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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오셨습니다.(눅2:8-14)
2023, 12/25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눅2:8-14절 말씀으로“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오셨습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지난주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동성결혼 커플을 축하한다는 발표를 해 논란이 일자 나중에 혼인을 축복한 것이지 동성결혼을 축하한 것이 아니라고 발뺌했습니다. 원래 천주교가 진리가 아닌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세속화가 급하게 이뤄지는 줄은 몰랐습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교황 말이 하나님 말씀인 성경보다 우선해서 그런지만 그래도 인류의 근본 질서를 깨뜨리는 참으로 괴이한 괴설을 주장하면 안 됩니다. 세상은 갈수록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황들이 심각해지다가 결국 종말에 이르게 될 것인데, 우리는 이렇게 돌아가는 세상을 바로 알고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그런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누가복음은 4복음서 중에 예수님의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다른 복음서보다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있는데, 어린 예수님이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와서 율법사들과 토론하여 그들이 놀라게 한 것도 이 누가복음에서만 나옵니다. 성탄에 대해서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해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말씀을 잘 보고 듣고 읽고 묵상해서 그리스도의 성탄을 더욱 깊이 깨달아 감사하며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아기 예수님이 가난한 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둘째로, 성탄을 축하한 목자들도 가난한 자였습니다.
셋째로, 주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불릴 만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의 성탄절은 주님이 이 땅에 오신지 2,027년이 되는 해입니다. 물론 주님이 탄생한 날을 성경에 기록해두지 않아서 실제 주님이 탄생한 날을 정확히 알 수 없어서 초대교회에서도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다고도 합니다.
신약성경도 성탄절을 지키라는 말씀이 없어서 AD 303년 밀라노감독이었던 암브로시우스가 성탄절을 지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비판했다고 합니다.
또한 성탄절에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와 상관이 없는‘산타클로스’나,‘루돌프 사슴’을 노래하고, 화려한 트리를 만들어 세속화되어가는 것도 문제이긴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중요하지 언제 태어났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을 하나님의 크신 은총으로 우리가 구원받은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념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돌아가신 날을 정확히 몰라도 특정 날을 정해서 지키는 것과 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이단들의 논리에 현혹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면 본문의 말씀을 따라가면서 주께서 왜 이 땅에 가난한 모습으로 가난한 자를 위해 오셨는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난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지금은 먹을 것이 워낙 풍성해서 가난의 아픔을 모르겠지만 먹을 것이 없어서 입 하나 덜자고 형 누나들이 남의 집으로 머슴살이 식모살이를 떠나야했던 시대를 경험했던 사람들은 배고픔의 아픔을 잘 알 것입니다.
특히나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북한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300만 명의 아사자가 속출한 상황에서도 없는 인민들의 것을 뺏어먹을 수 있는 권력자들과 돈 있는 부자들은 살아남았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영양실조로 자고 일어나면 내 가족이 죽고, 이웃집에서 사람이 죽어나가는 것을 보면서 더더욱 가난의 처절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도 우리는 미국에서 원조해준 우유가루나 밀가루를 통해서 허기를 메울 수 있어서 극한 배고픔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저도 국민학교 다닐 때 학교에서 옥수수가루로 만든 빵을 점심시간에 나눠줘서 그 빵을 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고 동네에서 나눠주는 우유가루 밀가루를 가져다가 매일 밀가루 죽을 쑤어먹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든 가난은 사람을 참으로 힘들게 만들기 때문에, 또 생명과 직결되는 먹고사는 문제라서 굉장히 예민해질 수밖에 없는데, 그래서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은 가난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5:3절에 "...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하시고, 마5:6절은 "...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이렇게 말씀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심령이 가난하고, 의에 주린 사람으로 영적인 부분을 말씀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육체적인 가난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습니다.
물론 북한처럼 생명을 위협할 정도라면 문제가 달라지겠지만 일반적인 가난에 대해서 긍정적인 언급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시107:41절에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그 가족을 양무리 같게 하시나니."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때 하나님은 영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물론이고, 육적으로도 가난한 자들에게도 필요를 공급하시며 채워주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후8:9절에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하심이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님은 태어날 때부터 이 땅의 모든 불행을 한 몸에 짊어지시고 오셔서 가난해지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 해주는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가난한 자에게 왜 복이 있을까요? 가난해야 하나님이 그 빈곳을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부자를 대체로 부정적으로 언급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부자는 모든 것을 다 갖고 있어서 부족함이 없었을 것이고, 따라서 하나님께 구하지도, 하늘의 복을 사모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배고파야 젖 달라고 울지 않겠습니까? 배고프지도 않는데 젖 달라고 울리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부자도 부족함이 없다보니 아쉬울 게 없어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간절함이 있어서 하나님을 많이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도 가난하게 오셔서 가난하게 사셨을까요?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태어난 곳이 어딥니까? 요셉이 호적 하러 간 베들레헴에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 예수님이 기거할 방을 얻질 못해 춥고 냄새나는 마굿간에서 너무도 초라하게 태어나셨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만약 요셉이 돈 많은 부자였다면 아무리 방이 없어도 따뜻한 방을 구하지 못했겠습니까? 당연히 구했겠죠. 돈을 많이 주면 자기들 안방이라도 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돈 없는 가난한 요셉이라 방을 못 구해 마굿간에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변방 갈릴리나사렛이란 낙후되고 가난한 땅,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천한 땅에서 자랐습니다. 마리아도 별 볼일 없지만, 육신의 아버지인 요셉도 근근히 생계를 꾸려가는 참으로 가난하고 별 볼일 없는 천하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기에 정상적인 공부를 못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요7:15절에서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 이렇게 말할 정도로 예수님은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우리예수님은 이렇게 최악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성장했지만 하나님이 함께하시니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위대한 선생, 메시야의 사역을 잘 감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도 가난을 두려워하지 말고 언제 어디서는 신앙인으로서 당당하고 자신 있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성탄을 축하한 목자들도 가난하였습니다.
아기 예수께서 베들레헴의 어느 마굿간에서 태어나셨던 그날 밤, 예수님이 태어난 곳과 가까운 들판에는 몇 명의 목자들이 밤새도록 양떼들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목동들은 양떼들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이리저리 양들을 데리고 다니다가 밤이 되면 한 곳에 모아 잠을 재우는데, 가끔씩 사나운 짐승들이 양떼를 습격하거나, 부근을 지나는 사람이나 그 지역사람들이 몰래 양을 훔쳐가는 경우가 있어서 목동들은 밤을 세우며 양을 지키곤 했습니다.
보통 양떼가 작으면 주인이나 그 자녀들이 직접 목동 일을 하기도 하지만, 대체로 주인에게 고용되어 일하는 목동들이 대부분이라서 사회적 지위도 낮고, 또 가난한사람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지금도 노동의 대가가 낮아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당시에는 어떻겠습니까? 일하는 품삯이 너무 낮아서 거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일 없으면 굶어야 하는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목동들의 삶 또한 얼마나 비참했겠습니까?
이런 목자들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주님이 탄생하신 그날 밤, 그들이 들판에서 양들과 잠들어 있을 때 찾아 온 천사로부터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는데, 다윗의 동네 곧 베들레헴에서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돈 많고, 권세 높고,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왜 하필 낮고 천한 가난한 목동들에게 맨 처음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을까요? 왜 그들에게 맨 처음 복음의 기쁜 소식이 전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분명한 것은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가장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왜냐면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에게 먼저 복음이 전패되었을 것입니다. 세상권력자들, 부자들, 배우고 가진 자들보다는 더 많이 필요하고 더 간절한 가난한 자들에게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예수님이 탄생하실 때도 그렇고, 나중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도 가난하고 소외된 변방 갈릴리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며 활동했던 것을 보아도 이게 굉장히 의미심장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권력자들 부자들 지식이 많은 자들이 구원받기 어렵다는 뜻은 아닙니다.
만약 그랬다면 백부장 고넬료나 유대관원 니고데모도, 부자 아리마데 요셉이나 세리장 삭개오도, 서기관 율법사나 사도바울도 구원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만 가진 자들, 기득권자들은 가진 것이 많아 부족함이 없다보니 주님에 대해, 영생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당장 마태복음 19장의 부자청년도 돈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영생을 포기하는 것을 보아도 저들의 가진 것이 얼마나 복음을 막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의사 변호사 판검사 학자 등 소위 인텔리들 중에 모태신앙을 제외하고는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인 경우가 흔치 않습니다. 그만큼 저들은 권력이든 돈이든 지식이든 가진 것 때문에 교만하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목동들처럼 가난한 자들은 가진 것이 없다보니 복음이든 뭐든 받아들여 삶을 바꾸어보고 싶은 강한 열망으로 복음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이걸 아시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고아와 과부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으로 복음을 전했고 그 성과도 컸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가난하지만 겸손 자에게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가난하다고 부끄럽고 위축될 필요가 없고, 많다고 교만해서도 안 됩니다.
오직 여러분들은 성탄을 맞이하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만을 구하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되어 성탄의 복을 받을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주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불릴 만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난한 자에게 관심이 많고 그들에게 우선적으로 복음을 전하신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당신이 태어난 배경부터 성장하는 과정과 사역하는 현장을 볼 때도 주님은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고 함께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가난한 자의 하나님으로 불리울 만 한데, 시109:31절에 절에 "저가 궁핍한 자의 우편에 서사 그 영혼을 판단하려 하는 자에게 구원하실 것임이로다." 이렇게 말씀하셨고, 시107:36절에 "주린 자로 거기 거하게 하사 저희로 거할 성을 예비케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을 볼 때도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긍휼이 많은 분이라 일종의 약자인‘언더독’에게 특별히 관심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만들어놓으신 이 세상은 소유권이 인정되고, 자유경쟁을 통해 시장 질서를 중시다보니 자연스레 경쟁에서 밀려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 밀려난 사람들의 생계를 보장할 필요가 있어서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을 더 챙기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시고, 긍휼과 인애가 풍성해서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이 많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진 자들에게 의무적으로 매 3년마다 구제의 십일조를 하게 했고,(신14:28-29) 또 안식년을 제정해 땅의 경작을 금지해 땅도 쉬고, 또 떨어진 씨앗으로 자연적으로 결실하는 곡식과 또 자동으로 열리는 유실수의 과실을 가난한 자들의 몫으로 돌렸으며, 또 추수할 때도 소출의 1/10 정도의 이삭을 논밭에 남겨두게 함으로 가난한 자, 소외된 자들의 생계를 보장하도록 힘쓰셨습니다.
시10:14절에 "...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자니이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삼상2:8절에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핍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드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위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하나님이 가난한 자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가 천사에게 성령으로 수태할 것이고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는 말씀을 듣고 눅1:38절에서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네게 이루어지이다. 이렇게 계집종이라고 말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후 성령의 감동으로 부른 노래에서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비천한 계집종인 마리아에게도 주의 은종이 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할 것이니 그러므로 소유의 많고 적음에 좌우되지 맙시다.
주님은 이 땅에 가난한 자와 어렵고 힘든 자들,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있어도 항상 즐겁고 당당하게 성탄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기쁜 성탄 되시길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