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갈릴레아 호수에서 -
☆ 2014년 가해 2월8일 (녹)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청주] 아무리 고달퍼도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열왕 3, 4 - 13
† 복음 : 마르 6, 30 - 34
★ 솔로몬의 꿈에 주님께서 나타나신다. 주님께서 그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는지 물으시자, 그는 듣는 마음을 주시어 선과 악을 분별하여
백성을 잘 통치할 수 있게 되기를 청한다. 부나 장수 대신 분별력을 청한
솔로몬을 가상히 여기신 주님께서는 그에게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을
주시고, 그가 청하지 않은 외적인 축복도 약속하신다(제1독서).
★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에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며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신다(복음).
◈ 오늘의 묵상
사람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살아가면서 만나는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판단을 내리고 실행하는 것을 뜻할 것입니다. 그 선택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상적인 일에 관한 것일 때도 있고, 때로는 인생의 흐름을
바꿀 만큼 중요한 것일 때도 있습니다. 이러한 선택 가운데에서 특히 의미
있는 것은 우리가 ‘윤리적(도덕적) 선택’이라 부르는 선과 악의 분별입니다.
왜냐하면 윤리적 선택은 결국 그 사람의 됨됨이를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우리는 올바른 윤리적 선택을 하게 하는 원천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솔로몬 임금에게 허락하신 대로
‘지혜롭고 분별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솔로몬이 통찰하였듯이, 이것
없이는 부와 성공과 건강 같은, 자신에게 유익한 모든 것이 허사입니다.
문제는 아무리 지혜로운 삶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갖가지 유혹이 깃든
세상에 살면서 인간이 자신만의 힘으로 이러한 분별력을 유지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러한 분별력을 바라는 솔로몬은
먼저 ‘듣는 마음’을 주십사고 청한 것입니다. 주님의 소리를 겸허하게 듣는
마음이 있는 사람에게 분별의 지혜는 자라고 보존됩니다. 이러한 이라야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옳고 훌륭한 일, 다른 이들을 위한 일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예수님에게서 우리는 타인을 위한 삶을 선택하게
하는, 듣는 마음과 분별력의 진정한 중심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연민의 감정이 살아 있지 않으면
분별력과 주의력은 진정한 이웃 사랑의 행위를 선택하는 것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보다 주님께서 지니신 그 뜨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청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러한 마음을 잃지 않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아무리 고달퍼도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2월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 6,30-34
아무리 고달퍼도
사람은 때때로 쉬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과
환경에서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자 합니다. 그런데 맘먹고 쉬려고 하면
꼭 일이 생기고 맙니다. 그러니 때로는 지금 자리를 떠나는 것이 필요하고,
어느 특정한 날을 정하여 쉬는 것보다 일상 안에서 쉬는 법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하고 있는
일을 즐기는 법을 터득해야 오래도록 지치지 않을 것입니다.
20세기 위대한 별이었던 슈바이처는 “현대인이 하루에 단 몇 분이라도
밤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를 생각한다면 현대 문명이 이렇게 병들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지냈습니다. 그래서 배를 타고 외딴곳을 찾아
떠났습니다.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입니다.
하느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습니다. 그리고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으니(창세2,2-3) 휴식은 재충전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이 가는 곳에 이미 도착하여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배를 타고 이동하였는데 모든 고을 사람들이
육로를 통해 이동하였다는 것은 어떤 어려움도 기꺼이 감당하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동시에 그들의 적극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을에서 나왔다는 것은 자기들의 삶의 현장을 떠났다는 것을
말해주는데 그만큼 예수님께는 인기가 좋았습니다. 스스로 내 세워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분을 둘러쌌습니다. 바깥에 있으려 해도 사람들이
그분을 중심에 모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이 드시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 하셨습니다. 가르쳐 주셨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아 일시적으로 먹여 주시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잡는
방법을 알려주셨다는 것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을
통해서 영적인 갈증을 채우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례를 받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지내시는 분이 많은 데 사실은 이제 시작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고 또 부족한 것은 다시 배우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셔야 할 것도 많고 우리가 배워야 할 것도 많습니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이룰 수는 없는 법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예수님께서는 주변에 사람이 많아서 너무 고달프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사랑이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이 크시기에 모든 수고로움을
수고로움으로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도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측은한 백성과 함께할 수 있음이 오히려 기쁨이요,
행복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은 외딴곳에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산에 들어가 밤을 새우시며 기도하셨습니다.(루가6,21) 이른 새벽, 동트기
전 외딴곳에서 당신을 파견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는 시간을
결코 소홀히 한 적이 없으셨습니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되셨던 주님을
바라봅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기도를 소홀히 할 수 없음을 생각합니다.
오히려 너무 바빠서 기도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휴식은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내 일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아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여러분들의 기도와 염려 덕분에 피정 잘 다녀왔습니다.
대구대교구의 박성대 신부님 지도 아래, ‘새로운 복음화’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던 피정이었습니다. 특별히 바쁜 일상의 삶에서 벗어나,
사제성소에 대한 생각을 더 깊이 생각하고 묵상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을
보낼 수가 있었습니다. 피정을 통해 얻은 힘으로 또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여 봅니다.
이번 피정 기간 중에, 인천교구의 원로 사목자 신부님의 강론 말씀 중에
인상 깊은 이야기 하나가 생각납니다.
옛날에 고집 센 사람과 똑똑한 사람 둘이 서로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고집 센 사람은 2*8=17 이라고 주장했고, 똑똑한 사람은 2*8=16
이라고 주장했지요. 서로 맞는다고 주장하는 이 다툼이 도저히 멈출 것
같지 않자, 마을의 원님을 찾아가서 시비를 가려달라고 했지요. 원님은
한심스러운 표정으로 먼저 고집 쎈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2*8=17이라 말했느냐?”
“네. 당연한 사실을 당연하게 말했는데, 글쎄 이 멍청한 놈이 16이라고
우기지 뭡니까?”
이 말에 원님은 “17이라고 말한 사람은 풀어주고, 16이라고 답한 사람은
곤장 열대를 쳐라.”라고 선고를 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너무나 억울해서
다시 하소연하자, 원님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2*8=17이라고 말하는 아둔한 놈이랑 싸운 네놈이 더 어리석은 놈이다!”
우리 주변에도 이렇게 고집 센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충돌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싸움도 많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집 센 사람을 이기려고
노력하는 똑똑한 사람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람까지도 받아들이고
포옹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사람이 이 시대에는 필요합니다.
예수님의 모습을 묵상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바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오고 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을’ 정도였지요. 그런데 예수님의 이 바쁨은 다른 이들을
누르고 위에 올라서기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바쁨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바쁨은 오로지 우리들을 위한
바쁨, 즉 우리들을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포옹하기 위한 참 지혜 그 자체로
인한 바쁨이었습니다.
‘2*8=17’이라고 주장하면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고집 센 사람들의
모습은 지금 역시도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사람들과 시비를
가리느라 바쁘고 정신없어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는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고 나누는데 정신없이 바쁜 우리들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그 모습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을 따르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가슴 뛰는지, 어떤 일을 하는 순간이 가장 기다려지고
설레는지 살펴보라. 자신의 가슴에 가장 많이 머무르는 대상이 바로
당신의 꿈이다(아네스 안).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요즘 독감이 유행이라고 합니다. 저 역시 이 독감으로 인해서 꽤 긴 시간을
힘들게 지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몸살, 오한, 고열 등으로 생활하는 것이
정말로 힘들더군요. 그리고 아프다보니 뭐든 것이 다 귀찮아집니다.
심지어는 매일 바치는 성무일도도 얼마나 귀찮고 힘든지 모릅니다. 그래서
제 때에 기도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때로는 한꺼번에 몰아서
기도할 때도 있었습니다. 몸이 약해지니 의지도 약해지고 그래서 해야 할
것들을 하지 못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몸이 약해지면 이렇게 정신도 약해집니다. 그런데 정신이 강하면 몸도
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만약 몸이 아파서 식사하는 것도 힘들다고 전혀
음식을 먹지 않으면 어떨까요? 병이 나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음식을 억지로라도 넘기기 위해 노력한다면 그 누구보다도
빠른 회복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몸과 정신은 이렇게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도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들도록 노력하는 것, 이 세상을
정말로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가 일차적으로 해야 할
것들입니다.
‘몸도 튼튼, 마음도 튼튼’ 우리들이 항상 기억해야 할 표어입니다. 그래야
주님을 나의 삶 안에서 쉽게 체험할 수 있으니까요.
- 인천교구 성소 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홀로 설 수 있을 때 함께 설 수 있습니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홀로 설 수 있을 때 함께 설 수 있습니다.'
2014년 가해 2월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너희는 따로 외딴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마르코6,31)
----
모든 일은 지치기 마련이다. 좋은 일, 좋아서 하는 일조차 지치게
되어있다. 그러니 필요할 때 쉬어야 한다.
시끄러운 것이 세상이다. 그 안에 살고 있는 ‘나’ 역시 시끄러워지기
마련이다. 내가 시끄러우니 세상도 시끄럽게 보인다. 결국 내 마음이
시끄러워진다는 이야기이다. 그럴 때는 쉬어야 한다.
쉰다는 것은 자신만의 시간을 만들라는 뜻이다. 자신만의 시간이란
하느님과의 철저한 둘만의 시간을 말한다. 내가 걸어온 길,
내가 걷고 있는 길, 내가 걸어야 할 길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간이다. .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홀로 와서 홀로 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그러면서도 함께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이다.
그 세상에 있는 나를 위해서 혼자만의 시간을 연습해야 한다.
보통 우리는 혼자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기에 더욱 혼자 서는 것을 배워야 한다.
홀로 설 수 없음은 함께 설 수 없음을 말하기 때문이다.
간혹 혼자가 좋아 혼자 있는다는 사람들을 만난다.
그것은 마음의 병이고 상처이고 도피이다.
혼자의 시간을 갖는 것은 함께 하기 위함이어야 한다.
이 세상의 모든 복음적 의미는 ‘함께 사는 것’ 안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고 싶을 때는 한 발 물러나서 고요에 머물러야 한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피세정념(避世靜念)
2014년 가해 2월7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 6,30-34
피세정념(避世靜念)
둘씩 짝지어 현장 사목 실습을 떠났던 제자들이 속속 도착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사명과 그에 따른 능력을 부여받은 제자들의 사목실습은
그야말로 대대적인 성공이었습니다. 제자들 스스로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에는 어리벙벙했었는데 어느 순간 예수님께서 행하시던 그 놀라운
기적적인 치유와 구마활동을 자신들의 손으로 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목실습 대상자들을 만났습니다. 별의 별 케이스를 다 접했습니다.
예수님 앞으로 돌아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예수님께 모여와,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다 보고”
하였습니다.
제자들의 체험담을 가만히 듣고 계시던 예수님께서 마침내 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은 “그래, 다들 고생 많았다. 성공적으로
끝나서 다행이다. 그럼 우리 축하주라도 한잔 할까?”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이 말은 다름 아닌 ‘피정’을 좀 하란 말입니다. 피정이란 말의 의미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한데 피세정념(避世靜念)을 줄인 말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말마디 그대로 복잡한 일상생활을 피해(避) 고요한(靜) 곳에 머물면서
하느님의 뜻을 찾는 일입니다. 요즘은 피정에 대해서 주님과 함께 하는
휴식, 주님 안에서의 쉼이 많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3년간의 공생활이라는 큰일을 앞두고 홀로 광야로 들어가셔서
40일간의 긴 단식침묵 개인 피정을 실시하셨습니다. 피정기간동안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이었을까요? 진정한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어디 있는지
헤아리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빵과 권력과 재물이라는 악마의 유혹으로부터 용감히 맞서 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피정을 보면 우리의 피정이 어떠해야 하는지 즉시 답이
나오는군요.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찾는 시기가 피정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내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시기가 피정입니다. 내
안에 내재되어 있는 무질서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시기가
피정입니다.
알폰소 성인께서는 피정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주 간단하게 세 문장으로
요약해주셨습니다. “온전한 마음으로 들어오십시오. 홀로 머물러 있으십시오.
새 사람이 되어 나가십시오.” 간단하지만 정말이지 다 들어있군요. 피정에
참석할 때 ‘좋은데 가서 좀 놀다오지’하는 마음으로 적당히 설렁설렁하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꼭 하느님을 만나고야 말겠다는, 하느님의 음성을
듣겠다는, 하느님의 뜻을 찾겠다는, 그분의 현존을 체험해보겠다는 강한
의지가 필요합니다. 뭔가 반드시 영적인 전환점을 마련하겠다는 간절한
마음도 중요합니다. 피정에 들어올 때는 온전히 비우고, 온전히 내려놓고
온전한 마음으로 그렇게 들어오라는 것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홀로 머무는데, 그냥 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홀로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홀로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침묵입니다. 하느님을
느끼고 하느님의 뜻을 찾고 하느님과 대화하기 위해 침묵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피정 집을 나설 때는 피정 전의
세속에 찌든 내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한 새로운 나로 거듭 나서
피정 집 문을 나서라는 것입니다.
피정이란 말의 의미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봤더니 이런 것인 듯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듣지 못하는 죽음의 삶에서 깨침의 삶으로 건너가는
파스카의 은총을 체험하는 순간. 더 이상 어두운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속박 받지 말고, 그저 지금 이 순간 충만한 하느님
자비에 푹 잠기는 것. 바로 지금 이순간이 천국이고, 지금이 구원의 때임을
온몸으로 느끼는 순간, 그러기 위해서 은혜로운 하느님의 말씀을 꼭
붙들고, 말씀에 머물러 지내는 은총의 순간. 결국 우리 매일의 삶, 인생
전체가 피정인 것을, 그래서 피정처럼 인생을 살고, 인생처럼 피정을
하는...”
지난 연례 피정 중 들길을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먹장구름이 온 하늘을
덮고 있었기에 서둘러 피정 집으로 발길을 돌리려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먹장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더니 빠르게 구름이
걷히면서 맑은 하늘이 열리는 것이었습니다. 투명하게 열린 하늘 앞에
불현 듯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사노라면 반드시 내 인생의 하늘에도
지금의 이 먹장구름이 활짝 걷히고 저리 고운 옥색하늘이 열릴 거야.’
퀴퀴하고 꼬질꼬질해 보이던 내 인생이 갑작스레 그런대로 봐줄만한
인생으로 바뀌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체험이었습니다. 피정의
결실이었나 봅니다.
그러면서 연이어 이런 생각들이 제 머릿속을 강타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눈물겹도록 감사한 일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놀라운 신비이며
환희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가 하느님 자비와 은총 안에 있다는
표시입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기회가 있다는 표현입니다.
우리 평생의 과제는 삶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가장 큰 선물임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연중 제4주간 토요일
2014년 가해 2월8일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 6,30-34
3일 동안 서품식이 있었습니다. 저는 주무 부서이기 때문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습니다. 6개월 전에 올림픽 체조 경기장 대관 신청을 했습니다. 3개월
전에 제단의 디자인을 구상하였습니다. 서품자들과 면담을 했습니다.
본당에서 보내온 서품자들의 서류를 검토했습니다. 현수막 제작, 초대장
발송, 평화신문과 가톨릭 신문에 홍보 신청, 평화방송 중계요청, 주차증
발송, 성소 후원회 봉사자 모임, 성가대 섭외, 전례연습, 신학생들 모임,
운전기사 사도회 섭외, 의무지원팀 섭외 등을 했습니다. 물론 함께 일하는
직원들이 수고를 해 주셨습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 걱정도 되었지만
하느님의 도움으로 잘 마칠 수 있었습니다. 기꺼이 봉사를 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5일에 있었던 주교서품식에서 주교회의 의장이신 강우일 주교님께서 축사를
해 주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교회와 주교직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새로이
주교가 되신 분들에게 덕담을 해 주셨습니다. 2000년 역사와 전통을 지니면서
교회는 연륜이 늘어났고, 조직이 정비되었고, 영향력도 커졌지만 원시교회가
지녔던 역동성과 순수함은 많이 퇴색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교회의 건물이
커져가는 만큼 교회의 순수함은 세상의 것들로 많이 덧칠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는 바로 이런 덧칠을 제거하는 쇄신, 정화,
속죄의 모임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는 언제나 쇄신, 정화, 속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도 아니었고, 초대교회에는 주교, 사제, 부제의 직무가
신분과 권위의 직분이 아니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벗이라고 부르겠다.’고 하셨고,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은 모두 목숨을 바쳐서 예수님을
따랐다고 하셨습니다. 가톨릭교회가 성장하면서 여러 직분들이 생겨났고,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로마의 제도와 풍습이 가톨릭교회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뒤 1000년 중세시대를 지내면서 교회는 세상과 밀월 관계를 맺기도 했고,
결별하기도 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것은 주교직은 봉사하는
직분이고, 예수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직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제단에 엎드려 기도하는 새 사제들을 보았습니다. 그분들 모두 순수한
마음으로 사제가 되셨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맡겨진 직분을 성실하게
수행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살면서 몸과 마음에 많은 덧칠이 칠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그럴 때 일수록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쇄신, 정화, 속죄’의 삶을 사시기를 기도합니다. 오늘 솔로몬이 하느님께
청했던 것처럼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수 있는 분별력을 청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셨던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니시기를 기도합니다.
새 사제들에게 선물을 드리고 싶습니다.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 하여라!”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사랑이 지혜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2월8일 연중 제4주간 토요일
열왕기 상3,4-13 마르6,30-34
<그들은 목자 없는 양들 같았다.>
+ 마르 6,30-34
사랑이 지혜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
이런저런 예화로 강론을 시작합니다.
‘한 사람이 영적으로 성장하면 전 세계가 성장한다.’
어디선가 읽은 잠언 같은 말과 더불어 떠오른 짧은 잠언 같은 영어 글입니다.
‘As you are, so is the world.’(네 정도만큼 세상도 그만큼 된다).
모두 공감이 가는 심오한 뜻을 지닌 말입니다. 우선적인 것이 외적인 것에
앞서 내적혁명, 내적성숙, 영적성숙임을 깨닫게 됩니다.
박노해 시인의 다음 말도 의미심장합니다.
‘진정한 나를 찾아 사는 것이 최고의 사회적 실천이다.’
참 역설적인 말입니다만 위의 말들과 일맥상통하면서 관상의 핵심을
지적합니다. 관상의 핵심은 두말 할 것 없이 진정한 나를 찾아 사는 사랑의
삶입니다.
관상은 물론 영적 삶의 큰 적은 욕심입니다. 나이 들어가도 약해지지 않는
욕심입니다. 성욕, 식욕, 물욕, 명예욕, 권력욕 등 어떤 형태로든 줄기차게
남아 있는 집착의 욕심입니다.
얼마 전 떠올라 묵상했던, 노욕(老慾), 노추(老醜)란 말도 생각이 납니다.
반대로 젊은이를 빗댄 소욕(少慾)이나 소추(少醜)란 말은 없는데 유독
노년에만 노욕과 노추를 말합니다. 노욕을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젊은이에게 욕심은 자연스런 매력이 될 수 있지만 노년인생에 노욕은
그대로 노추와 직결됩니다.
예전 나이 50을 넘어 선 어느 수녀님의 말도 잊지 못합니다.
“나이 50이 넘으니 겨울 산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가 요즘 틈나는 대로 보는 어느 후배가 보내 준 국내 곳곳을 답사하며
촬영해 만든 국보와 보물들의 화보집입니다. 예전에는 사진의 겉모습만
보였는데 이제는 마치 ‘지혜의 눈’이 열린 듯, 국보와 보물들을 만든 분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됩니다.
무욕의 사랑, 무욕의 지혜, 무욕의 아름다움입니다. 경천애인, 즉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할 때 무욕의 지혜요 무욕의 아름다움입니다.
사랑이 바로 지혜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제단 위에서 천 마리씩 번제물을 바치곤 하는 솔로몬의 사랑에 감격한
하느님의 물음입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솔로몬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물음입니다. 솔로몬의 다음 답변을 통해
그의 하느님 사랑과 백성 사랑이 어디서 기인하는가 알아채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 종인 제 아버지 다윗에게 큰 자애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그가 당신 앞에서 진실하고 의롭고 올곧은 마음으로 걸었기
때문입니다. …당신 종에게 듣는 마음을 주시어 당신 백성을 통치하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아버지 다윗에게 경천애인의 사랑을 배웠기에 이런 주님 보시기에 좋은
지혜를 청하는 솔로몬입니다. 하느님의 통쾌한 응답입니다.
“네가 자신을 위해 장수를, 부를, 원수들의 목숨을 청하지도 않고, 이처럼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력을 청하였으니, 자, 내가 네 말대로 해 주겠다.”
분별력의 지혜와 더불어 부와 명예의 선물까지 곁들여 받는 솔로몬입니다.
아버지 다윗에게 경천애인의 사랑을 배웠기에 하느님께 사랑의 지혜를
청해 선물로 받은 솔로몬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주님으로부터 사랑의
지혜를 배우며 선사 받습니다.
“너희는 외딴 곳으로 가서 좀 쉬어라.”
쉴 줄 모르는 것도 큰 병입니다.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를 향한 말씀입니다.
활동으로 지친 제자들에게 휴식의 자리를 마련해 주시는 주님의 지혜로운
사랑의 배려요, 이어 목자 없는 양들과 같은 이들의 필요에 응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복음과 똑같은 주님께서는 매일의 외딴곳에서의 이 거룩한 성전미사를 통해
당신 사랑으로 우리의 영육을 충전시켜 주시고 분별력의 지혜도 선사해
주십니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