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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대학의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차례로 학위증을 받고 있었습니다. 학생들은 학위증을 받은 후 총장과 악수하고 지나가는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생이 한 손은 호주머니에 넣고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았고 총장에게 악수도 하지 않고 단상에서 내려갔습니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축하객들은 여기저기에서 수군거렸습니다. “세상 참 많이 변했군. 저렇게 건방진 학생도 있네. 한 손으로 졸업장을 받다니 이 학교는 4년 동안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쳤지?” 모두가 그렇게 혀를 차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한 재학생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저 분은 한 팔을 잃고 대신 의수를 한 채 4년 동안 훌륭하게 학교를 다닌 분입니다.” 그러자 보이는 대로 비난했던 축하객은 서로들 얼굴을 붉어지면서 함부로 말을 한 걸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의학 전문가인 데이빗 핑크 박사는 신경과민에 걸린 1,000명과 걸리지 않는 1,0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해서 발표한 논문에서 신경 과민증에 걸린 사람 대부분은 날카롭게 남을 비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6절은 “비판하지 말라”라는 교훈을 가르쳐주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 믿는 사람들 뿐 아니라 믿지 않는 일반 사람들도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일상생활 가운데 제일 많이 짓는 죄 중의 하나가 바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죄입니다.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엄숙히 말씀하시는데 우리는 이 예수님의 명령을 너무나 쉽게 가볍게 생각합니다. “비판하지 말라”라는 말씀이 내 몸과 마음에 체질화돼야 하고 완전한 습성이 돼야 하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비판하지 않는 연습으로 완전히 내 모습으로 정착될 때 우리는 내 주변의 모든 불편한 인간관계가 평화로운 인간관계가 될 것이 분명하지만 절대 우리 스스로 이루기 힘든 일입니다. 그런데 왜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을 주실까요? 인간 본성으로는 이룰 수 없는 이 상태를 왜 이렇게 강조하실까요? 저와 여러분이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 강조하신 비판하지 않는 삶을 추구하며 점점 성화의 단계를 거쳐 완전히 비판하지 않는 영화의 상태가 되기를 갈망하며 이 땅에서 점점 비판과는 거리가 먼 신앙이 체질화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해서는 안될까요? 첫째는 세상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1절과 2절에서 살펴보면 우리가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빠지기 쉬운 위선에 대한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사용된 ‘비판하다’는 뜻으로 사용된 “크리노”(κρίνω)라는 동사는 “선택하다”, “삶이나 행위를 심판하다”, “비난하다”, “비판하다”, “평가하다”, “결정내리다”, “법정에서 재판하다”, “형벌을 위해 넘기다”, “공의를 행하다” 등의 뜻으로 광범위하게 사용됩니다. 특히 오늘 본문에서는 일회적 행위를 강조하는 부정과거형으로 사용되면서 ‘정죄하다 고소하다, 심판하다’ 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잘 압니다. 진리에 대한 열정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처럼 행하지 않는 사람, 자기처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비판하는 잘못에 빠지기 쉽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판하지 말라”는 뜻으로 사용된 헬라어 Μὴ κρίνετε(메 크리네테)는 말씀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거나 분별하는 일을 금지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비판하다”라는 말은 ‘사물의 옳고 그름을 가리어 판단하거나 밝히는 것’으로, 이 단어의 유의어는 ‘비난하다, 공격하다, 부딪치다, 후려치다’, ‘까다벗기다, 헐뜯다’, ‘씹다, 긁다, 까다, 깍아내리다, 흠잡다, 훼방하다’, ‘꾸중하다, 꾸짖다, 문책하다, 질책하다’ 등이 있습니다. 반대 의미의 한글표현으로는 ‘칭찬하다, 기리다, 받들다, 기념하다’, ‘표창하다, 알리다, 추켜세우다’ 등이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2절 상반부는 정당하고 너그러운 판단을 전제로 하기에 이 말씀은 부당하거나 잔혹한 비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비판받지 않으려면”이라는 뜻으로 쓰인 헬라어 ἵνα μὴ κριθῆτε(히나 메 크리쎄테)는 수동태입니다. 즉 내가 받는 비판, 내가 받는 심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하실 분은 오로지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우리를 심판하실 분, 우리를 비판하실 분은 한 분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 하나님의 비판을 받지 않으려면 우리가 타인을 비판해서는 안됩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2절을 다시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가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제자들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우리 예수님께서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우리는 사람들의 상식, 사람들의 기준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헤아림”이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μέτρον(메트론)입니다. 이 단어는 ‘수량을 세다’라는 뜻인데 유사 의미로는 ‘세다, 계산하다, 셈하다’, ‘따지다, 재다, 측정하다’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의 비판을 돌아본다면 우리는 자신의 단점을 보지 못하고 자신의 허물에 관대한 사람은 타인에 대해서는 높은 기준으로 평가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미국 어느 법원 광장에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한 손에 저울대를 가지고 저울질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눈이 수건으로 가려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아무리 공평하고 바르게 판단한다고 해도 정확하게 판단할 수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하기란 거의 불가능을 표현한 동상입니다. 우리는 항상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오감으로 우리의 판단에 의해 사람들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기울어진 잣대 즉, 이중 잣대로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어떤 것은 내가 보기에 틀려도 하나님 보시기에 옳을 수가 있고 어떤 일은 현재 보기에 틀려 보이나 나중에는 옳은 것으로 판명되는 때가 오기도 합니다. 방금 읽은 이 본문 마태복음 7장 2절에서 ‘심판을 받고 평가를 받는다’는 동사가 원문 성경에서 수동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심판하는 사람은 자신의 잣대가 아니라 하나님의 편견 없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는 우리가 들이대는 기준이 그날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심판하실 때 사용될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냉혹하게 평가하는 기준으로 긍휼과 사랑없이 타인을 비난하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과 사랑없는 비난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의 참 제자라면 우리는 사람을 비판하고 비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대신 우리 신앙의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구분하며 옳은 사람과 그른 사람을 분별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장 10, 11절입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비판이란 이해와 사랑 없이 가혹하게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비판받지 않으려면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면 그 비판으로 비판을 받습니다. ‘되로 주면 되로 받고, 말로 주면 말로 받는 법’입니다. 이런 면에서도 우리는 심은대로 거두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남에게 너그러우면 너그러운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위해서도 비판하는 것을 조심해야 됩니다. 여러분, 손가락 하나를 가지고 다른 사람을 손가락질하면 적어도 다른 세 손가락을 나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비판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로마서 14장 10절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삶은 반드시 자기도 가혹하게 비판을 받게 되고, 남에게 너그러운 사람은 자기도 너그러운 판단을 받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 한 분이 아들을 신학교에 보낸 다음에 다른 여러 목사님들을 비판하며 ‘목사로서 자기 아들 목사 만들지 못하면 목회에 실패한 것입니다’고 신랄하게 비판하며 다녔습니다. 당연히 아들이 신학교 들어갔으니 목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준으로 다른 목사님들을 판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교에 입학한 그 아들이 어찌된 일인지 신학교에서 술마시고 담배피고 불량한 행동을 하다가 신학교에서 학칙으로 징계를 먹을 죄를 지어 퇴학조치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신학교에 입학할 자격을 박탈당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신의 가슴을 치며 통탄하면서 더 이상 남을 비판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비판한 만큼 자기도 비판을 받게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비판받을 사람도, 비판할 사람도 이 땅에 없음을 깨닫고 어느 누구나 하나님앞에 동등한 죄인, 판단받을 인생인 것을 깨닫고 타인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해서는 안될까요? 둘째는 어쩌면 자신이 더 큰 죄인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3,4절입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우리가 남을 비판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내가 비판하는 사람보다 오히려 내가 더 큰 잘못이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어찌하여 형제의 눈에 있는 티를 보면서 너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냐”며 책망하십니다. 자기 눈 속에 ‘들보’가 들어 있는데도 깨닫지 못 합니다. 여기서 “들보”라고 번역된 δοκός(도코스)라는 헬라어는 건축물의 기둥이나 서까래와 같은 나무를 뜻합니다. 우리가 보통 ‘티끌’이라고 생각하는 오늘 본문의 ‘티’라는 단어는 원어 성경에 헬라어로 κάρφος(카르포스)라고 번역된 작은 나무 조각을 뜻합니다. 남을 비판하기 잘하는 분들의 공통점은 자기 약점은 잘 깨닫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우리 인간은 내 잘못은 못 보고 남의 잘못만 찾아내는 수가 많습니다. 흔히 우리는 나의 잘못은 깨닫지 못하고 남의 작은 허물을 탓할 때가 많은 것입니다. 비판과 분별은 다릅니다. 비판은 서로 상호적입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상호성이란 내가 다른 사람을 대한 그대로 대우를 받게 되리라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높은 의를 지향할 때 상대방을 비난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고쳐 주는 자세로 사람을 대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12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우리는 남이 잘못할 때 비판하기에 앞서 ‘내게는 저런 잘못이 없나 살펴보고 나는 저런 잘못을 저지르지 말아야 되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자신의 허물이 통나무처럼 커서 눈을 가리고 있는데도 형제의 행위를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평가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본문은 진실하지 못한 비판자의 모순을 지적하는 비유이므로 형제의 잘못에 관심을 두지 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닙니다. 자신의 더 큰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이웃의 작은 문제에 집착하는 사람은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이런 태도가 위선입니다. 위선의 모습 중 하나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자기기만입니다. 자기기만으로 나타난 위선은 예수께서 가장 심각하게 다루는 죄이기에 예수는 5절에서 “위선자”,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꾸짖으십니다.
마태복음 7장 5절입니다.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외식하는 자여”라며 책망하십니다. 위선자는 자신의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자신의 눈에 통나무와 같이 큰 장애물이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어떤 지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내 눈을 깨끗하게 만들지 않으면 깨끗한 형제인데도 흐릿하게 보이고 나쁘게 보입니다. 그러기에 남의 허물을 찾아서 분석하고 고치기 이전에 과연 내 눈이 명확하게 사물을 볼 수 있는 상태인지 점검해야 합니다. 장애물이 들어 있는 눈으로 타인의 문제를 크게 보고 자신의 자랑거리를 크게 보면 스스로 속게 되기 때문에 위선자가 됩니다. 우리는 절대 위선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위선자가 되었을 때 우리는 우리도 천국에 가지 못하고 우리 주변의 사람도 천국에 가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23장 13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성찰하지 못함에서 위선과 외식이 비롯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위선과 가식, 외식하는 삶은 결국 우리를 비판하는 삶을 살게 만들고 이렇게 주변 사람들을 비판하며 살면 결국 지옥불에 떨어질 인생으로 하나님께서 만드실 경고를 우리는 듣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정말 가식적이지 않고 위선적이지 않은 인생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비판하지 않고 비판받지 않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왜 남을 비판해서는 안될까요? 셋째는 사소한 것 때문에 가치있는 것을 버리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입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 그들이 그것을 발로 밟고 돌이켜 너희를 찢어 상하게 할까 염려하라”
오늘 본문에서 “거룩한 것”으로 표현된 단어, “진주”라고 표현된 단어는 인생 자체를 걸만한 소중한 것을 뜻합니다. 거룩한 것이라고 번역하고 있는 헬라어 단어 τὸ ἅγιον(토 하기온)이라는 단어는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준비된 희생제물을 뜻합니다. 하나님앞에 드려진 예물이 바로 ‘거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룩한 것이 바로 진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3장 45,46에는 하늘나라의 가치를 진주에 빗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3장 45,46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발견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사느니라”
하나님앞에 드려진 예물이 거룩한 것이며 진주이고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천국이 바로 거룩한 곳이며 진주입니다. 이런 것을 놓치고 딴 것을 찾아다니는 것은 우둔한 인생,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는 진주를 개에게 주지 않고 돼지에게 주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돼지”와 “개”는 이스라엘 문화속에서 부정한 짐승, 가치없는 짐승, 부도덕한 존재를 뜻합니다. 대접받지 못하는 인생을 뜻할 때 “돼지”와 “개”를 인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하나님을 부정하며 살아가는 사람을 개로 비유한 구절을 우리는 성경에서 너무나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중에 한 구절을 우리 같이 한 번 읽어볼까요?
신명기 23장 18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기가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은 어떤 서원하는 일로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가져오지 말라 이 둘은 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 가증한 것임이니라”
구약에서 개는 모욕적인 표현으로 유대인들이 유대인들에게 사용하기도 했는데 신약에서는 유대주의자들, 악한 자들, 배교자들, 이방인들을 지킹하며 상징적으로 사용되는 동물이 개입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 마태복음 7장 6절에서 사용하신 ‘개’라는 표현은 인종이나 인격에 대한 모멸이나 차별이 아닙니다. 정말 의미있는 인생을 모르며 소중한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본능대로만 살아가는 모습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개나 돼지로 묘사된 사람들은 삶을 살아가면서 정말 거룩하고 귀한 것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에 사람들을 적대시하며 참 의미있는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멸시하며 비판하고 심지어는 강한 공격을 하며 목숨을 위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인생의 목적이 자신의 욕망, 자신의 명예, 자신이 대접받고 존중받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니 남들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자신의 가치, 자신의 명예, 자신의 의사, 자신의 능력과 자신의 노력만이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타인과 하나될 수 없고 타인의 마음을 조금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니 천국을 이룰 수 없고 하나님을 만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요한일서 4장 12절 말씀을 보시겠습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갑니까? 진정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거룩한 것, 진주를 잘 찾아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돼지와 개처럼 취급받고 정말 인생의 목적을 찾지 못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저와 여러분이 정말 가치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며 대접하며 위해주며 위로하며 거룩한 것을 소유하고 진주를 소유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연약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실제로 당해 보지 않고서는 어려움을 당한 그 사람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경솔하게 남을 판단하는 죄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나 가혹하게 남을 비판하는 사람은 언젠가는 가혹한 비판을 받게 됩니다. 이것은 자연스러운 법칙입니다. “남의 눈에 눈물 내면 제 눈에 피눈물 난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비판한 이상으로 우리는 우리 행위의 보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비판하는 대로 되돌려 받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비판하는 죄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죄와 허물이 보일 때 우리 자신의 죄와 허물을 먼저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보며 나에게 타산지석을 삼고 나를 돌아보며 하나님앞에서 먼저 나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는 참 제자될 수 있고 구원에 합당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비판하는 버릇을 습관적으로 가지게 될 때 우리는 멸망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입니다. 남의 허물이 보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비판하기 앞서 빨리 무릎을 꿇고 회개할 곳을 찾아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정말 저와 여러분을 돌아보며 비판받거나 비판하는 삶에서 멀어져서 정말 아름다운 말과 행동이, 아름다운 마음이 사람들을 세우고 가족이 직장이 사회가 하나님앞에 아름다운 공동체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아름다운 모임을 세우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