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올린 글.
연일 계속된 무더위가 태풍 종달이 영향 때문인지 오늘 아침은 선선하다.
종달이가 우리나라에 상륙하여 단비도 뿌리고 살인적인 무더위도 식혀주길 바랐는데..
일본으로 올라가더니 거기서 끝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영향은 바람으로 한반도까지..
여름이 끝나려면 아직 한 달도 더 남았는데 각자 건강에 유의를 해야겠다.
어제는 8대조 할머님이 탐진최씨라서 탐진이란 지명과 최씨의 내력에 대해 간략이 알아보았는데..
탐진 최씨보다 인구가 적은 우리 순천김.. 왜 적어도 이렇게 적은가? 난 이점에 대해 늘 궁금증을..
우리 순김은 인구가 6만여명..(2015년통계) 100대 성씨에도 못들어갈 것 같다.
적은 연유가? 우선 먼저 고려해볼 것이..
계유정난이란 조선조 초기 대 사건을 들 수 있다.
아다시피 계유년에 수양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우리 순천김씨인 좌의정 김종서님의 죽음이다.이 당시 이조판서인 형님을 비롯 두 아들도..
씨족이 멸족 되었다.순김 양 날개 중(김종서님 김승주님)한쪽이 완전히 꺾인 것이다.
뿐만아니라 이 후 수 백년동안 핍박을 받으며 숨어 살았는데(영조대 복권)..
살기 위해 순김에서 타성으로 갈아탄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다음은 계유정난 못지않게 사람들이 많이 죽은 사건...단종복위운동이다.
두 번에 걸친 단종 복위운동은 죄 없는 사람들이 반역죄로 몰리어 수 없이 죽음을 당했으니..
1차복위운동시엔 성삼문 등 사육신을 비롯하여 수 많은 연류자와그 가족들 까지..
2차 복위운동시엔 금성대군과 유배지 순흥부사(경상도순흥)이보흠을 비롯한 많은 연류자와 가족들이 참화..
우리 망미당 형제분이 계곡면 방축리와 산이면 구성리로 피신한 것도 바로 이 무렵으로 생각된다.
순흥부사와 같은 직위인 담양부사 효우할아버님은 종서님과 한 씨족이기에 위태롭다고 판단하시며..
때만 되면 관직을 그만 두고 낙향하여 숨어 살 것을 계획하셨을 것...
이처럼 깊은 산속..절해고도로 피신하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으셨기에 순김이 번창할 리가 없을 것이다.
또 하나는...신라말기의 정치 상황과 후삼국시대 정치상황,고려 건국초기까지 사건들이다.
왜 우리가 경주김씨인데 순천김씨인가?
수 년 전 내가 우리카페에 고향 구성리 소회란 글에서도 언급한바 있는데..
순천김씨세적총람을 참조하자면...가보(家譜)로 내려오는 기록에 의거...
김총 시조는 신라 종성이고 신라시대 인가별감을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물론 우리 대동보엔(세적총람) 어느 가계의 기록이며(家譜錄) 어떤 내용인지 구체적 내용이 없다.
아마도 내 생각인데 위에서 언급한 내용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닌 것 같다.
다시 말해 김총시조.. 신라종성..신라시대 인가별감 벼슬을 하셨다는 기록..
아무튼 우리 조상님들의 기록이니 믿어 의심치 않음이 마땅한 도리라 하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역사와 진실은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이다.
나도 종친회의 이런 주장이 맞기를 간절히 바라며 항간에 떠도는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다.
훗날에라도 자료들이 발견되어 우리 조상님에 대한 의문이 명확히 풀리기를 바란다.
고문헌에(신증동국여지승람:1486.1530년,승평지:1618,강남악부:1784,증보문헌비고:1782.1903년)..
기록된 내용은...김총은 후백제에서 인가별감을 했다고 나온다.(순김세적총람 41쪽참고,
단 증보문헌비고만 태봉국 궁예 때 인가별감을 했다고 나옴.)
왜 이 내용이(신라냐 후백제냐) 중요한지는 여기서는 길게 설명하지 않으려한다.
(만약 김총 시조가 신라인이 아니고 후백제 시대 사람이며 후백제에서 인가별감을 했다면?
우리 순김 씨족 족보는 한마디로 허위가 된 것이기에 그 중요성은 천동설 지동설에 필적할 것임.)
요즘 각 종 메신저상에 역사적 사건들이 떠돌아 다니는 데..
김총에 대한 내용들은 종친회 주장과는 상반된다 하겠다.
정치적,역사적 격변기에 우리 순김 어르신들은 주체적인 역활을 했거나 혹은 그 대상이 되었는바..
주로 피해 대상이었던 우리 순김은 인구가 감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면....
1.신라하대(下代),후삼국시대,고려 건국초기에 경주김에서 순김으로 넘어온 과정에서의 인구 감소..
신라하대에 여러 왕자의 후손들이 관향을 멋되로 정하고 시조로 모신 것과는 우리 순김은 다르다.
순김 대동보는 김총은 신라시대 인가별감이란 벼슬을 하며 전라도 순천(여수인데 순천에 속함)에서 ..
공을 세워 평양(순천옛이름)군에 봉해졌으며 사 후 그 곳 사람들이 성황신으로 모시었고.
후손들이 순천을 관향으로 삼고 김총을 시조로 모시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타 김총에 대해서는 계유정난시 기록 멸실로 알수 없다고 한다. 심지어 부, 조부도 누구인지 모른다.
만약 김총이 신라시대 인가별감으로 유명한 장군이고 공을 많이 세웠다면 왜 삼국사기(김부식),
삼국유사(승려 일연),고려사 등에서 기술을 안했겠는가? 상기 역사서엔 궁예에 대한 기록은 있으나 김총에 대한 기록은 없다.특히 고려사는 우리 가문의 종서님(당시 우찬성:영상,좌상,우상,다음가는 직급.종 1품임)이 총 감수하시고..
이조판서 정인지, 호조참판 이선길(광산이씨:궁예후손) 등 감독하에 집현전 학사들 다 수가 참여하여 찬술한 사서이다.
위에서 언급한 고문헌이나 역사학자들의 기록을 참고한다면 신라 하대 왕권쟁탈전에서 패한 어린 궁예..
(궁예는 47대 헌안왕 혹은 48대경문왕 아들이라고 함)
강보에 쌓인 궁예 신라왕실탈출,어린시절 한 사찰에서 불교에 귀의하여 불경공부,자기의 출신성분을 안 후..
잠시 양길에 의탁..그 후 궁예의 후고구려-마진국-태봉국 건국..태봉국 후기 궁예의 폭정...태봉국의 두 왕자들의 죽음..
그러나 손자들(둘)은 생존함.왕건에 의한 태봉국 멸망과 궁예의 최후..두 손자들의 고려국 탈출....
(궁예의 신라 적대정책으로 신라로는 갈 수 없었음)...손자들 후백제 안착..
장손 김총 장성후 후백제 무장으로 활약(인가별감(引駕別監):글자로 보건데 왕 출타시 근접경비담당하는 특별 장군)...
신라와 전투에서 무공세운 후 대우 받음..사 후 순천지방 수호신..후손들 시조로 모심...
이런 과정이라면 순김의 고난사를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순김중앙종친회는 이런 내용을 불인정하고 있음)
2.다음은 위에서 언급한 계유정난과 단종복위 과정에서의 순천김씨 씨족 말살 정책이다.
3.또한 아무도 모르게 숨어살다 죽거나 타성으로 성씨 변경등이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유추해볼 수 있을 것..
우리 순천김씨가 둘째 가라면 서러운 명문가임엔 틀림 없으나 오늘날 그 수가 적음은 이런 연유일 것이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현대에 와서 궁예를 재평가하고 있음.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함.
고려태조 왕건이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백성들로부터 얻고자 궁예를 악평했다는것.
첫댓글 문제는 태봉국 궁예가 폭정을 했다는것..
이런 사람을 조상이라고 족보에 올리기를 좋아할 후손이 있겠는가?
하지만 진실은 진실...역사와 문헌은 참,진실을 말해준다.
지금 여러 학자들에 의하면 궁예는 알려진대로 포악한 성격 소유자가 아니란 것..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씌어진 기록들이다. 그는 역성혁명을 해서 성공했다.
역사서 기록 결과는 뻔한것..조선조때 고려사, 고려사절요가 개찬,편찬 되었는데..
당시 개찬(고려사)편찬(고려사절요) 최고 책임자는 김종서..그 분도 기록은 어쩔 수 없었을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