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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제1강
임마누엘
말씀 / 마태복음 1:1-25
요절 / 마태복음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메리 크리스마스! 우리는 성탄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신 것을 기념하며 감사합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저자 마태는 이것을 ‘임마누엘’, 곧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로 해석합니다. 이 시간 구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하며 성탄의 은혜와 기쁨이 우리 가운데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오늘 말씀에서 마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해 기록할 때 제일 먼저 예수 그리스도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부터 시작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다윗을 거쳐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이르기까지 족보를 먼저 얘기합니다. 마태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이 족보를 기록했을까요?
첫째,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은 신실하신 분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그들의 자손 중에 그리스도를 보내주겠다고 언약하셨고 실제 예수님은 이 언약대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서 그리스도, 곧 구원자로 오셨습니다. 아브라함과 다윗은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고 다윗 왕은 이스라엘의 자부심이자, 구원과 독립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둘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들의 후손 중에서 그리스도가 탄생한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고 그에게 아들을 주시고 네 씨가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고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게 될 것이라 언약하셨습니다(창22:17,18). 그리고 다윗 왕 때는 그에게 그의 후손을 통해 영원히 견고한 왕국을 세우겠다고 언약하셨습니다(삼하7:13). 그리고 그 언약을 이행해 가시며 때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약속의 말씀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사람은 자기가 한 약속을 자기 사정에 따라 이리저리 바꾸고 어떤 때는 아예 없던 것으로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떤 경우에도 한 번 하신 약속은 결코 바꾸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하시고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런 만큼 우리를 향한 사랑과 구원의 약속도 영원토록 신실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자기 언약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유대인들은 족보를 기록할 때 자기들이 하나님의 택함 받은 백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아주 중요하게 여깁니다. 또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족보는 남성 중심입니다. 또한 중요한 인물 중심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여기에 몇 명의 특이한 여인들을 등장시킵니다. 3,5,6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누구입니까? 다말, 라합, 룻, 우리야의 아내(밧세바)를 등장시킵니다. 마태는 유대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아브라함의 부인인 사라나 이삭의 부인인 리브가는 기록하지 않고 숨기고 싶은 여인들을 기록했습니다. 이는 그들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가 어떠한지 드러내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다말이 누구입니까?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는데 창녀로 위장해 시아버지와 동침해 아들을 낳았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다말 나름대로 이유가 분명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런 여인을 굳이 족보에 넣을 이유가 없습니다. 저자 마태의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마태는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이러면서 다말을 그리스도의 족보를 잇는 여인 중 한 명으로 족보에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아주 죄악된 땅 가나안에 있는 성 여리고의 기생 출신 라합도 기록했습니다. 모압 여자인 룻은 혈통적으로 문제입니다. 모압 족속도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술에 취해 자기 딸하고 동침해 낳은 아들의 후손입니다. 이런 모압 족속의 시작과 함께 모압 사람을 유대인들의 족보에 올리는 것은 유대인들이 꺼려하는 것입니다. 우리아의 아내(밧세바)도 헷 족속입니다. 일단 다윗과의 관계는 제외하더라도 유대인들이 극도로 싫어하는 이방 여인입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런 여인들 이름 빼고도 얼마든지 족보를 기록할 수 있었는데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혈통과 신분, 출신이 어떠하든 하나님의 구속 역사에 쓰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보면, 다말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보고 가문의 기업을 잇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죽고 그 동생을 남편으로 이었지만 그도 죽어 시아버지 유다는 더 이상 자기 아들을 다말의 남편으로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말은 그 혈통과 기업을 이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와 동침하여 혈통과 기업을 이어갔습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안 유다는 이 모든 것이 자기가 며느리 다말에게 자기 아들을 아껴 남편으로 주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자기가 잘못했고 다말이 옳다고 했습니다.
라합은 비록 기생으로 살 수밖에 없었지만 이스라엘 민족을 출애굽 시키시고 홍해를 가르시며 그들을 광야에서 먹고 입히신 여호와 하나님을 상천하지의 하나님, 다시 말해 천하 유일의 하나님으로 믿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정복전쟁을 할 때 자기 목숨을 걸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 편에 서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지켜주었습니다. 이때 살몬이라는 사람이 라합의 믿음에 반해 이 여인과 결혼하며 메시야 족보에 오른 것입니다. 룻은 모압 여인으로서 일찍이 과부가 되었지만 시어머니를 끝까지 봉양했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영접하고 자기 장래 걱정보다 먼저 나오미를 따라 하나님의 백성에 합류하고자 했습니다.
저자인 마태 자신도 당시 죄인 취급을 받는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었고 복음 역사에 쓰임 받고 성경을 기록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혈통과 신분, 출신을 초월해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구속역사에 쓰십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역사입니다. 또 하나님은 혈통과 신분, 출신을 초월한 세상 만민의 하나님이시오 그리스도 역시 세상 만민의 구주임을 마태는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족보에 나오는 남자들은 또한 어떠합니까? 한마디로 문제가 많습니다. 마태는 이 중에서도 특히 다윗의 범죄를 말합니다. 6절을 보십시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자기 아내도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생각을 달리하려 해도 저자 마태가 상당히 의도적으로 기록한 것이라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습니다. 다윗은 자기 부하 충신이었던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에게 정욕을 품고 그를 왕궁으로 불러들여 죄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밧세바가 임신한 것이 드러나자 자기 범죄를 감추려고 잔꾀를 부리고 그것도 안 되자 그 충성스러운 신하 우리야를 격전지로 내보내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신 왕의 권력으로 이런 죄를 범한 것입니다. 보통 생각하기에 다윗은 이 죄 말고는 다 훌륭했는데 굳이 이것을 기록해 온 이스라엘이 존경하는 왕을 흠집 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마태는 ‘아니야, 이런 그를 죄 가운데서 구원해 주시고 여전히 세워주시고 구속 역사에 사용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록해야 하는 거야’ 하며 기록한 것입니다. 마태는 구속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이 자기를 어떤 죄의 수렁에서 구원해 주셨는지 그 은혜를 가장 먼저 생각하며 이를 앞세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죄는 부끄러운 것이지만 그 죄에서 구원받은 것은 참으로 귀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마태가 족보 중에서 다윗의 죄만 말하고 다른 왕의 죄를 덮어둔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실 마태는 다윗 왕을 대표로 기록한 것입니다. 다윗의 아들 솔로몬은 웅장한 성전을 지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후에 수많은 아내를 두고 즐기다가 자기가 세운 성전에서 아내들의 유혹에 빠져 우상을 받아들이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은 교만하게 통치하다가 나라가 남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더러는 히스기야나 요시야처럼 선한 왕들도 있었지만 아하스나 므낫세처럼 뒤로 갈수록 왕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고 노골적으로 우상숭배의 죄를 범했고 이는 점점 더 심각해져 갔습니다. 그러다 결국에는 이 죄 때문에 유다는 BC586년 바벨론 제국에 의해 멸망당하고 맙니다. 하나님이 바벨론과 같은 강대국을 통해 자기 백성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들은 잔인한 이방인들에게 처절한 살육을 당하고 모든 것을 빼앗기고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유다의 역사를 살펴볼 때 하나님은 이들을 몇 번이고 더 심판하셔야 했고 또 진멸시켜야 마땅했습니다. 이들은 택한 백성으로서의 자격이 전혀 없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족보는 심판과 멸망이라는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성취해 나가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유다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유다 땅에 돌아와 예루살렘에서 성전을 건축하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언약을 잊지 않고 우상숭배와 각종 죄로 황폐했던 그 땅을 회복시키시며 예배하게 하시고 아브라함과 다윗의 혈통을 계속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또 하나 이 족보가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다윗으로 시작되는 왕의 계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2절에 보면 동방의 박사들이 말합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그러면서 경배합니다. 동방의 박사들은 이방 지역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도 경배하기 위해 아기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예수님이 세상 만민의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만왕의 왕으로 나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족보 속에서 마태는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 되심을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 되시고 만왕의 왕이 되십니다. 우리에게 경배받기에 합당하신 왕이십니다.
또한 오늘 예수님의 족보에는 이스라엘의 고통과 아픔, 어둠이 드러납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왕국을 제대로 재건하지 못했습니다. 마카비 가문이 잠시 독립을 쟁취하기도 했지만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로마 등의 식민지로 500년을 견뎌내야 했습니다. 심지어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선지자가 없는 영적으로 어둡고 캄캄한 시대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런 어둠 속에서 예수님은 어둠을 밝히는 이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이처럼 성탄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신실하심, 인간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 그리고 우리 왕으로 오신 예수님, 세상의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말하면서 완성이 되어 갑니다. 이 예수님은 요셉과 약혼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게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태어나심이 구체적으로 어떠합니까? 본문에 나오는 천사의 메시지는 예수님이 이 땅에 어떻게 오시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 목적이 무엇인지를 아주 간결하면서도 핵심적으로 말해줍니다.
먼저 1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약혼 후, 결혼 전까지 대략 1년 간의 기간으로 육체적 관계만 없을 뿐, 법적으로는 결혼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리아에게 임신의 징후가 나타났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명백한 불륜의 증거였고 당시 율법과 풍습에 따라 이혼해야 했습니다. 19절에 보면 마태는 요셉을 의롭다고 했는데 이 말은 ‘율법 앞에 바로 서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요셉은 율법에 따라 조용히 파혼하고 끝내려고 했습니다. 이때 주의 사자(천사)가 꿈에 나타나 성령으로 인한 잉태를 설명하고 장차 태어날 아이가 이룰 일을 알려줍니다. 20,21절을 보십시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예수님은 죄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그가 아담으로부터 유전되어 내려오는 죄의 본성을 이어받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온전한 사람이면서도 신성을 지닌 분이 되기 위한 하나님의 각별한 섭리입니다. 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유일한 중보자가 되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둘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바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천사는 요셉에게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아기의 이름을 ‘예수’ 곧 ‘구원자’라고 지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아기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실 당시 유대인들은 장차 메시야가 오면 자기들을 강대국에서 구원해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유다는 역사적으로 애굽, 가나안 족속, 앗수르 제국, 바벨론 제국, 페르시아, 헬라 제국 등 큰 나라들에게 점령당하고 빼앗기고 끌려가기를 반복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그런 만큼 유대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자기들을 이런 강대국에서 구원해 메시야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천사가 전해준 메시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을 강대국이 아니라 죄에서 구원해주기 위해 오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원하는 지도자는 경제 살리고 돈 많이 벌게 해주는 지도자입니다. 그만큼 먹고 사는 것이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도자 한 명이 바뀐다고 해서 경제가 온전히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경제문제는 끝이 없습니다. 사회 곳곳에 각종 부조리와 부정부패가 넘쳐납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많은 문제의 시작은 죄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자기 욕심대로 자기 정욕과 탐욕을 채우고자 저마다 그러니 이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근본 문제는 죄 문제입니다. 죄는 이 땅에 사는 동안에는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가져오지만 다가올 세상에서는 이 죄 때문에 무서운 지옥 형벌의 심판을 받습니다. 아무도 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몸과 영혼은 영원한 파멸에 던져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죄와 심판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우리의 죄값을 십자가의 피와 죽음으로 대속하시고 우리가 구원받고 영생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예수님만이 우리의 구원이고 소망입니다. 이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셔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영원한 왕으로 우리를 다스려주실 것입니다. 성탄을 맞으면서 우리가 이 예수님을 생각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성탄은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는 때입니다.
이제 마태는 예수님이 오신 것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다 함께 22,23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마태는 예수님의 탄생을 이사야 7장 14절 말씀대로 하나님이 처녀 마리아를 통해 구원자를 보내주심으로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또 그는 이 모든 은혜를 ‘임마누엘’로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하나님이 이 말씀을 주실 때는 유다 자기 백성들의 죄로 인해 아주 마음이 괴로우실 때였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 바로 앞, 1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의 집이여, 원하건대 들을지어다. 너희가 사람을 괴롭히고서 그것을 작은 일로 여겨 또 나의 하나님을 괴롭히려 하느냐?” 자기 백성의 불신과 죄가 하나님을 정말 많이 괴롭혀 드렸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그들은 출애굽 후 광야에서 금송아지 숭배를 하고 불신과 불순종으로 얼마나 하나님을 노하게 하였으며 다윗의 후손들은 각가지 죄로 하나님을 얼마나 괴롭게 했습니까? 하나님은 진즉에 그들을 버리고 떠나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이 죄 가운데 있을 때도 함께 하셨고 망해서 끌려갔을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범죄의 역사이며 인간적으로 볼 때는 고통과 슬픔의 역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가운데 하나님은 때마다 자기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그 범죄함을 마음 아파하시며 인내하시고 가르치시고 안되면 징계도 하시고 돌아오게 하시고 위로하시고 다시 세워 주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 백성 중에 함께 거하시며 먹고 마시고 대화하시고 그 고통을 함께 겪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들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이렇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의 보혜사가 되셔서 함께 하시고 우리의 온갖 연약함과 허물을 감당해 주십니다. 외로움과 고독의 때에 우리 마음의 위로가 되어주십니다.
우리가 성탄절을 맞으면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임마누엘, 주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며 감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를 죄악과 고독, 슬픔, 연약함, 허물에서 구원해 주신 것에 깊이 감사하면서 주님을 찬양해야겠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성탄 선물은 이 땅에 오신 예수님입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변함없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그분은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가 이 주님의 임마누엘의 은혜를 교회 동역자들과 가족들과 이웃들과 함께 나누는 풍성한 은혜의 성탄절, 사랑으로 풍요로운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