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밝게 더 기쁘게
오늘 9월 성모신심 미사는 9구역, 10구역 미사로 봉헌하게 됩니다. 성당에 오늘 길이 기본적으로 묵주기도 5단은 넘는 구역이지요. 성당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구역이지만 마음과 열정만은 가까이 머무르는 9구역, 10구역 파이팅입니다. 이따가 9구역장, 10구역장님의 파이팅도 기대됩니다. 오늘은 더욱 주님 곁에 가까이 붙어서 은총과 축복 가득 누리시길 빕니다.
오늘 복음에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세명의 여인과 한명의 제자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 이모, 클로파스의 아내 마리아, 마리아 막달레나까지 모두 4명의 여인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로 앞 절에 예수님의 옷을 4조각 내어 가져가고 속옷을 놓고서 제비를 뽑고 있는, 로마병사 4명과 극적으로 대조되는 여인 4명을 대칭되게 놓은 것이지요.
요한복음에서는 백인대장이 나오지도 않습니다. 사도요한은 유일하게 현장에 있었던 사도로서, 십자가 아래에서의 모습을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전합니다. 다른 복음서들은 십자가 밑의 성모님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습니다.
이게 맞는 말인지 다른 복음서들도 직접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진짜 성모님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겁니다. 요한복음만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 제베대오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었다.” 다음 마르코 복음은 이렇습니다. “여자들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들 가운데에는 마리아 막달레나,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있었다.”
마지막 루카 복음은 여자들의 복음서라는 별명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름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친지와 갈릴래아에서부터 그분을 함께 따라온 여자들은 멀찍이 서서 그 모든 일을 지켜보았다.”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땅이 흔들리고 하늘이 어둠에 덮이고 해가 모습을 감추고 강도가 참된 고백으로 낙원에 들어가게 되고... 다른 복음사가들은 이렇게 주님 십자가 사건을 전하는데, 요한 복음 사가는 유일하게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전합니다.
암브로시오 교부는 이 구절을 “신심의 표시”라고 설명합니다. 강도를 용서하는 것은 종교의 표시이고, 사도와 어머니에게 서로를 맡기는 것은 신심의 표시라고 말이지요. 요한복음 사가에게는 이 신심을 전하고자 하는 것이 더 큰 의미가 있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암브로시오 교부는 성모님께서 바라보신 것은 자식의 죽음이 아니라 세상의 구원이었다고 전합니다. 확실히 성모님께서는 잘 되새기시는 분이시니 아들 예수님의 죽음 앞에 서서 아기 예수님이 시메온에 의해 봉헌된 그때를 연상하셨을 겁니다. 당신의 가슴이 칼에 꿰찔리는 고통 중에 예언이 완성되고 구원이 이루어지는 이 순간을 또 가슴에 담아 우리에게 전해주시는 어머니이십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인이라고 불렀던 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였지요. “여인이시여, 저에게 무엇을 바라십니까? 아직 저의 때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여인이라는 호칭을 구원의 때와 연관해서 쓰고 있습니다.
이 여인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원복음이라고 하는 창세기 3장 15절 “나는 너와 그 여자 사이에, 네 후손과 그 여자의 후손 사이에 적개심을 일으키리니 여자의 후손은 너의 머리에 상처를 입히고 너는 그의 발꿈치에 상처를 입히리라.”라는 이 구절의 여자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마리아는 이 복음이 이루어지는 구원의 때를 보는 “여인”이라는 겁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교회의 어머니로서 성모님을 모시며, 그 어머니의 신심을 우리가 잘 배워갔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때를 기다리며 바라보고 이루어지는 영광이 주어지길 빕니다.
첫댓글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아들의 죽음만을 안타까워하는 저희들이옵니다~ 더 큰 주님의 뜻을 바라보시고계신 성모님~
저에게도 더 큰것을 생각하고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주소서~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