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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35: 1-5)
세상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어보았는가?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창35:1-5)
종교개혁적인 예배
야곱은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밤새 씨름하여서 하나님과 사람들과 겨뤄서 이겼다는 뜻으로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얻었습니다. 그 후 형 에서와 완전히 화해한 후에 가나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본문은 야곱이 여호와의 지시를 받고서 벧엘로 올라가서 제단을 쌓고 예배를 드리는 내용입니다. 단순히 자신들의 믿음의 결단과 헌신을 새롭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문 전체가 영적으로 성결해지게 되는 종교개혁적인 예배였습니다.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2절)에게 이방 신상들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부터 아비 집에서 드라빔을 갖고 왔습니다. 야곱이 부자가 되어서 우상숭배의 땅 하란에서 얻게 된 노비들도 신상들을 모시고 있었을 것입니다. 귀고리까지 버리도록 했는데 당시에는 그런 장신구에도 우상과 그 상징들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에게 떠나겠다고 통보한 것은 요셉을 낳은 직후였습니다.(창30:25) 그러나 라반의 간청에 못 이겨 6년을 더 봉사했으니까 가나안으로 들어올 때에 요셉은 6-7세였습니다. 요셉이 꿈으로 인해 형들에게 미움을 받은 것은 본문 사건 직후의 일로 요셉의 나이가 십칠 세였습니다.(창37:2) 따라서 본문의 제사는 야곱이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약 10여년이 흐른 후입니다.
야곱이 그 십년 동안에 여호와에게 한 번도 제사를 안 드린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야곱은 이스라엘의 선조가 될 자격이 없으며 또 그런 자를 하나님이 선조로 세울 리도 없습니다. 가나안 세겜 땅에 정착한 후에 곧바로 단을 쌓고 벧엘에서 꿈에 나타난 하나님이 당신의 약속대로 무사하게 귀향하게 해주신 은혜에 대해 예배를 드렸습니다.(창33:20)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십여 년 만에 새삼스럽게 야곱 집안에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했는지 그럼 또 야곱은 왜 그 동안에 자기 식솔들이 우상숭배 하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지 의아해집니다.
우선 틀림없이 야곱은 수많은 가축을 돌보랴 네 아내들의 시기 질투를 감당해내랴 도무지 정신을 차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거기다 가나안으로 돌아왔을 때 열두 명 자녀들의 나이는 약 14살에서 6살까지로 한창 문제 많은 사춘기 시절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여호와 신앙을 온전하게 지도 양육할 여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으나 어쨌든 집안에 우상 숭배용 물건이 남아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여호와의 장자인 야곱의 잘못입니다.
그런데 여호와가 단순히 그 잘못을 제거하려고 예배를 드리라고 명한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항상 앞뒤와 연결해서 살펴봐야 합니다. 바로 앞 34장에 기록된 사건 때문에 평소와 다른 특별부흥집회를 열게 한 것입니다.
야곱의 본처 레아에게서 난 딸 디나가 세겜 땅의 여자들을 보러나갔다가(창34:1) 히위 족속 추장인 세겜에게 강간을 당했습니다. 성경에는 지명과 인명이 같은 경우가 종종 나오니까 주의하셔야 합니다. 야곱 가문은 세겜 성 앞 들판에서 장막을 치고 목축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디나로선 집안에 딸이라곤 혼자뿐이니까 세겜 성안에 여자 친구들을 사귀었던 것 같습니다. 디나는 라헬의 아들 요셉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났기에(창30:21,24) 강간을 당했을 때는 십대 후반이었습니다. 조기 결혼한 당시 관습에 비하면 이미 완전한 숙녀가 된 것입니다.
세겜은 첫눈에 반해 디나를 강간했지만 더 깊이 사랑하게 되어서 그녀를 위로하고 아비에게 꼭 아내로 삼게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세겜의 아비 하몰이 야곱에게 찾아와서 예물은 달라는 대로 줄 테니 서로 혼약을 맺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후로도 집안끼리 통혼하여서 자기들 땅을 기업으로 삼고 사이좋게 지내면 서로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습니다.
여동생이 추행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의 아들들이 세겜이 이스라엘에게 행치 못할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다고 크게 화를 내었습니다. 그러면서 할례 받지 아니한 사람에게 우리 누이를 줄 수 없으니 너희 모든 남자가 할레를 받으면 누이를 세겜의 아내로 주고 너희와도 통혼하며 지내겠다고 역으로 제안을 했습니다. 원하는 대로 줄 수 있다는 예물은 요구하지 않고 단순히 할례만 거행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서로 종교가 달라서 결혼시킬 수 없으니까 너희가 우리 종교로 개종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같이 서로 한 민족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습니다.(창34:16)
야곱의 아들들의 말을 들은 세겜의 모든 남자들이 기꺼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통상적으로 회복하려면 일주일은 걸리는데 삼일 째 되는 날에(창33:25) 아직 거동조차 못하는 틈을 타서 디나의 친 오빠인 시므온과 레위가 기습하여서 몰살시켜버립니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가축 떼와 그 자녀와 아내들을 사로잡아 오고 모든 재물까지 약탈했습니다.
하나님을 팔았다.
이는 거룩한 종교의 경전에는 도저히 기록해선 안 될 것 같은 너무나 비겁하고 추악하며 잔인한 사건이었습니다. 만약 성경이 선각자들이 깨달은 도덕적 종교적 진리나 계명이었다면 도무지 포함시킬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그 전말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지어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삼류 막장 드라마 같은 내용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성경은 살아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알다시피 성경은 솔직히 외면 부인하고 싶을 정도로 비참한 인간의 영적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따르지 않으면 사람이 어디까지 비겁하고 추악하며 잔인해지는지 실제 사건을 통해서 독자더러 정확히 깨달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과 그 후손을 당신의 언약 백성으로 삼아서 이스라엘이라는 사람이 받을 수 없는 고귀하고도 영광스런 이름까지 지어주었음에도 인간의 수준이 그것밖에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한마디로 성경을 읽는 신자들에게 너희의 지금 모습도 바로 그렇다고 선언하는 셈입니다.
세겜 족장 하몰이 야곱에게 예물은 달라는 대로 주겠다고 제안했고 또 할례를 하라는 역제안에 순순히 응했지만 사실은 음흉한 속내를 숨기고 있었습니다. 야곱 가문이 통혼하고 자기들 땅에 함께 거하게 되면 결국 그들의 재산이 자신들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계산했습니다.(창34:23) 자기 아들의 소원도 이루어주고 재물도 늘릴 수 있으니 일석이조였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그들로선 평소 살아가던 방식대로 야곱 가문의 재물을 취하려고 아주 영악한 술수를 동원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야곱의 아들들이 중도에 기습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이십여 년이나 성실하고 정직하게 봉사했다는 사실이 인근에 이미 소문이 나있었기에 그 아들들의 말도 의심치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 중요하게는 예물을 전혀 요구하지 않으니까 야곱의 아들들이 자기들 머리 꼭지 위에 있는지도 모르고 순진하다고 얕본 것입니다. 그 결과 자기들이 먼저 음흉한 속내를 숨겼으니 자기들 잘못에 대한 벌을 스스로 찾아먹은 꼴입니다. 남을 속이면 반드시 더 큰 속임을 당하는 것이 인간사회가 돌아가는 원리인데 실은 하나님이 마련해놓은 섭리입니다.
할례보다 믿음이 우선이지 할례 받는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가 먼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세우고 그 후손을 창성케 하며 가나안을 기업으로 주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 약속을 아브라함이 믿자 그의 몸에 각인시켜서 영원히 보장한다는 표시로 할례를 하라고 명했습니다. 그럼 그 언약에 동참 헌신하려는 자만이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야곱의 두 아들이 세겜 백성에게 할례하면 한 민족이 된다고 말했으니(창34:16) 형식적으로 서약은 시켰을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로선 입으로만 맹세하고 나중에 취소하면 된다고 여겼을 것입니다. 문제는 시므온과 레위가 이 일을 두고 하나님께 전혀 기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야곱으로부터 이 일로 크게 야단을 맞았으므로 할례 언약은 몰라도 중간에 기습하려는 계획은 아비에게도 통보하지 않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거짓말 정도는 아무런 죄의식 없이 예사로 행한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세겜이 먼저 야곱을 속였던 거짓말의 벌을 받았듯이 야곱도 아비 이삭을 속였던 잘못 때문에 지금 거꾸로 자식들에게 속임을 당하는 셈입니다.
시므온과 레위는 잔인하게 살인을 자행했고 아녀자들을 사로잡아 왔으니 세겜의 모든 가정을 파괴했습니다. 포로들을 노예로 삼았고 어쩌면 복수한다는 핑계로 강간도 했을 것입니다. 여동생 디나도 졸지에 청상과부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이름을 팔아서 개인적인 원한을 갚으며 이 모든 사악한 죄악을 범했습니다. 이제 겨우 20대 초중반의 청년들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다고 노아 홍수 때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창8:21)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은?
이 사건을 하늘에서 굽어보신 여호와 하나님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인간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너무나 비통해서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인도 하에 하나님께 순종하여 여리고 성의 큰 승리를 얻었으나 탐욕에 젖은 아간이 재물을 노략하는 바람에 아이 성에서 대패했습니다. 여호수아는 아간을 돌로 쳐서 심판했고 탈취한 모든 재물은 불로 태웠습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사백 년 전에 아간 이상의 엄청난 죄를 범했으나 하나님은 단지 벧엘에 가서 제사를 지내라고만 명합니다.(창35:1) 목숨도 살려주고 탈취한 재물과 포로도 그대로 두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을 인정 내지 방관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께서 야곱에게 주신 그의 후손을 창성케 해준다는 한 가지 약속 때문입니다. 야곱에게 당신과 사람들로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을 주었는데 아직은 야곱 후손의 숫자가 사람들과 겨뤄 이길 만큼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주목할 사항은 여호와의 제사 드리라는 지시를 받자 야곱이 먼저 가족들에게 우상 신상과 귀걸이를 제거하라고 지시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으로 뒤늦게나마 야곱은 영적으로 크게 각성한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하나님과의 교제가 먼저인데 자기는 그 순서를 거꾸로 하며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은 것입니다.
평소에 집안 여인들의 귀걸이의 우상 문양이나 종들의 신상이 눈에 거슬리긴 해도 자기 일에 바빠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지나쳤던 것입니다. 가뜩이나 조용하고 온유하며 묵묵히 인내하는 성격인지라 자식들도 아주 자유롭게 키웠던 것 같습니다.
디나 사건이 끝난 후에 야곱이 두 아들들에게 어떻게 야단쳤습니까?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러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34:30)
먼저 나로 이 땅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라고 꾸짖었습니다. 시쳇말로 아비 얼굴에 똥칠을 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일로 이방 족속들 앞에 아비로서, 그것도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서 면목이 전혀 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이십대 초중반의 아들이 저지른 살인과 약탈은 아비가 지시했다고 믿을 것이며, 설령 자식들이 자의로 행했다고 변명해도 그 엄청난 죄악을 방조한 셈입니다. 세겜 백성들도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이십 년간이 정직하고 성실하게 봉사했다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족이 아니라 자기들 사이에 우거하는 야곱을 존경하고 있었을 텐데 하루아침에 천하의 악당으로 멸시받게 생겼습니다.
야곱은 또 나는 수가 적으니 그들이 모여서 치고 죽이고 그래서 자기 가문이 멸망할 것을 크게 걱정했습니다. 세겜 백성을 진멸시켰으니 똑같이 복수를 당할 것은 정해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럼 야곱 자신도 죽을 것이므로 사실상 본인이 창피 당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람들은 남의 일에 그리 세세하게 신경 쓰지 않으며 죽고 나면 그 사람은 금방 잊혀집니다. 야곱은 지금 필생의 소원인 여호와 언약이 완전히 무산되는 것을 크게 염려한 것입니다.
이제 그에게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에게 진정으로 회개하며 용서를 비는 수밖에 없습니다. 평소에 눈에 거슬렸던 우상 신상을 없애지 않고는 제사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점을 야곱이 모를 리 없습니다. 야곱은 신상을 버리고, 자기를 정결케 하고, 의복을 갈아입으라고 세 가지를 지시합니다.(2절) 육신과 영혼 모든 면에서 여호와께 정결하게 바쳐질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 결과를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5절)고 말합니다. 만약 이런 정결 절차를 행하지 않았으면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든 시므온과 레위에게 벌을 받게 했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이 당신의 장자의 모습을 회복하자 여호와 언약 가문이 사라지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야곱이 가장 크게 걱정했던 일이지만 실은 하나님이 가장 걱정한 일이었고 그래서 말씀드린 대로 시므온과 레위를 심판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놀랍고도 엄청난 권능
정작 본문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사항은 지금 가나안 족속들에게 두려운 마음이든 것은 야곱 가족이 제사를 드리기 전이었다는 것입니다. 세겜에서 우상 신상들을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서 단을 쌓을 벧엘로 출발했습니다. 제사 드리기 전에 단지 우상만 제거했더니 야곱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다고 합니다.(4,5절)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고 가르쳤습니다. 예배가 문제가 아니라 성화가 먼저라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사울이 잘못 드린 제사를 받지 않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삼상15:22)라고 선포했습니다. 바울도 너희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즉, 삶에서부터 거룩해져야 한다고 권했습니다.(롬12:1)
야곱이 우상을 땅에 묻자 곧바로 하나님의 권능이 온 가나안 땅에 역사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야곱 가족을 두려워했습니다. 너무나 신령하고도 오묘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역사입니다. 여호와가 능치 못할 일이 없으니까 당연하다고 여기고 치워선 안 됩니다. 상수리나무는 원래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입니다. 한국에도 큰 나무나 큰 바위는 그앞에 사당을 지어놓고 천지신명에게 안락과 풍요를 빌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야곱은 신상들을 우상을 숭배하는 장소 즉, 사탄이 활개 치는 본거지에 묻었습니다. 당시에 그가 인식했던 안 했던 사탄의 것들을 사탄에게 되돌려준 것입니다. 이는 사탄으로선 정말로 깜짝 놀랄 일이었습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자기에게 직접 대놓고 행동으로 거역하는 자가 나타난 것입니다. 다른 모든 사람들은 두려워서라도 하지 못하는 일을 야곱이 했습니다.
라헬은 아들을 더 낳게 해달라고 드라빔에게 빌고 또 빌었을 텐데 야곱은 오히려 그런 것들이 여호와의 은혜를 받는데 가장 큰 장애라고 여기고 과감하게 몽땅 땅에 묻었습니다. 다시는 찾지도 말고 미련도 가지지 말라고 영원한 작별을 고했습니다. 자식들과 아내들과 노비들 앞에서 여호와 언약의 장자로서 가문의 지도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한 것입니다. 라헬은 물론 모든 아내들과 아들들과 노비들 또한 그 경건한 위엄 앞에 신령한 두려움이 엄습했을 것입니다.
야곱은 여호와를 이긴 자로서 그분을 대신하여 사탄에게 대적했습니다. 그래서 이때 가장 크게 두려워 한 것은 사실은 사탄이었습니다. 또 그 당연한 결과로 사탄에 미혹되어서 노예가 되어 있는 가나안족속의 마음에도 당연히 까닭모를 기분 나쁜 두려움이 엄습했던 것입니다. 목축의 대가인 야곱이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등한히 할 만큼 특유의 성실성으로 일했으면 재산이 얼마나 더 늘어났겠습니까? 그런데도 자기들 동족 세겜의 남자들이 무참하게 진멸 당했는데도 아무도 추격해 오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2차 선교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여러 이적을 일으켰고 심지어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어도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나갔습니다.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귀신 들린 자에게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쫓아내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귀신들이 예수와 바울은 내가 알지만 너희는 누구냐 하며 덤벼들자 혼비백산하여 벗은 몸으로 도망치기 바빴습니다.(행19:11-16)
예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고 형식적 주술적으로 그 이름만 불렀기에 귀신들에게 무참히 패배한 것입니다. 그 엄청난 광경을 목격한 에베소의 마술사들이 은 오만이나 되는 마술에 관한 책을 모아다가 불에 살랐습니다.(행19:19) 마술은 불쏘시개에 불과하지만 예수님을 순전히 믿으면 큰 권능이 따른다는 진리를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야곱 집안의 우상과 장신구들도 지금 어떤 능력도 발휘하지 못하고 땅에 파묻혀서 거름으로 쓰이는 것 외에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 참으로 흥미롭지 않습니까? 바울이 자기 손수건이나 앞치마에 예수님이나 십자가 형상을 그려놓았을 리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것들과 접촉만 해도 즉, 구태여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거나 기도하지 않았어도 악귀가 쫓겨나가고 불치병이 나았습니다. 십이 년 간 혈루병을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완치되었던 동일한 이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바울의 소지품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는 예수님이 바울의 순전한 믿음과 헌신을 통해 심지어 바울이 그 자리에 없는데도 역사해준 것입니다. 본문도 야곱이 성결례를 진행하고 있는 사이에 인근의 족속들에게 여호와의 권능이 크게 임했습니다.
우상 신상과 장신구를 버려야 하는 야곱의 식속들의 처지에선 처음에는 많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 동안에 어쨌든 우상이 자기 인생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고 최소한 큰 재앙 없이 지냈던 것이 그 덕인 줄 믿었을 것입니다. 특별히 야곱을 따라온 노비들은 이런 인자하고 온유한 부자 밑에서 일하며 편하게 지내게 된 것이 그 우상 덕분이라고 여겼을 텐데 그것을 다 버리라고 합니다. 혹시 앞으로 큰 불행이 생기지 않을까 그 신으로부터 벌을 받을까 염려되어 많이 망설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어떤 집안에서 예수를 처음으로 영접하여 교회에 출석하려고 하면 집안에 큰 우환이 생긴다고 어른들이 말렸습니다.
어쨌든 노비들은 주인 야곱이 단호하게 명령하자 따를 수밖에 없었고 벧엘로 올라가 함께 여호와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란에서의 우상숭배와 전혀 차원이 다른 예배였습니다. 산해진미와 음주가무는 물론 무엇보다 음란한 의식이 따르지 않았습니다. 기이하거나 거대한 신상도 없고 화려하고 거창한 의식도 없습니다. 오직 양을 잡아서 제단 위에 피를 뿌리며 진정으로 회개하고 여호와께 용서를 구하며 그분께 감사 경배 기도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지금껏 경험해보지 못한 평강과 기쁨이 심령에 충만해짐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실은 우상들을 땅에 파묻을 때부터 까닭모를 두려움이나 억눌림이 깨끗이 사라지고 아주 평온해졌을 것입니다.
신자가 서있는 위치와 특권
모세 율법에는 이스라엘 전 백성이 일 년 동안 지은 모든 죄를 사하려고 대제사장이 딱 하루 지성소에 들어가 언약궤 위에 양의 피를 뿌리는 대속죄일 규정이 있습니다. 그 때에 다른 양 한 마리는 광야로 내보내는데 광야는 사탄이 거하는 곳으로 인식되므로 백성들의 모든 죄를 그 원흉이자 근원인 사탄에게 돌려보낸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어린 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구원을 예표합니다. 야곱도 집안의 우상관련 물건 전부를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어서 그 죄를 사탄에게 돌려보냈습니다.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의 대속 구원에 참여한 것입니다.
살펴본 대로 세겜 사람이나 야곱 아들이나 그 죄의 질이나 양에서 사실상 똑 같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로만 따지면 지금도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당장에 심판 받아 아무도 남지 않습니다. 야곱이 잠시 하나님과의 교제가 등한히 해졌더니 너무나 참혹하고 잔인한 죄악을 언약의 후손에 의해 저질러졌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피를 뿌려 우리의 죄를 대속해준 골고다 언덕의 제사에 체험적으로 동참하지 않고는 인간답게 살아갈 수는 있는 자는 단 한명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은 정말로 모든 인간이 반드시 알아야 할 100% 순전한 진리이며 반드시 소지해야 할 100% 완전한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긍휼에 힘입지 않으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곧바로 추하고 악해질 뿐입니다.
예수십자가 구원에는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천국영생을 선물로 주시는 은혜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덧입을 때에 우리도 본문의 야곱처럼 종교개혁예배에 동참한 것입니다. 사탄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옛 사람을 십자가와 함께 묶어서 죽였습니다. 사탄의 소유였던 것을 사탄에게 되돌려준 것입니다. 한 명의 죄인이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날 때마다 천국에는 큰 잔치가 벌어지는 반면에 사탄의 나라에서 사탄이 가장 큰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사탄은 신자를 시험 유혹은 해도 더 이상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직도 사탄의 지배 아래 미혹되어 있는 세상 사람들도 신자 앞에선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신자가 정말로 신자답게 서있으면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빛과 권능이 어떤 방식으로든 불신자들에게 전해져서 두려워지게 만듭니다. 사탄도 신자에게 꼼짝 못하는 판국에 사탄의 졸개인 흑암의 권세들과 사탄의 노예인 세상 사람들이 신자를 어떻게 해볼 도리는 절대로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너희 몸만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함께 능히 지옥에서 멸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마10:28)
여러분 우리가 그런 신분과 위치에 있습니다. 단순히 사탄을 이기는 권능에 좋아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형식적으로 믿으면 스게와 제사장의 일곱 아들처럼 도리어 무참하게 패배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일에 등한히 하면 큰 불행이 닥친다고 겁주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정반대입니다. 정말로 우리의 심령의 중심이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에 100% 순전하게 집중되어 있으면 우리로 인해 주변의 영혼들이 뒤집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는 일이 신자에게 달렸습니다. 신자가 그렇게 하지 못하면 세상은 소망이 사라집니다.
코비나 사태로 모두가 까닭모르는 불안감에 사로잡힌 지금이야말로 신자는 더더욱 그래야 합니다. 예수님이 우리더러 눈앞의 문제나 고난 없애려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 아닙니다. 전 세상과 견주어도 더 크신 그분이 십자가에 당신의 전부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 또한 우리 전부를 바쳐서 이 세상을 거룩하게 바꾸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부터 예수님을 처음부터 끝까지 증명해 내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그분의 진리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럼 우리부터 항상 기뻐하며 범사에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보는 주변 사람에게도 그 기쁨과 감사가 전해질 수 있습니다. 요컨대 골고다 십자가의 예수님만이 우리 자신뿐 아니라 불신자들 모두에게 알파요 오메가이고, 처음이자 끝입니다.
(9/6/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