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
이헌 조미경
올해 100세이신 시어머님을 하늘로 보냈다. 슬픔보다는 마음의 짐을 더는 느낌을 가졌다. 젊은 시절 친정 부모님을 떠나 보낼때는 슬픔의 무게에 짓눌려 우울감과 죄책감에 시달렸다. 반대로 시모님 상을 치르는 3일 동안 어머님과 쌓은 정보다는 남들에게 나 자신이 어떻게 보일까에 대한 생각에 무게가 실렸다. 시집온 횟수로 33년, 좋은 며느리 착한며느리 노릇에 대한 것을 지울수 밖에 없는, 한 중년 여인이 의무에서 해방되어 홀가분하게 거울 앞에 서있다. 시모님의 장례를 치르게 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는 계기가 되었다. 행복의 조건 중에서 중요한 요건이 돈과 권력이라는 양면성을 들여다 보는 계기가 되어, 앞으로 나 자신 어떤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깊게 깨달은 시간이었다.
일요일 아침 어머님의 부고 소식을 듣고 아무런 감정의 변화가 없었다. 늘 어른들이 하는 말처럼 산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현실을 살고 있는 있는 나였기에. 남편과 아들을 장례식장에 먼저 보내고 나서, 혹시 밤을 새울지 몰라 남편 면도기와 속옷을 챙기는데도
마치 여행을 떠나는 사람의 가벼운 짐을 챙기듯 마음에 동요가 없다. 택시를 타고 장례식장이 있는 강남 성모병원으로 향하면서
마음은 슬픈 표정을 지어야 하는 강박증과, 손님이 찾아왔을때 너무 초라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장례식장에 도착 어머님 영정에 절을 하면서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불과 얼마전까지 어머님께서는 '바쁜데 어쩐일이냐' 하시며, 며느리를 맞이 하시던 카랑한 목소리가 있었는데, 그자리에는 어머님은 계시지 않고 빈소가 차려진 공간에서 시누이들과 조카들이 분주하게 부고장을 보내느라 여념이 없다. 한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도 눈물보다는, 손님을 맞이해야 하는 가족들의 분주한 모습이 먼저 들어왔다. 나 역시 동창들에게 시모상 안내를 위해 동창회 총무들에게 연락 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급하게 통화후 상복으로 갈아 입으니 비로소 어머님께서 안계신게 실감이 났다. 영정 사진속 어머님은 미소 짓고 있는데
밖에서는 근조화환이 계속 들어온다. 근조화환이 들어 올때 리본에 쓰인 글을 읽어 보니, 신문과 텔레비젼에서 자주 보던 정치인의 이름이었다. 영정 사진이 걸린 빈소에 현직 대통령 함자가 쓰인 근조화환을 시작으로 전직 대통령의 근조 화환과, 대기업 회장들의 화환들과, 검찰에 몸담으신 분들의 이름이 적힌 화환이 계속 들어왔다. 우리는 가족이라 피부로 느끼지 못했지만, 권력의 심장부에 계셨던 시모님의 큰 아들이며 나에게는 시아주버님 되시는 전직 법무부 장관을 지내셨던 이름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가족들은 조의를 표하러 오시는 손님들을 맞이 하면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화환을 배달 하는 기사들은 조심스럽게 꽃이 다치지 않게 다루면서 보내는 사람을 일러 주고 받는 사람 사인을 받아 갔다. 부고 통지를 단톡방에 올렸더니 여기저기에서 언제쯤 방문 하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직장인들의 황금 같은 시간은 휴일인데도 손님들이 앞다투어 들어오고 있어 조문객을 맞이 하기 위해서 계속 서 있었다. 평소에도 앉아서 생활 하는 생활 패턴이 습관이 되어 서 있으니 허리가 아팠다. 잠깐 손님이 뜸하면 의자에 앉아 한숨 돌렸다.조카들이 쉬라고 하는데 빗속을 우산을 받고 찾아오는 조문객들에 예의가 아닌것 같아 허리숙여 인사 하는데 힘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조카들과 내 아들은 서로 쉬어 가면서 조의금 받는 탁자에 앉아 일사 분란하게 움직였다. 나와 시누이, 동서는 손님들에게 식당 안내를 하고 근조화환의 위치를 계속 해서 바꾸었다. 상주로서 하루를 보내는데, 중간 중간 초등 친구들이 찾아와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저녁에는 여고 동창들이 한꺼번에 우르르 몰려와 빈소를 가득 메웠다. 어머님 조문실 앞에는 조문을 온 손님들로 줄을 서서 기다리며 방명록을 쓰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밤 늦은 시간 까지 손님들이 계속 들어와 조문했다. 밤 12시가 되어 집으로 돌아와 쉬었다. 손님을 맞이 하는 일은 정말 힘든것 같았다.
여느날 같으면 출근을 해야 하는 월요일인데 우리 가족들은 직장 대신 장례식장으로 몰려 갔다. 아침 식사후 잠시도 쉴틈이 없이 남편 직장 동료들이 조문을 왔다. 찾아 주신 것에 대한 인사를 건네고 나니, 남편이 찾는다. 손님들에게 배우자로서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어서 밖에 서 있다. 인사를 나누었다. 젊은 조카들에게 손님 안내를 맡겼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 방안에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비가 내리는 날 먼거리를 달려와 준 고마운 마음을 표해야 하는 일이기에 계속 해서 움직였다.가족들이 많아도 몰려 오는 조문객을 맞이 하고 방명록 작성이며 조의금을 받는 일은, 한치의 실수가 없어야 하기에 정신 없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점심후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대통령이 오신다는 전화에 우리 가족들은 하던 일을 멈추고 긴장 했다. 잠시 후 경호팀이 출동했다. 그들은 조문실 앞에 서서 장내를 정리를 했다. 어떻게 대툥령을 맞이 할 것인지 지침을 내리는 모습에 경호에 대한 생각을 새롭게 했다. 오후 3시가 되자 이명박 전 대통령께서 경호원들과 나란이 들어오셨다. 그리고 조문을 마치고 손님을 맞이 하기 위해 서 있는 우리를 향해 '고생이 많으세요' 하고 웃으시는데, 예전 텔레비젼과 신문에서 보던 그 얼굴 그 미소가 어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다녀가시고 정치인들의 발걸음이 계속 이어지는데, 대화는 나누지 않았지만 표정은 보통 사람들처럼 편안해 보였다. 퇴근 시간이 지나자 조문객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나도 덩달이 바빴다. 중학교 동창생들이 우르르 빈소에 서서 절을 하는데, 한편으로 그동안 내가 사회 생활을 하면서 결코 헛되이 살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동창생들은 빈소에 나란이 놓여 있는 현직 대통령 조화와, 전직 대통령 조화 그룹의 회장들이 보낸 조화를 보더니,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집안에 큰 인물이 탄생하게 되면 옆에 있는 가족들도 덩달이 어깨가 으쓱해진다. 이번 어머님을 하늘로 보내면서 참 많은 것을 배우는 시간이 되었다.
언젠가 내게 시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 났다.
이제는 이름 석자를 널리 알려야 한다고, 글을 쓰면서 나 자신 이름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어머님 부고 소식이 신문에 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내 이름 석자로 인터넷 신문에 크게 활자화 되었으니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