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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에 성리학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기 시작한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고려 사신이 중국(송과원)을 드나들면서 송의 서적을 적극 수집해 들여왔다. 중국에 유학을 가는 고려의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성리학은 중국에서 발흥·성장한 것과 거의 때를 같이하여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주자학으로서의 성리학의 도입은 충렬왕 때(13세기 후반)로 추정된다. 안향(安珦, 安裕)은 주희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며너 주자학을 공부함으로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인물로 존경 받는다. (같은 시대에) 백이정(白頤正)은 충선왕(忠宣王때 원에서 성리학 관계 서적을 많이 구해 왔다.
또한 권부(權溥) 등은 주희의 『사서집주』 등을 전파함은 물론 과거 시험에서 채택하게 함으로써 성리학의 도입이 활기를 띠었다. 뒤이어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정몽주(鄭夢周) 등은 피상적 차원을 넘어 성리학이 정치적·사상적 토대가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고려 말에 성리학을 도입한 유학자는 안향을 위시하여 백이정이었고, 권보, 우탁, 이재현은 추종자였다.
1344년에 과거 시험의 과목으로 유학의 사서가 채택되면서 신진 유학자가 대거 관리로 진출하였다.
안향을 비롯한 성리학 초기 수용자들 대부분은 과거 급제자들이었다. 타고난 신분이 아니라 갈고 닦은 학문 실력으로 관계에 진출한 것이다. 이들은 전통적인 귀족 세도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무신정권 붕괴(1270) 이후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 출신이었다. 본관도 대부분 충청, 전라, 경상 등 삼남(三南)에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중소지주가 많은 가운데 대지주도 있었다.
세도가문의 권력 남용, 관리의 부정부패, 토지 겸병(兼倂)과 양민 수탈, 조세 문란. 당시의 고려 사회는 무신정권기와 원나라 간섭기를 거치면서 많은 문제가 이어지고 있었다. 따라서 고려 유학자들의 성리학 수용은 이러한 폐단을 시정하고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토대를 찾으려는 움직임으로도 볼 수 있다. 그들은 ‘사대부의 나라’이자 ‘성리학의 왕국’ 조선을 사상적으로 예비했던 것이다. 숭유억불정책을 추진했다. 특히 정치제도, 토지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고려 말에는 대부분의 신진 성리학자들은 정치개혁은 반드시 이루어져아 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정몽주도 당시의 실세였던 이성계의 개혁사상을 동조했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을 하면서 찬반의 파벌이 생겼다.
이색과 이성계가 대립하자 정몽주는 이색의 편에 섰고, 정도전은 이성계의 편에 섰다. 공민왕 때 이색이 성균관의 책임자였고, 교관인 이숭인도 이색의 편이 되었다.
고려 말에는 성리학자 대부분이 학문적 연구에 몰두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학자 사이에 사상적인 차이는 없었다. 따라서 학파로 분류하기보다는 학맥이나 인맥으로 분류하는 수가 많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따라서 반대한 이색, 정몽주, 길재를 절의파로 분류하고, 정도전, 하륜, 권근, 조준 등을 혁명파로 분류할 수 있다.
혁명파와 절의파의 혁명사상도 조금 달랐다.
정도전(정몽주보다 나이가 적고, 정몽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은 고려의 부패를 청산하기 위해서 왕조 혁명을 주장했다. 다음 왕조는 신하가 중심이 되는 정치체제(신권정치)를 구상했고, 정몽수는 역성혁명이 아니고, 단순히 정치걔혁만을 주장했다. 왕권을 인정하고, 신하가 왕을 함부로 바꾸어서 안 된다고 했다. 이로서 절의파라는 이름을 얻었다.
결과적으로는 신권주의자인 정도전이 승리하고, 왕권의 보존을 주장한 정몽주는 죽었다.
2. 조선시대
1) 조선 초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성리학은 양반 사회의 통치 이념이 되었다.
성리학이 조선의 개창을 합리화하는 토대가 되면서부터 조선시대 사상의 중심부로 부상하였다. 조선 초 성리학계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역성혁명의 주체인 정도전(鄭道傳)과 권근(權近)의 활동이다.
정도전은 성리학을 중심으로 조선조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면서 철저히 불교를 배척하였다.
불교가 사후 세계를 논의하는 것도 비판하였다. 이와 같이 고려 시대의 국교인 불교를 비판하고 성리학으로서 국가의 통치 이념을 건립함에 따라 성리학은 관학(官學)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들은 조선 초기에 지배집단이 되면서 이들을 ‘관학파’라고 부른다.
관학파는 다시 철저한 개혁과 반대파 제거를 주장한 정도전, 남은 등의 소수파와 이방원을 위시한 세력은 반대파에 대하여서나 개혁에 대하여 온건한 입장을 취하므로 서로 갈라선다. 여기서 정도전이 제거된다.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는 반대파를 철저히 제거하는 것이 정당화 되지만, 안정이 되고 나면 과거의 반대세력을 끌어안으려는 것이 역사의 흐름이다. 정몽주 일파를 받아들이는 문제에 정도전, 남은과 하륜, 조준의 의견이 서로 달랐다. 태종은 이색 - 정몽주 계열의 후손들에게 화해의 손을 내밀었다. 한편으로 정몽주보다도 더 절의파에 속하는 두문동 72현의 자제들도 관리로 받아들였다. 절의파도 왕조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정도전만을 비난함으로 화해의 손을 잡고 조선의 신민이 되었다. 조선 건국을 두고 갈라섰던 두 파는 공동의 적으로 정도전을 만들므로 서로 암묵적 합의를 이루어 냈다.
산 자들은 죽은 자를 희생제물로 삼아서 자기의 살 길을 찾아냈다.
태종은 길재를 부르고, 정몽주에서 영의정을 추서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숭인 등은 신원을 풀어주었다. 정몽주와 길재를 ‘충절을 중심으로 행한 의리의 관점에서 추켜세웠고, 성리학을 중심학문으로 삼는 사림파들도 정몽주와 길재를 높이 평가했다. 한편으로 정도전의 후손도 관리로 채용해주었고, 사림에서도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반 체제가 형성되면서 정도전은 다시 천한 신분 출신으로서 버림을 받는다.
이후에 관학파와 절의파는 학문적 이론으로 대립한 것이 아니고, 양반 관료 체제의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 투쟁이 일어났다. 이들은 훈구 와 사림의 대립으로 나타났고, 사화라는 사건을 일으켰다.
2) 사림파의 진출
왕권이 수립되고 나면, 왕권을 지키는 문제가 제일 급하다. 성리학은 충과 의를 중시함으로 왕권 수성에 가장 적합한 학문이었다.
성종 때부터는 사림파 학자들이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했다. 그 중에게도 경제적 기반을 어느 정도 갖춘 영남 사류가 가장 많았다. 정몽주 - 길재 -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로 이어지는 인맥이 형성되었다. 길재는 정몽주 이외에도 이색, 권근의 영향도 받았다. 문제는 영남 사림파의 중심세력이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하여 절의 정신을 내세운 인물들이많았다.(사육신과 생육신은 거의가 영남 출신이다.)
이들은 성리학(性命과 義理)은 리(理)를 다루는 사변철학이지만 이들은 실천철학도 강조했다. 실천을 나타내는 중심 학문이 소학(小學)이다. 따라서 성리학을 도학(道學)이라고도 한다. 도학은 명분을 중시하는 실천학문이다.
훈구 세력이 장기간 권력을 쥐고 있으면서 많은 부조리가 일어났다. 도학으로 무장하고 새로 정계에 들어온 사람에게 훈구파의 부패는 좋은 공격 목표가 되었다.
3) 의리 실천의 도학파들
길재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는 절의를 내세워 조선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이러한 정신은 김숙자를 통해 이어졌다. 사림파 학자들은 무오사화·갑자사화·기묘사화·을사사화 등 많은 사화(士禍)를 받으면서도 성리학의 의리 정신을 실천하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를 즈음하여 윤리 도덕서라고 할 수 있는 『주자가례』·『삼강행실도』·『오륜도』·『소학』 등이 널리 간행·반포되었다. 성리학의 입문서 역할을 하였던 『소학』은 입교(立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 등의 편으로 되어 있는 성리학적 율신(律身)·수기(修己)의 책이었다.
『소학』의 학습은 김굉필·남효온(南孝溫) 등 당시 사림파 학자에게 일반화되어 있었다. 특히 평생 자신을 ‘소학동자(小學童子)’로 자칭하였던 김굉필은 한시도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김굉필의 문하생인 조광조도 도학을 추구하였다. 그는 도(道), 즉 정(正)과 선에 의한 정치를 강조하면서 의리·공사(公私)의 구분을 확실히 함으로써 지배층의 사리사욕을 인정하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에 올랐다. 그는 중종이 혁명에 의해 왕위에 오른 것을 기화로 과감한 개혁정치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목숨을 아끼지 않고 공(公)과 의리를 지켰던 도학 정신은 길재에서 조광조로 이어지는 하나의 학통관을 형성하였고 한국 성리학이 대의·의리·명분을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결론적으로
조선왕조의 건국은 사회혁명을 가져왔고 이에 수반하여 문명개혁이 나타났다. 우선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 특히 성리학(性理學)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정도전의 뒤를 이어 권근(權近)이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입학도설(入學圖說)》, 《오경천견록(五經淺見錄)》, 《사서오경구결(四書五經口訣)》 등을 저술하면서 더욱 확고한 이론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세종 전후 시기에는 김말(金末)·김반(金泮)·김구(金鉤) 등 이른바 ‘경학삼김(經學三金)’이라 불리는 저명한 성리학자들이 나와 성균관 중심의 국가성리학을 꽃피게 하였다. 세종이 즉위한 해에 경녕군 이비는 중국의 영락황제가 하사한 성리대전, 사서대전, 오경대전을 받아서 돌아왔고,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고, 과거시험의 교재로 널리 사용되었다.
또한 각급 교육기관에서 성리학을 가르치고, 과거시험 과목에서도 큰 비중을 차지함으로 성리학은 더욱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조선 초기 성리학의 기본경전은 사서(四書)[3]와 오경(五經)[4]이었으며, 이밖에 일상생활에서의 도덕적 윤리규범을 서술한 《소학(小學)》이 널리 읽혔다. 성리학은 우주자연과 인간사회의 문제를 형이상(사변철학)과 형이하(실천철학)로 나누어 포괄적으로 설명하는 사상체계이다. 그것은 형이하 세계의 다양성과 개개사물의 주체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공동체적 협조관계를 강조한다.
성리학은 조선의 초기를 지나면서 사변철학과 실천철학이라는 두 가지의 갈래로 발전한다.
조선 중기에 퇴계가 사변철학을 대표한다면, 남면 조식은 실천철학을 중요시 함으로 두 개의 봉우리를 이룬다.
한훤당 김굉필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簑翁)·한훤당(寒暄堂). 예조참의 김중곤(金中坤)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의영고사(義盈庫使) 김소형(金小亨)이고, 아버지는 충좌위사용(忠佐衛司勇) 김뉴(金紐)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淸州韓氏)로 중추부사(中樞副使) 한승순(韓承舜)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소학(小學)』에 심취해 ‘소학동자(小學童子)’로 불리었다.
선대는 서흥의 토성(土姓)으로서 고려 후기에 사족(士族)으로 성장했는데, 증조부인 김사곤(金士坤)이 수령과 청환(淸宦)을 역임하다가 아내의 고향인 경상도 현풍현에 이주하면서 그곳을 주근거지로 삼게 되었다.
할아버지인 의영고사 김소형이 개국공신 조반(趙胖)의 사위가 되면서 한양에도 연고를 가지게 되어, 할아버지 이래 살아오던 한성부 정릉동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는 호방하고 거리낌이 없어, 저자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매로 치는 일이 많아 김굉필을 보면 모두 피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분발해 점차 학문에 힘쓰게 되었다.
근기 지방의 성남(城南)·미원(迷原) 등지에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주로 영남 지방의 현풍 및 합천의 야로(冶爐)주 01), 성주의 가천(伽川)주 02) 등지를 내왕하면서 사류(士類)들과 사귀고 학문을 닦았다.
이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소학(小學)』을 배웠다. 이를 계기로 『소학』에 심취해 스스로를 ‘소학동자’라 일컬었고, 이에서 받은 감명을 "글을 읽어도 아직 천기를 알지 못했더니, 소학 속에서 지난날의 잘못을 깨달았네. 이제부터는 마음을 다해 자식 구실을 하려 하노니, 어찌 구구히 가볍고 따스한 가죽 옷과 살찐 말을 부러워하리오."라고 술회했다고 한다.
이후 평생토록 『소학』을 독신(篤信)하고 모든 처신을 그것에 따라 행해 『소학』의 화신이라는 평을 들었으며, 나이 삼십에 이르러서야 다른 책을 접했고 육경(六經)을 섭렵하였다.
1480년(성종 11)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때에 장문의 상소를 올려 원각사(圓覺寺) 승려의 불법을 다스릴 것을 포함한 척불과 유학의 진흥에 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이 이학(理學)에 밝고 지조가 굳다는 명목의 유일지사(遺逸之士)로 천거해 남부참봉에 제수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어서 전생서참봉·북부주부 등을 거쳐, 1496년 군자감주부에 제수되었으며, 곧 사헌부감찰을 거쳐 이듬해에는 형조좌랑이 되었다.
1498년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장(杖) 80대와 원방부처(遠方付處)의 형을 받고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다가 2년 뒤 순천에 이배되었다.
유배지에서도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써, 희천에서는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해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맥을 잇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무오 당인이라는 죄목으로 극형에 처해졌다.
중종반정 뒤 연산군 때에 피화한 인물들의 신원이 이루어면서 도승지에 추증되었고, 자손은 관직에 등용되는 혜택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사림파의 개혁 정치가 추진되면서 성리학의 기반 구축과 인재 양성에 끼친 업적이 재평가되어 김굉필의 존재는 크게 부각되었다. 이는 조광조를 비롯한 제자들의 정치적 성장에 힘입은 바가 컸다.
그 결과 1517년(중종 12) 정광필(鄭光弼)·신용개(申用漑)·김전(金詮) 등에 의해 학문적 업적과 무고하게 피화되었음이 역설되어 다시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도학(道學)을 강론하던 곳에 사우를 세워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김굉필의 문인들이 피화되면서 남곤(南袞)을 비롯한 반대 세력에 의해 김굉필에게 내려진 증직 및 각종 은전에 대한 수정론이 대두되었다. 당시의 이 같은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그 뒤 김굉필을 받드는 성균관 유생들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건의가 계속되었다.
그리하여 1575년 영의정 추증, 1577년(선조 10) 시호가 내렸졌으며, 1610년(광해군 2) 대간과 성균관 및 각 도 유생들의 지속적인 상소에 의해 정여창(鄭汝昌)·조광조·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오현(五賢)으로 문묘에 종사되었다.
학문적으로는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으로 이어지는 우리 나라 유학사의 정통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김종직을 사사(師事)한 기간이 짧아 스승의 후광보다는 자신의 학문적 성과와 교육적 공적이 더 크게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사우(師友)들 가운데에는 사장(詞章)에 치중한 인물이 많았으나, 정여창과 함께 경학(經學)에 치중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성향으로 인해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의 편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현실에 대응하는 의식에서도 그러한 성격이 잘 나타나, 현실 상황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대응하려는 자세는 엿보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20여 인에 달하는 문인들은 두 차례 사화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았다. 나아가 유배지 교육 활동을 통해 더욱 보강되어 후일 개혁 정치를 주도한 기호계(畿湖系) 사림파의 주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소학』에 입각한 처신(處身), 복상(服喪)·솔가(率家) 자세는 당시 사대부들의 귀감이 되었으며, ‘한훤당의 가범(家範)’으로 숭상되었다. 후학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정국(金正國)·이장길(李長吉)·이적(李勣)·최충성(崔忠誠)·박한공(朴漢恭)·윤신(尹信) 등이 있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서흥의 화곡서원(花谷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의 옥천서원(玉川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경현록(景賢錄)』·『한훤당집(寒暄堂集)』·『가범(家範)』 등이 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 도동 서원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리에 있는 서원이다. 2007년 10월 10일 사적 제488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오현의 한 사람인 문경공 김굉필(1454년~1504년)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1568년(선조 1년) 유림에서 현풍현 비슬산 기슭에 세우고 쌍계서원이라 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그 후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사우를 중건하고 당시의 동명이 보로동이었으므로 보로동서원이라 불렀다. 그 후 2년 뒤인 1607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면서 공자의 도가 동래하였다는 의미로 도동서원이라고 하였다. 이때 동(洞) 이름도 도동리로 개칭되었다. 1678년(숙종 4) 정구(鄭逑)를 추가배향하였다
첫댓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정통파와 사이비 주체사상을 섞어서 성리학을 논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성리학은 관념론이고, 지배계급의 통치사상입니다...
주체사상은 인민을 착취하고 기만하기 위한 붉은왕조의 통치사상입니다
타락한 착취자(김씨붉은왕조)의 마음대로 이렇게 아무렇게나 혁명이니 이론과 실천이니
갖다붙이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정도전, 이황, 이이, 정약용(부분적으로)의 책을 읽어보았는데...한심한 수준입니다
공자와 주희는 뿌리와 잎사귀처럼 천양지차입니다
조선의 성리학의 계보을 보면 사색당파의 역사가 잘 드러납니다
중국도 버린 성리학을 조선은 보물처럼 여기는 것은 우스광스럽습니다
김씨왕조가 이씨왕조를 비판하다 ( ^ ^ )
주체사상이 성리학을 비난하다
붉은반동이 옛날반동을 심판하다
공자님께서 참으로 통탄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