨울 따름이었다.
“할 말이 있어.”
처음 그 날과는 달리, 그는 나의 말에 곧바로 움찔거렸다.
“아직도 그 여자, 사랑해?”
그 이상의 움직임은 없었다. 그는, 첫날부터 지금까지 죽 한결 같았다. 기분 나쁠 정도로.
“대답해줘. 아직도 그 여자, 사랑해?”
“……응.”
멍청이. 한심한 놈. 그 여잔 널 버렸어. 그 여자의 마음속에서 넌 지워졌어. 네가 이러고 있을 동안에, 그 여자는 분명 다른 남자를 만나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거라고. 나는 이를 갈며, 모든 것을 속으로 삭혔다. 내가 그에게 전달하고 싶은 말은 그런 단순한 투정부림이 아니었다.
“그럼, 누가 널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등만 보이던 그가, 반쯤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뭐?”
“지금 당장, 누가 널 사랑한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너 무슨 말 하는 거야?”
나는 그에게 달려들었다. 웅크린 그를 끌어안기란 매우 쉬운 일이었다. 차갑게 식은 것 같으면서 따뜻한, 애매하면서도 부드러운 체온이 끌어안은 팔 안쪽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뭐, 뭐야. 너 왜 이래?”
그의 얼굴은, 내 머리 뒤로 향해져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었지만,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는 적잖은 당혹감이 섞여 있었다. 다행이다. 이런 식으로라도, 본래의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가 있어서. 그러나 내가 다음에 입을 열었을 때도, 그는 이런 달콤한 목소리로 대답해줄 수 있을까.
……걱정과 두려움을 지워버리자. 이대로 내가 그를 싫어하게 되기 전에, 차라리 그가 나를 싫어해주는 편이 나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진심을 전해야만 했다.
깊은 심호흡과 함께, 나는 모든 감정을 내려놓았다.
“나야.”
“……뭐?”
“내가 널 사랑한다고.”
끌어안은 그의 어깨가, 심장박동만큼이나 크게 들썩였다.
“미친 짓인 거 알아. 하지만 진짜야. 오래 전부터…….”
갑자기 가슴팍이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며 아파왔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아픔이었다. 그리고 나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와 멀어져있었다. 벽에 부딪친 등과 뒤통수의 아픔을 꾹 참으며,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태풍이 일렁이고 있었다. 반쯤 열린 입은 다닥다닥 흔들리고 있었고, 뺨은 수염과 함께 씰룩였다. 진동하는 핸드폰을 부여잡을 때 이상으로, 그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를 향해 있던 실망감이나 한심한 시선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다시 돌아온 그를, 나는 어떻게 해서든 잡고 싶었다.
“그러니까…….”
“장난이라고 해.”
누구를 향한 비웃음일까. 그의 입 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갔다.
“장난이지? 그렇지?”
“아니…….”
“장난이잖아.”
“아냐.”
“장난이라고 해.”
“진심이야. 난, 널 사랑해.”
한순간 둔탁한 것이 날아와 얼굴을 때렸다. 눈에 바람이 들어가 따가웠다. 콧등 위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은 느낌이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발치에는 베개가 볼썽사납게 뒹굴고 있었다.
“미쳤어. 넌.”
그의 눈에서 태풍이 거둬졌다. 문틈을 통해 들어온 빛을 받은 그의 눈은, 마치 작은 불씨가 지펴진 것처럼 보였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은 사람을 보는 눈도, 사물을 살피는 눈도 아니었다. 내가 항상 두려워하고, 걱정해왔던 그런 눈. 불쾌한 해충이나 역겨운 냄새를 풍기는 쓰레기를 보는, 누구나 가질 수 있고, 변해버렸던 그를 바라보던 나의 눈이기도 했다.
그는 나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이, 벙어리처럼, 소리 없이 입을 열고 닫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물었고, 그 사이로 소리는 세어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혀를 한 번 차는 걸로 모든 대화를 마치고, 방밖으로 뛰쳐나갔다. 방문이 거칠게 닫혔다. 문밖에서 그의 발이 장판 위를 밟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소리는 점점 잦아들어갔다. 그 후로는 빗소리만 있었다.
뒤통수와 등의 쓰라림을 참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가슴팍의 아픔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살갗의 고통을 넘어서서, 그 안까지 깊게 베인 것 같은 느낌이 몹시 불편했다. 가슴을 꼭 움켜쥔 채 아픔을 참으려고 해도 참기가 힘들었다.
그가 떠나간 궤적을 더듬었다. 어두운 방에서, 밝은 거실로 나왔다. 이렇게 밝은데, 그 어디에도 그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가 활짝 열어놓고 떠난 문을 통해, 비바람이 아까보단 약한, 새침한 웃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가지런히 정리해놓았던 신발들은 제멋대로 어질러진 채, 그 웃음소리에 농락당하고 있었다. 그와 처음 왔던 날처럼, 흠뻑 젖은 신발들이 수두룩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나의 신발이었다. 그의 젖은 신발은 어디에 있을까. 당신의 입술처럼 바짝 말랐을 터인 신발을 신고, 그는 어디로 떠나갔을까. 이 폭풍우 속에서 다시 젖으며, 이제 그는 누구에게 물기를 닦아주길 바랄까.
나는 현관문을 닫고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어질러진 신발들의 물기를 털고, 제 자리에 다시 정리해놓고, 현관바닥의 물기를 닦아냈다.
거실로 옮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담요를 집어 들었다. 담요에게선 처음 샀을 때의 따뜻한 이미지가 느껴지지 않았다. 집어든 담요는 그저 심하게 구겨지고 냄새나는 헌 이불에 불과했다. 담요를 비닐에 싸고, 화장실로 갔다. 그의 것이어야 했던 새 치약도, 새 칫솔도, 새 수건도, 그리고 새 물 컵도 모두 집어서, 담요를 담은 비닐에 쑤셔 넣었다.
그걸로 그는, 내 방에서 완벽히 사라졌다.
후련했다. 가슴팍의 아픔은 이젠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그와 친구라는 연결고리마저 깨진 것조차도 시원했다. 그러나 그 시원함은 추위로 다가왔다. 문을 닫았는데도, 비바람은 더 이상 들어오지 않는데도, 봄도, 가을도, 겨울도 아닌, 여름날의 끈적끈적한 비인데도, 너무나도 추웠다. 뼛속까지 시리고 아플 만큼.
추위를 달래려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담배 끝이 타들어가며 내는 소리는 마치 빗소리 같았다. 수많은 실오라기마냥 서로 얽어가다가 머리 위에서 풀어지던 담배연기는 여느 때보다도 맑고, 투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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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학년 졸업생 성명규입니다.
얼굴도 모르는 선배이고, 그다지 남에게 보여줄만한 실력을 가진 것도 아니지만,
과거 문예부원이기도 했고, 열심히 활동하는 후배들의 모습이 너무나 보기가 좋아서, 이렇게 글을 올려봅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입니다.
그것이 즉흥으로 쓰든, 체계적으로 쓰든.
쇼잉을 중요시하든, 텔링을 중요시하든,
글쓰는 방식이 여러 가지 있고, 그 중에 쉬운 방법이 있다고 한들
결국에는 하나의 의문으로 귀결되고, 그 의문에서 막히기 시작합니다.
'내가 쓰는 글은 무엇인가.'
이 의문은 많은 뜻을 품고 있습니다.
내가 쓰는 글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런 사소한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이 글은 무엇인가, 그런 깊이 있는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의 글이 남에게 무슨 글이 될 것인가, 그런 힘든 질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답을 못한다면, 그 때부터 슬럼프가 온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보다 먼저 졸업한 저도 아직은 그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도 많이 읽고, 많이 쓰고,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면
분명 대답을 찾을 수가 있겠죠.
후배 여러분들도 꼭 힘내서, 자신만의 글을 쓸 수 있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안녕히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