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 示, 與視同. 指其掌, 弟子記夫子言此而自指其掌, 言其明且易也. 蓋知禘之說, 則理無不明, 誠無不格, 而治天下不難矣. 聖人於此, 豈眞有所不知也哉? 示는 視와 같다. 손바닥을 가리켰다는 것은 공자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스스로 그 손바닥을 가리켰다고 제자가 기록한 것인데, 이는 그것이 명확하고 쉽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대개 禘제사의 내용을 안다면, 이치가 밝지 아니함이 없고, 정성이 지극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성인이 여기에 대하여 어찌 진짜로 알지 못하는 바가 있겠는가?
延平李氏曰 記曰 魯之郊禘 非禮也 周公其衰矣 以其難言 故春秋皆因郊禘事中之失而書 譏魯自在其中 今曰禘自旣灌而往者 吾不欲觀之矣 則是顚倒失禮 於灌而求神以至於終 皆不足觀 蓋歎之也 對或人之問 又曰 不知 則夫子之深意可知矣 旣曰不知 又曰 知其說者之於天下也 其如示諸斯乎 指其掌 則非不知也 只是難言爾 原幽明之故 知鬼神之情狀 則燭理深矣 於天下也 何有 연평이씨가 말하길, “예기에 이르길, 노나라의 郊제사와 禘제사는 禮가 아니었는데, 이는 주공이 쇠미해졌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것을 말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춘추에서는 모두 郊제사와 禘제사 일 중의 잘못으로 인해 기록하였지만, 노나라를 기롱한 것도 저절로 그 안에 들어있었다. 오늘날 禘제사에서 이미 灌地하여 강신한 이후로는 나는 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한 것은, 본말을 전도하고 禮를 잃었기에, 灌地하여 귀신의 강림을 구한 것에서부터 끝에 이르기까지 모두 볼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니, 대체로 탄식한 것이다. 혹자의 질문에 대하여 다시 모른다고 말한 것에서는 공자의 깊은 뜻을 알아볼 수가 있다. 이미 모른다고 말하였으면서도, 다시 그에 대한 말씀을 아는 자라면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 여기에 올려놓고 보는 것과 같다고 말하면서 그 손바닥을 가리켰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그저 말하기 어려울 뿐이라는 것이다. 이승과 저승의 까닭을 근원까지 미루어, 귀신의 情狀을 알고 있다면, 이치를 밝힘이 매우 깊은 것이니, 천하를 다스림에 있어서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朱子曰 禘是祭之甚大甚遠者 若他祭與祫 祭止於太祖 禘又祭祖之所自出 如祭后稷又推稷上一代祭之 周人禘嚳 是也 주자가 말하길, “禘제사는 제사 중에서 매우 크고 매우 심원한 것이지만, 다른 제사나 祫(合祀)제사의 경우에는 태조에게 제사 지내는 것에 그친다. 禘제사 다시 태조를 배출한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예컨대 후직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다시 후직의 1대를 미루어 올라가 그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주나라 사람들은 帝嚳에게 禘제사를 드렸는데,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禘之意最深長 如祖考與己身未嘗遼絶 祭禮亦自易理會 至於郊天祀地 猶有天地之顯然者 不敢不盡其心 至祭其始祖已自大段闊遠 難盡感格之道 今又推始祖所自出而祀之 苟非察理之精微盡誠之極至 安能與於此 故知此 則治天下不難也 此尙明得 何況其他 此尙感得 何況其他 禘제사의 의미는 제일 深長하다. 예컨대 할아버지는 내 몸과 아직 멀리 끊어지지 않았기에, 祭禮 역시 저절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늘과 땅에 제사를 드리는 일에 이르면, 그래도 천지에 드러난 것이 있기 때문에, 감히 그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시조에게 제사 드리는 일에 이르러서는, 이미 저절로 대단히 멀어져서, 감동이 지극한 도를 다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지금은 다시 시조를 배출한 분을 미루어서 그분에게 제사를 드리는 것이니, 만약 이치를 살펴봄이 정미하지 않고 정성을 다함이 지극하지 않다면, 어찌 능히 여기에 참여할 수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안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것도 어렵지 않은 것이다. 이것도 도리어 밝게 알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랴! 이것에도 도리어 감동할 수 있는데, 어찌 하물며 다른 것에 있어서랴! 自祖宗以來千數百年 只是這一氣相傳 德厚者流光 德薄者流卑 但法有止處 所以天子只是七廟 然聖人心有不滿 故又推始祖所自出之帝以始祖配之 然已自無廟只是祔於始祖之廟 然又惟天子得如此 諸侯以下不與焉 故近者易感 遠者難格 若粗淺之人 他誠意如何得到那裏 不是大段見得道理分明 如何推得聖人報本反始之意 如此深遠 非是將這事去推那事 只是知得此說時 則其人見得道理極高 以之處他事 自然沛然也 祖宗(시조)이래로 천 수백 년 동안 그저 이 하나의 기운이 서로 전해졌는데, 덕이 두터운 자는 영광으로 흐르고, 덕이 얇은 자는 비루한 데로 흘렀던 것이다. 다만 법도에는 그치는 곳이 있으니, 이 때문에 천자는 단지 7개의 묘당을 가질 뿐이나, 그래도 성인의 마음에는 불만이 있었다. 그러므로 다시 시조를 배출한 제왕을 미루어서 시조로써 배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당연히 묘당은 없으니, 그저 시조의 묘당에 합사할 뿐이다. 그러나 다시 오직 천자만이 이렇게 할 수 있을 뿐, 제후 이하로는 여기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가까운 사람에는 쉽게 감동하고, 먼 사람에게는 이르기 어려운 것이다. 만약 거칠고 얕은 사람이라면, 그의 성의가 어떻게 거기에 이를 수 있겠는가? 이치를 알아봄이 대단히 분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으로 돌이킨다는 성인의 뜻이 이와 같이 심원하다는 것을 미루어서 터득할 수 있겠는가? 이 일을 가지고 가서 저 일을 미루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이 말씀을 알아서 터득했을 때라야만, 그 사람이 도리를 알아봄이 지극히 높기 때문에, 이로써 다른 일에 대처하는 것이 자연히 거침없게 될 것이다.
天地陰陽生死晝夜鬼神只是一理 若明祭祀鬼神之理 則治天下之理 不外於此 七日戒三日齊 必見其所祭者 故郊焉 則天神格 廟焉 則人鬼享 此可謂至微而難通者 若能如此 到得治天下 以上感下 以一人感萬民 亦初無難者 천지와 음양, 생사와 주야, 그리고 귀신은 단지 하나의 이치일 따름이니, 만약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이치에 밝다면, 천하를 다스리는 이치도 이것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7일 동안 경계하고 3일 동안 재계하여 반드시 제사를 올리는 대상을 봐야 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郊제사를 올리면 천신이 이르고, 묘당에서 제사를 올리면, 사람과 귀신이 흠향하는 것이다. 이것은 지극히 은미하여 통달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천하를 다스림에 이르러서, 위로써 아래를 감화시키고 한 사람으로 만민을 감화시키는 것도 역시 처음부터 어려울 게 없는 것이다.
問魯之郊禘 自成王之賜伯金之受不是了 後世子孫合如何而改 曰 時王之命 如何敢改 曰 恐不可自改 則當請命於天王而改之否 曰 是 누군가 묻기를, “노나라의 郊제사와 禘제사는 성왕이 하사하고 백금이 받은 것부터 옳지 않은 것입니다. 후세의 자손들이 마땅히 어떻게 하면 고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당시의 천자가 명한 것이니, 어떻게 감히 고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말하길, “아마도 스스로 고칠 수 없었다면, 마땅히 천자에게 명을 청하여 고쳐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그렇다.”라고 하였다.
黃氏曰 根於天理之自然 謂之仁 形於人心之至愛 謂之孝 眞實無妄 謂之誠 主一無適 謂之敬 仁孝誠敬 凡祭皆然 交於神明者愈遠 則其心愈篤 報本追遠之深 則非仁孝誠敬之至 莫能知之行之也 其爲說精微深遠 豈或人所能知 況又魯所當諱乎 以報本追遠之深而盡仁孝誠敬之至 卽此心而充之 事物之理 何所不明 吾心之誠 何所不格哉 황씨가 말하길, “天理의 자연스러움에 뿌리를 두는 것을 일컬어 仁이라고 말하고, 사람 마음의 지극한 사랑에서 형체를 갖추는 것을 일컬어 孝라고 말하며, 진실하여 망령됨이 없는 것을 일컬어 誠이라고 말하고, 오로지 하나에 주안점을 두어 다른 데로 나아가지 않는 것을 일컬어 敬이라고 한다. 仁孝誠敬은 모든 제사를 지낼 적에도 모두 그러한 것이다. 신명과 교류함이 멀면 멀수록 그 마음도 더욱 돈독한 것이다.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함이 매우 깊은 것은, 仁孝誠敬의 지극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알지도 행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밀하고 은미하며 심원한 것이라 말하는 것이니, 어찌 혹자가 능히 알 수 있는 것이겠는가? 하물며 또한 노나라가 마땅히 숨겨야 할 것임에랴! 근본에 보답하고 먼 조상까지 추모함이 깊으면서 仁孝誠敬을 다함이 지극한 것을 가지고, 이 마음에 나아가 가득 채운다면, 사물의 이치가 밝지 않은 곳이 어디이며, 내 마음의 정성이 이르지 않는 곳이 어디이겠는가?”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萬物本乎天 人本乎祖 我之有此身 出於父母也 父母又出於祖 祖又出於始祖 始祖又出於闕初得姓受氏之祖 雖年代悠遠 如自根而幹 自幹而枝 其本則一而已矣 故必推始祖之所自出而祭之 則報本反始之義 無不盡矣 若非仁孝誠敬之極至 豈能知此禮而行之乎 蓋凡人於世之近者 則意其精神未散 或嘗逮事而記其聲容 必起哀敬之心而不敢忽 若世之遠者相去已久 精神之存與否 不可得而知 又素不識其聲容 則有易忽之意 故禘禮非極其仁孝極其誠敬者 不能知其禮不能行其事 苟能知此理矣 則其他事物之理 又何難知之有 苟能感格矣 則推而格天地者 此誠而已 推而感之其他 則亦此誠而已 故曰 理無不明 誠無不格 於治天下 何難哉 서산진씨가 말하길, “만물은 하늘에 뿌리를 두고 있고, 사람은 조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내가 이 몸을 갖고 있는 것도 부모에게서 나온 것이다. 부모는 또한 할아버지에게서 나왔고, 할아버지는 또 시조에게서 나왔으며, 시조는 또 다시 처음에 姓을 얻고 氏를 받은 저 할아버지에게서 나왔다. 비록 연대가 오래되어 멀지만, 마치 뿌리에서 줄기가 나오고 줄기에서 가지가 나오는 것처럼, 그 근본은 하나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시조를 배출한 할아버지까지 미루어서 그분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데, 이렇게 한다면, 근본에 보답하고 처음을 돌이킨다는 뜻을 다하지 않음이 없게 될 것이다. 만약 仁孝誠敬이 지극한 사람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 禮를 알아서 그것을 행할 수 있겠는가? 대체로 무릇 사람이 세대가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는, 그 정신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간혹 일찍이 함께 했던 일에 생각이 이르거나, 그 목소리와 용모를 기억하기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애통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감히 소홀히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세대가 먼 조상이라면, 서로 떨어져 멀어진 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에, 그 정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도 알 수 없으며, 또한 평소 그 목소리와 용모도 알지 못하니, 소홀히 하기 쉽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禘禮는 그 仁孝를 지극히 하고 그 誠敬을 지극히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 예를 알 수도 없고, 그 일을 행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만약 이 이치를 능히 알 수 있다면, 그 밖의 나머지 사물의 이치도 또한 무슨 알기 어려움이 있겠는가? 만약 조상의 영혼과 감응하기를 지극히 할 수 있다면, 미루어서 天地에 이르는 것도 역시 정성(誠)일 따름이고, 미루어서 그 밖의 나머지에도 교감하는 것도, 이 역시 정성일 따름이다. 그래서 말하길, 이치가 밝지 못한 곳이 없고, 정성이 이르지 못한 곳이 없다고 말한 것이니, 천하를 다스리는 일에 있어서, 무엇이 어렵겠는가?”라고 하였다.
厚齋馮氏曰 中庸云 明乎郊社之禮禘嘗之義 治國 其如示諸掌乎 蓋夫子嘗爲郊社禘嘗發此語 至此復指其掌以示或人也 후재풍씨가 말하길, “중용에 이르길, 郊제사와 社제사의 禮와 禘제사와 嘗제사의 의미에 밝으면,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아마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보는 것과 같을 것이라고 하였다. 아마도 공자께서 일찍이 郊社禘嘗의 제사를 위하여 이러한 말씀을 하셨던 것 같다. 여기에 이르러서는, 다시 그 손바닥을 가리키면서 혹자에게 보이셨던 것이다.”라고 하였다.
雲峯胡氏曰 於禘而洞幽明之理者 理當無所不明矣 於禘而極感格之誠者 誠當無所不格矣 始曰 仁孝誠敬之至 末獨曰誠 仁孝敬 皆不可不誠 而誠之至者 仁孝敬當無不至也 운봉호씨가 말하길, “禘제사에 있어서 저승과 이승의 이치를 잘 아는 사람은 당연히 이치가 밝지 않은 곳이 없고, 禘제사에 있어서 조상의 영혼과 교감하고 이르는 정성을 극진히 하는 사람은 당연히 정성이 이르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처음에 말하길, 仁孝誠敬의 지극함이라 하다가, 마지막에는 홀로 誠이라고만 말한 것은, 仁孝敬에 모두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되고, 또한 정성스러움이 지극한 사람은 당연히 仁孝敬에도 지극하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