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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측천의 연호(年號)
무측천이 사용한 연호는 아주 많다. 그녀가 태후(太后)의 자격으로 임조칭제(臨朝稱制, 조회를 주재하고 초고명령을 내리는 것)할 때 쓴 것이 4개이고, 정식으로 대주(大周)의 황제가 된 이후에 쓴 것이 13개이다.
첫번째 연호: 광택(光宅)
이것은 무측천이 임조칭제한 첫해에 붙인 연호이다. 이 연호는 아주 재미있다. 보는 사람에게 시골졸부가 새로 지은 큰 집에 입주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런 기쁜 감정이 보는 사람들에게 한 눈에 느껴지게 하는 연호이다. 무측천이 이렇게 연호를 지을 때의 심정은 마치 시골부자가 새로 집을 지어 입주할 때와 같았을 것이고, 그러한 기쁜 감정이 연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무측천은 왜 기뻤을까? 바로 전해 즉 당고종 홍도원년(683년)에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 이치가 병으로 사망했고, 유조(遺詔)를 남겼는데, 군국대사는 무후의 의견을 들어 재결하도록 하였다. 며느리가 고생끝에 마침내 시어머니가 된 것이다. 마침내 무대의 뒤에서 앞으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정정당당하게 태후의 자격으로 임조칭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광택"이라는 글은 보기에는 아주 상서롭고, 즐겁고 뜻도 괜찮으며, 자신에 충만하지만, 숨어있는 의미는 아마도 이런 것일 것이다: 내가 정치를 맡은 후에는 반드시 억조창생들에게 행복한 생활을 하게 하리라. 그러나, 글자 자체의 뜻으로 분석하면, 너무 자잘하고 기세가 약하다. '광택'은 어쨌든 집을 밝게 하는 뜻인데, '광(光)'에는 텅빈다는 의미도 있어서, 집안을 텅비게 한다는 것으로 상서롭지 못하게 생각될 수도 있다. 과연 무측천이 집무를 시작하자마자 서경업이 반란을 일으킨다. 그리하여 무측천은 '광택'이라는 연호를 3개월만에 갈아치워버린다.
두번째 연호: 수공(垂拱)
"수공"이라는 연호는 무측천이 특히 좋아했다. 4년이나 썼다. "수공"이라는 단어는 <<관자. 임법>>편(*상서.무성편에 나옴)에 나오는 것이며, 이를 연호로 한 것도 그 의미를 딴 것이다. "수공이천하치(垂拱而天下治, 옷을 늘어뜨리고 두 손을 맞잡고 있으면서 - 즉 아무 일도 안하면서 - 천하를 다스린다)"는 데서 따온 것이다. 무측천은 문사에 밝은 여황제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인지, 이를 연호로 사용했고, 자신의 학식과 우아함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수공"이라는 연호를 쓰는 4년동안 일어난 두 가지 사건은 모두 무측천이 만족할 만했다. 하나는 수공2년에 일어난 일로 그녀가 조서를 내려 황제에게 권력을 넘겨주겠다고 했는데, 괴뢰황제인 이단이 동의하지 않아 그녀는 할 수 없이 계속 통치할 수밖에 없었다. 둘째는 수공4년에 일어난 일로, 옹주사람이 낙수에서 하얀 돌을 하나 건져올렸는데, 그 위에는 "성모임인, 영창제업(聖母臨人, 永昌帝業, 성모께서 인간세상에 내려오시니 황제의 사업이 영원히 번창하리라)"는 여덟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무측천은 이 돌을 받고는 매우 기뻐하며 이 돌을 '보도(寶圖)'에 봉했다.
이 두가지 일은 왜 무측천을 기쁘게 하였는가? 왜냐하면 진짜라도 좋고 진짜가 아니어도 좋았다. 이 두가지일은 무측천이 스스로의 '수공'의 양호한 효과를 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길도 닦았고, 여론도 호의적이다. 스스로 황제를 대신할 수 있는 날이 머지 않은 것이다. 이때의 무측천은 정상에 도달하기 직전의 등산가와 같이, 천하를 내려다보고자 하는 웅심이 날로 강해졌다. '수공'이라는 연호에서 그러한 심정이 묻어난다.
세번째 연호: 영창(永昌)
이 연호는 바로 위에서 언급한 '보도'에 쓰인 글자인 '영창제업'에서 따온 것이다. 원래 뜻은 영원히 좋은 일만 있기를 축원하는 말이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그런데,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수공'이라는 연호를 잘 써왔는데, 왜 갑자기 '영창'으로 바꾸느냐는 것이었다.
원래, '수공'4년 8월, 낭야왕 이충등 이씨왕족들이 모반을 일으켰으나, 무측천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곧이어 반란에 연루된 수백여집안을 주살했으며, 종실은 거의 다 죽여버렸다. 정치적 최대장애가 제거된 것이다. 그리하여, '영창'으로 연호를 바꾸었다.
그러나, '영창'의 "창(昌)"은 해(日)가 둘이다. 이것에 대하여 사람들은 손쉽게 "하늘에 두 개의 태양이떠 있다는 것은 두 명의 황제를 상징한다. '영창'이라는 것이 영원이 두 황제 체제로 간다는 말이 아닌가? 이것은 무측천에게 있어서 꺼리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1년도 되지 않아, 다시 연호를 바꾸게 된다.
네번째 연호: 재초(載初)
이 연호에는 드러난 뜻 하나와 숨은 뜻 하나가 있다. 재초원년 1월은 바로 영창원년 11월이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 하면, 이때 무측천이 조서를 내려 주력(周曆)을 쓰도록 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일이고, 역사서이 기재될만한 일이다. "재초"라는 말을 쓴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책에 기재할만한 일을 시작했다는 듯이다. 이것이 드러난 뜻이다.
그렇다면, 숨은 뜻은 무엇인가? 이때의 무측천은 이미 계획이 서 있었다. 등극전의 모든 준비가 차곡차곡 진행되었다. 등극은 당연한 일로 여겨졌다. 마찬가지로 역사책이 기재될 일이다. 그리하여, 등극전의 몇개월동안 "재초"라는 연호를 쓴 것은 이러한 등극을 축복하는 의미가 있다. 이외에 이런 뜻도 있을 것이다: "중국역사상, 나 무측천은 대단한 인물이다. 시비공과는 후세인들에게 맡기자. 어쨌든 나는 첫번째로 역사책에 기록되는 여중호걸이다"
다섯째 연호: 천수(天授)
이것은 무측천이 황제가 된 후에 처음 사용한 연호이다. 이 연호는 속(俗)되다. 그러나 아주 적절하게 사용했다. 이 연호를 정하는데는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을 것같다. 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무측천이 황제가 되는데, 세속관념상 아주 큰 장애가 하나 있었따. 즉, 수탉이 울어야 하는 것이고, 암탉은 그저 달걀이나 낳아야 한다. 즉, 여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자의 부속하는 것이고, 여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황제를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안되는 일이다. 그래서, 무측천은 '천수(하늘이 주다)'라는 말을 쓴 것이고, 여론을 그 방향으로 이끌고, 황제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받는 것이라는 것을 말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 점에 있어서, 당시의 승려들은 무측천에게 아주 잘 협조했다. '법명(法明)'이라는 스님은 <<대운경(大雲經)>>을 편찬했는데, 무측천은 바로 미륵불이 세상에 내려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당나라를 대신하여 천하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측천은 황제가 된 후인 천수2년 4월, 정식으로 승려의 지위를 도사보다 위에 위치하도록 명을 내리게 된다.
사람노릇하기는 힘들지만, 여자노릇하기는 더 힘들고, 여자황제노릇을 하기는 더더욱 힘들다. 아마도 무측천은 당시에 이를 뼈저리게 느꼈을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연유에서인지 그녀는 '천수'라는 연호를 3년간 사용한다.
여섯째 연호: 여의(如意)
이 연호는 그저 주운 것같다. 왜 이렇게 얘기할 수 있는가? 대주를 건국한 이래로, 모든 일은 순조로웠다. 아마도 무측천은 만족하였을 것이다. 특히 하나 언급해야 할 일은 <<구당서. 측천황후본기>>에 이런 내용이 있다. "천수3년 3월, 오천축국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을 했다" 대주왕조는 천축국과 같은 외국의 승인을 받은 것이다. 무측천은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원하는대로 모두 이루어지고 있었다. 아마도 그리하여 이 연호로 바꾸었을 것이다.
일곱째 연호: 장수(長壽)
천수3년, 무측천은 두번이나 연호를 바꾼다. 즉, 천수3년, 여의원년, 장수원년은 모두 같은 해로 692년이다. 이때 무측천의 나이는 이미 68세이다. 1년만에 두번이나 연호를 바꾼 것을 보면 그녀의 몸이 예전같지 않았던 것같다. 특히 유의할 점은 '장수'라는 단어를 연호에 사용한 점이다. 무측천이 '장수'할 것을 기원하는 것인가? 대주황조가 '장수'하기를 기원한 것인가? 아니면 둘 다 인가?
무측천의 성격으로 보아서는 그녀는 권력욕이 강한 여인이다. 이런 사람에게 권력이 주는 달콤함은 다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장수'라는 단어를 연호로 쓴 것은 무측천 자신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뜻이 강할 것이다. 최소한 처음에는 그런 뜻이었을 것이다. 이연호를 3년이나 쓴다. 여기에서 우리는 미묘하지만 무측천의 이 당시 심리를 이해할 수 있다. 최소한 생리적으로 노화가 시작된 것이리라.
여덟째 연호: 연재(延載)
무측천이 막 황제가 되었을 때, 즉 천수3년, 스스로에게 존호를 붙여 "성신황제(聖神皇帝)"라고 하였다. 장수3년 5월이 되어, 무측천은 자신의 존호를 덧붙여서 "월고금륜성신황제(越古今輪聖神皇帝)"라고 고쳤다. 그리고 "연재"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글자 자체의 뜻으로 보면, 존호가 승격된 것이다. 그런데, 그 안의 '월고금륜'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무측천은 이런 글자를 사용해서 고심막측하게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도록 한 것은 아닐까?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위대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그래도 "연재"라는 연호의 의미는 이해하기가 쉽다. 특히 이것은 '장수'를 뒤이어 쓰인 것이다. 만일 이 연호와 무측천의 존호에 부가된 글을 함께 놓고 분석한다면, 그 의미는 대주강산이 영원히 공고하고, 황제의 은덕이 만세에 미치라는 뜻일 것이다. 이때의 무측천은 여전히 '나이는 들었지만, 뜻은 그대로'인 상태인 것같다.
아홉째 연호: 증성(證聖)
이 연호는 불교용어에서 나왔다. 마치 무측천이 추구하는 바를 보는 듯하다: 증입성과(證入聖果). 이를 추구하기 위하여, 무측천은 널리 사원을 중수하고, 부처에 절하고 향을 사랐다. 그 중에 천추(天樞)를 만들고, 구정(九鼎)을 주조하는데만도 강철 200여만근을 사용했다. 사원을 짓는데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는지는 통계를 잡을 수조차 없다.
아마도, 바로 그녀의 이러한 경건한 '증성'의 마음에 감동받아, 그녀가 죽은 후에 중종은 그녀를 '대성황제(大聖皇帝)'로 추존함으로써 그녀의 바램을 이루어준 것일까?
열번째, 열한번째, 열두번째 연호: 천책만세(天冊萬歲), 만세등봉(萬歲登封), 만세통천(萬歲通天)
무측천이 짓는 연호는 갈수록 괴이하게 바뀌었다. 이 세개의 연호는 아주 촌스럽다. 언뜻 보기에도 아부꾼이 지었다는 것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나, 이런 말이 무측천의 입맛에 맞았다는 말이고, 그녀가 듣기 좋아했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아부하기 위하여 그녀의 참모들은 연호가 촌스럽고 아니고를 떠나서, 무측천이 좋아하기만 하면, 촌스러운 것도 아름다운 것이었다. 이들 연호의 변화에서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것은 무측천의 자아의식이 점차 돌출하게 된다는 것이고, 개인숭배의 기풍이 점점 더 짙어진다는 것이다.
열세번째 연호: 신공(神功)
이 연호를 쓴 목적은 아주 명확하다. <<구당서. 측천황후본기>>에는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9만세통년2년) 9월, 거란 이전멸등을 평정하고,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다. 그리고 연호를 신공으로 바꾸었다"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최고통수권자인 황제로서는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리하여 기념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뿐이다.
마지막 네 연호: 성력(聖曆), 구시(久視), 대족(大足), 장안(長安)
무측천이 "성력"이라는 연호를 3년이나 썼따. 그녀가 사용한 연호중에서는 짧은 기간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연호에서도 "증성성과'를 기원하는 심리상태가 드러난다. 이 연호를 지을 때, 무측처는 74세였다. 인생칠십고래희인데 그녀는 황제였다. 그리하여, 과거를 생각하고, 미래를 생각하니, 만족스러운 마음, 되돌아보는 마음, 바라는 마음, 쓸쓸한 마음들이 들었을 것이다. '성력'이라는 연호에서 그것이 어느 정도 느껴진다.
"구시"라는 연호를 쓴 목적은 <<구당서. 측천황후본기>>에 아주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성력3년) 5월 계축, 황상이 병에서 낳아서 회복하였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구시로 하였다." 아마도 무측천은 이때 눈병이 들었을 것이다. 백내장과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이로 인한 고통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병이 나은 후에 무측천은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건강한 신체가 없다면 모든 것은 헛되다"
무측천의 모든 연호중 '대족'은 농교성졸(弄巧成拙)의 대표적인 것이다. 왜 그러한가? '대족'은 한번 들어서는 좋은 것인데, 자세히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 '대족'은 모든 것이 가득 차 있다는 말이고, 운세가 극성에 달하엿따는 것이다. 극한에 도달하면 내려가는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1년도 쓰지 않고, 바꿔버리게 된다. 그러나, 이 연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무측천이 자신의 일생동안의 정치적 업적에 대하여 스스로 만족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가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무측천이 연호를 바꿀 때마다 천하에 사면령을 내렸는데, 유독 이때만은 사면령을 내리지 않았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다.
무측천이 사용한 마지막 연호는 "장안"이다. 아주 잘 지었다. <<구당서. 측천황후본기>>에는 "(대족원년) 10월, 경사에 갔고, 사면령을 내렸고, 장안으로 연호를 바꾸었다"고 되어 있다. 이 이름을 지은 본 뜻은, 무측천이 장안에 갔던 일을 기념하기 위한 것일 것이다. 황은이 넓고 크다는 것을 칭송하기 위한 뜻이리라. 장안은 오랫동안 편안히 있게 된다는 뜻이다. 무측천은 이 마지막 연호에 묻혀 영원하고 편안하게 잠들게 된다. 이것도 하늘의 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