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랩(teamLab:LIFE)
봉혜선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 갈 때마다 마음은 기대감에 부푼다. 낯선 장소에 불시착한 것도 같고 멀리 떠나온 예술가의 고향에 안착한 기분에 휩싸이기도 한다. 건물을 휘감아 도는 선을 따라가면 어딘가에 닿아 미래로 가는 지름길이 나타날 것 같은 외관 때문이기도 하다. 김초엽 소설《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서처럼 미래로 가는 우주선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심정이 된다.
디디피에서 팀랩(TeamLab:LIFE. 2020.9.25.~2021.8.22)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2011년 시작한 팀랩은 예술가, 프로그래머, 컴퓨터 그래픽 애니메이터, 수학자, 건축가등의 전문가들이 모여 상설전시 및 아트 기획전을 하는 인터내셔널 아트 컬렉티브 팀이다.
첫 작품 <생(生)>을 대한다. 작품의 주재료인 나무의 생김새가 한자 ‘生’을 닮았다고 해서 제목을 붙인 것으로 보였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본 따 허공에 띄워놓은 나무 ‘생’은 나무, 즉 생(LIFE)이 겪는 사계의 순환을 컴퓨터그래픽으로 표현하고 있는 미디어 아트다. 지난해 인사동 쌈지길에서 보았던 르네 마그리트 기획전과는 또 다른 세계를 맛볼 기대에 부푼다.
전작(全作)을 관람하는 데 1시간이 걸린다는 ‘생명은 생명의 힘으로 살아 있다’는 의미를 지닌 나무가 표현하는 과정 중 내가 도착했을 때의 ‘생’은 나목 상태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라는 안내대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시간의 변화를 참을 수 없는 앞선 관람자가 빠지는 덕이었다. 내리는 눈을 다 맞은 달밤, 눈꽃이 홍매로 바뀐다. 공중은 아직 색을 갖추지 못해 안 떠지는 눈으로 바라보듯 희미하다. 희고 연한 노란 꽃이 오른다. 세상이 나뉘기 전 천지창조처럼 어렴풋하게 희망의 기운을 품고 있다. 가늘게 명맥을 잇던 물줄기가 흐릿한 땅 사이에서 회색 강이 된다. 전체적으로 낡고 오래된 동양화 느낌이다.
가늘지만 곧은 가지가 뻗어 나오는 가운데 솟는 흰, 보랏빛을 띤 꽃들. 진하지 않아도 생은 빛난다. 각각의 송이마다 찬란한 삶이 들어있다. 낮게 넓게 퍼지는 작은 꽃이 풍성하다. 신화에나 나올 법한 기화요초들이 잔치를 벌인다. 흐르는 강물의 변화가 두드러진다. 푸른빛 가득한 곡선으로 표현한 굵게 변한 강줄기는 생명의 근원이 어디서부터 발원되었는지 알게 한다.
더 큰 꽃이 피고 나비의 수가 늘어난다. 네 마리 나비는 사방과 사계절을 호위하는 것일까. 개체 수를 유지하며 조화와 균형을 이루는 날개 짓을 하며 난다. 잎으로 뒤덮인 가지에 벼처럼 아래로 향하는 가을꽃이 절정이다. 잎과 꽃에 덮인 가지가 굵어진다. 청록빛을 띠던 강줄기가 보라, 흰빛으로 녹빛을 잃어간다.
잎이 성글어져 나목이 된 나무 <생>에서 변함없는 광경은 끊임없이 피는 꽃과 잎이라기보다 화면을 가득 채우는 꽃비와 낙엽과 눈과 비다. 희비애락이 회전하는 ‘생’의 뒤는 어디인가. 떨어지고 사라져 빈자리와 틈이 생겨야 채워져 순환하는 엄정함에 굳은 다리를 풀 수 없던 한 시간 동안 한 생이 지났다.
<꽃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들Ⅱ>. 꽃과 꽃 무더기들이 모여 만들어진 동물의 움직임이 역동적이다. 컴퓨터 프로그램화된 작품은 관람자의 참여와 손끝에서 단 1회성인 작품으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진다. 다가가 만지라는 설명 끝에 많이 만지면 사라진다는 건조한 말이 뒤따랐다. ‘지금 이 순간의 장면은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 연인 간의 사랑은 물론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도 지나치면 물러나는 엄혹하고 자명한 사실을 받아들인 컴퓨터그래픽의 숨결이 느껴지는 움직임이다. 꽃으로 이루어진 물고기·호랑이·곰·코끼리·새가 손끝에서 꽃잎이 되어 흩어지는 느낌은 흩어지는 꽃잎보다 허망했다.
<꿈틀대는 골짜기의 꽃과 함께 살아가는 생물들>. 먹고 먹히는 생태계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먹혀도 살지 못하고 먹지 못해도 살아갈 수 없는 생태계는 사람이 너무 관여해도 유지되지 못한다. 살펴보려 쉽게 들어서지 못했다. 자생으로 피고지고 살다가 스러지는 자연스러움을 파괴당한 지구가 비책으로 내놓은 바이러스를 겪으며 겪지 않으려 쓰고 있는 마스크가 답답하다.
<고동치는 대지>. 광물의 세계인 지구 중 육지의 요동을 표현한 작품이다. 살아있는 지구를 잊고 지냈다? 사람이 들어서니 더욱 꿈틀댄다. 솟구칠 준비를 하는 화산 속에 들어선 듯 어지럽고 불안하다.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두 번이나 놓쳤다. 악의가 있는 자연이 아니고 자연을 대하는 사람도 악의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은인자중해야 ‘내가 피고 네가 피고 우리가 다 피면 세상이 온통 꽃밭’인 지구가 되는 것 아닐까. 발걸음을 조용히 하고 다음 불빛을 좇는다.
<거대한 몰입>. 시작도 끝도 없는 물이 만든 파도로 풍덩 뛰어드는 공간. 안도 없고 바깥도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파도의 세계는 하나의 획으로 연결되어 있다. 바다 속 물기둥을 표현하느라 가운데 세운 기둥을 따라 돈다. 지구 5/6을 차지하는 바다에서 살아가는 파도가 일으키는 파장과 율동의 힘이 지구별의 생명을 키운다. 만원버스가 일부러 몸을 흔들어 승객을 실을 공간을 확보하듯 흔들림은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으면 더 단단한 살이 되고 흉터를 보며 의지를 다지듯 파도는 삶을 이끄는 추진체, 바로 그것이다. 항해사로 일하는 아들을 생각하면 잔잔한 바다를 염원하지만, 순풍이나 바다가, 파도가 그리는 물길을 잡아 올라타야 순항할 수 있다고 했다. 역경을 겪는 가운데 뒤엎을 수 있는 힘이 생기니 ‘역경이라는 단어를 뒤집으면 경력이 된다’는 말처럼 파도에 올라타 파도를 가르는 생이 되어가기를 기원한다.
<증식하는 무수한 생명>. 지켜보는 눈길이 없어도 생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스스로를 이어간다. 반복을 표현할 방법으로 데칼코마니 기법을 채택한 거울의 방에 무한대로 증식하는 나무는 진한 생명력을 뿜고 있어 비온 뒤 열대우림을 떠올리게 한다. 자꾸만 발길을 유혹하는 전시장 가는 길 거울 너머에서 나도 증식할 수 있을 듯하다.
<경계를 초월한 나비 떼, 경계 너머 태어나는 생명. <군접도 群蝶圖> >. 창 밖에서 엿보던 세계다. 창문 밖을 지나는 사람의 발끝에서 만들어진 나비가 창을 넘어온다. 나비는 군집을 이루며 반짝이는 생명력을 뽐낸다. 앉았던 사람이 일제히 일어선다. “나비 만들고 가세요.” 코로나 시기에도 말 붙이며 생명을 만들러 안간힘을 쓰느라 여기저기에 서서 나비처럼 활개를 펴 보던 바깥을 내다보았다. 나비는 사람의 손이 닿으면 사라진다. 사람이 관여해야 하는 자연은 어디까지인가. 지구 속 생태와 사람과 환경의 삼각관계는 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안과 밖의 경계가 또 한 번 무너진다.
<교차하는 영원 속, 연속되는 생과 사>. 12계절 꽃이 피어오른다. 강렬한 파랑, 눈부신 흰색, 마음을 들썩이게 만드는 빨강, 위험스런 빛을 띤 주황, 보라빛 꽃은 생명을 향한 향연이다. 겨울 국화, 금낭화, 유채꽃, 제비붓꽃, 나팔, 해바라기, 범부채, 피안화, 개맨드라미, 천남성 등 계절을 아우르는 꽃들이 꽃봉오리만을 앞세우고 등꽃은 가지가 꼬인 후에야 꽃이 달린다. 생명의 아우성은 무엇을 향해 저리도 눈부신가. 꽃이 아름다운 것은 꽃이 심장이기 때문이 아닌지. 여리고 다치기 쉬운 이유도 마찬가지. 지금 이 순간을 의미 없이 지나치는 건 생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본다. ‘나는 지금 꽃을 보고 있다. 생명에 대해 경외감을 키우고 있다’ 거대하게 피어오른 꽃은 사람의 손이 닿자 무참할 만큼 무너져 내린다. 전시장 4면 가득 피고 지는 꽃을 지켜보느라 한 시간이 훌쩍 지난다.
<꽃과 사람, 제어할 수 없지만 함께 살다’, ‘물입자의 우주>. 하나의 선으로 이루어져 전시장 전체를 휘감는 물의 선은 사람의 발길이 닿자 작은 공동(空洞)의 늪이 된다. 물을 받은 꽃 벽은 사람이 들어서면 ‘비밀의 문’으로 변해 문을 연다. 시선을 아래로 하려고 앉자 꽃방석을 펼쳐준다. 전시장에 들어서기 전 밖에서 내 발끝이 만들어 들인 나비를 좋아하던 사람들처럼 나에게서 번져나는 꽃이 나를 위무한다. 손끝에서 죽어 흩어지던 꽃이, 앉아 휴식을 취하는 내 몸에서 피어오르게 한 의도를 짚어보았다.
삶의 장면마다 지극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늘 현재인 삶은 예고편인 <생>이 그려주었듯 아름다움과 고난이 혼재하며 조화롭다. 규칙으로 정해둔 ‘이미 관람한 전시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문구는 관람자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시장마다 감시자 격으로 배치한 안내인의 시선은 담당한 공간에 머물지 않는다. 경계에 서서 내가 지나온 전시장을 넘나보는 안내인의 눈길에 잠시 눈길이 머문다. 단 한 번뿐인 생은 감시자가 있든 없든 지속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했다. 관람은 최소 2시간 이상을 잡아야 한다. 평면이 아닌 작품들 중 두 곳의 관람에 각각 1시간이 들기 때문이다. 순간의 미디어 아트를 기획한 예술가들의 팀워크의 힘을 느낄 수 있는 느낌은 덤이다. -(한국산문 7월)
봉혜선
서울 출생
한국문인협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