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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순교자 전기집
순교는 믿음의 씨앗이 되고
김진소. 윤민구. 차기진. 하성래
감수 최석우
발행 : 한국교회사구소
위 책자 내용을 바탕으로 한국 순교자전 “신유박해 순교자전”을 연재 합니다.
간행사
한국 천주교회 는 수많은 순교 선조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이 분들은 “제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
은 목숨을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입니다”(마태 16, 25)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용감하게 실천에 옮기셨습니다. 다시 말해 소중한 생명을 희생함으로써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밖으로 드러낸 분들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는 선조들 특히 초창기 신앙인들이 1801년 신유박해 중에 피를 홀림으로써 세워졌고 발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처럼 순교 선조들 덕분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신유박해 중에 순교하신 이분들의 증거의 삶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 이 순교 선조들의 전기를 간행하게 된 첫 번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또 다른 이유는 이분들을 복자와 성인으로 현양하는 데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오늘날 각 교구에서는 시복 시성위원회를 구성하고 많은 현양 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에 오래 전부터 순교자들에 관한 기록을 정리해 온 본 연구소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이 전기집을 내놓게 되었습니다. 이후로도 본 연구소에서는 소장하고 있거나 각처에 흩어져 있는 사료들을 최대한 이용하여 시복 시성 작업을 하고 있는 교구들에 일조를 하고자 합니다.
순교자 전기집을 간행하는 데에는 많은 분들이 힘써 주셨습니다. 각 교구 시복 시성 사업에 참여하여 바쁘신 가운데에서도 소중한 원고를 작성하여 주신 집필자들께 먼저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아울러 모든 원고를 감수하시면서 도움 말씀을 주신 본 연구소 명예 소장 최석우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학문적인 문장을 부드럽게 손질해 준 강영선(아네스) 자매와 사진을 제공해 주신 한국 순교자 기념관과 장영돈(안드레아) 형제에게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책이 신자들의 신앙 생활에 도움이 되고 교구 시복 시성위원회에 참고 자료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김성태 신부
- 들어가는 말 -
신유박해의 배경과 의의
서종태 / 한국교회사연구소 책임 연구원
한문으로 간행된 천주교 및 서양 과학 기술 서적인 한역 서학서(漢譯西學書)가 처음으로 조선에 전해진 것은 선조 때의 이수광(李碎光)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이들 한역 서학서는 근 100년 이상이나 유학자들의 관심을 그다지 끌지 못하였다. 처음으로 한역 서학서에 비상한 관심을 보인 유학자는 성호(星湖) 이익(李屬)이었다. 그는 서양 과학 기술에 대한 이해를 선비가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필수적인 소양의 일부로 생각하였고, 천주교에 대해서도 유교를 보충하는 면
이 있다고 인정하였다. 이러한 남다른 생각을 바탕으로 다방면의 천주교 서적과 서양 과학 기술서적을 적극적으로 탐구한 결과, 이익은 서양 과학 기술이 중국의 그것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중국 중심의 화이관(華喪觀)을 극복하고 오히려 서양을 세계의 중심으로 이해함으로써 서양의 선교사나 서학(西學,천주교 포함)을 성인이나 성학으로 인식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서학에 대한 선진적인 인식을 바탕으로 이익은 제자들을 적극 계몽하여 서학에 관심을 기울이게 만들었다. 이러한 이익의 영향으로 서학에 대한 학문적 탐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그로 인해 서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마침내 성호학파의 소장 학자들은 천주교를 신앙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승훈(李承舊)이 이벽(李樂)의 권고로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1784년 3월 말경(음) 귀국하면서 가지고 온 여러 천주교 서적을 이벽과 함께 연구하여 교리에
통달한 다음, 친척과 친구들에게 선교함으로써 서울에 신앙 공동체가 탄생하게 되었다. 이후 천주교는 빠른 속도로 전파되어 경기도,충청도,전라도의 여러 지역에 신앙 공동체가 만들어졌으며,신자층도 양반뿐만 아니라 중인이나 하층민까지 다양하였다.
이와 같이 천주교가 급속도로 전파되어 나간 것은 서학이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 주었기 때문이었다. 천주교의 주재적인 천주의 설이나 서양 과학 기술은, 당시사회의 도덕성을 회복하고 부국 강병을 이룩할 새로운 사상 체계를 모색하고 있던 남인 실학자들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또한 찰나적인 현세보다 죽은 다음에 천당에 올라 누리게 될 영원 복락을 더 중시하는 천주교의 내세 사상은 사회적 모순의 심화로 더욱더 고통을 겪게 된 서민들에게 미래의 희망을 주는 복음이 아닐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하느님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천주교의 주장 또한 당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고있던 중인 이하의 신분층에게 큰 위안이 되었으며, 교회법에 따라 축첩과 중혼을 엄격히 금하고 결혼에 있어서도 당사자의 의사에 반대되는 억혼을 금한 것은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여성들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이 정조(正祖)의 개혁 정치를 뒷받침해 주던 세력과 깊이 연결되어 있어 집권 세력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정조는 노론을 중심으로 한 장기 집권 가문 즉 벌열(閥閱)이 정치의 실권을 독점하고 부정한 수단으로 자제들을 과거에 합격시켜 그 지위를 세습시켜 나감으로써 왕권을 제약하고, 백성들의 생활과 국가의 재정을 궁핍하게 만들며, 많은 양반들을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등 갖가지 사회적 모순을 야기시키자 이러한 벌열 정치를 타파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신의 개혁 정치를 보필할 정치 세력의 하나로 정조는 남인을 선택하였는데, 당시 남인의 영수인 채제공(蔡濟燕)은 성호학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여 정조의 개혁정치를 뒷받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가환(李家換),이기양(李基議) - 정약용(丁苦鐘) - 이승훈,정약전(丁岩餘) 등 성호학파의 인물들이 대거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크게 활약하게 되
었다.
성호 이익의 실학을 계승한 성호학파의 인물들은 당시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전적으로 노론의 벌열 정치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이를 타파하고 주자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들은 서양 과학 기술을 널리 탐구하고 더러는 천주교를 수용하기도 하였는데, 그들의 백과 사전적인 지식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돕는 데 활용되었다. 특히 정조가 왕권 강화의 하나로 수원성을 축조할 때 정약용은 서양 과학 기술을 이용해 거중기를 제작 ‘ 사용하게 함으로써 경비를 대폭 줄일 수 있었고, 이는 경비 조달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정조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그렇지만 노론 벌열은 실학과 서양 과학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정치 세력에 위기 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따라 노론 벌열은 정조의 개혁 정치를 뒷
받침해 준 정치 세력과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하게 제거하고자 하였다.
또한 천주교의 내용이 당시의 지배적인 사상인 주자학과 정면으로 배치된 점도 천주교를 배척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주자학에서는 비인격적인 태극(太極)을 만물의 근원으로 보는 데 반하여, 천주교의 한역 서학서에서는 주자학의 태극에 관한 학설을 정면으로 배척하고 인격적인 하느님이 천지 만물을 창조하고 안배하고 다스린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천주교에서는 현세보다는 죽은 다음에 천당에 올라가 영원한 복락을 누리는 내세에 주된 초점을 맞추어, 죽은 다음에 복을 받고 벌을 면하기 위하여 밤낮으로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구하며 미사를 드리는 등의 방식으로 하느님을 공경한다. 이에 반하여 주자학에서는 사욕의 간섭을 제거하여 마음이 항상 이치에 따라 발동하게 하는 공부를 통해 현세에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인생의 주된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주자학의 입장에서 보면 현세를 경시하고 사적인 자신의 구원을 바라는 천주교는 반사회적이고 반교육적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당시의 신자들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함으로써 주자학에 정면으로 도전하였다. 그들은 부모나 군주보다 하느님을 더 높이고, 하느님의 법을 부모나 군주의 명령보다 더 우위에 두는 천주교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순교의 길로 나아갔다. 당시의 통치 체제를 이념적으로 뒷받침하는 주자학을 정면으로 배척하고 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부모와 군주를 상대화시키는 이러한 신자들의 태도는 당시의 통치 질서나 윤리 질서와 상치되는 것이었고, 이는 박해를 부추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집권 세력은 일찍부터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1785년 봄 김범우(金範禹)집에서 신앙 집회를 갖다 적발된 사건으로 발생한 을사박해(己己迫害), 1791년 진산에서 윤지충(尹持忠)과 권상연(權尙然)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를 폐한 사건으로 촉발된 신해박
해(辛玄迫害), 1795년 배교자 한영익이 주문모(周文護, 야고보) 신부의 입국 사실과 그의 거처를 고발함으로써 발단된 을묘박해(己卵迫害), 1798〜1800년에 걸쳐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기 위해 충청 - 경기 지방에서 잇따라 자행된 일련의 박해 등 천주교에 대한 크고 작은 박해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주문모 신부의 선교 활동과 천주교에 대한 정조의 비교적 관대한 정책으로 인해 오히려 교세는 더욱 확대되어, 1800년 무렵에는 신자수가 1만 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의 죽음으로 천주교 신자들은 갑자기 불리 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죽고 그 뒤를 이어 순조(純祖)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게 되자, 대왕대비 김씨가 후견인이 되어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기에 이르렀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한 영조의 처사를 지지한 노론 벽파에 속한 대왕대비 김씨는, 11월 하순 선왕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한 시파의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그 자리를 벽파의 사람들로 채웠다. 그런 다음 1801년 1월 10일(음) 회개하지 않고 엄한 금령을 어기는 천주교 신자들에게 역률(逆律)을 적용하여 역적으로 다스리고, 아울러 오가 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 여 천주교 신자들을 철저하게 색출한 뒤 처벌하라는 박해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최필공(崔必燕) - 최창현(崔昌顯) - 이가환 - 정약용、이승훈、홍낙민(洪樂敏) - 권철신(權哲身) - 정약종(丁岩鍾) - 정약전 - 이기양 등이 차례로 체포되어 국문을 당하였다. 또한내포 지방의 사도인 이존창(李存昌)과 포천 지방의 선교에 공이 큰 홍교만(洪敎萬)도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고, 여성 회장 강완숙(姜完減)도 체포되었다. 대부분 남인의 중요한 지도자들이거나 천주교의 지도급 인물들인 이들 가운데 정약종 - 홍낙민 - 최창현、최필공,이승훈,홍교만 - 강완숙 등은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고, 이존창은 공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으며, 이가환과 권철신은 고문에 못 이겨 죽었고, 이기양 - 정약용 - 정약전은 각각 유배되었다.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1801년 3월 12일(양 4월 28일) 주문모 신부의 자수로 더욱 가열되었
다. 주문모 신부의 진술로 김건순(金행휘 - 이희영(李喜英) 등이 계획했던 해도행(海島行)이 드러나고, 강화도에 유배된 은언군 이인(李福)의 처와 며느리가 거처하는 폐궁을 주문모 신부가 출입한 사실이 드러나자, 정부 당국자들은 그가 나라를 원망하는 무리들을 모아 모반을 꿈꾼것으로 판단하고 박해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특히 3월부터 시작된 전주 지역의 박해로
유항검(柳6倫) - 유관검(柳觀倫),윤지헌(手#憲) - 이우집(李字集) 등이 서양의 선박을 불러 들이려고 했던 계획이 탄로나고,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 서양 선박의 파견 등을 요청한 황사영(黃顧永)의〈백서〉(萬書) 사건이 불거지면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는 더욱더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가혹하고 잔인했던 신유박해는 1801년 말에 막을 내렸다. 이 박해로 희생된 신자수는 기록에 따라 약간씩 다르지만 대체로 처형된 자 100명, 유배된 자 400명 도합 500명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기록에 누락된 자들까지 합치면 희생자수는 그보다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이 최초의 대대적인 신유박해로 조선의 교회는 큰 타격을 입었다.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목자 없는 교회로 돌아가야 했고, 지도층 신자들이 거의 다 순교하거나 유배 또는 생명 유지를 위해 산간 벽지로 피신함에 따라 교회는 거의 빈사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더욱이〈척사 윤음〉(床邪論音)의 반포로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법적인 근거가 마련됨으로써 교회를 재건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서양 선박 등을 요청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 한 황사영〈백서〉사건이 드러나면서 천주교는 반인륜적인 종교라는 인식에다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을 더하게 되었다. 이로써 천주교는 물론이고 발달된 서 양 과학 기술까지도 배척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조선의 과학 기술은 낙후된 상황을 면치 못하게 되었고, 근대화의 기회도 놓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나 노론 벌열의 천주교 탄압은 일시적인 성공에 불과하였다. 신유박해에 뒤이어 세도 정권이 출현함에 따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더욱더 심화되었고,이미 한계가 드러난 주자학이 여전히 지배적인 이념으로 기능하고 있는 상황에서, 천주교와 서양 과학 기술은 몰락할 처지에 놓여 있는 양반이나 양반 중심 신분제의 질곡에서 신음하고 있는 중인 이하의 신분층들에게 여전히 복음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대대적인 신유박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천주교 신앙은 더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다. 살아 남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간 지방으로 숨어 들어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였고, 죽음을 눈앞에 둔 순교자들의 용기와 귀 양간 신자들의 인내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은 그 동안 신앙의 불모지였던 전라남도와 남쪽의 도서 지방,그리고 경상도를 벗어나 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 등 온 나라의 궁벽한 구석에까지 확산되었다. 신유박해는 일시적으로는 교회에 큰 타격을 주었지만, 궁극적으로는 오히려 천주교가 더욱 발전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일러두기、
1. 본 전기집은 신유박해 순교 200주년을 맞아 신자들에게 올바른 순교자의 모습을 알려 주기
위해 기획되었다.
2, 본 전기집은 학술 자료를 토대로 집필되었지만, 내용과 문체는 가능한 한 신자들이 쉽게 읽을 수 있는 형태를 취하였다.
3,본 전기집은 ‘제1장 서울, 경기 지역 순교자들’,제2장 충청도 지역 순교자들’,제3장 전라도 지역 순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총 121명(제1장 기명, 제2장 31명, 제3장 19명)의 전기를 수록하였다.
4, 본 전기집에 수록된 인물은 대체로 천주교 창설부터 신유박해까지의 순교자를 중심으로 하였다. 다만 제2장 충청도 지역 순교자들의 경우는 1812년부터 1814년에 순교한 이여삼 –원 베드로, 장대원, 황 바오로(이상 1812년 순교), 김진후(1814년 순교) 등을 함께 수록하였다.
5, 본 전기집은 각 순교자별로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나,혈연 관계 - 활동 사항 - 순교 날짜를 고려하여 관련 인물을 함께 서술하였으며, 각 장의 순교자들은 순교 날짜 순으로 배열하 였다.
6, 본 전기집에 수록된 날짜는 음력을 기준으로 하였으며,필요한 경우 양력을 병기하였다. 양력만쓴경우는 ‘(양)’자를 부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