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4일 목요일 맑음. 서경 홍범 편 앞부분을 강독하다.
낮에는 집에서 멀지 않는 녹번동에 있는 초당(李武鎬) 서실에 나가 보았다. 이 달부터 정식으로 입회를 하고 매주 목요일 오전에 한 번씩 나가 보겠다고 하였다. 고향 사람인데, 국회와 KBS의 서예반을 지도하는 등 매우 바쁘기 때문에 목요일 오후에만 여기에 나와 앉아있다고 하였다. 오후에 다니면 좋지만, 이미 내 스케줄에 짜여진 일정이 하나 있어 부득불 오전에라도 다니겠다고 하였다. 그 부인도 글씨를 잘 쓴다고 하니 그 분은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글씨를 좀 쓴 뒤에 점심을 사서 먹고 오후에 구기터널 위로 난 북한산 둘레 길의 한 구간을 걸어서 강의를 하러 다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오후 3시에 일가 사람들과 함께 하는 구기동의 공부 모임에 가서, 어제 출판사에서 무료로 기증 받은 김학주 교수의 《새로 옮긴 서경》을 한부씩 나누어 주고서, 그 책의 맨 앞쪽 해설 부분과, 홍범편 전 반 부분을 강독하였다.
먼저 13경 전체에 대한 포괄적인 설명, 한국 전통문화연구회에서 지금 진행 중인 방대한 《십삼경주소》의 완역 작업(총 130 권 출간 예정인데 이미 그 일부가 출간되고 있음)을 보충 설명한 뒤에, 김교수의 책 해설에도 간단하게 언급되고 있는 대만(굴만리의 상서석의), 일본(길전행차랑의 상서정의정본)과 서구의 대표적인 서경의 역주자(영국의 제임스레그, 스웨덴의 칼그렌의 저술) 작업에 관련된 내용을 조금씩 부연 설명하였다.
홍범 편 원문은 김교수의 책에서 달아놓은 글자 풀이 단어 풀이 중에서, 잘 못 보던 글자. 또는 자주 보기는 하지만 뜻이 지금 통용되고 있는 의미와는 아주 다르게 사용되고 있는 것만 짚어 가면서 이야기 하여 주었다.
3시간 가까이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오늘도 참석을 하신 행파(杏坡: 용태) 형님이 “경 敬” 공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면서, 정좌하여 심신을 수렴하는 호흡법을 설명하면서 함께 몇 분 동안이라도 명상을 하여 보자고 제안하셔서, 모두 따라서 하여 보았다. 모두 현직에서 떠난 나이 든 사람들의 모임인데, 중간 시간에 10여 분 넘게 그렇게 하고나니 훨씬 공부하는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았다. 앞으로 매주 이러한 마음공부를 실천에 옮기는 방법을 30분 정도씩 설명하고, 또 시범을 보여주시겠다고 하셨다.
현대 사람들이 아무리 책을 많이 읽는다고 하여도, 그것은 머릿속에 “빈 지식”만 추적할 뿐이고, 이렇게 무엇이라도 몸으로 실행하여 보는 공부를 계속하여 가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이러한 유학의 실천운동을 구체적으로 보급하여 보고 싶은데, 여기서 책을 함께 읽는 것도 좋지만, 그런 쪽의 실천운동에 대한 구상도 함께 하여보자고 하셨다.
90이 가까운 연세에도 이렇게 책을 읽는 공부도 즐겨하시고, 또 이런 책에 나온 정신을 체득하여 현대사회에서 그 취지를 실천궁행하여 보는 일에까지 앞장서고 계시니 참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결코 쉽게만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런 취지는 좋지만, 자칫하다가는 너무 “보수적”이라는 인상을 받기도 쉬우니,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앞으로 우리들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될는지 하는 좌표부터 먼저 설정을 하는 게 중요할 것 같다. 정말 공자님의 말씀과 같이 “잘 안될 줄을 알면서도 무엇이라도 하여 보고자하는” 경지에 이른 분 같이 생각된다.
오후 6시 경에 공부를 끝내고, 행파 형님은 집으로 가시고, 나머지 사람들을 절로 올라가는 물길을 따라서 한참 올라가다가 그 개울 물 곁에 있는 한적한 식당에 들어가서 저녁을 함께 먹고 헤어졌다. 전에도 큰 조카를 따라서 두 번 쯤 와서 본 식당인데 늘 와서 보아도 손님은 별로 보이지 않지만 음식은 매우 푸짐하게 잘하여 주는 집이다. 특히 이 사람은 지금 밥보다는 나물을 많이 주는 식당을 좋아하는데, 이 집도 그러한 곳에 속하는 것 같다.
9월 15일 금요일 맑다. 오랫 만에 보청기를 껴 보다.
오전에는 연평문답 윤독 모임에 나갔다. 퇴계문집에도 수록된 연평문답 발문을 읽었다. 그 글의 번역문이 국역퇴계전서에도 수록되어 있지만 그것은 복사하여 나누어 주기만 하고, 발표자가 한문 원문을 짚어 가면서 해석을 하고 설명을 하여 나갔는데, 내가 원문에 나오는 글자의 미묘한 맛 같은 것을 간과하고 넘어가는 것을 더러 지적하여 가면서 보충 설명을 하여 주었고, 이광호 교수도 더러 이야기를 보태어 나갔다. 전공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글을 읽는다는 것이 참 좋은 점이 많은 것 같이 생각된다.
그 모임에 참석하였던 내 또래 친구 두 사람(김호기, 엄성진)과 같이 점심을 따로 사서먹고, 인사동의 길 가의 어떤다방 2층에 들어가서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이 근처에 있는 일본문화원으로 김박사(한무숙기념관 관장)가 전화를 하더니 , 한국인 여직원을 한사람 불러내어 이야기를 좀 나누고서 돌려보냈다. 그 문화원의 일본인 원장과도 잘 안다고 하였다. 참 발이 넓고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오후에 성대에서 국제퇴계학회 월례 발표회를 한다고 하여서 나가 보았다. 소리를 잘 못 알아들으면 답답하기도 하고, 또 딴 사람들이 답답하게 여길까 싶기도 하여, 오랫 만에 보청기를 끼고서 그 회에 참석을 하여 보았다. 발표자 두 사람이 모두 주자와 그 스승 이동 선생 사이에 질의 토론한 내용을 담은 《연평답문》이라는 책에 관하여 발표를 하였는데, “미발未發”에 관련된 문제에 관하여 발표와 토론을 많이 하였다.
이퇴계 선생은 미발의 활동성을 인정한 것인가? 미발인 상태에서도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소이가 갖추어져 있느냐? 없느냐? 뒤의 문제를 문제를 놓고, 지금 한국의 현역 철학자 중에도 찬반이 서로 엇갈리고 있다고 한다. 나는 무슨 말인지 잘 납득이 되지 않으나, 하여튼 젊은 후배 학자들이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매우 즐거웠다. 다음 금요일 오전에 다시 연평문답을 읽으면서 이런 문제를 또 이야기할 것이니 더욱 열심히 들어 보아야 조금 더 이해를 하게 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