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금해서요.
제가 김해김씨 감무공파(최근 사군파) 69대손 자제되는 70대 손입니다.
가야가 어쩌다보니 한반도에서 왕의 존재가 제대로 기록된 국가중 제일 먼저 멸망했는데요.
2천여년전에...
왜 제일 먼저 멸망당했는데 자손들은 제일 많을까요.
조선말기 벼슬을 사고 팔았던 가짜 金씨인 안동김씨 빼고도, 김해 김씨가 제일 많거든요.
보통 성씨가 많은 순으로 김.이.박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왜, 제일 먼저 멸망한 김씨 가문 사람들이 제일 많은 건가요?
그래도 한열사의 역사 게시판인데... 실마리 정도는 알려 주실 수 있겠지요?
첫댓글 기본적으로 김해김씨는 예전부터 많았습니다. 경주김씨만 하더라도 분적한 본관이 많은것 처럼 김해김씨에서 분적한 본관이 많습니다. 물론 님의 말도 일리는 있습니다. 틀린만도 아닙니다. 안동김씨 김좌진 장군의 노예들도 같이 안동김씨로 편입된 것을 보면 쉽게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김해 허씨인데..^..^ 반갑네요...
제가 말한 부분은 개인적인 사견으로 지어낸 말이 아닙니다 논쟁으로 연결되기를 원하지 않기에 내렸습니다 노여움 푸시기 바랍니다.그리고 시간이 되시면 김병모 교수의 저자로 되어 있는 김수로왕의 혼인길이라는 책을 보세요.좋은하루 되세요.
저희 어머니 외가쪽도 김해 허씨 ㅎㅎ
현재 우리나라에 신라 성씨가 가장 많죠.
제가 보는 관점은 당시 삼국시대 특히 신라때 풍습에 기인한다고 봅니다.
신라 왕족 귀족은 1부 다처제가 허용되었습니다. 반대로 여자측도 남자 여럿 거느린경우도 있었지만(공주 같은 경우)
성은 아비성을 따르지요. 화랑세기라는 기록을 보면 1부1처로 사는 경우들도 많았지만, 남자측이 재력과 권력이 되고 자기가 원한다면 여자 백여명을 첩으로 삼았던 예도 보입니다. 그러면 그 자손은 전부 아비성을 따르게 되니, 한 대代에 순식간에 1명에서 100여명으로 자손이 퍼져나가고 그것이 몇대를 거치면 100년도 안되어 천여명의 같은 성씨의 자손을 퍼트리
는 결과가 나오게 되지요. 고구려 백제보다 신라가 좀더 그런 풍속이 강해서 그 자손이 많았다고 보여집니다. 더군다나 신라를 이어 고려때까지 그 권문세족들이 이어갔을테니 현재의 결과가 나왔다고 여겨집니다.
다른 가설로는 조선후기 성이 없던 노비들이 흔하던 성씨를 임의로 얻어서 불어났다는 얘기도 있지만, 조선시대 노비들도 대부분 성을 갖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어서 주요원인으로 볼만한 가설은 아니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김씨라고 하면 크게 신라계와 가야계로 대별됩니다. 신라계는 알(자)지(자) 할아버지를, 가야계는 수(자)로(자) 할아버지를 그 시조로 하고 있으나 비조는 공히 소호 할아버지인 것으로 현재까지 알려져 있습니다. 가야계는 대부분 김해 김씨로 불리고 있으나 신라계는 경주김, 안동김, 광산김 등 다양하게 불리기에 김해김씨를 제외한 나머지 김씨들은 대부분 신라김씨로 보셔도 무방할 것입니다. 또한 사성 등에 의해 김씨가 권씨, 최씨, 허씨 등으로 성이 바뀐 경우도 많이 있기에 이들 까지도 김씨의 범주에 포함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김해김씨는 멸망하였다기 보다 신라김씨와 합쳤다고 보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야는 신라에게 패망은 하였지만, 멸족당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신라의 귀족으로 편입되어 김유신대에 이르러서는 가문을 드날렸지요. 죽어서는 왕의 칭호도 받았구요. 명문으로 다시 거듭나서 계속 이어졌다는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의문이 있죠. 신라에 복속되었는데, 왜 신라 왕성王性인 경주 김씨나 신라의 주요성씨보다 현재 김해 김씨가 더 많을까? 광산김씨 안동김씨등이 경주김씨에서 뻗어나온 성씨니까 다합치면 김해김씨와 비슷해질것 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김해김씨의 그많은 후손이 이해되기는 어렵지요.
또 다른 가설을 내놓는다면, 금관가야만을 볼것이 아니라, 다른 가야들도 봐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금관가야만 보면 작습니다만 가야연맹 전체를 보면 땅도 넓고 인구도 신라와 비견될수 있을겁니다. 가야연맹에 널리 퍼져있던 김해김씨가 신라에 흡수되면서 요직에 등용되고 신라의 풍습에 기인하여 자손이 번성하게 되었다면 신라기존 성씨의 인구를 넘어설수 있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화랑세기에 그 근거가 될만한 기록들이 많이 있는데요. 가야가 복속되는 기간의 기록이거든요. 화랑이라는 집단에도 가야인재들이 많이 들어오게 됩니다. 가야는 패망하고 가야인들이 진출할수있는 관직의 벽은 신라인보다 높았지요. 그래서
가야인들은 정규 관직이 아닌 우회루트로 역량을 펴게됩니다. 금관가야 왕족은 신라가 직접 등용했지만, 가야일반백성들은 관직의 벽이 턱없이 높았던걸로 보입니다. 하지만 화랑은 교육성격의 집단이고 무인양성의 기능을 담당했습니다. 당시 신라가 확장정책을 펴고 있었고 백제 고구려와 전쟁이 잦아서 병사의 수요가 많았지요. 금관가야의 투항한 왕자도 신라변방의 장수직을 맡았지요. 그래서 가야인들은 화랑에 대거 들어갈수 있었고 나중에는 권력을 얻을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 신라기존 세력과 경쟁을 하게 되고 후에는 폐단이 생겨서 화랑이 폐지되기에 이르는데요. 그당시 상황이 화랑세기에 올롯이 담겨있습니다.
패망했지만, 당시 가야인들은 차별을 딛는 과정에서 더 단련되었고 삼국전쟁이 치열하던 그 시대를 잘타서 많은 무훈을 이루면서 신라 관직에 빠르게 진출을 할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대표적 인물이 김유신이지요. 삼국통일(염연히 말해 통일은 아니지만요)에서 신라만 얘기하고 가야는 잘 언급을 안하지만, 제가 보기에는 망국의 설움과 흔들리는 마음을 전쟁에 뛰어들어 쏟아붇고 그것을 통해 신라에서 다시 권력과 안정된 지위를 얻고자한 당시 가야인들의 강한 열망이 신라가 통일하게 만드는 큰 힘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가야계들이 삼국통일에 기여한 만큼 후대에 대우를 받고 자손의 번영을 누릴수 있게 된 것이겠지요.
그리고, 삼국유사 가락국기 중요기록에 오류가 있습니다. 금관가야 마지막 왕인 구형왕 기록에서 "보정(保定)2년 임오년(562년) 9월에 신라 제24대 진흥왕이 군사를 일으켜 침공하자 왕이 직접 군졸을 거느리고 싸웠으나, 적은 많고 아군은 적어 대항하여 싸울 수 없었다. 이에 동기 탈지이질금을 보내 국내(수도)에 머물게 하고, 왕자 및 상손 졸지공 등은 신라에 들어가 항복했다."는 기록인데요.
이는 삼국사기에 이미 30년전인 532년 법흥왕시기에 금관국이 신라에 항복했다는 기사와 어긋나지요.
삼국사기에는 항복했다고 나오고, 삼국유사에는 30년뒤에 침략받아 망했다고 나오는데요. 기록이 왜 다르게 되었는가 하면,
삼국유사에 두 가야의 기록이 짬뽕되었기 때문입니다. 금관국은 532년에 신라에 항복한것이 맞고, 562년에 침략당하여 패한 가야는 금관가야가 아니라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였습니다. 가야의 마지막 맹주였죠.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금관가야와 대가야를 구분하지 못해서 뒤섞은거지요.
금관가야는 항복하기전에도 신라와 친한관계였습니다. 왜냐하면 몇대를 걸쳐서 왕후가 신라계였고 신라인들도 등용하고 교류를 많이했거든요. 그래서 금관가야가 망하고 신라에 흡수될때 마찰이 적었을리라 봅니다.
아마도 조선시대 노예제도 철폐할때 노비들에게도 성씨를 부여했고..
당시 이씨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이씨성을 갖질 못했고..
그 당시 김씨성으로 가장 많이 성씨를 등록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울나라 모든 백성이 모두 양인이 되었다는거에 만족하는게 좋을거 같습니다.
뼈대있는 집안도 동생집의 아이를 양자로 들이는게 흔했고, 그것도 아닌 양자도 있었습니다.
지금처럼 본관 새로만드는게 흔치않던시절, 국민 모두 양자로 편입됐다고 생각하는게 좋다고 봅니다.
김해김씨중에 번성한 파로는 삼현파로 삼현파의 파조가 고려조 충열왕때의 김관 고려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