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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자서전 프로젝트
춘천에 살고 계신 시아버지는 매년 가을이면 서울 용산 효창운동장에서 열리는 이북5도민 체육대회에 참가하신다. 주일에 진행되다 보니 예배 후 아이들과 교회에서 도보로 15~20분 정도 거리에 오신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게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시아버지는 곧 팔순이신데 올해도 얼마 전에 손주들 손에 용돈을 쥐어 주고 가셨다. 이북5도민 체육대회 날이면 효창운동장 주변 길가에 버스가 줄지어 있고 백발의 어르신들이 하얀색, 빨간색, 파란색 모자를 쓰고 경기장 안팎에 무리를 이루어 서 있다. 모자의 색은 어르신들이 출발한 지역을 나타내는데 오가는 길에 버스를 헷갈리지 않도록 역할을 할 것 같다. 이름은 체육대회지만 서로의 생사 확인이 목적인 양 점심시간이 지나면 행사가 마치기 전에도 많은 버스가 왔던 곳으로 출발한다. 어르신들이 점점 등이 굽어가는 모습에 시간이 많지 않아 보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한강에 딱 도착하니까 한강 다리가 무너진 거야. 왜냐면은 이승만 대통령이 북한군이 남하할까 봐 폭발시킨 거야. 언 한강을 건너오는데, 갑자기 말이지. 너희 증조할머니가 화장실 가고 싶다 해가지고 나를 한강 바닥에다가 놓고 갔는데, 미군 비행기가 와서 피난민들을 전부 이렇게 사살했어요. 비행기가 지난 다음에 어머니가 나를 부르는 거야. “둘째야 어딨냐!” 나를 부르고, 나는 “어머니, 엄마! 나 여기 있어, 엄마, 여기 있어.” 그래가지고 헤어지지 않았지. 한강을 건너서 영등포까지 내려왔는데 또 북한군이 내려오는 거야. 빨리 남쪽으로 더 내려가야 되잖아. 그때는 갈 길이 없어가지고 기차를 타야 됐어. 그런데 기차에 사람이 너무 꽉 차서 뭐, 기차 꼭대기고 화차고 말이지, 달라붙어가지고 탈 데가 없는 거예요. 기관사가 사람들 내리라고 빡빡 하는데도 기어이 붙어가지고 수원까지 내려왔다고. 어머니 아버지가 이불 두 개 짊어지고 머리에다 쌀, 한 세 끼 정도 먹을 것 지고, 그 다섯 식구를 끌고 내려간 거야. 그런데 누구 아는 사람이 있어, 직업이 있어, 재산이 있어. 이북에서 내려와 아무도 없잖아. 그런 가운데서 살았다.’
5년 전 둘째 아이가 <할머니, 할아버지 자서전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인터뷰한 내용이다. 초등 4학년 아이들이 각자의 조부모님을 인터뷰하고 자서전을 만드는 프로젝트였는데, 8월 여름 아이와 함께 질문지를 작성하고, 인터뷰를 했다. 시아버지는 손주 앞에서 5살 때 겪은 1·4후퇴 이야기를 어렵게 꺼내셨다. 이런 기회가 아니었으면 들어볼 기회가 있었을까?
인터뷰를 계기로 펼쳐본 옛 사진첩 속 시아버지는 용산고등학교 재학시절 육체미(당시에는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현재의 보디빌딩) 동아리 활동사진이 있어 깜짝 놀랐다. 명문대에 진학했으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업을 계속 이어가지 못하고 베트남전에 참전하셨다. 이후 교도관으로, 보건직 공무원으로 평생 공직에 계셨다. 때문일까? 나와 남편이 정치적인 견해를 이야기하면, 모난 돌 정 맞는다고 사람들 앞에서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하신다. 괜히 말을 잘못하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며 걱정하신다. 그 연세의 보통 어르신들이 그렇듯, 전쟁을 다시 겪을지 모른다는 공포를 전제로 세상을 판단하신다. 지금도 늘 배움을 놓지 않으시고, 신앙에 있어서 지혜로운 말씀을 하시는 시아버지가 그 부분에 관해서는 유난히 과하게 반응하시는 이유가 궁금했다. 아이의 인터뷰를 통해 비로소 답을 찾았다.
인터뷰 후 시아버지는 나에게 생사가 갈리는 전쟁의 현장에서 떨고 있는 5살 아이로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기차에 매달리는 사람들 가운데서 아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생각해 보니 시아버지는 불과 몇십 년 차이의 동시대 사람이다. 겪지 않은 사람은 모를 전쟁의 처절함이 각인되어 몸이 먼저 반응하시는 게다. 그런 배경을 모른 채 나의 경험과 지식으로 그 세대를 판단하는 건 얼마나 오만한 일인가? 대화할 때 되도록 정치적 이슈를 피할 뿐이다.
첫댓글 오늘도 시골에 계신 엄마는 전쟁이 날까 걱정하시며 전화를 하셨습니다.
법원에서 전쟁난거 아니냐며..
이미 전쟁을 겪으셨던 엄마의 깊은 한숨에서 두려움이 느껴졌습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