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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늦잠을 자고 일어난 이안이 시계를 들여다 본다 어제 마신 막걸리에 머리가 어지럽다 9시가
다 되어서 일어난 이안이 배낭을 챙겨들고 집을 나선다 이안의 발걸음이 경쾌해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버스에 오르는데 기사님이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삿말을 건넨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알록달록
배낭을 메고 처다 보는 몆몆 일행들로 뻐스안이 시끌벅적하다 도봉산 정류장에 도착하니
산행을 준비하는 이들로 북적 거린다
아주 오랜만에 산행을 하는 것 같다 이안은 몸을 한번 으쓱해보며 얼마 전까지 산행을 하기전
회원들과 늘 만나던 만남의 광장 쪽을 한번 쓱 쳐다보며 흠 하고 심호흡을 하며 인파와 함께
발걸음을 옮긴다
어쩌면 아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전에는 토요일마다 산행을 했던터라 고정 멤버들이라면
이많은 사람들속에 한 두어명쯤은 섞여서 올라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봉산 입구를 지나다
보면 길가 노점상들이 늘어서 있는데 새로 단장을 했는지 전에는 안보이던 점포들까지
하나같이 예쁜 색상들로 칠해져 있다
얼마전까지 입장료를 징수 하다가 무료가 되면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 두배가량 늘어서인지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복잡해졌다 광륜사를 지나 산 초입에 들어서니 특유의 산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동안 무료했던 정신과 육체가 오랜만에 확 깨여 나는 것 같은 느낌이다 속세의
혼탁한 정신과 물질들을 금방이라도 털어 낼것처럼 씩씩대고 올라가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작은 능선에 올라설때마다 땀이 비오듯 쏟아진다 산 정상에 올라가려면 작은 능선을 타고
가야 되는 것처럼 매순간마다 부딧치는 경쟁 사회에서의 치열한 삶의 경쟁도 따지고 보면
지금 산행과 별반 다름이 없으리라
이안은 은석암을 지나자 한쪽 능선에 걸터앉아 숨을 돌린다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을 흠치면서
오늘의 목표지점인 포대 능선을 바라보니 먼저 올라간 등산객들이 아득히 멀게만 느껴진다
포대 능선위에서 아물거리는 사람들위로 지난 시절의 추억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군복무시절 하루는 부대 연병장으로 일반 뻐스 몆대가 들어오더니 하얀 칼라의 여학생들이
줄지어 내린다 나는 마침 연병장 단상에 서서 1군에서 선별 되어온 기간병들에게 육군 태권도
교육을 시키고 있었다 군복무시절 태권도 교관으로 근무 할때의 일이다
강원도 원주를 중심으로 각 학교 모범생들이 군대내의 생활 견학을 나온 것이다 깨끗한
군대의 환경을 알리려는 켐페인의 일환으로 당시에는 파격적인 여학생들의 군 시찰이었다
교육을 끝내고 점심시간에 맞추어 도복을 입은채 식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여학생들이 자연
스럽게 삼삼오오 앉아서 병영 식사 체험을 하고 있는중이다 나도 한쪽으로 식판을 내려놓고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는데 여학생 몆명이 자리가 찼는지 학생들과 떨어져 앉은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앉는다
식사를 하던중 무심결에 처다보는 나를 여학생 하나가 환하게 웃는다 학생들의 수다를
뒤로 식당을 나왔다 그런일이 있은 며칠후 시내에 동료와 함께 외출을 나와 영화구경을
하기로 했다 상영 시간에 맞추다보니 1시간 가량 기다려야 될참에 마침 옆건물에 탁구장이
있어 우리는 탁구를 치며 시간을 맞추기로 하고 탁구장 안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보는것보다 실내가 제법 커 보였다 탁구 다이가 10개가 넘는것 같았다 안쪽으로 자리
하나가 빈곳이 보이는데 옆에서는 여학생 서너 명이 게임을 하고 있었다 동료와 자리를 잡고
공을 집어 들었는데 옆의 여학생들이 떠들어대며 처다보는 순간 나는 아, 하고. 놀라고 말았다
며칠전 부대 탐방을 와서 내 자리에서 식사를 함께한 그 여학생들이 아닌가
환하게 웃던 그 여학생이 나를 기억 했는지 또다시 나를보고 웃는다 동료와 나는 자연스럽게
그학생들과 어울려 게임도 하고 영화도 자연스럽게 같이 보게 되었다
그날이 있고 부터는 누가 먼저 라고도 할것 없이 토요일 마다 만나곤 했었는데 여학생의
이름은 자은이라고 한다 2학년으로 웃는 모습은 정말 귀엽다
어떻게 세월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눈깜짝 할 사이에 일년 정도가 흐른 어느날 하루는
자은이와 영화구경을 하고 식당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한참을 먹고 있는 나를
자은이가 식사를 하다 말고 쳐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머쓱해서 자은아, 왜. 그렇게 처다보는거야. 하고, 묻자, 자은이가 이렇게 대답
하는 것이 아닌가 오빠가 무엇을 잘 먹는지 보고 있는 거야. 하고. 자은이가 망설임 없이
말한다 그리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잘 보아 뒀다가 이담에 내가 맛있게 해줄거야
하는 자은이의 티없이 맑게 웃는 모습에서 고등학생이라는 앳된 모습은 없고 사랑스러운
여인처럼 보여진다
오늘따라 바람이 없는것 같다 그래도 땀이 좀 가셨나보다 앞서가는 사람들을 따라 다시
배낭을 챙겨메고 올라가기 시작 하는 이안의 가슴속으로 젖어드는 아련한 추억속의 영상이
아니 하얀 칼라의 교복을 단정히 입고 어느날 부대로 찿아온 자은이의 모습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푸르게 푸른숲 나무들 사이로 하늘이 나를 좀 처다보세요 하듯 맑고 고운 뭉게
구름이두둥실 흘러간다
저하늘 높이 날으는새들 연실 땀을 닦으며 위로 위로 향하는 사람들 정상까지는 아직도
멀었다 조금만 더 올라가면 은석암 정상이 나오는데 포대능선은 한참 더 올라 가야만 된다
나는 은석암 정상에서 쉬기로 작정하고 계속 올라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은석암 정상이
보이는 작은숲 사이로 바위덩이가 길게 위로 뻗어 있는곳까지 당도 했다
팔을 걷어 부치고 기다시피 은석암 정상에 도착하니 먼저 올라온 등산객들이 삼삼오오 앉아
땀을 훔치며 과일이랑 물들을 마셔 대고 있다 나도 그 옆 바위 위에 걸터앉아 올라 온곳을
바라보니 도봉산역이 성냥갑처럼 한눈에 들어온다 온몸이 땀에 젖은채 아래를 바라보며
내 인생도 어쩌면 이렇게 고단한 산행 길처럼은 아닌가 생각이 드는것 같다
태권도 교육을 마악 끝내고 자은이가 기다리는 부대정문으로 나가보니 자은이의 친구 은혜
가 기다렸다는듯이 부대 정문 위병소에서 벌떡 일어나며 오빠, 안녕. 하고. 먼저 웃는다
그옆에서 예쁜 모습으로 웃고있는 자은이가 나를 처다보며 눈인사를 한다 며칠전 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나를 처다보던 그 은은한 눈빛으로 환하게 웃는 단발머리의 단정한 모습이 오후
햇살에 예쁘게도 빤짝 거린다
나는 도복을 입은채 자은이와 친구 은혜를 부대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여기저기 구경을
시켜주고 1년전 부대 견학을 올때 앉았던 곳에서 식사도 함께 하며 만남에 추억을
되새겨 보며 자은과 친구 은혜와 즐거운 시간을 함께 가졌다 그때의 자은이와 은혜가
입고 있었던 검정 바탕에 하얀 칼라의 교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였섰던것 같았다
은석암 정상에서 바라보이는 저멀리 상계동 주변까지 눈앞에 펼쳐 보인다 어머니와 생전에
같이 살던 그곳도 시야에 어른 거리는것 같다 어머니의 영상이 어른거리는듯 이안은 흠
하고 심호흡을 한번 가다듬고 옆에서 일어나는 등산 마니아들을 따라 다시 정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은석암 정상에서 포대능선을 향해서 걷는 이안은 머리속을 스쳐 지나 가는 어머니의 영상을
떨쳐 버릴수가없다 어디를 향하는 바람인지 바람은 조금씩 불기 시작한다 가파른 코스가
지나고 안개바위 쪽으로 향하는 등산로는 조금씩 위로 향하고 있다 앞서거니 뒷서거니
오르는 사람들 마다 지팡이를 짚고 등산로를 따라 가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것을 보고
이안은 문득 생각 나는게 떠오른다
언제인가 한국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등반가로 이름이 나있는 산악인
모씨가 느닷없이 지팡이를 짚고 그것도 쌍지팡이를 짚고 텔레비젼에 나와서 이렇게
이야기를 한다
등산 할때 균형 감각을 잡아 주기 때문에 등산 할때는 쌍지팡이를 짚고 가야 되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나를 지나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팡이를 하나에서 어떤
사람들은 양손으로 짚고간다 좁은 등산로를 향하다 보면 길에서 마주 칠때나 옆으로
스칠때 위험한 순간들이 발생 하기도 하고 뒤를 따르다 보면 날카로운 지팡이의 금속에
찔릴것만 같아 험난한 등산로에서 자칫 안전사고의 위험도있다
소문 따라 유행 따라 하다보면 그것의 성질을 떠나 모르는 사이 불규칙한 습관으로 몸에
배이거나 고치기 어려운 고질적 사고방식으로 굳어 질수 있다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 팔힘은 세질수 있을런지는 몰라도 균형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는 간단한
복장으로 등산을 하는것이좋다 굽은 산길을 돌면서 때론 위로 향하면서 지팡이를 의지하지
않고 몸으로 적응하며 균형감각을 유지한다면 오장육부의 흔들림과 자율신경과 타율신경의
반응조절로 온몸의 밸런스가 최적의 컨디션으로 변하는 것이다
지팡이에 의존 한다면 지팡이로 밸런스가 유지되기 때문에 몸의 컨디션은 지팡이 때문에
반감이 되는 것이다 험한 산길에서 지팡이에 의존하지않고 몸의 균형이 이루어진다면
산길이 아닌 곳에서는 몸놀림이 더욱 가볍게 이어질수 있다는 것을 알수있을텐데 이안은
아쉬움이 남는지 지팡이를 짚고 안개바위 쪽으로 향하는 등산객들의 뒷모습을 처다본다
안개 바위가 나무숲 사이로 삐끔히 보인다 몆년전인가 나도 한때는 바위를 타고 다닐때가
있었는데 하고 이안은 안개 바위를 힐끔 처다보며 미련이 남는듯 속으로 뇌까린다
이제는 옛날처럼 까마득히 생각도 잘 나지가 않는다 리찌클럽 회원들을 언제나 만남의
광장에서 만나면 냉골 초입에서 2차 상견례를 하고 간단히 몸을푼다
바위를 점검하듯 타고 갈때에는 7.8.명이 검은 등산복 차림으로 몸놀림도 날렵하게 움직이는데 줄을 걸고 타는 사람들이 앞으로 먼저 나가는 사람을 선등을 선다고 하는것처럼 리찌를
하는 사람들도 그날의 서기를 정하고 등반을 시작한다
안개바위는 난이도가 별로 없어도 습관처럼 걸쳐가는 곳이랄까 이안은 멀어지는 안개바위를
다시한번 돌아 보며 우연히 바위를 타게된 인연들을 생각해 본다
그언젠가 체육관 후배와 도봉산을 찿은적이 있었는데 한무리의 등산객들을 따라 냉골이라는
곳을 지나 미륵바위라는 가파른 곳을 아무생각없이 올라 간적이 있었다
후배와 나는 미륵바위 중간에서 움직일수가없었다 당시 나는 에스콰이어 구두로된
등산화를 신고 올라서기는 했는데 너무도 미끄럽고 가파로워 오도가도 못하게 된 것이다
위로도 아래를 처다보니 30미터 바위로된 가파른 낭떠러지가 아닌가 올라 서고 30분 정도가
흐른것 같았는데 후배도 어쩌지 못하고 난감한 표정으로 나만 쳐다본다 다리가 떨려오는데
갑자기 아래에서 검은 등산복을 입은 너댓명이 미륵바위를 날렵하게 올라 오는것이 아닌가
구세주가 온듯 애써 반가운 얼굴로 니는 인사를 할려고 하는데 무리중 한사람이 대뜸 이렇게
이야기를 하는것이 아닌가 아니 이양반들이 죽고 싶어 환장을 했나 여기가 어디라고 구두를
신고 올라 온거야, 하고, 나무라는것이 아닌가 나는 다리가 떨리고 온몸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아 말도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살려 달라고 할수밖에 없는 순간이다
아래를 처다보니 오금이 저려 발이 떨어지지가 않는다 올라온 일행들에 의해 간신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 했는데 그때의 심정을 생각 한다면 구사일생이랄까 지금도 그순간을
떠올리면 정말 그사람들이 아니였으면 생사가 어떨게 되었을지가 모를 일이였다
그런 우연의 만남으로 이안은 그사람들의 한사랑 Rock climbing 클럽의 회원이 될수 있었다
줄을 사용 하지 않고 손으로만 바위를 짚고 올라간다고 해서 핸스 리찌라고 한다
위험한 도전이기도 한것이 눈깜짝 할사이 바위에서 미끄러지면 사망 아니면 중상이다
이상한 만남으로 위험 천만한 바위 타기를 만 2 년동안 했으니 지금 생각 해도 이안으로서는
너무도 무모한 도전 이였던것 같았다 당시 미륵바위에서 이안을 구해 준분이 이대장이라고
부르는 사람이였는데 냉골의 1세대 리찌전문가로 통하기도 했다
이안은 이대장과 2년동안을 주 2회정도 만나 산행을 하면서 도봉산의 바위라면 거의 다
정복을 했을 정도로 준 전문가가 다 되였다 이안이 얼마나 열정적으로 바위 타기에 전념
했는지 2년여 동안 바위타는 신발을 20 켤레 정도를 사용했다 당시에는 화이브 텐 이라는
미국에서 수입한 고무창을 붙인 등산화를 신고 바위를 탔다
이안의 바위타기가 너무도 무모했던 도전 이였다는것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 터졌다 그날도
우리는 만남의 광장에서 7명이 모였다 검은 등산복위로 아침 햇살이 빤짝인다 이대장과
바위 등반을 시작 한지가 벌써 2년이 되어간다 이제는 팀에서도 자신력이 붙어 다들 부러워
할 정도가 되였으니 말이다 오늘 공격 목표는 만장봉으로 점심식사는 정상에서 하기로 했다
산내에서는 조리는 금물이지만 바위를 타는 사람들에게는 예외 인 것이 어떤 누구도 근접을
할수없기 때문에 당시 바위 타는 사람들은 간단한 조리 기구를 갖고 다니면서 특권쯤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의 우월감을 뽐내는 것 같았다
나자신도 바위를 타면서 생기는 성취감속에 자신감이 한층 더 고조 되여 있었다 바위를
탈때는 어려운 코스를 선택해서 타곤 했는데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현기증이 날정도로
가슴이 뛴다 그때의 생각 만으로도 말이다 바위를 한창 배우고 있을때 한번은 이대장을
따라 만장봉으로 갔는데 호랑이 굴이라는데로 나를 데리고 가는것이 아닌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도봉산에서 제일 어려운 코스라고 한다
아래를 처다보니 500미터 직벽이 발아래로 내려다 보이는데 줄도 없이 왔다 갔다 하는데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날정도로 긴장이 정말 되는 곳이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무모한
미친 짓이다, 라 고. 생각하고싶다 버스를 타고 도로를 지나다 보면 도봉산 만장봉의 하얀
바위 덩이의 넓은 벽면이 언제나 그렇듯이 잘보인다 그곳을 제집 드나들듯이 했으니
지금은 가장 두려운 추억이 되여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뛴다
늘 그렇듯이 냉골에서 만장봉으로 갈 준비를 하고 우리는 점심시간에 당도하기 위하여
출발을 했다 7명중 선등을 서는 사람은 팀에서 능숙한 형식이 맞기로 했다 형식의
체구는 마른 체격에 바위 경력이 십년 이상으로 베테랑이다 별명은 깜상으로 산에서
살다싶이 하다보니 온몸이 햇볕에 그을러서 생긴 별명인것 같았다 만장을 손금 보듯 하는
형식이 우리팀에 합류를 하게 된것도 우연의 만남에서 이루어 졌다
어느날 나는 이대장과 몆이서 도봉산 냉골을 출발하여 바위를 하나씩 타고 가고 있었다
그때 당시 우리가 오르는 바위마다 이름이 있었는데 우이동 쪽 할미 바위까지의 바위들이
대략 4.5.십여개의 크고 작은 것들로 난이도가 있는것들도 더러 있었는데 그중 칼바위가
까다로운 측에 낀다
내가 처음 칼바위에 다가 갔을때 아니 처음에는 다가서는 것 조차 힘들었다 칼바위의 지형이
접근하기가 어렵게 되있는것이 다가 서자 마자 직벽으로 30 미터쯤 되는 아래가 내려다
보이기 때문에 앞에서면 공포심이 먼저 다가온다 이대장과 처음 칼바위에 갔을때의 심정은
난감 그 자체였다 너무도 힘들었던 그날 이였섰는지 그날밤 자다가 놀라서 깰 정도였으니
말이다
포대능선 밑에있는 말바위에 도착하여 잠시 휴식한뒤 그날따라 이대장과 회원이 먼저
통과하고 내가 맨나중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바위틈새에 발을 너무 깊게 집어 넣다보니
발이 끼어 빠지지 않는 난감한 상황이 벌어졌다 회원들은 내가 뒤따라서 오겠거니 하고 다음
코스인 치마바위 쪽으로 향하고 나는 발이 끼어서 당황하고 있었다
그순간 누군가 내뒤에 바싹 붙어 나의 신발을 풀고 있는것이 아닌가 돌아볼 틈도없이 민첩한
동작에 위험을 피할수가 있었는데 그때 그사람이 깜상 형식이였다 지금도 생각하면 당시에는
3개월 정도 바위에 익숙해 있을때 였었는데 형식의 고마움을 잊을수가 없다
그일로 형식을 알게 되였고 형식의 합류에 팀의 움직임이 더욱 빨라지게 되었다 포대능선을
가기전 바위타는 사람들만이 통과 하는 곳이 말바위라는 곳인데 말의 얼굴 형상을 하고
있어서 붙혀진 이름인데 단순 코스인데도 까다로운 곳으로 아래로는 직벽으로 15미터
낭떨어지다 리찌의 베테랑인 형식을 그렇게 우연히 말바위에서 알게 된 것이다
선등을 서는 형식이의 믿음직한 뒤를 따라 만장으로 향하는 회원들의 서는 순번을 숙지
하는것은 만일의 사태를 생각하는 것이다 만장 쪽은 리찌를 꺼리는 곳임에도 도전을 계속
한것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무모한 도전이였던것 같았다 그것도 어려운
코스로만 다녔으니.
우리는 만장봉으로 진입하는 초입의 어려운 코스를 통과하고 형식이 계속 앞으로 전진하는
가운데 8부 능선쯤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8명 중간에 내가 서고 이대장은 맨뒤에서 커버를
하는 식으로 등반을 하는것은 여러가지 상황에 대처하기 위함이다
여성회원 3 명이 함께 등반하게 되었는데 그중 이선희라는 여성은 바위 경력이 일년쯤으로
공격적으로 바위를 타는 사람이다 그날도 몸놀림이 아주 좋아 보였다
그래도 나는 걱정이 되여 팀내의 선배로서 이선희씨에게 순번따라 움직이라고 당부를 잊지
않았다 바위경력 3년차인 박여사가 한마디 거들고 나선다 내가 이대장의 회원이 되기전
박여사는 팀내에서는 박반장으로 통하고 있었다 위암 수술을 하고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서
산을 찿았다가 이대장을 만나 바위타기에 푹 빠졌다 한다 박여사의 날렵한 바위타기는
도봉산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정도로 유명하다
박여사는 늦게 발견된 위암 수술을하고 건강 회복을 하기 위해서 도봉산을 찿았다가 이대장을
냉골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부터 바위를 타게 되었다 한다 지금은 건강도 무척 좋아져
바위타기를 멈출수가 없다고 하는데 옆에서 보기에도 정말 적극적인것이 저사람이 위암
3 기 수술을 받은 사람인가 믿어 지지가 않는다
도봉산 한사랑 리찌팀에서도 총무를 맡고있고 회원들간에 유대도 끈끈하다 박여사는 산에
오를때마다 도시락을 맛있게 싸오는데 정작 본인은 수술 때문에 많이 먹지를 못하지만
올때마다 늘 푸짐히 들고와서 팀을 항상 즐겁게 하기도 한다
이제 만장 정상이 눈앞에 보인다 우리는 바로 코앞에 보일듯하는 정상을 향해 출발을 하면서
마지막 코너를 돌아 올라가기 시작했다 전날 밤사이에 소나기가 내렸던 터라 오늘 날씨는
아주 좋지만 정상부근은 습기가 아직도 잔뜩 배여 있는것 같아 위험 한것도 같지만 별로
대수롭게 생각 하지는 않고 우리는 만장 정상 부근의 마지막 코너를 돌고 있었는데 이선희
대원이 갑자기 순번도 아닌데 먼저 올라가는것이 아닌가
나는 밑에서 올려다 보면서 제지할 겨를도 없이 올라가는 이선희 대원을 보고 있었는데 순간
이선희 대원의 몸이 공중에서 회전을 하며 바위 아래로 떨어지는것이 아닌가 아래로는
500 미터 직벽인데 이선희 대원은 바위 측면과 측면 사이에서 소생하는 작은 소나무에 몸이
걸쳐져서 간신히 직벽 아래로 추락은 면했다
너무도 갑작 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우리는 황급히 이선희 대원의 몸을 절벽 안쪽으로 옮겨
놓고 응급 조치를 하고 119 에 헬기 요청을 황급히 했다
정상 부근에서 이선희 대원을 옮기기 위해서는 들것이 있어야 하고 로우프가 있어야 되는데
구조대에 연락을 하고 도착 하는데 시간이 너무 흐르는 것같아 대원들의 모습은 이선희
대원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그냥 지켜 볼수밖에 없는 판국에 그저 난감할 뿐이었다
오전 11시 30 분에 사고가 났는데 백병원에 오후 8시에 도착 했으니 웬만한 사고는 병원에
오기전 죽을수 밖에 없는 실정이 산악 사고의 특징이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점퍼를 벗어 이선희 대원의 몸에 걸쳐주며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를
하면서도 걱정이 앞서는 것은 구조대가 들것을 들고 이곳에 올려면 웬만한 사람은 오르기
힘들기 때문에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될것 같아 속으로 은근히 걱정이 앞서 있었던
그때의 심정 이었섰던것 같았다
이안은 안개 바위를 지나면서 그때의 끔찍했던 기억들을 애써 떨쳐 버리려는듯 몸을 한번
움추려 본다
울긋불긋 등산복 차림의 남녀 일행들의 뒤를 따르면서 이안은 산행을 할때마다 바위를
타는 사람들을 보지만 이제는 그자체가 너무도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다
마음을 조리며 바위를 타던 시간도 한사랑 팀들도 만장의 사고 이후 침묵속에 그렇게
각자의 시간들이 흘렀다
일반 산행은 올라 갈수록 숨은 차지만 마음을 조려 할필요도 없고 멋은 없지만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을 만끽 할수있는 여유가 있다 가슴을 스치는 바람 맑은하늘 파랗게
흐르는 구름 사이로 막역하지만 그리움 같은것을 내마음대로 안을수도 있다
여름을 따라 자생하는 꽃과 나무들 자연의 온갖 풀잎들의 다투듯 피고짐의 화려함은
인간에게 자연이 선물하는 최고의 순간인것 같다
이안은 땀을 훔치며 포대능선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그동안 바위를 타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주일날마다 추락사고가 나는 것 을 보아 왔지만 한사랑
팀에서는 그런 사고는 없으리라 생각 했었다 그런데 정말 뜻밖 이었다 그 일로 인해
한동안은 산행을 멈추었섰는데 오랜만에 산행하는 이안의 마음에 무언가 아쉬움이
스처지나간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맞이하는 도봉산은 변한 것 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것처럼 보인다
무슨일이 있었수 하는것처럼 언제나 그자리 그곳에 그대로들 있다
어쩌면 억하심정의 인간들이 스스로 빚어내는 온갖것들을 참아 내며 포용으로
화답하는 도봉산에 자연의 그런 원대함이 숨어 있는것을.
저하늘 높히 그리고 멀리 내꿈되여 흐르는 구름처럼 자연은 무한대의 포용의 품으로
인간들을 언제나 맞이해준다 이안의 가슴속에 남아있던 만장봉의 사고도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삶의 부분처럼 이제 마음속에 남아있던 아쉬움들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잊어 버릴때가 된 것 같다
이안은 신선대 바위에 걸터 앉아 저멀리 보이는 수평선 넘어 옛일들이 아지랑이처럼
피여 오름을 가슴으로 느껴본다 국민 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이안의
파란 만장한 행로가 시작 된다
이안은 동네에서 다들 부러워하는 부잣집에 외동 아들로 태여 났다 아버지의 유창한
삼국어(영어 일어 중국어)실력에 호탕한 성격은 주위에 늘 따르는 사람들로 붐볐지만
호사다마랄까 좋고 나쁨은 항상 병행 하며 일순간 삶을 바꿔 놓기도 하는 것처럼
이안의 운명도 그런 숙명을 비껴가진 못했다
가세가 갑자기 기울면서 국민 학교를 졸업 하자마자 이안이 한것은 연탄 공장에서 어른들이
수레를 끌면 뒤에서 밀어주는 그런 일을 시작 했는데 그것도 동네에서 친구의 아버지가
마침 연탄공장 감독으로 일하고 있어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는 중학교도 시험을 보고
들어갔는데 이안은 중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아놓고 있던 중이였다
어느날 이안이 수레를 뒤에서 밀고 가는데 누군가 이안 하고 부른다 그러지 않아도 이안은
일을 나갈때마다 누가 알아 볼새라 얼굴을 푹 숙이고 가는데 누군가 이안을 알아 본 것이다
이안이 흠칫하며 돌아보니 이게 어떻게 된일인지 나에 짝이였던 은미와 항상 라이벌 의식을
갖고 있던 창호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면서 서있는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쥐구멍이라도
기어들어 갈 것 같은 수치심에 몸이 떨려옴을 애써 참으며 어...으..하고 그.그래..하면서
검정이 묻은 얼굴을 푹숙이고 나도 모르게 수레를 힘껏 밀어 대었다 수레를 끌고 가는
아저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이녀석. 오늘 아주 세게 밀어 부치네. 하면서 무슨 좋은일이라도
있냐듯이 힐끔 돌아 보며 중얼 거리듯 이세상에 부모마음 다같은 마음, 하면서.
콧노래를 흥얼 거린다
국민학교 동창을 만난 그일이 있고 얼마후 모든 친구들이 내가 연탄 수레를 밀고 다닌다는
소문이 쫙 퍼져 모르는 친구들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나는 가급적 동네를 피해 멀리
배달이 되는곳으로 다니기 시작 했는데 창피하기도 했지만 나의 어려운 환경을 내보이기가
정말 싫었다
그럭저럭 한 달이 다되어 갈 무렵 일을 늦게까지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가며 품안에 받아둔
한 달 치 보수가 하늘에 빛나는 별빛처럼 내 작은 품안에서 빛나고 있었다
한 달 치 보수를 받는 순간 부모님의 모습이 먼저 떠오르며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더니
그동안의 고달픔도. 말없이 나를 짓누르고 있던 창피함도. 견딜수 없게 만들었던 내마음의
비굴함도. 순간. 모두 날아가는 것 같았다
오늘따라 유난히 밝아 보이는 별빛이 내 작은 어깨위에 쏟아져 내리는 것 같았다 그렇게
처음 일을 해서 돈을 벌어 본것이 13살때의 일이었다
신선대 주변이 소란해지며 누군가 부르는 낯익은 목소리가어디선가 들려온다 오랜만에
이대장이 못보던 일행들과 함께 바위타는 코스로 올라오며 나를 보고 반색을 한다 이대장도
한동안 보질 못했섰는데 신선대 위에서의 조우는 정말 뜻밖이였다
이대장과 그 일행들과 칼바위에서 간단히 몸을 풀고 거북샘에서 잠깐 쉬면서 처음 이대장과
만나 바위타는 연습을 하던 거북샘 옆의 바위를 우리는 함께 바라보며 올라가 보기도 하면서
지난 옛일을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높이는 3미터 남짓 직벽으로 4-5명이 동시에 올라갈수있는
평평한 바위로 기본 연습 바위로서는 훌륭한 곳이다
락 클라이밍(rock climbing)을 할때에 가장 중요한것은 바위에 나있는 crack을 선별해서
재빨리 찿는 순발력이 필요하다 숙련이 될때까지 crack 홀드와 바위에 몸을 올려 놓는
동작을 반복해서 연습을 하다 보면 몸에 자연히 배이게 된다 올라가는 것도 내려가는것도
중요한데 내려갈때의 동작에서 balance climbing 으로 올라 갔다면 내려가는 back and foot down 을 할때에는 뒤를 큰동작으로 돌아보면 안된다
줄을 걸지 않기 때문에 웬만큼 숙련이 안된 사람은 내려오는 동작을 할때에는 정말 위험하다
평평한 바위를 올라가는 것에는 경사도에 따라 달라지는데 도봉산에서 난이도가 좀 있는것은
포대능선 밑에 직벽으로 되있는 다람쥐 바위가 그중 하나고 만장봉에서는 호랑이 굴과
피아노치며 도는 바위정도가있다 도봉산에서 수년간 바위를 타면서 어느 한곳을 소흘히
했다면 지금의 나도 여기 없었으리라
이대장이 일행들을 이끌고 먼저 자리를 뜨고 이안은 천천히 일어선다 이안은 거북샘
아랫길로 걸으면서 그옛날 연탄수레를 밀던 수원에서의 고향 생각을 다시 떠올려본다
100년도 더된 살구나무며 대추나무가 마당에 울타리 가장자리에 여러구루를 포함해
고목나무가 몆구루 더 있었는데 기억으로는 여름이면 울창한 푸른 잎들이 집안가득
굉장했었다 뜰이 넓어 당시에 미군 트럭도 마당 안으로 들어올 정도였다
연탄공장에서 일한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중학교에서 입학 통지서가왔다 동네 친구들은
교복을 맞추어 입고 나에게 자랑을 하기도 했는데 아버지는 통지서를 받고도 나에게는
묵묵부답인것이 나는 당시의 집안 사정상 묻고싶어도 알고 싶어도 마음만 태우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집에서 기르고 있던 독일산 세바트인 메리를 아버지의 지인이 가져 간다고
온 것이다
지금도그때의 상황이 또렷히 떠오르는것은 그날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친구분이 메리를 트럭에 싣는데 메리는 좀처럼 트럭에 올라가지를 않을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아버지를 자꾸만 처다 본다 나는 숨을 죽이고 어른들 뒤에서 메리를
처다보고 있었는데 메리가 나를 처다보는것이 아닌가 나는 순간 눈을 감고 싶었다
나를 처다보는 메리의 커단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는것이 아닌가 지금 이글을 쓰면서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히 생각나며 눈물이 떨어진다 당시 가엾은 메리의 눈망울을 지금도
잊을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안의 본적은 서울이다 서울에서 태여 났지만 국민학교 생활은 수원에서 했으니 수원이
이안의 고향인 것이다 메리는 어렸을때부터 이안하고 같이 자랐다 메리는 새끼때부터
남달리 덩치가 커서 이안이 어렸을때는 등에도 탔던 기억이 날 정도로 메리는 줄곧
이안의 옆에서 지켜보며 있었던 것이다 메리가 울며불며 떠나가던날 이안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억누를수없는 심정을 표현할수 없을 정도로 슬퍼옴은 할머니와 헤여질때와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태여 날때부터 할머니가 계셨는데 친할머니는 아니고 홍성 할머니로 어머니
옆에서 가사일을 거들어 주셨던 할머니다
당시에는 아버지 주변사람들이 집에서 가끔씩 머물다 가곤 했었는데 무얼하는 사람들이
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항상 권총을 가슴에 차고 다닌걸로 봐서는 군에서
통역관으로도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것과 어쩌면 상통된것이 아닌가 생각 된다
어쨌던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나의 우상이였다 항상 사람들을 몰고 다니면서 호탕한 성격에
주위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것을 보아 왔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보인것 같았다
동네에서 아버지의 친절을 받지않은 사람들이 없을 정도로 50년대 후반 실정이란 말 할수
없을 정도로 누구나가 다 궁핍한 생활을 아니 한 사람들이 없었을 시기였다
당시 미 군인들의 식당에서 나오는 여러가지 물건들을 가끔씩 트럭에 실어서 가져오곤
했는데 그날은 동네가 떠들석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우리집을 들락 거리곤 했었다
메리가 떠나가던 날 밤 할머니의 생각에 더욱 복 바쳐 오르는 슬픔을 억누르지 못하고
이불속에서 밤새 훌쩍 거리던 생각이 난다 어렴풋이 아련하기만한 기억속에서 떠오를듯
감춰지는 옛일들에 이안은 산등성이를 걸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진다 이안은 저 멀리
아득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인생이란 허허로움에 격세지감의 세월을 생각해 본다
메리를 아버지의 친구에게 맡긴것도 수원에서의 생활을 더이상 할수없는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그리 하신 것 같았다 할머니가 떠나 신 것 도 아마도 그 때문인 것 같았다 할머니가
떠나 가시 던 날 할머니는 나 때문에 나를 보지도 않고 몰래 떠나 가셨던 것이다 지금도
할머니의 영상이 희미하게 내가슴 언저리에 이렇게 남아 그때의 향수를 부르고 있는것을
보면 얼마 만큼 할머니가 그리웠었는지 짐작이간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을 때 보다 도
더 서럽게 몆날 몆일을 울었으니까 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렸을 때 너무도 큰일들이 내주변에서 일어난 것 같다 그일로 인해
내자신이 감성적으로 외로움을 많이 느끼며 살아 온 것은 아닌가 생각 된다
메리도 떠나고 얼마 후 학교에서는 재차 독촉장이 날라 왔다 입학 절차를 위해 학교로
오라는 통지서를 보내 왔지만 집에서는 대답을 안 한 것이다 아버지는 수원에서의
생활이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신 것 같았다 당시 어린 내마음에도 짐작은 했었지만
아버지의 위상이 한순간에 무너져 버린것에 대한 자책감이랄까 아버지도 감당할수
없는 상황에 어디론가로 그냥 숨어 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북에서 단신으로 내려오신 분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일가
친척이라고는 한사람도 주위에 없는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방첩기관에서 통역관으로
근무하던중 5.16 군사 혁명이 나면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어수선한 가운데 어느날 그렇게 눈물을 뿌리며 어디론가로 실려갔던 메리가 목에 긴
쇠사슬을 끌면서 대문으로 들어서는것이 아닌가 온몸이 먼지 투성이로 메리가
울면서 마당으로 들어서는순간 나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새도 없이 메리를 부둥켜 안고
울고 또 울었다
아버지도 메리의 극적인 해후에 감동을 받았는지 어찌됐든 함께 이사를 결심 하신것
같았다 며칠이 지나서야 메리가 기력을 찿았는지 정상으로 회복 한것 같아 기쁜
마음도 잠시 어느날 메리가 마당을 숨가쁘게 구른다 당시정부에서는 쥐를 잡아가면
포상금을 주었기 때문에 동네 곳곳에는 쥐약이 널려 있었다
메리는 집에 귀환 한지 얼마 되지않아 여러 방면으로 응급 조치에도 불구하고그렇게
쥐약을 먹고 고통스러운 최후를 맞았다 기쁨도 잠시 메리가 너무 불쌍하여 몆날 며칠을
그렇게 울고 또 울었다 메리를 양지바른 동산에 묻고 얼마후 동네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나돌아 다녔다
그누군가 메리의 무덤을 파헤쳐 삶아 먹었다는 괴소문이 돌았다 아버지와 메리의 무덤을
확인해 보고 모든것이 사실로 밝혀 졌다 나는 그날밤 야릇한 흥분감에 휩싸여 메리를
삶아먹은 그자들을 찿아가 그들을 정말 죽이고 싶었다 어린마음 이였섰지만 메리의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메리가 몇십리길을 헤매이며 집으로 달려오는 순간들이 내눈속으로 내가슴속으로
파고 든다 자신이 머물던 곳을 향해 달리는 메리의 가슴속에서 무엇인가 떠올렸을
상상이 메리를 집으로 이끌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떻게 그 먼길을 달려올수 있었을까
메리를 생각하면 눈물이 먼저 떨어진다
가엾은 메리 아직도 메리의 영상을 지울수 없는 내마음 깊은곳에 메리의 그 눈빛을
그 눈물을 잊을수가 없는 것처럼 세월도 그렇게 애수의 빛을 머금은채 내주변을 맴돌며
함께 흘러 갔다
동네 친구들이 새교복을 입고 학교로 향하는 모습들이 눈에 뛴다 아침일찍 연탄공장에
출근을 하면서 그무엇인가 알수없는 슬픔 같은것이 내마음을 스처 지나 가는것도 같다
떨처 버릴수 없는 우울함을 안고 그렇게 또 며칠이 흐른 어느날 이사 한다는 아버지의
말씀이 있고 며칠후 우리는 경기도 의정부로 이사를 했다
아버지는 40대의 나이에 모든것을 접고 은둔자처럼 82세에 돌아 가실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렇게 살았다 살아생전 어머니는 아버지와 언성을 높힌적이 없었는데 두분의
다툼을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그렇듯 어머니는 말이 없는 조용한 성품에 항시 아버지를
존중하는 쪽이였다
아버지가 미국사람들이 많은 의정부로 오신것은 아마도 영어를 했던 인연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때서부터 아버지는 두문불출 은둔자의 길을 걸으신것 같았다
이사한 첫날부터 나는 밥을 지을 땔감을 찿으러 다녔는데 주변 야산에는 이미 땔감이라고는
눈을 씻고 찿아봐도 없는것이 당시어려웠던 상황처럼 주변 야산은 거의가 다 민둥산으로
변해 있었다
어느 누군가 일러 주어서 찿아 간곳이 집에서 십리길이나 되는 송추란 산골 이였는데 멀기도
했었지만 어찌할 방도가 따로 없었다 당시 내나이에는 엄두도 못낼 그런 곳 이였는데도
어려웠던 그때의 상황에 나는 신들린것처럼 이사한 첫날부터 땔감을 나르기 시작했다
미 군인들이 눈에 자주 띄는 의정부에서의 첫날부터 나는 매일같이 지게를 지고 송추로
나무를 하러 다녔는데 아무리 둘러 보아도 나만한 아이들은 눈에 띄지를 않는다
처음에는 너무도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사항에 돌아볼 틈도 없었는데 하루 이틀
지나다보니 어떤 때에는 창피한 생각이 들기도 한것이 지게에 땔감을 가득 얹고 내려
오다보면 내또래의 교복입은 학생들을 마주칠때 더욱 그런 생각이 드는것 같았다
어떤날은 지나던 학생들 앞에서 지게를 진채로 넘어 진적도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 남몰래
눈물을 흘리기도 하였다 어른들이 지고 다니는 지게였었는데 내키만큼이나
컸었던것 같았다
이안은 내려오던 길을 잠시 멈추고 바위 중턱에 걸터 앉아 무성한 숲 주변을 돌아 보면서
그옛날 땔감을 찿아 송추의 푸른숲속을 헤매이던 어린시절 나무를 하러 다닐때 조그만
시집을 갖고 다녔던 생각이 난다 숲속에 누워 푸른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큰소리로 읽던
생각 수원에서 연탄수레를 밀던 어느날 이웃 동네에 배달을 갔을때 마당에 가지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것이 아닌가 아저씨도 모르게 가지를 하나 슬쩍 따서 먹은적이 있었는데
당시 남의것을 훔쳤다는 죄책감에 괴로워 했던 일들 수원을 떠날때 동산에 혼자 올라
가엾은 메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 하던 일들 중학교 교복을 새로 맞추어 입고 자랑하던
동네 친구들이 떠오른다
지게를 지고 송추로 땔감을 구하러 다니다보면 한나절이 걸린다 의정부로 이사온 첫날부터
땔감을 구하러 다니는것이 하루 일과처럼 된 것이다 수원에서 시작된 고된 일들이
자연스럽게도 계속 연결이 되며 쉴틈이 없이 항시 바쁜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 그렇게
몇개월이 흐르다보니 하는일도 익숙해져 새벽에는 두부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저소득층을
위하여 설립된 천막으로 된 야간 학교 에도 입학했다 이때 운동도 열심히 했는데 나의
유일한 탈출구였다 나무를 하러 다니면서 여러가지 동물도 키우고 있었는데 토끼가
새끼를 많이 낳는것을 보고 열심히 길렀던 생각이 난다
당시 토끼는 우리집 유일한 육류 대용 이였는데 건강에 많은 도움을 준것 같았다
늘 혼자 있다보니 운동과 책이 친구처럼 자연스럽게 가까워 졌다 누구와 어울릴 시간도
없었던 터라 틈만 나면 운동을 하고 책을 보았는데 이후 사회 생활에 많은 보탬이 된것
같았다
수원에서의 마지막날 동산에 올라 메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던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마지막 몸까지 내어준 메리의 헌신적 사랑에 눈물을 뿌리던 그 동산이 지금쯤 어떻게
변해 있을까 뛰어놀던 그동산은 메리의 혼을 간직한채 아직도 그대로 있을지도 모른다
내가 지금 이렇게 앉아있는 도봉산 숲들이 우거져 있듯이 말이지
교복을 입고 뽐내던 친구들과 연탄 수레를 밀면서 멀어지던 일들 어쩌면 친구들도 그옛날
동네 골목을 누볐던 골목대장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연탄수레를 밀던 가엾은 친구를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이 문득
지난 옛일들을 생각하며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세월의 덧없음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안은 세월에 이끌리어 변하여가는 나약한 인간들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서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천년을 살것처럼 이끌고 있는것인지 이안은 도봉산의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 보면서 수원 동산에서의 맑던 하늘을 떠올린다
도봉산(道峰山)은 높이 739.5m 서울시 도봉구와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양주시 장흥면에
걸쳐있는 산이다
백두대간의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뻗은 한북정맥의 연봉을 따라 운악산 불곡산을 거쳐
남서쪽으로 내려오다가 서울 동북쪽에서 우뚝 솟아 우이령을 경계로 북한산으로 이어진다
산 전체가 하나의 큰 화강암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최고봉인 자운봉(紫雲峰, 739.5m),
남쪽으로 만장봉(萬丈峰)·선인봉(仙人峰), 서쪽으로 오봉(五峰)·여성봉이 있다
다양한 기복과 울창한 수림이 절경을 이룬다 도봉동·송추·망월사 계곡은 유원지로 개발
되었으며, 불암산 수락산과 더불어 서울 시민의 휴식처 및 등산로가 되고 있다 그밖에
망월사 쌍룡사 천축사 등의 절이 있다
도봉산의 맑은 하늘 어딘가에 사람들의 꿈들을 이어주는 희망이 맴돌고 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말없이 이어지는 무언의 희망은 당시 여린 이안의 가슴속에도 말없이 뛰고
있었다 의정부에서의 고단한 생활은 이안 의 본인을 돌아볼 틈도 없이 흐르는 가운데
새벽 4시부터 두부 공장에서의 일은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 몆개월이 흐르면서
곧 익숙해져 월급을 기다리는 여유가 생기면서 물질을 대하는 나름대로의 철학을 이때부터
몸에 익히기 시작했다 송추로 땔감을 가지러 매일같이 가다보니 재고가 쌓이기 시작하면서
틈틈이 가축을 키우는 여유도 생겼다
이안이 이때부터 영어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는데 야간학교에서 선생님의 칭찬을 늘
들었던것 같았다
아마도 이때 몸에익힌 영어가 훗날 미국 생활에서 도움이되지않았나 싶다
이안의 가슴에는 아직도 지우지못한 어쩌면 영원히 지울수 없는 영혼의것이 될지라도
잊을수는 없을것인지도 모른다 이안의 가슴에는 아직도 조약돌이 있다 이안의 가슴속
깊은곳에 남아있는 조약돌은 아마도 죽을때까지 버리지 못할것이다
군생활때 우연히 알게된 당시 고 2 학생이였던 자은이는 지금쯤 미국의 어느하늘 아래에서
살고있을지도 모른다 자은이가 서울 사범대에 어렵게 진학하여 다니던 여름 어느날 함께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어느 해변에서 우연히 주운 검정과 하얀빛이 나는 조약돌을
각각 하나씩 갖은적이 있었다 우리는 조그만 행낭을 만들어서 조약돌을 간직하게 되었는데
만날때마다 서로의 조약돌을 보면서 우리들의 증표인양 즐거워 하곤 했었다
군생활을 하면서 알게된 자은이는 당시 고등학교 2년차로 하얀 칼라의 교복이 무척이나
예쁘게 보이는 단발머리의 학생이였다 이듬해 자은이의 졸업식때는 먼발치에서 지켜
보아야만 했다
3학년 올라갈때 부터 토요일마다 늘 만나곤 했었는데 어느날 우리는 서로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고 선을 넘고 말았다 자은이를 처음 만나고 일년후의 어느날 이었다 졸업식때 자은이는
임신 2개월이 알려지게되여 이안은 자은이의 부모님으로부터 호되게 질책을 받았는데 당시
자은이의 아버님은 공교롭게도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는 기관장이었고 집에서 자은이는
외동딸로 애지중지 금지옥엽처럼 살고있던 때였다
그일이 있은후 이안은 최전방으로 전속명령이 떨어졌는데 지금 생각하니 자은이의 아버님
영향이 미치지 않았나 생각 하고 있다 갑자기 전속 명령을 받고 이동할수밖에 없었던터라
자은이에게는 연락을 할수있는 시간조차 없었는데 어느날 자은이가 어떻게 알고 이곳까지
불쑥 찿아온 것이다 핼쑥한 모습으로 찿아온 자은이가 너무도 반가워서 어쩔줄 모르는
이안에게 자은이는 오빠 하고 목이메인 소리로 내일 서울사범대에 입학하는 날이야. 라고,
하면서 울음을 터트린다 자은이도 그동안 마음고생이 심한것 같았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를
부둥켜 안고 한참을 같이 울었다
자은이가 사범대를 졸업할때까지 우리는 부모님의 강력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조약돌을 보면서 어렵게 어렵게 서로의 우정을 쌓아 나갔다
자은이가 서울사범대에 입학식을 하던날 교정에서 자은이의 아범님과 또다시 마주치게
되여 곤혹을 치르던 날 이안은 부대를 허락없이 이탈을 하여 탈영병으로 간주되여
군법회부에 회부되여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자은이가 고등학교 졸업즈음 임신사실을 알고
대노한 자은이의 아버지가 이안의 신상을 면밀히 조사한것 같았다 당시 보잘것없는
학력으로 어디하나 내세울것 없었던 이안의 신분을 자은이의 아버님으로서는 수용을 할수가
없었던것 같았다 거세게 반대를 하시는 자은이의 부모님으로부터 저항을 받으면서 이안은
아마도 그때부터 학력의 콤플렉스를 느끼기 시작한것 같았다
비정하리만치 차별을 두어 다가오는 냉혹한 현실앞에 내던져진 꿈많던 이안의 젊음은
사회의 저항에 부딧치곤 했는데 어느곳에서든 학벌을 따질때에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것 같았다
자은이가 사범대를 졸업할즈음 군에서 전역을 하게 되였는데 당시 이안의 나이가
22세쯤인것 같았다 5년여의 평탄치 못한 군생활을 하고 사회로 나왔지만 어딜가나
학력증명을 요구하는 현실을 외면할수가 없어 학력을 만들기로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돈이면 않되는게 없는 세상이 아닌가 비정한 사회에 학력을 위조한 비열한 수단으로
대기업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입사시험에 합격하여 자은이가 있는 미국에 가기전까지
7년여의 직장생활을 한것 같았다
자은이가 사범대에 입학하는 모습이 보고싶어 부대장의 허락도 없이 부대를 이탈한것이
알려져 군법회부에 넘겨져 재판을 받던날 선고를 내리던 재판장이 월남에 있을때
부대장인것을 알고 깜짝 놀랐는데 부대장은 벌써부터 나의 신상서를 읽고 나온지라
별로 놀라는 기색은 보이지가 않아 보였다
귀하는 월남전쟁의 휴의증으로 순간 부대적응이 평탄치 못함을 참작하여 무죄를 선고함
탕탕 선고봉을 두드리는 근엄한 표정의 재판장의 나무 망치 소리가 지금도 귓전에서
맴도는것 같다
군법 재판정을 나서는 이안을 부르는 재판장 아니 월남에서의 부대장이 군법 재판정에서의
엄숙한 표정은 어디로 갔는지 웃음띤 얼굴로 서있다
월남전우인 부대장과의 해후는 그렇게 재판정에서 상견례를 하며 옛전우의 신뢰가 아직도
남아있음을 보여 주었다
이안이 군복무시절 월남전쟁터에서 고국으로 돌아와 예하 군부대에 배속이되여
근무당시 지휘계통의 수순을 밟지않고 자은이의 서울사범대 입학식에 참석하기
위해 근무이탈을 하였을때 탈영병으로 내몰려져 군법회부에 회부되여 재판을
받을당시 재판관 (대령)은 월남전쟁당시 내가 근무하던 부대의 단장님이셨다
대령님과의 만남은 당시 부대가 이동하고 있었는데 부대 이동로에 베트콩들이
매설해놓은 폭탄이 터지면서 대령님의 짚차가 공격을 받으면서 운전병과 부관이
그자리에서 즉사를 하고 급박한 상황속에서 아무도 운전할사람이 없을때
경계병이였던 이안이 무조건 운전대를 움켜쥐고 대령님의 차를 운전하게 되면서
인연이 되었다
전쟁터에서 흔히 일어날수있는 예측불허의 일들이였다 우왕좌왕 하고 있을때 이안의
행동으로 당시의 위기 상황을 모면할수 있었던것을 대령님은 항시 부대원들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곤 했었는데 방향을 예측할수없이 총알이 빗발치는 급박한
상황속에서 어디서 그런 순간적인 용기가 났었는지 지금 생각해 보아도 정말
아찔한 추억인것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몸이 먼저 움추려 든다
이안은 당시 운전면허도 없었지만 두부공장에서 일을 할때 운반 트럭의 조수석에
앉아 어깨넘어로 배워둔것이 그런기지를 발휘하게 될줄은 정말 몰랐다
당시 운전병은 제대를 몆개월 앞둔 병장으로서 안타까운 전사를 했고 부관인
대위가 사망했는데 너무도 예측할수없는 순간적인 돌발상황이었다 더구나 단장의
짚차를 운전했던 병장은 귀국을 2개월 남겨두고 전사를 한것은 두고두고 가슴에 슬
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후 대령님이 주선한 무공훈장도 당시 18세의 너무도 어린 나이라 선뜻 받지를
못하고 이안보다 선배인 나이가 많은부대원들에게 양보를 했는데 대령님이 무척
섭섭해 하셨던 기억이 난다 그후에도 전선의 앞장에섰던 소대장들의 전사가 많아
현지임관 제도가 있었는데 소위 추서도 대령님이 앞장서 마련을 해주셨는데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 성사가 되지는 못했다
하루하루를 예측할수없는 전쟁터에서 부대장과의 각별한 인연은 그렇게 1년 6개월
동안 이어졌다
전쟁터에서 조국으로 돌아오면서 부대장과 헤어졌는데 다시만난것은 2년만에 나는
탈영병이 되여 군법회부에 회부되여 그렇게 법정에서였다 예측할수없는 일촉즉발의
생과사를 넘나드는 월남 전쟁터에서 부대장이였던 대령님은 나에게는 어떻게보면
부모처럼 자상하게 여겨지던 그런 분이셨다
이안이 월남 전쟁터에서 귀국하여 예하군부대에서 적응을 못하고 7년을 못채웠다 6년만에
군에서 전역을 하고 사회로 나오던날 아무도 반겨주는 사람이 없는것은 당연한
것이였는지도 모른다
이안의 가슴속 깊은곳에는 오로지 한사람 사랑하는 자은이가 있다 자은이가 내옆에 있는한
그 어떤 역경도 헤쳐 나갈것 같았다 이안이 7년제 소년기술행정병으로 군을 지원할때
국가에서의 소정의 금액과 생필품 도움을 집에서 받은것 같았지만 이제부터는 가족을 위해
부모님을 위하리라 생각하니 무언가 모를 감회와 더불어 두려움 같은것이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솟구쳐 오른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어린시절이 문득 떠오른다 이안의 키만큼이나 커단 지게를 지고
십리길 송추로 나무를 하러 다니던 시절들 야간학교를 다니면서 동트기전 두부공장으로
출근하며 새벽잠을 떨쳐버리지 못하던 그시절들이 22세의 지금 나이에 걸맞지 않게
얼마전의 일들이 아주 옛날처럼 느껴지기도 한것이 마음만은 정말 어른이 다된것 같았다
1965년 나라전체가 큰홍수의 재해로 피페해져 7년이 지나도록 회복을 못한것 같았지만
새마을 운동이 지역마다 자리를 잡던 때였다
군전역을 하자마자 이력서를 들고 부지런히 회사를 다녀 보았지만 어디 한군데
받아주는곳이 없는것같아 마음은 초초해지기 시작했다 야간 고등학교 중퇴의
학벌은 일반 회사에서는 받아주는곳이 없는것이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로 우선
졸업증명서를 먼저 보면서 사람도 보기전에 실격이였다 냉담한 사회의 반응에
자학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부터 니힐리즘 (nihilism)사상에 젖어들곤 했다
태양은 떠 오르는데 나를 위해 빛나지 않았고 달빛은 비추이되 차별을 두는것만
같았다
세상을 향해 자학을 하며 달빛을 향해 무수히 쏘아대던 이안의 화살을 맞는 달빛의
상처가 다시 이안에게로 되돌아와 이안의 마음에 더큰 상처를 남기곤 했는데 그토록
야속한 사회가 정말 원망스러웠다 어떻게 해볼도리가 없었지만 그래도 실날같은
희망을 버리지는 못하고 있던차 정부에서 경찰 공무원을 선발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브로커의 도움을 받아 학력을 만들어 경찰시험에 응시하여 합격이 되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 한것은 정의를 구현하기위해 불의를 서슴치않고 저지르는 이안을
두고 용납할수있는 세상은 없는것 같았다 합격후 정밀 신원조회에서 학력증명이
위조로 발각이 되여 사문서 위조로 군볍정에 이어 또다시 불구속으로사회의
법정까지 서게 되였다
경찰이 되여 정의구현에 나서기도 전에 법을 어긴 죄인이 되여 경찰서 유치장에
들어가게 된것도 처음이였다
불의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불순한 의도는 없는것이 참작이되여 징역살이는 간신히
모면하게 되었는데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들을 우대한
덕분인것 같았다
경찰이되여 사회정의의 무엇인가를 몸으로 불태우고 싶었던 젊은 꿈이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게 된것은 두고두고 평생토록 아쉬움이 남는 일이였다
이안이 우여곡절끝에 경찰의 꿈도 접어야만 했던 상황이였지만 실력으로 입증하려는
이안의 노력은 계속되였다 학벌을 중시하면 할수록 이안의 가슴속에는 치밀어 오르는
역겨움을 느끼곤 했는데 당시에 대학을 다니면서도 영어로 자신의 이름도 쓰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다
사람 됨됨이 보다도 가문을 중시하고 실력보다도 학벌위주의 형식을 중시하는 사회
저변에 팽배해 있는 계층의차별화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였다
사문서 위조로 곤욕을 치렀는데 한편으로는 이안의 실력에 내심 놀라워 하면서 그재능을
아까워 하는 사람들도 주변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검정고시나 학력을 만들기위해 공부를
할수도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너무도 많은 시간 때문에 오직 능력으로 평가를 받기만을
고집했다 지난후에야 독선적 행위였음을 깨달았지만 당시의 패기를 억누루지는 못했다
학업이란 것은 그시기가 있다는것을 결국 만용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평생의 후회를
하였는데 이안만이 알수있는 조그만 지식이란것을 내세워 뽐냄을 마다하지 않았으니
이또한 부끄러움에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고개를 들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상황이 달라 진것이 없듯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시스템의 구조를 이안의
능력으로 돌파하기란 역부족인것 같았다 공장이나 소규모 작업장에서 일할수는 있었지만
웬일인지 그런곳에서는 이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모 대기업에 또
학력증명을 만들어서 입사지원 서류를 넣었는데 1차 서류전형을 거쳐 2차 시험을 통과하고
3차 관상도 합격했는데 당시 회사에서 인물과 관상을 보는지도 처음 알았다 대기업에
합격통지서를 받기까지 혼란스럽던 사회의 시각이 이안의 시야로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전역할 당시 사회의 전반이 새마을 운동이다 월남전쟁 파병중이라 어수선한것
같았지만 나름대로의 사회의 모습은 역동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회의 온갖 저항에 부딪치면서 이안의 정체성을 숨기면서 뗫떳치 못한 비굴한 행동으로
또다시 학력을 위조하여 모기업에 입사하기까지 이안의 상황은 급박했다
누군가 생계를 책임질수있는 사람이 집에서는 필요한 것이다 언젠가는 또다시 응분의
대가를 받겠지만 내가 할수있는 일은 부모님을 봉양하기 위해서는 생계가 먼저인것처럼
어쩔수 없는 이안의 선택이였다는것을 하느님만은 또 부처님이 보고 계시다면 용서를
해주실것이라고 그렇게 믿었다
대기업의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던날 자은이가 기뻐하며 달려왔다 대학생이 되면서 그전의
앳띤 모습은 어디로 가고 한층 성숙하고 제법 어른스러워 보인다 오빠 축하해. 하면서
환하게 웃는 자은이의 맑은 모습이 오늘따라 파란 하늘보다도 더 맑게 빛나 보였다
152센티의 키에 하얀 피부가 햇볕에 빤짝거릴때는 백설공주가 환생한것처럼 보일때도
있지만 언제나 만날때마다 환하게 웃는 모습에서 그동안 나를 짓누르고 있던 모든
고난들이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는듯 했다
끈질기게 반대하는 자은이 아버지의 감시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만남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던 어느날 웬 낯선 사람들이 찿아와 임의 동행식으로 연행하여 감금도하고 자은이를
만나지 말라는 회유도 계속 되었지만 우리의 만남을 막지는 못했다 자은이도 내색은
않했지만 완강한 부모님의 반대에 내심걱정을 하면서도 두려워하지는 않는것 같았다
결국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자은이가 어느날 갑자기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것이다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것 같은 충격속에 이세상 모든것들이 내눈에서 사라져 버리는것
같았다 하늘에 뜨고지는 태양이 매일처럼 다가오던 그맑은 아침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것이다 현실은 너무도 암울하게도 그렇게 냉정하게 다가오며 이안의 슬픔을
매정하리만치 증오로 바꿔놓고 있었다 아름다운 젊음의 진실은 무엇이며 순수한
젊음들의 사랑은 무엇이냐
순수한 젊음의 진실과 사랑이 통하지 않는 매정한 현실들 젊음의 열정을 가혹하게
짓밟고 외면하는 비정한 사회를 향해 증오의 날을 세우는 이안의 마음에 날아드는것은
아픔의 고통뿐인것을 이안은 몆날 몆일을 상상조차 할수없는 고통과 슬픔의 나날을
그렇게 보내고 또 보냈다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아무 생각없는 일상들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던 어느날 자은이로부터 편지가 왔다 겉봉투에 영문으로 인쇄된
Stanford Junior University 란 영문글자가 낮설게 다가왔다
유심히 쳐다보는 이안의 가슴을 스치는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슬픔같은것이 지나간다
슬픔이 가시기도전에 가슴이 뛰지만 선뜻 열어보기가 망서려지는것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이 도대체 용납이 않되고 이런 현실이 아직도 이안의 마음을 받아들이지못하고
있음 이지만 현실은 진행형이다 마음은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또한 현실은 그렇게
마음처럼 쉽지만은 않은것이 이안의 현재이고 그것이 또한 이안의 심정 인 것이다
그렇게 마음속에 자은이의 영상을 하루도 놓아본적이 없는 이안이지만 편지를 받아든
이안의 마음은 기쁘면서도 착찹한 마음에 눈물이 먼저 떨어져 내리는것을 애써 참으려는듯
봉투를 다시한번 살펴본다 캘리포니아 란 영문자가 선명하게도 다가온다 떨리는
이안의 손끝에 자은이의 체취가 묻어나오는듯 자은이의 영상이 이안의 눈속으로 펼쳐진다
자은이가 고등학교시절 여름 어느 토요일 함께 치악산을 등반한적이 있었는데 치악산 정상
부근을 오르던중 자은이가 순간 발을 헛딛어 발목을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정상 부근서부터 4시간여를 업고 내려 온적이 있었는데 힘은 들었지만 마음은 너무도
즐거웠던 생각이 난다 정상적인 등반보다도 더 재미 있었던 당시의 생각이 난다
무척 많은 이야기를 진솔하게 나눌수 있었던것도 아마 그때쯤인것도 같았다 등에 업혔던
자은이의 그 따뜻한 체취가 왜, 지금 생각이 나는걸까,
이안의 가슴으로 스며드는 자은이의 하얀 얼굴이 또다시 날아든다. 아.자은아.
자은이가 하얗게 웃으며 오빠 하고 금방이라도 달려올것만 같다 치악산 등반후로 이안과
자은은 하루도 거르지않고 매일 만나다 싶이했다 이안은 태여나서 어머니 다음
여성으로는 자은이를 알게 되면서 이세상 모든것의 존귀함에서 아름다움을 보았다
겨울내 얼어있던 동토를 녹이러 달려오는 봄바람처럼 때로는 아름다운 목련처럼 하얀
꽃속에 숨어 더욱 하얀 진실을 갖고 있는듯 물밀듯이 스며드는 그리움처럼 멈춤이 없이
배어나오는 해맑은 정감들 이안의 삶을 이끌고 있는 이정표처럼 자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무한의 사랑을 느껴 본것도 이무렵 부터 인 것 같았다
자은이가 손끝으로 어루만졌을 편지봉투에서 자은이의 체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것만 같다
이안의 기슴으로 물밀듯 배어오는 자은이의 모습이 눈물속에 어른 거린다 아.. 자은아 .
오빠, 하고. 보고 싶었어 써내려간 편지지 위에 잉크가 번져있는것이 눈에 먼저 보인다
아마 자은이도 마음이 편치는 않았나보다 형제도 없이 외동딸로 자란 여린마음의
자은이에게 너무도 큰 시련을 주는것 같아 가슴이 더욱 메여 지는것만 같다
어느 여름날 자은이와 여행을 한적이 있었는데 우리는 어느 해변에서 주운 검정과 하얀
색깔의 빤짝거리는 조약돌을 각각 간직하게 되었다 우리는 소설속에 나오는 비련의
주인공을 떠올리며 우리에게는 그런일은 없을거라는 확신과 함께 마냥 즐거워 했었던적이
있었는데 그 소설과 같은 이야기가 이안에게 전개가 될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한 것이다
모든것이 소설속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행낭속에 들어있는 조약돌을 바라보며 자은이를
생각하게 되었으니 누군가 이야기 했듯 사람의 운명이란 미리 알수있는것도 더더욱
예측할수는 없는것 처럼 자은이의 편지를 처음 받아들던 날 이안의 가슴으로 달려오던
그무엇인가 불길한 예감 같은것이 전광석화처럼 스쳐갔던 옛날을 떠올려 본다
검정으로 된 비단 행낭속에 들어있는 빤짝거리는 하얀 조약돌을 볼때바다 기구한 운명처럼
전개되는 소설속에 주인공처럼 된것이 아닌가 자은이도 편지의 말미에 하얀 행낭속에
오빠의 돌을 본다고 했다 실제 소설에서는 주인공이 청운의 꿈을 실현하기위해 고향을
떠나면서 사랑하는 연인에게 작은 조약돌을 정표인양 손에 쥐여주며 잊지말라고 당부하며
떠난다 그러나 14년동안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도 소식이 없는 님을 기다리며 만지작 거리던
조약돌이 다 닳아 없어질때까지도 님은 돌아오지않는다는 그런 슬픈 이야기다
실제 소설과는주인공이 바뀌였지만 어쨌던 갑작스럽게 떠나버린 자은이가 이안으로서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것도 이역만리인 미국이라는 멀고도 먼나라 도저히 갈수가 없을것만같은 그런 나라로
떠나 버린것이 황망 스럽고 그렇게까지해서 갈라 놓아야만 했던 자은이의 부모님이
원망 스럽고 증오 스럽기까지 했지만 이안 에게는 오직 자은이가 있을 뿐이다 하고
마음속으로 자위를 하면서 내 반드시 자은이가 있는 곳으로 가리다 라고 마음속으로
되뇌이고 또 되뇌이고 있었다 나 이안이 언젠가 너희들에게 무엇인가 보여 줄것이다,
나도 미국으로 건너가 내꿈을 펼치리라,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앵무새처럼 말하는
형식에 얽매여 현실을 외면하는 그 관행과 관습들이 틀렸다는것을 증명해 보이겠다,
이안은 떨리는 가슴속으로 몆십번을 다짐하고. 또, 다짐하고 부르짖고 있었다
이안은 자은이의 편지를 받은 다음 날부텨 미국을 갈수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 여기저기
알아보았지만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미국에 갈수있는 길은 밤 하늘에 별을 가져 올수
없는것처럼 방법은 없는것 같아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것만 같았다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자은이가 있는곳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든지 가고 싶은 마음 뿐 인 것을 방법을
찿아보는것을 멈출수가 없었다 언젠가는 자은이의 곁으로 갈수있는길이 있으리라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미국을 가기 위해서 준비를 하기 시작 했는데 직장에서 받는 월급중
생활비를 제외하곤 돈을 모으며 틈틈히 영어 공부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1975년에 접어들면서 세계 정세는 불안정하고 국내 사정 역시 정치적으로도
안정이 안되여서 그런지 그무엇인가 들어나 보이지 않는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표면상으로는 그저 평범한 일상을 맞는것 같지만 그 무엇인가는 숨가쁘게 움직이고
있는듯한 긴장된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971년도에 군에서 전역을 하고 직장 생활이 벌써 3년이 흘러가고 있었지만 미국을
갈수있는길은 열리지가 않아 답답해 하고 있던 그무렵 자은이에게서 두번째 편지가
왔는데 학생으로 비자를 받으면 미국에 올수 있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이는것 같았다
그날로 이민 브로커를 만나서 실날같은 희망을 쥐게 되였지만 문제는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이였다
당시 2백만원이면 웬만한 집 한채를 살수있는 돈인데 미국을 가려면 3백만원 정도가
있어야 된다고 한다 그것도 편법을 동원한다고 하니 돈이 있다해도 갈수있는 보장도
장담할수도 없고 미리 확인을 하여 볼수도 없는지라 애꿎은 속은 타들어 가고만 있었다
그렇게 밋밋한 날들이 흐르던 어느날 여행사를 하고 있는 김선생이라는 사람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몆번 상담을 했던 면식이 있는사람인데 그런대로 친절하게 안내를
받은적이 있던터라 반가웠다 김선생님. 안녕하세요. 하고, 말하기도 전에 김선생의
격앙된 목소리가 자신있게 들려온다
미국을 확실하게 갈수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였다 마음속으로는 마음이 뛰였지만
김선생에게는 내보이면 안될것같아 감정을 억누르며 선생님. 그 방법이라는게. 하고
물어보기도 전에 김선생은 이번일은 자신이 장담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친척이 미국에 사는데 사촌을 초청 했다는 것이다 그 사촌 여인과 미리 결혼을
해두면 된다는 것이였다 그러면서 그 사촌도 마침 나이가 25세이니 잘되였다고 하면서
김선생은 이안의 마음속도 모르고 젊은 사람끼리 만나서 좋으면 같이 살아도 되지
않겠냐고 그럴듯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믿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것이
설마 3백5십만원 때문에 사촌을 결혼 시키면서까지 사기를 칠수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라고 속으로 생각이 들어 일단 안심은 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무언가 형언키 어려운
전류같은것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것 같다
한편으로는 미국에 갈수있는 방법만 있다면 이안으로서는 그무엇이라도 할수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막상 결혼을 하여야 한다는 그말에는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순간
자은이의 맑고 고은 모습이 떠오른다 아 .자은이 .자은이와 함께 있을때는 자은이는 항상
나의 일거수를 유심히 보는 경향이 있는것 같다 언젠가 왜그렇게 세심하게 나를 살피냐고
물은적이 있었는데 자은이는 웃으면서 오빠의 분신이 될려면 오빠를 먼저 잘 알아야 되지
않겠냐고 하면서 또다시 웃는다 그 해맑은 모습이 왜 지금 생각이 나는 걸까 오늘따라
달려오는 자은이의 웃는 모습이 가슴속으로 파고든다 보고싶다 그렇게 정말 보고싶다는
생각이든다 눈물이 나도록 보고싶다, 자은이가 .
며칠후 여행사 이민 브로커인 김선생에게서 전화가 왔다 자신의 사촌과 이번주 토요일
약속을 잡았다고 연락이 왔다 맞선을 겸해서 선수금을 걸라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했었던 터라 어떻게 해야 되는지 마음은 선뜻 결정을 할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머뭇거릴수도 없는것이 미국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결정을 내려야만 했는데 그
런사이 토요일 주말이 다가왔다
오후7시에 만나기로 한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가 않았는데 이안의 머리속으로는 벼라별
생각이 다 떠오른다 아 . 어떻게 해야되나 .그래, 한번 만나는 보아야지. 미국을 갈수있는
확신이 선다면 무엇인들 못할께 있겠나 생각하며 이안은 대사관 근처에 있는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으로 향 한다 이안의 발걸음이그렇게가벼워 보이지는않는것 같다
당시 대사관 근처에는 여행사와 관련된 이민 사무실이 많았는데 브로커들의 이민 사기가
종종 있는 터라 조심하지 않으면 언제 사기를 당할지도 모르고 불법으로 진행되는
일이라 사법 당국에 형사상 낭패를 볼수있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은 놓을수가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런지라 사기를 당해도 어디에다 하소연도 할수가 없다는것이 문제인 것이다
약속 장소인 레스토랑 문을 밀치고 들어서니 분위기있는 실내 조명이 음악과 함께 은은히
흐르는 가운데 맛있는 양식 냄새가 이안의 후각을 자극한다 두리번 거리는데 구석에서
김선생이 손을 흔든다 얼핏 보니 옆자리에는 그 사촌이라는 사람이 다소곳이 앉아
있는것이 조심스럽게 이안의 눈으로 먼저 들어온다 이안이 천천히 앉으면서
처음 뵙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옆에 앉아 있던 사촌도 따라 안녕하세요. 한다. 사촌의
예쁜 목소리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 은은히 흐르고 있는 음악위로 날개가 달린듯 날아
가는 것 같다
목소리도 예뻐 보이지만 언뜻 조명에 비친 얼굴 모습이 충청도에 산다는 시골사람으로만
상상했던 그 사촌의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이안은 흠 . 하고. 심호흡을 한번하고 김선생을
바라보며 전에 말씀하시던 사촌이시군요 하자. 김선생도 아참, 정자야 인사하지. 하고.
김선생이 사촌의 이름을 가볍게 부르며 인사를 시킨다
본적이 충청도 대천이고 이름은 김정자 로서 나이는 25세인데 당시 이안보다 한살이
위였다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나왔는지 사촌은 당황하는 기색은 없고 침착했다 그냥 조용히 앉아
있는것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일이 있고 난후 이안의 마음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이문제를 어떻게 풀어 가야할지 현명한 생각이 금방 떠올려 지지가 않는것이 답답할 뿐이다
며칠을 전전긍긍 하고 있던차 김선생에게서 또다시 전화가 왔다 선수금을 달라는 것이였다
그리고 정자를 한번 만나 보라는 이야기를 넌지시 한다
이안은 회사일을 서둘러 마치고 김선생과 만나기로 한 약속장소로 가면서 어쩌면 김선생의
사촌인 정자도 함께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김선생은 전화를 할때마다 정자와의
만남은 가졌는지 당부하듯 정자의 좋은면을 자주 어필할려고 한다 이안은 미국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인들 못할게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오직 자은이에게만 갈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이든 이안에게는 문제가 될게 없어 보였다
이안은 며칠전 본사 홍보과에서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았는데 회사에 입사한지가 벌써
3년이 지나 간다 엊그저께 입사한것 같았는데 눈깜짝할사이 세월은 홀로 달려간것만
같았다 자은이의 돌연 미국유학으로 한동안은 정신나간 사람같이 회사에 출근하느라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회사일은 소흘히 할수도 없는것이 이안의 현실인 것이다
이안이 회사에 입사하기전 군에서 전역을 하고 사회 저변에 내재되어있는 계층간
차별화를 극복하지 못하고 부침을 겪으면서 한동안 방황을 하던 생각이 난다
우여곡절끝에 대기업에 재차 도전을 하여 합격 통지서를 받아 들던날 자은이가
기뻐하며 한달음에 달려왔다 자은이와 합격 통지서를 함께 들여다 보며 생애 최고의
순간 처럼느껴졌던 그순간만큼은 정말 잊을수가 없다
옆에서 그렇게 기뻐하는 자은이의 그 모습은 내모든것을 다바치고 싶은 그런 마음
뿐이었다 아직도 그날을 잊을수가 없는것은 자은이는 내가 살아갈수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게 해준 사람이기에 그렇게 더욱 잊을수가 없는 것이다 당시 마음 속으로는
자은이의 기뻐하는 그모습을 보면서 영원히 간직하게 될것이라는 확신을 하면서 사명감
같은것이 마음 한켠을 뿌듯하게 만들어주고 있었다
신입사원으로 입사하고 며칠뒤 강남 유스호텔에서 신입사원들의 세미나가 3박 4일동안
있었는데 당시 삼성에 입사한 신입사원들과 모든 일정을 함께 한것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의 젊은이라면 삼성에서 근무를 한다는것은 꿈이요
소망인것이다 그런 삼성 신입사원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것은 같은 대기업군으로
여겨졌기 때문인것 같았다
당시에 이안이 입사한 회사도 삼성과 쌍벽을 이룰만큼 큰 기업인것만은 사실이다 신입
사원의 월급도 그렇지만 당시에 보너스는 삼성보다도 더 많았다 3박4일동안의 세미나에서
이안은 전혀 경험하지못한 교육을 감명깊게 받았는데 당시에 명강의를 하신 고려대 안모
교수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서 맴도는것 같다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사회에 발을 딛는 순간 자신이 사회고 사회가 자신이다 회사의 유니폼을 입는순간 개인이
아닌 회사의 상징이 되는 것이다, 라고, 신입사원들의 열정을 끌어내여 개개인의 자긍심을
북돋아준 교수들의 명강의가 지금도 그리움으로 남아 사회의 첫발을 내딛던 그때의
향수를 부르고 있는것 같다
신입 교육을 마치고 홍보과로 발령을 받았는데 분위기가 그런대로 괜찮아 보였다 이때
경험한 광고의 다양성과 접목성은 회사의 이미지를 순식간에 바꿔 놓을수도 있는
마술과도 같았는데 인생 전반에도 많은 도움을 준것 같았다
3년여가 지나갈 무렵 하루는 이안이 차를 몰고 영업점으로 홍보겸 나갔었다 당시에는
지역마다 분사된 영업점이 있었는데 한달에 몆번씩 본사에서는 각 지역으로 홍보차
나가곤 하던 시기였다 그날은 이안이 여니때와 마찬가지로 영업점에 도착하여 시간도
있고해서 차를 닦고 있을 때였다
당시에는 과마다 차가 한대씩 배정이 되여 있었다 신발을 벗고 맨발로 세차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다가와 이안에게 말을 건네는것이 아닌가 아니. 회사에서는
세차비도 안나옵니까, 왜. 직접 차를 닦고 있는가.하는 것. 같았다 .
이안은 차를 닦다말고 얼핏 돌아보니 웬 늙수구레한 사람인것이 아마 영업점에
볼일차 온 대리점 사장처럼 보인다
영업점에는 각지역의 점주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던 때였다 아.네.세차비가. 왜,
안나오겠습니까. 대기업인데요. 허지만. 직원들이 할수있다면 스스로 해야죠.
이안은 힐끔 대꾸하고 계속 차를 닦느라 그사람이 언제 갔는지도 모르게
그일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당시 이안의 회사에서 생산하고 있는 주류는 국내에서는 독점적으로 생산이 수효를
따라가지를 못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만해도 산업의 혁명으로 도시가 한층 고조되던
그런 시기에 맥주는 품귀현상이 자주 일어나곤 했는데 이안이 그 맥주를 출고하는
부서로 발령이 난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영업점에서 차를 닦고 있을때 이안에게 말을 건넨 사람은 회사의
창업주였다
당시 회장님은 암행 순시를 자주 했었는데 이안이 맨발로 차를 닦는 모습을 본 것이다
직원들은 회장님의 얼굴을 먼발치에서 일년에 한번 어쩌다 신년사를 할때 단상에
있는 모습을 보게되는데 회장님의 모습을 쉽게 볼수있는것도 아니고 바로 앞에
있다해도 몰라보는것이 당연한 것이다 이안이 그렇게 회장님인줄도 모르고 은연중
회장님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일이 있고 난후 이안은 남들이 부러워 하는 요직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서. 이안의 경제 사정이 달라지기 시작했지만 이안이 옮긴 부서에서
벌어지는 그런 환경에 적응하는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미국을 가기까지
필요한 자금을 축적할수는 있었지만 처음에는 그러한 일들에 익숙하지 못한것도
이안이 스스로 양심의 자긍심을 설득하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더 필요했다
당시 대리점 사장들은 출고량만 가지고는 폭발적인 수효를 감당하기 힘들정도로
맥주가 불티나게 팔리던 때였다 공급을 더 받기위해서 봉투를 주곤 했는데
그것을 별일 없다는 듯이 받아 들이는 선임자들의 익숙한 행동을 보고 한동안은
고민을 많이 하기도 했지만 당시 상황의 분위기를 신입이 어떻게 해볼 도리는 없었다
그런 선배들의 행동을 묵묵히 지켜볼수밖에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아마도 회장님은
그런 유통 과정의 비밀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당시의 분위기를 보면 대충
짐작은 하신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튼 이안은 미국에 갈때까지 한국에서는
주류소비량이 제일 많은 지역의 책임자가 되여 회사를 사퇴 할때까지 근무했다
김선생을 만나러 대사관 앞 레스토랑에 들어서니 김선생과 그 사촌이 앉아있는것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분위기 있는 조명아래 예쁘게 앉아있는 사촌의 긴머리가 바람도
없는데 조명에 흔들리듯 빤짝 거린다 레스토랑에 흐르는 팝송은 그래도 서울의 한복판
이라고 도시 티를 내는것도 같다
김선생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사촌도 이안이 낯설지는 않은지 미소를 머금은 눈빛으로
쳐다본다 김선생은 앉기가 바쁘게 사촌의 일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으니 두사람이 한국에
있을때 부지런히 데이트를 해야지. 한다 곧 미국으로 떠날것 같이 이야기를 하는것이다
좋은말만 골라서 하는것이 별로 나빠 보이지는 않아 보인다 김선생은 약속한 선수금을
챙겨들고 일어서며 사촌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이렇게 잘 어울리는 젊은 사람들도
드물지. 하고. 혼잦말처럼 중얼거리며 자리를 뜬다 사촌과 함께 흘러간 팝송이
은은히 흐르는 레스토랑에 남아서 연인들처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미국에는
자매인 언니가 살고 있다는것을 알았다 고향은 시골이지만 줄곳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해서 그런지 나름대로 세련미가 있어 보였다
오랜만에 양식을 맛있게 먹고 맥주도 마시면서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모르게 사촌과
밤 9시가 될무렵 레스토랑을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어깨위에 빛나는 저 별빛
어디쯤 자은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른다 자은이가 갑자기 보고
싶어진다. 아. 자은이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자은이의 눈빛처럼 쏟아져 내리는
별빛이 내발등에 떨어진다 너무도 보고싶어 내눈물이 자은이의 눈빛속으로 별빛처럼
떨어져 내린다
며칠후 김선생과 몆차례 더 만나면서 사촌의 수속이 거의 끝나갈 무렵 사촌과 미국에서
어떻게만날 것인지에 대해 논의 하기로 했는데 당시 이안은 주위에서 대충 들어 알긴
했지만 전적으로 김선생의 말과 행동에 의존하고 있었다 사촌이 미국에 들어가면 그
사촌이 이안을 초청한다는 약속이었다
마침 김선생의 사촌이 미국을 가게 된계기를 이용하여 겸사겸 자신의 일을 연결한것
같았다 김선생은 이안에게 정자의 마음을 얻으라는듯 몆차례 넌지시 이야기를 한적이
있었는데 아마도 초청을 하는 사람이 사촌이기 때문인것 같았다 이안은 거액의 돈을
주고 미국에 들어가면서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김선생이 일러주는대로 할수밖에 없었다
국내 정황으로 볼때 돈이 있다해도 국외로 나가기가 그렇게 쉽지가 않았다 그만큼
미국을 가는것은 당시의 국내 상황으로서는 더욱 어려웠다
미국을 가고자 하는 이안의 절실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김선생과 사촌은 모를수밖에
없다 그저 젊음의 이상과 꿈을 실현하기위해 더큰 세상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열정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안의 가슴속으로 꿈틀거리고 있는 욕망 그것은
오직 자은이를 만나기 위해서다 이안의 희망과 꿈은 자은이를 만나는 생각뿐인것을
김선생과 사촌은 알길이 없는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한시도 잊을수 없고 미치도록
보고싶은 자은이를 이제 곧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을 남몰래 키우면서 모든것을 참아내야만
했다 그것이 무슨 일일 지라도, 이안은 그렇게 하루하루를 자은이를 만난다는 일념에
마음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런 어느날 사촌이 미국으로 떠나는날 공항 한켠에서 김선생과 이야기를 나누던 정자가
이안에게 마지막 눈인사를 하며 손을 흔든다
마지막 배웅을 하는 김선생과 이안을 뒤로 정자의 긴머리가 옷깃속에서 떨리듯 흔들리며
저멀리 사라진다 순간 이안의 마음을 스쳐 지나가는 야릇한 감회는 가슴 한켠에 남몰래
숨겨져 있는 애수를 또다시 불러 온다
김선생의 사촌인 정자가 게이트 안쪽으로 사라지는것을 보면서 나도 가야 되는데
이안은 마음속으로 되뇌이며 정자가 사라진 게이트 쪽을 못내 아쉬운듯 다시한번
바라보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김선생은 이안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듯
정자가 이군을 실망시키지는 않을것 같다는 말과함께 호감을 가득 갖고 있다는
말도 은근히 덧붙이는것을 잊지 않았다
일순간 파란 슬픔같은것이 이안의 가슴속으로 가득 밀려온다 정자가 이안의 눈앞
에서 자은이가 있는곳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마음같아서는 자은이의 소식을
묻고 싶지만 정자에게는 그런 말을 할수가 없는 것이다 김선생과 돌아오는 내내
이안은 마음 속으로 정자가 날아가고 있을 미국의 하늘을 떠올리며 금방이라도
오빠,하고. 부르며 달려올것만 같은 자은이의 하얀 얼굴을 떠올려 본다
밤마다 자은이의 영상이 이안의 꿈과 하나되여 만날때마다 눈물을 닦을새도 없이
잠에서 깨는 아침이 너무도 아쉬워 동트는 새벽이 원망스울때가 정말 많았다
지난날 자은이의 임신 사실이 알려진 어느날 대노한 자은이의 아버님을 찿아뵈려
갔을때 자은이가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던 생각이 난다 순간 아무생각도 할수가
없었지만 자은이를 책임지겠습니다란 말은 분명히 한것 같았다 계속된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치곤 했는데 그럴때마다 자은이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였다 오빠와
나는 떨어질수없는 분신이야, 하고. 용기를 주는 것이었다
공항에서 돌아오는 내내 김선생과 무슨말을 하고 헤여졌는지도 모르게 이안의
가슴속으로 날아드는 자은이의 목소리. 오빠는 나의 분신이야,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메아리처럼 들려온다
정자가 그렇게 떠나고 얼마후 여권사진도 찍고 초청에 대비한 서류를 갖추기
시작 했는데 김선생이 물어본다 혹시 편지가 오지않았냐고 그런 어느날 정말
정자에게서 편지가 왔다 뜻밖인것이 편지가 이리도 빨리 올줄은 꿈에도 생각을
못했는데 예상밖이었다 정자의 편지를 열어보기도 전에 마음은 벌써 미국으로
달리고 있었다 당시에 이안의 생각으로는 정자의 초청이 금방이라도 이루어
질 것 같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후에 안일이지만 정자가 영주권이 있어야만
결혼 초청이 가능하다는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김선생은 사촌인 정자에게 이안을 소개 한것은 자신의 일을 관철 시키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뿐 미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자기의 사촌에게는 이안과의 계약 내용은 말하지 않고 젊고 유망한 보기드문
후배라고 사촌인 정자에게는 호감을 갖도록 소개를 한 것같았다
어쩌면 사촌인 정자도 사촌 오빠인 김선생의 피해자 인지는 알수는 없어도
당시의 정황은 정자의 편지에서도 언급했듯 이안이 품고있던 이상을 사촌인
정자도 공감을 한다는 것이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무도 아쉬움의 날들이
였다는 연인이 된것같은 감회어린 말들이였다 말미에는 정자의 진심어린
심중이 그대로 보여지는 만날날 고대 한다는 말도 있었다
당시 김선생은 사촌인 정자가 이안에게 미국에 올려면 시일도 많이 걸리는 것은
물론이고 자격 여건이 형성이 되야 하는데 그 자격 여건이라는것을 편지로 알려
올까봐 걱정한것 같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정자 본인도 이안을 초청 할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한동안 낙담했었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렇게 정자가 떠나면서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회사일이 성수기를 맞아 눈코
뜰새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던중 회사의 인사 이동이 있었는데 이안이 주임으로
승진을 하고 전임자인 선임자가 맡고있던 업무를 맡게 되었다 당시 분사점의
편제는 지역영업 총괄 과장밑에 10 여명의 주임이 있고 주임밑에 일반 사원과
견습사원으로 편제가 되어 있었다 주임이 맡고있는 지역을 관장하는 일반사원
들이 2십여명 정도가 함께 움직인다
지역을 인수하고 나니 지역의 대리점 사장들의 예우가 달라지기 시작 했는데
이안은 처음부터 봉투를 받지 않기로 원칙을 세워놓고 선임자가 해오던 대로
대리점 관계는 유지하고 있었다
관례대로 일주일에 한번씩 이루어지던 직원들의 회식과 출고에 관련되어 발생
되는 모든 선례의 화합비를 충당 했는데 이안이 직접 관여를 하지않고 함께
다니는 후임자에게 모든것을 처리하게 하였다 이안이 처음 부서로 왔을때는
선임자가 모든것을 하는것을 지켜보고만 있었고 아무런 권한이 없었지만 이안
이 지역을 맡고 부터는 후임자에게 본인의 권한을 행사하게끔 의욕을 북돋아
주었다 당시 후임자는 이안보다 나이가 위였지만 어색한 분위기는 없었다
이안은 어려서부터 고진감래의 일들이 몸에 익숙해 있어서 그런지 나이에 비해
좀더 성숙해 보였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지역의 책임자가 바뀌면서 대리점 사장들은 혹시 차질이 생길까봐 전전 긍긍하며
처음에는 걱정을 많이 했다고도 한다 나중에야 이안을 경험 하면서 대리점 사장
들도 마음을 놓기 시작했는데 한동안은 대리점 점주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아
졌다 당시 종로구 낙원동에는 한국의 내노라하는 술집들이 즐비했는데 그중 대하
나 오진암 명월 같은곳은 입이 다물여지지 않을정도로 큰 요정으로 소문이 나
있었다
일본사람들의 출입이 많았섰는데 내국인들이 출입하기에는 술값이 너무 비쌌다
얼핏 이야기를 하는것을 보면 한상을 받는데 제일 싼것이 5만원이라고 했으니까
당시에 사원 월급이 7.8만원 하던 때였다
오진암같은곳에는 접대하는 여성들이 150명에서 200명씩 있었다 하니 상상을 초월
하는 술집이였다는것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당시 이곳을 공급하는 대리점 사장은
그옛날 주먹의 대명사인 김두한 밑에서 한때를 풍미했다고도 한다 그도 그럴것이
어마어마한 이권이 걸린 소비처를 놓고 보이지않는 암투가 세상 밖에서는 많았섰던
것 같았다 그런곳을 관장하다보니 매일같이 그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아졌다
도시에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면 종로구로 모여드는 술객들로 붐볐는데 술문화의
발달은 한국이 단연 으뜸인것이 그옛날의 명성만큼 지금도 술에 관한한 만큼은
변함이 없는것 같다
70년대 중반은 산업의 발달로 이어지며 도시의 밤을 출렁거리게 할정도로 매일
서울의 밤을 달구고 있던 때였다 땅거미가 짙어 질수록 북젂였는데 네온의 불빛
까지 더해 젊은이들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도 충분했다
그렇게 회사일이 끝나면 그들과 어울릴때 간혹 곤혹스러운 일을 겪게 되는데
술을 마실때 파트너를 붙여주는것을 그들은 아무렇지않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안의 마음속을 그들이 알리가 없었다 잠자리까지 당부를 할때에는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의리라고 생각하던 때였다
오히려 이안이 여성에게 사정할때가 많았는데 대리점 사장들과 어울리면서도
한번도 여인들과 밤을 새운적은 없었다
그럴수록 이안의 마음속에는 자은이가 더욱 굳게 자리하고 있을때였다 이안의
분신인 자은이가 편지를 쓰면서 올려다 보았을 서울의 밤하늘의 별을 이안이
지금 함께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나는 외롭지 않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자은이의 상상만으로도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당시 회사의 편제상으로는 주임밑에는 주임을 보좌하는 어시스트를 두었는데
후임자 다음으로 주임의 업무를 맡을 사원위의 직급인 대리격인 것이다
일반사원들도 마찬가지로 사원이 되기전 쥬니어 과정을 거쳐야만 일반 사원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70년대 들어서며 산업이팽창해지며 개발도상국들은 선진국을
모델로 표방 했는데 대한민국도 미국의 사업시스템을 처음 도입하여 적용하고
있었다 명칭과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했지만 선진국의 보편화된 고용인들의
권리는 선진국처럼 적용하지않고 외형만 선진시스템이고 내용은 한국식이였다
그러니까 겉은 화려했지만 정작 내부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업과 고용의 편차가
맞지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기업인들은 노동의 규제를 기업인들이 마음대로 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도 산업을 독려하던 때 였으므로 장시간 노동의 근로 조건쯤은
안중에도 없었다 현재의 오늘이 있기까지 근대사를 돌아보면 근로자들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어두운 과거사를 빼놓을수는 없을 것이다 기업인들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하에 선진국들의 훌륭한 기법을 따라 했지만 선진국처럼 기업인과
고용인들의 동반 성장이아닌 기업과 고용이 이원화의 길을 걸어 온 것이다
기업은 성장했지만 고용은 그 반대의 길을 걸어오며 투쟁일변도로 변질되어
지금까지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옛날이나 지금까지 근로자들은
정부의 독려 아래 장시간의 근로를 하면서도 선진국에 비해 낮은 임금을 받아
야만 했다 선진국들이 표방한 보편적 민주주의 즉 국민위주의 민주주의를
정착 시키지 못하고 한국식 민주화로 발전한것은 오랜 군부의 장기 집권에서
비롯된 한국 근대사의 어두운 단면이라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우리나라의 고사에 내유외강 이란 말이 있다 속은 부드러우나 겉은 굳세다는
표현이다 선진국들을 보면 내유외강의 국가라고 할수있는것이 선진국 국민들을
보면 모두가 하나같이 미소처럼 부드럽다 그러나 국가들을 놓고보면 세계를
좌지우지 할정도로 강한 나라다 그렇다면 그 강함은 어디서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 선진국들을 보면 국가의 틀을 만들어 갈때부터 정부와 국민이 하나가
된 것이다 어떻게 한마음이 될수 있을까 그것은 어떻게 보면 간단한
문제일수도 있다 속이지 않는 것이다
오늘의 선진국들을 보면 국민이 있는 나라에 국가가 있는 것 처럼 모든것이 국민
위주로 시스템이 되어있으니 국민들 모두가 웃는 얼굴이다 국가가 나이고 내가
국가인 것처럼 모두가 주인인 것이다 강함은 그렇게 한마음일때 모두의 힘에서
나오는 것이다 후진성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대부분의 국가들은 하나같이
군인들이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 국가들이다
웃는 표정을 떠올리자면 여러가지의 모습들을 상상할수가 있는데 웃음은
대개 즐거운 마음에서 나온다 그만큼 속이 편안해야 웃음이 나도 모르게 그렇게
나오는 것이다 속이 편하다는 것은 안정이 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
안정은 어디서 어떻게 오고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안정은 개인이 스스로 갖고
올수있는것은 한정이 되있다 왜냐하면 환경적 요인이 대두되는것이다 모두가
함께 공유해야 하는것은 개인의 능력으로는 어느 범위의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 범위의 한계를 넘는것은 현재를 관장하고있는 기능에 의해서 나뉘어 져야
하는데 그 기능을 움직이게 하는것은 정부의 힘에 의해서만이 구축 될수가
있는 것이다
균형을 맞출수도 있고 그 힘의 작용해 의해 반대의 부작용도 불러 올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는 신중해야 한다 신중해야 한다는 것은 감추지 않고 속이지
않고 모든것을 투명하게 하는 것이다 그럴때 국민 모두가 편안해지며 웃음이
절로 나오게 되는 것이다 선진국들을 보면 국민이 주인인것처럼 모든 시스템이
국민 위주로 되어있다 법은 있으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공정하고 질서는
지켜지되 소리가 안난다 모든것을 투명하게 운영하니 서로가 감출게 없다
모두가 주인인 셈이다 자연히 마음도 한마음이니 날로 번창 할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선진국은 강국이 될수밖에 없고 국민들은 노후까지 부족함이
없이 보장된 삶을 이어가니 표정 또한 항상 웃는 모습이다
지금껏 후진국의 행태는 말로는 국민이 주인이다, 를 밥먹듯이 이야기를 하면서도
국민의 상전처럼 군림한다 말과 행동이 다른것처럼 후진국들의 행태는 하나같이
국민을 속인다는 공통점이있다 두개의 마음이 서로 상반되게 공존 하는 한 마음은
같아 질수가 없고 즐거울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안정을 할수가 없고
웃음이 없어 지는 것이다
그래서 후진국 국민들의 표정들은 하나같이 무뚝뚝한 것이다 후진국들은 선진
국의 모든것을 표방 하면서도 국민에게는 이원적인 체계를 유지하며 감추고
속이기에만 급급해 한다 그도 그럴것이 후진국들의 공통된 점은 하나같이
지도자들의 살신성인하는 훌륭한 원칙이 없다는 것이다 또한 군인들이 정치에
관여를 하다보니 자연 전문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당시 대한민국도 70년대
후반을 넘어서며 오랜 군부통치에 반발하여 각종 시위가 빈발하고 있을때 쯤
이었다
학생들의 격하된 시위속에 한편으로는 군부의 통제가 더욱 심해지면서 국외로
나갈수 있는 길이 어려워 지듯 보였다 그런 어느날 김선생은 미국에서 초청장이
왔다며 영문으로 된 서류 한뭉치를 보여주며 이제 대사관에 인터뷰를 하러
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안은 뛰는 마음을 억누르며 인터뷰를 마치면 김선생과
계약한 마지막 돈을 혼쾌히 주기로 약속했다 이안은 서울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야릇한 감회에 젖어본다 그동안 준비는 단단히 하고 있었지만 많은 것들이 순간
이안의 가슴을 교차하며 지나간다 모든것에서부터 자유스러울수 없었던 지난
날들에게 스스로 묻는 것이다 이안의 정체성은 그 어디에 두고 또다른 이안으로
살아가야만 했던 떳떳치 못한 지난날들이였던가. 위선으로 난무했던 지난날의
모든것들이 지금 이안의 마음을 허물고 있는 것이다
외롭고 고독한 길을 한번도 들어내지않고 마음속으로만 삭이며 온마음으로 참아
내야만 했던 고단했던 지난 날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 높은 하늘 저멀리 저멀리
날아가는것 같다 마음은 날개되여 자은이가 있는 미국으로 훨훨 날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얀 얼굴이 푸른하늘 저멀리 구름과 함께 두둥실 떠오르며 오빠,하고.달려
온다
이안으로서는 결코 넘을수 없을것만 같은 그런 곳을 넘었다는 무언가 모를 남다른
감회가 가슴가득 밀려온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날 김선생한테 대사관 인터뷰 날자가 잡혔다고 연락이 왔다
하루전에 통보가 온다고 하니 마음에 준비를 하고 있으라고 연락이 왔는데 마음도
뒤숭숭하고 회사일이 손에 잡히지가 않는다 70년대서부터 정부에서는 선진 기법을
도입하면서 세금 관계의 정립을 위해 세금 계산서를 발행하기 시작했는데 이모든것은
선진국에서는 제도화 된지 이미 오래지만 후진국에서는 마악 따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정부에서도 70년대 들어 서면서부터 투명한 상거래를 통한 세금 징수를 보다
간편하고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실시는 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는 않았다
이안의 회사에서도 세금 계산서를 발행하고 있었는데 이안이 맡고있는 대리점
사장들은 걱정은 하면서도 별로 신경은 쓰지 않는것 같았다 그당시도 당연히
세금을 내고 있었지만 이안처럼 지역을 맡고있는 담당 공무원의 눈높이에서
적당히 하던 때였다 세무 공무원들의 눈높이에서 이루어지던 그 옛날의 적당
히가 세월이 이만큼 흘렀어도 얼마전까지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는 현실을 감안
할때 그것도 수장들의 들어난 행위에 경악을 느꼈을 테지만 국민만 모르고
살면 그만인듯 살아온 지금까지의 세월인듯 싶다
이안은 회사에 근무 하면서 늘 마음 한구석에 자긍심을 같고 있었는데 그것은
창업자이신 회장님을 은연중에 만났을때부터였던것 같았다
회장님의 눈높이에서 이안을 바라 보았을 그 품위를 잃지않기 위해서 이안은
많은 노력을 했지만 어떤때는 잘 지켜지지가 않을때 회장님이 불현듯 떠오르곤
했다
이안이 근무하면서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대리점이 있었는데 종로구를 선점하고
있는 별명이 망치란 사람이였다 한때 김두한 밑에 있었다고 한다 주먹이 이안의
두세배는 되보일만큼 커 보이는것이 한때 굉장했었구나 짐작이 갈만큼 호탕한
사람으로 이안이 의정부에서 서울로 이사를 한다고 했을때도 선뜻 이백만원을
내밀던 사람이였다
4년여를 그 사장님과 함께 하는동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오히려 이안이
도움을 많이 받은것 같았다 그사이 인터뷰 날자를 받아놓고 있었는데 김선생이
일러 주는대로 답변을 해야 된다고 하면서 몆가지 일러 주는대로 암기를 하고
약속 시간에 맞추어 대사관 앞으로 나가니 김선생이 나와 있었다 그때 이안은
대사관이라는곳을 처음 들어가 본 것이다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는데
안은 굉장히 넓고 복잡한것 같았다
두리번 거리는데 어떤 사람이 대사관 직원이라면서 김선생과 몆마디 주고 받더니
이안을 보고 접견실로 들어 오라고 한다
김선생을 문밖에 세워두고 이안이 접견실에 앉자마자 직원이라는 사람이 몆마디
물어 보면서 인터뷰가 끝났다고 하면서 일어선다 여권은 김선생에게 건네 주면서
인터뷰가 끝났으니 출국 날짜를 맞추라고 하는것 같았다
이안은 김선생에게 여권을 건네 받으면서 계약한 마지막 돈을 지불했다 이안은
김선생과 헤여지며 이렇게 간단한 일을 너무도 어렵게 어렵게 돌아서 왔구나
생각을 하니 갑자기서글픈 마음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이 한국땅에서 내자신이
스스로 할수있는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법과 원칙은 있었지만 힘있는자에
게는 관용과 형식을 뒤바꾸면서도 약자에게는 원칙을 높히 세우곤 하는 이런
곳에서는 이안이 머물곳은 더더욱 아닌곳 같았다 그무렵 자은이에게 반갑게
편지가 왔다
부모님의 투자 이민 소식도 함께 전해 왔는데 부모님 이야기를 할때 순간 나도
모르게 마음이 멈칫 거리는것 같았다 당시 경찰서장이었던 근엄한 얼굴 모습이
떠오른다 집에 수영장도 있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는 내심 놀랐다
이안은 평소에 음악을 좋아 했는데 주로 팝송을 많이 듣곤 했다 취미중에
영화 감상도 빼놓을수 없었는데 한국영화는 내용이 너무 편협해서 맞지가
않았다 특히 외국영화를 많이 보았는데 수영장이 딸린 큰저택이 미국 영화
에 나오는것을 본적이 있는지라 놀라는 것이다 나중에 미국에 정착해서
그정도의 여유는 웬만한 정도면 갖출수 있다는것을 알게는 되었지만 처음
자은이에게 편지를 받고는 놀란것은 사실이다
미국에 정착할때 선진국이라는 세상을 몸으로 체험 하면서 나의 조국 대한
민국의 암담했던 현실을 떠올려 본적이 있었는데 이런 믿기지 않은 선진국
세상의 경험을 나의 동족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한 때도 있었다
왜 미국이 전세계 국민이 동경하고 전세계를 아우르는 강국이였나를 말이다,
원칙은 지켜지되 능력위주의세상, 인권의 존엄이 제일주의로 국민이 우선인
나라. 사회보장의 시스템이 잘되있고 미국의 법과 제도는 무엇이던지 노력을
하면 가능한 길로 갈수있게 잘되어 있었다
대한민국을 생각하면 세상밖의 물정을 너무도 모르고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 암담하기만한 조국의 미래가 걱정도 되었지만 그런 아쉬움들은 마음에
더큰 아픔으로 돌아 왔는데 그것은 우리 민족이 걸어가야만 하는 숙명의
길인것 같아 더욱 가슴이 아팠던 기억이 난다 우리나라 속담에 세상물정
모르면 코베어가도 모른다는 말이 있듯 어쩌면 조국의 그런 세상 물정 모르고
살면 그것이 전부인줄알고 사는것이 우리 민족들의 삶인것 같았다 오랜 끄달
림에 익숙 하다기 보다도 민족을 선도 하고 있는 지도자들이 국민을 위해서
살신성인하는 리더쉽을 너무도 아쉬워 하였다
이안은 이렇게 생각한다 나도 미국에 와서야 이런 세상이 있다는것을 보았지
않았나.우리나라 속담에 또 이런 말도 있다 우물안 개구리라고. 모르고 살면
어쩔수가 없고 선견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투명하게 하지 않고 나누지 않을
려고 하면 그런줄 알고 사는게 세상사라고 나라안에 있는 제주도도 가보지 않은
사람은 제주도의 풍광을 모르듯 말이지.
이안은 의정부의 집을 처분하고 서울 수유리에 돈을 보태어 개인 주택을 장만
하여 부모님과 함께 이사도 하고 미국을 가는 준비를 나름대로 하고 있었는데
대사관에 인터뷰를 한 때가 1977년경으로 생각된다 회사에 1972년도에 입사했
으니까 5년여의 직장 생활을 했을때이다 지역담당 책임자로 잘나가고 있을때
였었던것 같았다 아무도 모르게 진행한 일이라 화사도 대리점 사장들도 모르고
있을때였다 그당시 인터뷰를하면 대개 6개월안에 비자가 외무부로 통보가 온다
는것을 알았는데 시일이 다 되도록 김선생한테 연락이 없는 것이다
출근을 하자마자 바로 회사차를 몰고 대사관 부근에 있는 사무실로 갔는데 김선
생은 없고 손님인듯한 7.8 명의 사람들이 못보던 사무실 직원인듯한 사람을
붙들고 왠 이야기를 따지듯 하고 있었다 그손님인듯한 사람들도 나처럼 김선생을
찿으러 온 사람들이다 직감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구나 싶었는데 손님인듯한
그사람들도 인터뷰를 마치고 외무무에서 통보를 기다리던 사람들이였다 그
여행사 사무실은 김선생의 사무실이 아니고 김선생은 프리랜서로 브로커 일을
하던 사람이였다는것도 알았다
김선생에게 사기를 당한 액수도 사람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이안이 350만원
포함하여 3천만원 정도의 금액이었다 당시에 집이 2.3백이었으니까 그당시 돈도
돈이지만 갑자기 절망속에서 나락으로 떨어져 내린듯 눈앞이 캄캄한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자은이가 제일먼저 떠오르는 것이었다 자은이를 못본지도 벌써 4년이
넘은것 같은데 세월은 빨리도 달려 갔지만 마음은 너무도 긴 시간이였던것
같았다 그렇게 낙담속에서도 수개월동안 김선생을 찿으러 다녔지만 만날수가
없었다 그런 가운데에도 회사와 대리점들은 날로 번창하는 가운데 맥주의 소비
상승세는 폭발적으로 수효가 놀랄만큼 증가하고 있었다
이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사에서는 증가하는 가수효를 감당 하느라
야간작업도 병행 하느라 눈코 뜰새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바쁜 와중에
이안은 상심한 마음을 달랠길도 없이 분주한 일정들을 쫒아 다닐수 밖에 없었
지만 한편으로는 김선생을 찿으러 다니면서도 미국을 갈수있는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시 고단한 회사 근무를 하면서도 운동은 계속했는데 주일에 3일정도는 유지
하고 있었다 마침 누군가 미국에서 태권도 사범으로 가면 우대를 받을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터라 내심 서광이 비치는것 같았다 얼핏 들은이야기로는 미국사람
들의 체구가 커서 왠만한 실력으로는 감당하지 못할것이라는 말과 함께 실력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었다
회사일을 하면서도 미국을 가기위해서는 무엇인가 그사람들에게 보여줄수있는
특수 무술을 해야 될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나름대로 태권도에 없는 종목의
병장기를 연마 하고 있을때였다 이안은 마음속으로 그래,어쩌면.내가.해낼수
있을것이다.하고.생각도 해보지만 아직은 김선생을 찿으러 다니는것이 일과처럼
되었으니 한편으로는 한심한 생각도 들었다 상심은 크게 되었지만 자은이가
기다리고 있을 미국을 가야만 된다는 신념 때문인지 모든것을 운명처럼 받아
들였다 또 회사일은 소홀히 할수도 없는지라 속은 타들어 가면서도 하던대로
덤덤히 이어 나가며 미국 가는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안이 여행사 브로커인 김선생에게 사기를 당하고 낙담하고 있을때 였지만 어느
누구한테도 그 사실을 알릴수도 없었다 그런 세상을 향해 이안이 할수있는것은
마음에 차오르는 슬픔을 혼자서 억누를수밖에 없었다 어리석은 자신을 향해 날아
드는 모든것들에 대항할 힘을 잃고 있는 이안 자신을 그렇게 보고만 있었다 승자와
패자의 희비가 분명하게 엊갈리는것처럼 이세상의 비애가 전부 이안의 가슴으로
쏟아져 내리는것 같았다
이안은 어려서부터 모든일을 스스로 해결을 했는데 부모님한테는 늘 결과만 말씀
드리곤 했다 수원에서 처음 연탄 공장에서 일을 했었을때도 의정부로 이사했던
첫날부터 땔감을 하러 송추로 다닐때도 이안이 스스로 하면서 무엇이던지 부모님
한테는 결과만 알려 드리곤 했는데 부모님도 그렇게 묵묵히 지켜 보기만 한것
같았다 항상 부모님이 말씀하시기전에 이안이 스스로 알아서 한것 같았다
이안이 17살이 될무렵 스스로 7년재 장기복무 육군 소년병으로 지원 입대를 하였
는데 당시 정부에서는 지원병에게는 소정의 보상금을 주는 제도가 있었다
그무렵 1964년경 전국이 수해 피해를 입었는데 그당시 이안의 집도 유실되어
막막하던때 이안은 부모님 한테는 알리지 않고 군을 선택을 하여 소정의 목돈을
해드릴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가 1965년 2월 어느날. 육군 소년 기술 행정병으로 지원 입대할 당시.이안의
나이는 17세 였다.논산 훈련소와 후반기 교육까지 마치고 1965년 6월쯤
단 작전과란 곳에 배치되기 까지 우여 곡절도 많았지만 그런대로
보직도 괜찮은것 같았다. 2-3.개월이 지나며 행정 서기병으로 자리를 잡을즈음.
느닷없이 월남 파병 차출이 내려졌다. 너무도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무척 당황
스러웠지만 마음 속으로는 잘 된 일이라고 .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단에서는 열댓명 정도가 차출이 된것 같았는데 어느 병사의 부모는
부대까지 찿아와 아들의 월남 파병을 취소하여 달라고 격렬히 항의를 하는것을
보았다. 한번 파병 차출이 이루어 진것은 되돌릴수 없다는 부대의 확고한 방침에
울고 불고 난리가 일어 나기도 했었는데 이안은 내심 차출이 잘 되었다고 혼자
생각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것이 전쟁터에서는 생명수당으로 받는돈이 많다고 얼핏 들은 이야기가
있어서다. 월남 파병 차출이 되던날 부모님 얼굴이 제일 먼저 떠 올랐다. 어떻게
해서든지 도움을 드릴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때문에 마음은 웬지 모르게
들떠 있었다.월남파병으로 차출된 열댓명을 단장이 직접 불러서 올라가니
별이 뻔쩍거리는 단장이 일일히 악수를 하며 그대들은 조국의 부름을 받은
영웅들이라고 극구 칭송을 한다. 단에서 대표 선수로 차출이 되면서부터
말단 벙사에게 대하는 사단장의 예우가 360도. 달라 졌다.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
하고 벼라별 향응서부터 자유로운 시간은 물론. 용문 교육장 으로 출발할때까지
진짜로 영웅이 된 기분이였다.
마음속으로 단장의 말씀따라 어쩌면 영웅이 될수도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여 본다.나라를 위해 이한몸 기꺼히 던질수 있게될. 그런 날이 올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스처 지나간다.어느날밤 .차출된 병사들을 집결지로 호송
하는데 조심 스럽게 하는것은 만약의 이탈자가 생길까봐 단장은 노심 초사 걱정
한것 같았다.당시. 월남 파병은 국가의 운명이 걸린 결단이었던것을 사단장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였다.
전투지로 향하는 병사처럼 완전 군장을 하고 집결지로 향하는 마음은 웬지 모르게
착찹한 생각마져 든다.부모님에게는 월남 파병 이야기를 하지않고 떠나는 마음이라
그런지 무언가 형언키 어려운 죄송스러운 생각 뿐이다.
부모님. 결코 .실망을 드리지는 않을겁니다. 몆번이고 되뇌여 보는 이안의 다짐이
흔들리는 차량안에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는것 같다.달빛 사이로 슬쩍 비추어진
옆의 전우들의 얼굴이 창백한 모습으로 순간 보이다가 이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간다.집결지인 용문에 도착하여 30일동안 특수 교육을 받고 월남으로 출병했다
그때가 1965년 9월 26일쯤 인것 같았다
이안이 어려서부터 일을 하고 군대를 지원하고 월남전쟁에 참여하기까지 모든
것을 스스로 결정할수 있었던것은 누군가 하지않으면 안될 그런 환경 때문이였는
지도 모른다 월남 전쟁터에서 돌아와 예하 군부대로 배치되어 태권도 교관으로
근무도중 자은이를 그렇게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 것이다
회사일은 쉴새없이 바쁜 나날이 계속되었지만 이안은 김선생을 수소문 하면서
미국쪽을 계속 타진하고 있었다 그무렵 회사에서는 세금 계산서 발행을 독려하고
있었는데 정부에서도 적극적으로 정착을 시킬려고 노력을 하고 있었을때 였지만
대기업이나 이안이 관장하는 대리점 사장들도 당시의 사회 분위기로 보아도 정부의
의지대로 돌아가고 있는것 같지가 않았다
그러나 소규모 영세 업자들은 당국의지침에따라 세금 계산서 발행을 철저히 이행하고
있었다 이안이 관리하고 있는 지역도 예외는 없었지만 망치사장 점주에게는 세금
계산서를 발행 하지 않고 무자
료로 물건을 계속 공급해 주었는데 그양이 어마어마했다 당시 정부에서도 또 회사
에서도 알고는 있었지만 정부와 기업도 대리점 점주들도 모두가 눈높이에서 상응
하고 있었다 다만 영세업자들은 그때부터 세금을 과표대로 꼬박꼬박 내기 시작
했는데 당시의 흐름을 이안이 혼자 거슬를수는 없었다 안에서나 밖에서 이루어
지는 강자들의 관행들을 따라가야만 했다
당시 회사에서도 이안이 관장하고 있는 종로구에서 소비되는 맥주의 수량은 회사
전체의 반을 차지 할 정도로 엄청난 관계로 회장님도 알고는 있었지만 세금 계산서
내용에 대해 한번도 언급한 적은 없었다 출고와 관련해 점주들과는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망치 점주하고는 더욱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망치
점주에게는 회사가 자신의 창고처럼 사용하는것처럼 이안이 적극 배려를 했는데
그무렵 더욱 성수기를 만나 망치 점주가 다른 대리점 점주에게 부족한 수량을 채워
주기까지 했으니 망치 점주는 이안과 함께 종로구의 대리점 군주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였다
밤만되면 휘황찬 네온의 불빛따라 서울의 한복판이 출렁거렸지만 낮은 그와 반대로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잇단 시위에 사회가 뒤숭숭하게 돌아가고 있을때 즈음 이안이
또다른 이민 브로커를 만나서 일을 진행시키고 있었는데 취업비자로 나가는 것이
였다 선진국에서는 자국의 이익이 된다면 받아들이는 그런 제도가 있었다는것도
그당시 처음 알았다 취업 비자를 받고 미국에 도착까지 3백만원이 들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런 합법적인 제도를 브로커들이 이용하고 있었다 당시의 국내
상황은 1979년10월 26일 대통령 시해 사건이 나던 때라 계엄과 같은 분위기에서
국내 주민의 이탈을 엄중 단속하던 때였다
대사관에 이안이 인터뷰도 없이 비자를 받고 김포공항을 출국까지 모든것을 브로
커가 책임지는 것으로 이번에는 공항 나갈때 출국장에서 대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서류를 구비하는것만 빼고는 전부 비공식적인 루트로 출국하는 것은 당시 상황은
자국인의 출국을 엄중 통제하던 비상 시국이였다
이안은 그렇게 은밀히 브로커와 접촉하며 미국가는 준비를 시작했는데 회사는 후임
자만 알게 사표를 써놓고 공항을 이륙할때 제출하는것으로 이야기를 맞추어 놓고
대리점 점주들에게는 해외연수를 간다고 미리 귀띰을 해논터라 걱정은 안됐지만
부모님이 걱정이 되었다 일단 해외 연수차 3개월 미국으로 교육 간다고 말씀은 드려
놓았지만 이안의 마음 한구석에 차오르는 눈물은 가슴가득 젖어옴은 막을길이 없었다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국내사정도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을즈음 이안역시 긴박한
마음으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당시 번을 서는 사람과 미리 약속을 해놓고 출국장을
나간다는 계획이였는데 영화에 나올법한 첩보 장면 처럼 이안이 통과 하는 것이었다
이안의 여권은 브로커의 손에 있다 이제 마지막 관문만 통과하면 이안이 그렇게 염원
하고 꿈에 그리던 자은이가 있는 곳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마음은 왜 이렇게 착찹할까
기대와 설레임으로 자은이를 곧 만나게 되어서 기뻐 하여야 할 마음인데 이제 막
고국을 떠난다고 생각하니 눈물은 왜 나올려는 걸까 그렇듯 내가 머물곳은, 나같은
부류들은, 나의 조국에서도 이런 이원적인 삶을 살게 하면서 스스로 차별을 만들어
왔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안은 내가 아닌 가면의 두얼굴로 살아야만 했던 내스스로를
내자신이 용서할수가 없는 것이다
어쩌면 비겁한 삶을 살아온 스스로를 비겁하지 않은척 하려는데 자책을 느껴서일까
가슴은 메워지고 울음은 속에서 마음을 붙들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봇물처럼 터져
나오려는 슬픔을 나보고 어쩌란 말이냐, 이안은 그렇게 한참을 서서 서울의 명멸
하는 불빛속에서 고국의 마지막 밤하늘을 올려다 보며 어떤때는 온몸으로 받아 내
야만 했던 너무도 고단했던 지난날을 생각해본다 홀로 달려오며 불가능을 가능케
했던 그힘은 자은이가 없었다면 해낼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불가능을 가
능케 만들어 주었던 이안의 발판이 되었던 그런 고마운 조국을 이안은 지금 스스로
떠나려 한다 이안의 마음을 움켜쥐고 놓으려 하지않는 또다른 이안의 마음은 그렇
게 자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뜬눈으로 밤을 새운 이튿날 이안은 예정대로 오후 5시
쯤 영화에서만 나올 범직한 장면을 연출하듯 김포 출국장을 빠져나와 미국 로스
엔젤리스로 이륙하는 비행기에 오르는데 성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