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수의 단위를 나타내는 우리말은 없었나
수에 각각 알기 쉬운 이름을 붙여 조직적으로 명명(命名)하는 방법을 명수법(命數法numeration)이라 한다. 명수법은 0, 1(하나), 십(열), 백, 천을 기본으로 하고 만, 억, 조, 경을 보조로 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1에서 만까지는 10곱을 셈하여 올라가고 억부터는 아랫수의 만곱을 셈하여 올라간다. 즉 만은 천의 10곱이요, 억은 만의 만곱이다.
이렇게 셈하여 일, 십, 백, 천, 만, 억, 조, 경(京), 해(垓), 자(秭), 양(穰), 구(溝), 간(澗), 정(正), 재(載), 극(極), 항하사(恒河沙), 아승기(阿僧祇), 나유타(那由陀), 불가사의(不可思議), 무량수(無量壽)로 올라간다. 이것은 우리 동양의 명수법이고 미국과 영국에서는 1에서 108(1억)까지는 같으나, 그 이상에서는 달리 호칭한다.
그리고 소수에서는 1의 10분의 1을 푼 또는 분(分)이라 하고, 이하 10분의 1마다 이(厘)·호(毫)·사(絲)를 거쳐 허공(虛空),청정(淸淨)에 이른다. 허공은 10의 -20승이고 청정은 10의 -21승이다. 그러니까 청정은 0점 아래 0이 21개인 작은 수다. 분수를 부르는 이름에는, 1/2을 반(半), 1/3을 소반(小半), 2/3를 대반(大半)이라 하고, 옛날에는 ‘셋으로 나눈 하나’ ‘넷으로 나눈 하나’라는 말도 썼다.
그러니 지금 명수법으로서 가장 큰 수는 무량수고 가장 작은 수는 청정이다.
여기서 작은 수를 가리키는 허공과 청정 그리고 큰 수를 가리키는 항하사 이상의 수는 다 불교에서 유래한 말이다. 허공과 청정은 불교에서 모든 것을 놓아버린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항하사는 항하(恒河)의 모래라는 뜻으로, 셀 수 없이 많음을 의미한다. 항하는 인도의 갠지스강을 말한다. 항하사는 항하사수(恒河沙數)라고도 하는데 여러 경전에서 셀 수 없이 많다는 것을 비유할 때 쓰인다. 『지도론(智度論)』에는 ‘항하사는 부처가 나신 곳이고 유행(遊行)하는 곳이며 제자가 나타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아승기는 산스크리트 asamkhya를 음역한 말로, 수리적으로는 10의 56승을 뜻한다. 경전에는 수없이 나오지만 세종이 읽었다는 『산학(算學)』에도 나오고,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석보상절』에도 등장한다.
나유타, 불가사의도 전부 불경에 나오는 한량없는 수를 나타내는 말이다.
무량수는 범어 아미타유스(Amitāyus)를 음역한 말인데, 서방 극락세계에 머물고 계시는 아미타 부처님의 명호이기도 하다. 아미타불의 수명이 한량없고, 또한 중생을 제도하여 수명이 한량없도록 하기 때문에 무량수라고 한다.
그런데 이들 수를 읽을 때 잘못 읽고, 잘못 쓰는 경우가 더러 있다.
이 중 허공을 공허로 쓰는 이가 있는데 이는 일본식이다. 秭(자)를 秄 자로 쓰는 것도 일본식이니 맞지 않다. 또 무량수를 무량대수(無量大數)라 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 역시 일본식을 들여와 쓰는 것으로 바르지 못한 것이다.
무량수(無量壽)를 無量數로 적는 것도 역시 틀리게 쓰는 것이다. 이것은 원래 부처의 한량없는 수명이란 데서 나온 말이기 때문이다. 아미타불을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이라고 하는 것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 아승기(阿僧祇)를 ‘아승지’로 읽는 사람이 있으나 이 역시 잘못된 것이다. 이는 한자 祇 자와 祗 자를 혼동해서 생긴 것으로, 祗 자에 ‘기’라는 음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음이라 취할 바가 못 된다. 아승기는 산스크리트 asamkhya를 음역한 것이므로 반드시 그 소리대로 ‘아승기’라 읽고 阿僧祇로 써야 한다.
그러면 우리말의 명수법을 알아보자.
우리말 하나의 10곱은 열이다. 열의 10곱은 ‘온’이다. 용비어천가와 월인석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온 사람 다리샤 [遂率百人 백 사람을 거느리시어] 용비어천가 56장
百寶는 온 가짓 보배라 [백보란 백 가지 보배다] 월인석보 8장
우리는 이 ‘온’을 완전하고 충족된 것으로 관념하였기 때문에 ‘온’은 ‘모든, 온갖, 완전, 전부’의 뜻을 갖게 되었다.
온 체ㅣ 오로 업스며 [擧體全無 온 몸이 완전히 없으며] 원각경언해
님아 님아 온놈이 온말을 하여도 님이 짐작하소서 [임아 임아 모든 사람이 온갖 말을 하 여도 임이 짐작하소서] 고시조 정철
지금 쓰고 있는 ‘온 동네, 온 천지, 온 세상’ 등의 ‘온’이 모두 그러한 예다. 그런데 이 ‘온’은 한자어 백(百)에 눌려 원래의 의미는 사라졌다.
1000을 가리키던 우리말 ‘즈믄’도 한자어 천(千)에 밀려 사라지고 말았다.
리 즈믄 매 비취요미 니라 [달이 천 강에 비치는 것 같다] 월인석보 11장
즈믄 뫼곳 갓 제 하도다 [천 산이 허허로이 저마다 많이 솟아 있도다] 두시언해
만의 우리말은 ‘골’이다. 이 역시 한자의 위력에 제 자리를 잃고 말았다. 다만 ‘골백 번’이란 말의 한 자락에 겨우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억’의 우리말은 ‘잘’이다. 그러나 이 역시 본래의 뜻은 사라지고 부사 ‘잘’에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잘 한다, 잘 달린다, 잘 먹는다’ 할 때의 ‘잘’이다. ‘잘 하는’ 것은 ‘많은 것’과 관련이 있다. 짧은 시간에 ‘많이’ 하는 것은 ‘잘’ 하는 것이고 ‘잘’ 하면 점수도 ‘많이’ 받는다. 경상도 말에 ‘억수로 잘 한다’는 말이 있는데, 이는 ‘잘’이 많은 수를 뜻한다는 의미를 안고 있다.
‘조’의 우리말은 ‘울’이다. 하늘의 이전 말은 ‘한울’이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울’은 영역을 뜻하는 말이다. 크고 넓은 영역, 그것이 하늘이다. 지금도 ‘하늘만큼 사랑한다’는 말을 쓰고 있다. 이는 ‘울’이 많다는 뜻을 머금고 있음을 암시한다. ‘울’은 지금 그 의미가 축소되어 ‘울장, 울타리, (돼지)우리’ 등에 그 자취를 남기고 있다. ‘We'의 뜻인 ‘우리’도 여기서 나온 말이다. ‘우리’는 나를 포함한 많은 영역이란 뜻이다. 어떻든 이 ‘울’이 크고 많은 영역을 나타내고 있어서 ‘조’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경’ 이상의 수는 어떤 문헌에서도 우리말의 자취를 찾을 수 없다. 아마도 그 이상의 많은 수는 선인들이 실생활에서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 명수법과 관련하여 무한을 의미하는 겁(劫)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자.
겁은 산스크리트 Kalpa를 번역한 말인데, 본디말은 겁파(劫簸)다. 이는 무한히 길고 오랜 시간을 뜻하는 말로서 찰나와 상대되는 말이다. 이것을 더 강조하기 위하여 천겁, 만겁, 억겁, 광겁曠劫, 영겁이란 말도 생겨났다.
겁은 인도에서 하늘나라[梵天]의 하루, 즉 인간세계의 4억 3천만 년을 가리킨다고도 하나, 이러한 개념은 사라지고 영원한 세월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우주가 영원히 되풀이되는 회전 운동임과 같이, 만물은 영원히 회귀하여 멈추는 일이 없다는 니체의 사상을 가리켜, 전에는 영원회귀라는 용어를 쓰더니 요즘은 영겁회귀라는 말을 많이 쓰고 있음을 본다.
그런데 이 겁을 비유하는 이야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사방 1 유순(由旬)이나 되는 큰 바위를, 천녀(天女)가 내려와 입고 있는 얇은 옷으로 백년마다 한 번씩 스쳐서, 그 바위가 다 없어져도 끝나지 않는 시간이라는 것이 그 하나이고, 또 사방 1 유순이나 되는 성(城) 중에 겨자씨를 가득 채우고, 그것을 백 년마다 한 알씩 꺼내어도 끝나지 않는 시간이 겁이라는 것이다. 전자의 비유를 반석겁(盤石劫)이라 하고, 후자의 비유를 겨자겁(芥子劫)이라 한다. 또 갠지스 강의 모래알 수만큼이나 한량이 없고 헤아릴 수도 없는 시간이 겁이라고도 하였다.
유순이란 단위는 한없이 긴 길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어떻든 이들 모두가 한량없는 시간을 나타내기 위한 비유담이다. 그러면 인도인이나 불교에서는 왜 그렇게 무한한 수와 한량없는 시간을 나타내는 말을 만들어 냈을까? 그만큼 오랜 세월을 살고 싶은 기원에서 그런 수와 시간을 만들어 냈을까? 아마도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무량수를 만들어 낸 반면에 작은 수인 허공과 청정을 겸하여 만들었고, 아승기겁을 만들어 낸 반면에 짧은 찰나라는 개념을 만들었다. 무량수와 허공, 영겁과 찰나를 함께 만들었다. 그러한 수 개념을 만든 것은, 무량수를 가지려 하고 무한대를 살고자 하는 우리 인간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주고자 하는 사유에서 나온 결과라 생각된다.
이 무량수와 겁에 비유하면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무량수와 겁을 만들어 경전에 그렇게 자주 내세운 것은 바로 이 물음에 답을 주기 위함에 있을 것이다. 억겁에 비하면 인간은 너무나 미세한 존재다. 이러한 사실을 진정 깨닫는다면 탐욕도 성냄도 어리석음도 사라질 것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을 깨우쳐야 한다. 그래서 인도인들은 엄청나게 큰 수와 엄청나게 작은 수를 만들어 그것을 통해 인간의 모든 것을 사유하게 한 것이라 생각된다. 불교의 공(空)사상도 이와 궤적을 같이 한다. 그들이 0이란 수를 최초로 발명해 낸 것도 우연한 데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