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조의 사모곡 육상궁, 그리고 칠궁
조선 왕조에서 '효(孝)'하면 정조를 떠올리지만, 영조의 효는 손자인 정조에 못지 않았다.
어머니에 대한 영조의 애틋함을 담은 곳이 경복궁 북서쪽 청와대 옆에 자리한 칠궁(七宮)이다.
칠궁은 영조가 어머니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1725년 지은 ‘숙빈묘(廟)'가 시작점이다.
이후 왕(추존 왕 포함)을 낳았지만 왕비가 되지 못한 일곱 명의 신주를 함께 모시면서 칠궁이 됐다.
알려진대로 영조의 어머니는 숙종의 후궁인 숙빈 최씨이다.
일곱 살 때 궁궐에 들어와 무수리로 지내다 숙종의 눈에 들어 1693년에 아들 영수를 낳았으나, 두 달 만에 죽었다.
다음해에 다시 임신했는데, 그 때 낳은 둘째가 연잉군(이금)으로, 훗날 영조가 됐다.
최 씨는 무수리 신분에서 내명부 종4품–종2품 숙의–종1품 귀인를 거쳐 숙종25년 1699년 정1품 빈의 지위를 받으며 숙빈 최씨가 되었다.
그러나 무수리 출신이라는 주홍글씨가 지워지는 것은 아니었다.
1724년 영조는 즉위와 동시에 경복궁 북쪽 지금의 칠궁 자리에 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지었다.
애초 생각한 장소는 잠저(潛邸)였던 창의궁이었다.
하지만 왕이 거처하던 곳에 사친(私親)의 사당을 둘 수 없다고 신하들이 반대하자 청릉군의 168칸 집을 사들여 사당을 조성했다.
1724년 숙빈묘(廟)라 했고, 1753년엔 육상궁(毓祥宮 상서로움을 기른다는 뜻)으로 격을 높였다.
영조는 재위 52년 동안 육상궁을 200여 차례나 방문했다.
답사는 재실 정문에서 시작한다.
탁 트인 마당 왼쪽으로 가옥 한 채가 눈에 들어온다.
현판은 두 개로 <송죽재> <풍월헌>이라 적혀 있다.
풍월은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뜻하는 것으로, 어머니의 영혼을 만나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송죽재와 풍월헌 앞에는 계단처럼 보이는 돌이 있다.
노둣돌이다.
말에서 내릴 때 이용했던 일종의 돌계단이다.
영조는 어머니에게 예를 다하기 위해 여기서부터 직접 걸어 사당으로 이동했다.
뒷마당에는 담장이 있고 동쪽으로 중문이 나 있다.
사당으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중문으로 들어서면 정면에 삼문이 나온다.
삼문은 세 개의 문을 나란히 만들어 놓은 것인데, 사당 입구에는 주로 삼문을 설치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오른쪽 문으로 들어가 제를 지내거나 예를 갖추고, 왼쪽 문으로 나오는 것이 예법에 맞다.
육상궁이 아닌 연호궁이란 현판과 마주한다.
연호궁은 영조의 장남 효장세자의 모친이자 영종의 후궁 정빈 이씨의 신주를 모신 곳이다.
정조는 즉위한 뒤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고 정빈을 위해 사당을 세우는 등 극진했다.
모두 영조가 죽기 전 명한 일이었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영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의 아들이 되어 왕으로 즉위했다.
연호궁은 1870년 육상궁에 합사됐다.
시어머니(숙빈 최씨)와 며느리(정빈 이씨)가 함께 합사돼 있는 것이다.
연호궁 현판 뒤쪽으로 현판이 하나 더 걸려 있다.
한 건물에 현판을 여러 개 걸 때 가장 새로운 것을 맨 앞에 거는 예법을 따랐다.
그런데, 육상궁이 아닌 육상묘라고 쓰여져 있다.
영조가 직접 쓴 것이어서 현판 위쪽에 붉은 글씨로 '어필'이라고 적혀 있다.
육상궁 현판이 고종 때 불에 타 없어지자 육상묘 시절의 현판을 걸어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육상궁과 연호궁 옆문을 나오면 냉천(우물)에서 흘러나온 물이 네모난 자연(연못)으로 흘러들어 간다. 영조는 어머니 제사를 지낼 때 냉천의 차가운 물로 목욕재계했다.
영조는 어머니 숙빈 최씨로부터 무수리 시절 세(細)누비가 가장 하기 힘들었다는 말을 듣고 평생 누비옷을 입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냉천 옆에는 '봉안각'이라 했던 냉천정이 있다.
봉안각은 어진(임금의 초상화)을 넣어둔 곳이라는 뜻이다.
'어머니, 저 잘 컸지요'라면서 왕이 된 자신의 모습을 어머니가 지켜보길 바라는 애틋한 마음이 엿보인다.
덕분에 영조의 어진은 지금도 전해진다.
이곳에 놓였던 영조의 어진(현재 국립고궁박물관 소장)은 정복 차림이지만 반신상이다.
영조가 생모를 곁에서 모신다는 상징적 의미에서 걸어 둔 것이었고, 진전에 봉안하던 용도가 아니었으므로 전신상이 아닌 약식의 반신상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면을 바라보는 보통의 초상화와 달리 시선을 아래로 향한 다소곳한 모습이다.
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머니의 사당을 지키는 아들의 모습으로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둔 것이다.
냉천정 현판의 차분한 글씨는 영조의 증손자 순조의 것이다.
서쪽 삼문으로 들어가면 덕안궁 등이 나온다.
덕안궁은 삼문과 마주보는 마당 한가운데에 있다.
덕안궁은 영친왕의 어머니이자 고종의 후궁인 순헌귀비 엄씨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1913년 덕수궁 근처에 사당을 지어 모시다 1929년 칠궁 안으로 들어왔다.
덕안궁 뒤쪽에는 나란히 서 있는 3개의 사당은 왼쪽부터 저경궁, 경종의 어머니이자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를 모신 대빈궁, 사도세자(추존왕 장조)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를 모신 선희궁과 순조의 어머니이자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를 모신 경우궁이다.
장희빈으로 잘 알려진 경종의 어머니 희빈 장씨는 중전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대빈궁의 기둥은 다른 사당의 사각기둥과 달리 유일하게 둥근 기둥으로 돼 있다.
대빈궁 문의 경첩 장식도 다른 사당보다 더 많다.
조선 시대 왕과 왕비의 신주를 모신 종묘의 기둥은 모두 둥근 기둥이다.
희빈 장씨의 아들 경종은 왕이 된 지 3년째인 1722년, 어머니를 옥산부대빈으로 추존하고 지금의 서울 낙원동에 대빈궁이라는 사당을 세웠다.
왕을 낳은 후궁을 위한 조선의 첫 사당이었다.
저경궁은 선조의 후궁인 인빈 김씨이자 추존왕인 원종의 어머니 신주를 모신 곳인데, 저경궁을 지어 모실 것을 지시한 왕은 영조였다.
영조는 자신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신분 상승을 치밀하게 준비했다.
인빈 김씨의 정경궁, 사도세자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선희궁의 사후 관리를 골고루 체계적으로 함으로써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분 격상의 명분을 쌓은 것이다.
선희궁은 사도세자(장조로 추존됨)의 어머니이자 영조의 후궁인 영빈 이씨의 사당으로 1908년부터 경우궁과 함께 있다.
경우궁은 정조의 후궁 수빈 박씨(순조의 어머니)의 사당이다.
선희궁과 경우궁, 육상궁과 연호궁은 한 건물 안에 각각 두 명의 신주를 모시고 있어 신주는 일곱이지만 사당 건물은 모두 다섯이다.
칠궁은 1968년 ‘1·21 사태’ 이후 50년 넘게 출입이 통제됐었다.
원래는 2만 평 규모였지만, 청와대가 들어서고 1·21 사태를 겪으면서 7000 평 규모로 줄어들었다.
북악산을 바라보고 섰을 때 칠궁 바로 왼쪽의 2층짜리 단아한 흰색 건물은 주한 교황대사관 건물이다.
교황들이 한국을 방문했을 때 숙소로도 쓰였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4년과 198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이곳에 머물렀다.
주한교황대사관 바로 앞 무궁화동산은 궁정동 안가가 있던 곳이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이곳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총을 쏘았다.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군사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겠다며 공원으로 조성했다.
궁정동은 육상궁의 ‘궁’과 온정동(溫井洞)의 ‘정’을 더한 이름이다.
온정동은 효자·궁정동 사이인데 겨울에도 더운 김이 나는 우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궁화동산에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1570~1652)의 집 터였음을 알리는 푯돌과 그의 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마는 /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하여라."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청과의 화의를 반대했던 청음이 청으로 잡혀가면서 남긴 시조이다.
그는 4년여 동안 청에 묶여 있었으나 끝까지 저항했고, 1645년 소현세자와 함께 귀국했다.
무궁화동산 근처 경복고등학교는 겸재 정선이 살던 집과 선조 때 승지를 지낸 조원의 가족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이다.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지키려다 왜군의 칼날에 목숨을 잃은 조원의 두 아들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종로구 효자동의 유래이다.
무궁화동산에서 죽 걸어내려오면 왼편에 경복궁 영추문(迎秋門)을 만난다.
경복궁 동쪽의 건춘문(建春門)과 짝을 이루는 영추문은 이름처럼 '가을을 맞는다'는 뜻을 갖고 있다.
해가 뜨는 동쪽은 봄을 상징한다고 해서 건춘문이고, 해가 지는 서쪽은 가을을 의미하니 영추문이다.
원래는 지금보다 50m 정도 남쪽에 있었다.
조선총독부가 낸 전찻길로 전차가 다니면서 그 진동으로 경복궁 담장과 영추문이 무너진 것을 지금의 자리에 복원했다.
영추문을 왼편에 두고 오른쪽으로 꺾어 통의동 35-15번지로 이동한다.
거대한 백송의 밑동이 남아 있다.
한국에서 가장 크고 나이 많은 백송이었지만, 1990년 큰 비와 강풍에 쓰러져 죽은 백송의 흔적이다.
이 백송은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에 있었던 것이다.
백송은 중국이 원산지로 중국을 왕래하는 사신이나 지체 높은 집안에서나 가까이 할 수 있는 귀한 나무였다.
영조는 19세가 되던 1712년 창의궁으로 들어갔고, 1721년 왕세제가 돼 궁궐로 들어올 때까지 10년을 이곳에서 살았다.
영조는 생모가 미천해 숙종의 다른 후궁이던 영빈 김 씨의 양자가 되어야만 했다.
영조는 51년 7개월 동안 왕으로 지냈고 지금의 기준으로 봐도 장수(81세)했지만, 어머니를 제대로 대우하기 위해 오랜 시간 명분을 쌓고, 치밀하게 준비해야 했고, 끊임없이 설득해야 했다.
조선은 봉건사회였지만 왕은 지존이 아니었다.
봉건사회 조선에서도 정치에는 명분과 과정이 중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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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오른편 가운데는 냉천정. 아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백송이 자라던 곳인 통의동 35-15).
ㅡ칠궁, 경복궁, 고궁박물관 등 '경복궁권역'은 다른 궁궐, 박물관과는 달리 월요일 관람할 수 있다(화요일이 휴무일).
- 모셔온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