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17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죽으면 죽으리이다 》
에 4:16
〈 드라마 ‘세작’의 왕과 여인 〉
채널 tvN에 방영한 ‘세작’이라는 드라마가 있습니다.
주인공인 왕(조정석 분)과 한 여인(신세경 분)이 등장합니다.
왕과 여인은 우여곡절 끝에 서로 깊이 사랑하는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여인은 왕에게 한이 서려 있습니다.
그 한으로 말미암아 사랑하면서도 왕을 죽이고자 음모를 꾸밉니다.
왕도 이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 중에도 둘은 서로를 깊이깊이 사랑합니다.
어느날 왕이 여인에게 다짐합니다.
“너는 내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와야 하는 내 여인이다.”
“나 또한 그러하다. 네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 것이다.”
여인은 왕의 이러한 다짐을 이용하여 계략을 꾸미고 왕을 부릅니다.
왕은 여인이 자기를 죽일 계획으로 자신을 모처로 불렀음을 모르지 않습니다.
자기를 죽이려는 여인의 계략을 알고도 그곳으로 갑니다.
여인의 초청에 약속된 장소로 나아가는 왕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오늘 설교 제목입니다. 《 죽으면 죽으리이다 》
‘내 너를 사랑하고, 네가 부르면 어디든 달려가겠다고 약조했다.’
‘설령 네가 나를 죽이려는 자리라 할지라도 나는 간다!’
그 자리에 나아가는 배우 조정석의 연기가 무척 빼어납니다.
지존의 자리, 왕위에 있지만, 한 여인을 사랑하므로 약조를 지킵니다.
약속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더라도 왕은 나아갑니다.
“사랑의 언약”을 위하여 《 죽으면 죽으리이다 》 참, 멋집니다.
이런 사랑에 빠져볼 수 있다면 죽어도 행복하지 않겠습니까?
☞ 오늘 설교 제목이 《 죽으면 죽으리이다 》입니다.
인생 살아가는 중에 이러한 결단을 해야 할 때가 ‘더러’ 있습니다마는,
이 설교 준비하면서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는가?’ 생각해보니, 없는 것 같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게까지 사생결단해야 했던 때는 없었던 듯합니다.
☞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 ① 사랑을 위한 결단 〉
드라마 ‘세작’에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결단하는 사례를 보았습니다.
남녀 간의 사랑, 그 사랑의 약속을 위해, “죽으면 죽으리이다” 시리도록 아름답습니다.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는 서약을 합니다.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에도, 부유하거나 빈한할 때에도, 검은머리 파뿌리되도록…”
사랑할 것을 서약합니다.
그런데, 이 서약은 없습니다. “살다가 성격 차이가 드러나도 갈라서지 않겠습니다!”
이 서약이 앞으로는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서로 사랑하기로 다짐한 약속, 이 약속 지키기 위한 “죽으면 죽으리이다”를 기억합시다!
기억해 두었다가 우리도 다짐을 해야 할 때가 온다면 기꺼이 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제가 ‘축복합니다’ 했는데요, 아무나 이렇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눈앞에 닥치면, 우리는 사랑을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살아남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 “죽으면 죽으리이다”하고 담대히 나아가면,
☞ 오히려 거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 하나님이 그렇게 섭리하시는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② 생계를 위한 결단 〉
구약 성경에 보면, 전쟁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고대시대 전쟁에는 ‘용병’이 있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돈을 주고 병사를 사들입니다.
용병으로 지원하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듭니다.
왜 모였을까요? 이들도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모입니다.
고대시대 생명을 부지하기가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초근목피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전쟁이 터져 용병을 모집 소식이 들립니다.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심정으로 용병으로 지원합니다.
만일 전쟁에 나갔다가 자신이 속한 나라가 이기고, 생명을 부지하면 대박이 터집니다.
전리품을 나눠 받을 수 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하고 나갔다가 실제 죽는 사람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러나 살아남으면 대박이 납니다. 고대시대 용병지원 역시 바로 이 결단입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 ③ 구국을 위한 결단 〉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결단, 첫째, 사랑을 말씀드렸습니다.
둘째 생계를 위하여 결단하는 고대 용병의 얘기를 드렸습니다.
세 번째 결단이 있습니다.
☞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과 싸웁니다.
이순신 장군은 조국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단했습니다.
그리고 노량해전에서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세세토록, 세계 만방에 길이 남았습니다.
“생즉사, 사즉생” 바로 이순신 장군이 남긴 말입니다.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살리라!
이순신 장군이 “죽으면 죽으리이다” 결단했기에 왜군을 물리쳤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조국은 살아났습니다.
성웅 이순신, 길이길이 나라를 구한 영웅의 표상이 되었습니다.
① 사랑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② 생계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③ 나라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동서고금 숱한 민초들, 고대 용병처럼 먹고살려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 오토바이를 타고 총알같이 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배달꾼들입니다. 일명 ‘라이더’입니다.
분초를 다투는 배달 경쟁의 시대입니다.
오토바이 배달에 나서는 일도 위험이 큽니다. 그들을 바라볼 때 안쓰럽습니다.
저들도 적게는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각오가 왜 없었겠습니까?
그래서 배달꾼 오토바이족을 긍휼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 또 있습니다. 택배운전사들입니다.
탑차에 짐을 가득 싣고 하루종일 배달에 나섭니다.
스물 네 시간이 부족할 만큼 달리고 또 달립니다.
택배차량을 만나면 왠지 비켜주고 싶어요! 도와주고 싶습니다.
모두가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니다.
“죽으면 죽으리리다” 험한 말이지만, 사실은 이 모두가 우리들의 이야깁니다.
〈 ④ 민족을 위한 결단 〉
오늘 본문 에스더 4장 16절의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주인공 이야기를 할 차례입니다.
(16절)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와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하니라”
‘하만’이라는 간신배의 농간으로 유대인에게 위기가 닥쳐왔습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한 길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위기상황을 왕에게 알려야 합니다.
마침 유대인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입니다.
왕에게 유대인이 처한 위기를 알릴 길은 에스더 왕비의 ‘직언’뿐입니다.
고대시대 왕을 알현하려면, 반드시 왕이 먼저 불러주어야 합니다.
왕의 부름이 없이 왕의 면전에 나섰다가는 목숨을 부지할 수 없습니다.
초청없이 왕 앞에 나섰다가 살아날 길은 왕의 ‘즉석 윤허’뿐입니다.
왕이 윤허의 의미로 규(홀)를 내밀면 그 규를 잡고 용건을 말할 수 있습니다.
왕이 규를 내밀지 않으면 왕의 군사들이 즉시 끌어내어 처형합니다.
왕이 규를 내밀지 않아, 에스더가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빠지면 유대인은 망합니다.
이때 에스더가 결단했습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갔을 때, 왕이 규를 내밀었습니다.
에스더는 유대인이 처한 부당함을 낱낱이 아뢸 수 있었습니다.
에스더도 유대 민족도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생즉사, 사즉생’이 떠오릅니다.
① 사랑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② 생계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③ 나라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④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 ⑤ 신앙을 위한 결단 〉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결단은 또 있습니다.
☞ 신앙의 결단이 있습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갈 때 유대인들에게 요청한 것이 있습니다.
내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으로 왕 앞에 나아갈 것입니다.
나아가기 전 “밤낮 삼 일간 금식을 해 주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유대인들 모두 금식했습니다.
에스더도 그 기간 함께 금식했습니다. 그리고 왕께 나아갔습니다.
금식 ~ 음식 섭취를 중단하는 일입니다.
금식은 그 자체로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도 간혹 금식을 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입니다.
☞ 모세는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했습니다.
☞ 예수님도 40일간 금식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믿는 자의 신실한 금식은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입니다.
생명을 주신 자 앞에서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 금식기도입니다.
금식 기도는 “죽으면 죽으리이다”의 가장 강력한 표상입니다. 할렐루야~
① 사랑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② 생계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③ 나라를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④ 민족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⑤ 신앙을 위하여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렇게 다섯 가지 예를 말씀드렸습니다.
① 드라마 ‘세작’에서 조정석은 자신이 왕인데도, 한 여인을 위하여 결단했습니다.
② 고대 전쟁에 팔려나간 용병들, 자신과 가족의 생계를 위해 결단했습니다.
③ 이순신 장군, 나라를 구하고자 결단했습니다.
④ 에스더는 유대민족을 위하여 결단했습니다.
⑤ 기독교인들, 신앙을 위하여 결단을 합니다.
〈 신앙고백 〉
설교를 시작하면서 제 인생에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는 결단 경험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 설교를 준비하고, 설교를 하게 되면서 깨달았습니다.
저도 사실은 이러한 결단을 꽤 해야 했었다는 것입니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이 결단을 해야 했다는 것을, ‘돌아보니’ 알겠습니다.
그럴 때마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섭리하셨다는 자복이 곧 신앙고백입니다.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최후의 한 호흡까지 토해내면서, 전력 질주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가 사실은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결단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간섭하셨습니다. 그리고 섭리하셨습니다.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생명을 내놓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생명을 누린다는 것은 우리가 누리는 행복이 생명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생명보다 큰 것은 없습니다. 한 생명이 온 천하보다 귀합니다.
온힘 다해 주님을 사랑할 때 행복이 생명만큼, 아니, 생명보다 크게 다가옵니다.
① 인생은 사랑을 위하여 결단하는 것입니다.
② 삶은 그 자체 즉, 생계를 위하여 결단하는 것입니다.
③ 나라를 위한 결단이 나라를 구합니다.
④ 민족을 위하여 생명을 내놓을 때 민족이 번영합니다.
⑤ 주님이 주신 생명까지 주님께 드리는 결단이 기도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