흙과 다듬지 않은 돌로
20: 22-26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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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를 잘 보내셨습니까? 명절이 되면 주위의 기독교인들로부터 이런 질문을 많이 받습니다. ‘기독교인이 차례나 제사를 지내는 데에 참여하거나 절을 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또는 제사음식을 만드는 데 참여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제사나 차례를 지내고 그 음식을 먹어야 하느냐 말아야 하느냐?’ 여러분에게 이런 물음은 조금 식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우리 주변에는 이러한 일로 인해서 가족간에 의가 상해서 왕래를 하지 않거나 사이가 좋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심지어는 가족이 서로 갈라서는 경우도 보았습니다. 이것은 종교 간의 차이와 갈등이 삶을 지배하는 경우입니다.
어떤 종교든지 신앙과 사랑 중에서 무엇을 선택할까 하는 상황에서 기준이 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 기준은 유일신을 모시는 경우에서 더 엄격하고 철저합니다. 타 종교의 믿음에 대한 대상을 우상이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남한 개신교인에게 있어서 우상이라는 단어는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예민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우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도 있듯이 모세의 때부터 어떤 형상을 만들고 섬기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해왔습니다. 그 이전에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가 우상을 만들어 팔았는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거부해서 하느님의 택하심을 받았다는 유대교 전승이 있습니다. 십계명 중에도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둘째 계명이 우상숭배의 금지입니다(출애 20:4; 24:9-10). 그리고 많은 예언자들이 우상이나 신의 형상에 대하여 비판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아모 5:26; 이사 44:12). 신의 형상의 제작과 금지는 계속 반복해서 일어났습니다. 중세시대에 성상과 성화의 숭배 논란도 그 중에 하나입니다. 특히 기독교가 다른 문화권(동양)에 전래되면서 충돌했던 그 첨단에는 우상숭배가 있었습니다.
우리 전통문화를 그러한 시각으로 보면 걸리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개신교에서는 가톨릭의 마리아 상이나 성화 등도 우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엄격한 분류로 따져보면 교회의 십자가나 강대상, 그리고 예배당 자체도 우상에 해당합니다. 그래서 개신교적 상징도 우상이라고 하는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우상숭배를 관념적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즉 하느님보다 더 마음을 빼앗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이라고 합니다. 하느님보다 돈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돈이 우상이고, 부모나 자식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부모나 자식이 우상이라고 합니다. 물론 마음을 빼앗길 만한 것이 우상일 수 있습니다(삼하 15:23).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우상이란 그런 것과는 조금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후에 계속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네 가지의 명령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상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흙으로 하느님의 제단을 쌓으라는 것이고,
셋째는 돌로 하느님의 제단을 쌓으려면 다듬지 않은 돌로 쌓으라는 것이고,
넷째는 제단에 계단을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말씀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이스라엘의 상황을 고려해서 생각해 보면, 그 의미는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에서 금지했던 우상과는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종으로 있었습니다. 종살이하면서 무엇을 했습니까? 주로 신전이나 창고를 짓는 강제노역에 동원되었습니다(출애 1:11). 아마도 그들은 신상을 만들고, 성을 만들기 위해 벽돌을 만들어 굽거나 돌을 다듬고 운반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모두를 요셉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히브리라고 한다면, 그 강제노역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의 건설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BCE 2700-2000년 경). 히브리의 어원은 'apiru, Hapiru, habiru'(BCE 1450-1150년 기간에 사용)로 포도원에서 포도를 만드는 일꾼, 전쟁 포로, 채석장에 동원된 강제 노역자, 신전 건설에 동원된 부역자, 노예, 집단적 용병, 강도, 반란자, 탈법자, 도망자, 망명자, 농업 노동자 등을 가리킵니다.
피라미드는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대의 건축물인데, 이집트 전체에서 94개의 피라미드가 발견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기자 지역의 피라미드로서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인 쿠프왕의 피라미드의 경우 2.5t 되는 돌 235만 개와 10t 되는 돌 268만 개 정도의 화강암으로 구성되었다. 사용된 석회암과 화강암은 수십km 혹은 수백km 덜어진 곳에서 육로나 나일강을 통한 수로로 운반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하루 10만여 명이 1년에 3-4개월씩 20여 년(총 2천여 일)동안, 연인원 2-3억 명이 동원되었습니다.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하여 돌을 옮길 둑길을 만드는데 만도 10년이 소모되었는데 전체길이가 1km, 폭이 18m, 가장 높은 곳의 높이가 14.4m이었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 하나를 위해서, 그 사람을 신의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이러한 대규모 토목사업과 건축사업을 하면서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스라엘의 조상 히브리는 이러한 일에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지난 2001년 2월에 어느 교우의 후원으로 교회 청년들과 이집트와 이스라엘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그 때에 여행기를 김재일 집사가 홈페이지에 연재했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여행지 중에서 피라미드와 헤롯궁이 있던 맛사다 요새는 너무나 거대하고 웅장했습니다. 피라미드 앞에 섰을 때와 헤롯궁 터를 살펴볼 때에 나도 모르게 속에서 뭉클하면서 눈물이 나오려 했습니다. 마치 그 건출물을 지으면서 죽어간 수많은 원혼들의 울부짖음이 들리는 듯했습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히브리들이 걸었던 그 길을 따라 시내산 밑에 도착하여 성서를 읽는 중 오늘 본문에 시선이 머물렀는데, 특히 25절인 “만일 돌로 나의 제단을 쌓을 경우에는 다듬지 않은 돌로 쌓아라. 거기에 정을 대면 부정을 타게 된다.” 라는 구절에 머물렀을 때에 다시 피라미드와 신전들이 떠올랐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계명으로 지켜온 우상제작 금지의 의미가 여기에 있었구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의 종살이 할 때에 강제로 동원되어 했던 일을 생각하면 ‘어떠한 형상도 만들지 말고, 흙이나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으라’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기독교에서 우상은 나와 남을 구별하고 차별하여 나를 우월하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유일신 신앙이 고착화되면서 나와 조금만 다른 생각, 생활방식도 우상이라 정죄하고 그런 사람들과는 상종하지 않으려 하였습니다. 특히 그 잣대가 당대의 권력을 가진 세력에게 주어진다면, 자기의 정적을 처단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게 되어 당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화를 불러오게 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개신교인의 대부분은 우상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상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으로 우상의 실체를 규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한도 끝도 없고,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른 답으로 서로 혼란과 반목만 가져올 것입니다. 오히려 ‘어떤 행위가 우상숭배에 해당하는가?’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서 구별하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골로 3:5).
십계명의 첫째 계명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분류대로라면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이러한 분류도 유일신 신앙의 교리를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는 분류입니다. 유대교의 탈무드의 분류에서는 첫째 계명이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의 유일함을 강조하기보다는 해방하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형상 제작을 금지하거나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면서 겪었던, 지긋지긋한 강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흙으로 하느님의 제단을 쌓고,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고, 계단을 만들지 말라는 것은 신전을 만들기 위해, 죽은 사람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끌려가서 일해야 했던 그러한 노동행위를 거부하는 것이었습니다. 돌을 다듬기 위해 정을 대는 행위는 부당한 강제 노동이기 때문에 하느님을 부정하게 하는 것입니다.
강제 노동에서의 해방 그것은 우상숭배를 거부하는 것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거꾸로 생각하면 하느님을 부정하게 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인간의 노동을 소외시키는 것입니다. 노동자의 임금을 체불하고, 저임금에 시달리는 노동자들을 해고하는 것도 우상숭배입니다. 이러한 경영자들의 행위는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다른 사람, 다른 생명을 갈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생명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정치인들과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무기를 만들어 내고, 재래식 무기를 소모하기 위하여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는 것, 그 책임을 자기들이 생각하기에 없어져도 될 나라에 덮어씌우는 것, 그리고 그것을 묵인하는 미국인들을 보면, 미국이야말로 기독교 국가가 아니라 최대의 우상숭배 국가입니다.
이러한 우상숭배는 집단 간의 문제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평범한 삶에서도 경계를 늦추는 사이에 문득문득 일어납니다. 더 엄격히 말하면, 우상 숭배는 자기에게 맡겨진 일, 자기가 감당해야 할 사명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 사람 속에 있는 하느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도 이 땅에서 우상을 없애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수 없이 많은 생명이 나를 살리기 위해 죽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살아 있는 것은 나를 위해 죽어간 생명들의 희생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날마다 먹는 먹거리,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 내가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것이 생명 아닌 게 없습니다. 그들은 나를 위해 죽었기 때문에 나를 위한 대속제물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위해 죽은 생명들을 대신하여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생명들에게 부끄럽게 사는 것은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 열심히 살지 않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게 하는 것이고 우상을 숭배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