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봄 고조부 시제에(시제는 음력 10월에 5대조<나는 고조부,나의자식은 5대조,손자는 6대조가됨>이상에게 산소에서 지내는 제사<묘제>인데 요즈음은 그 때가 춥기도하고 자손들이 객지에 많이 사는걸 고려하여 가족이나 문중회의등을 거쳐 따뜻한 4월에 제사를 많이 모시고 있음.) 불참했기에 항시 죄지은 마음이었는데 불현듯 조상님들 산소를 찾아뵙고 싶은 충동을 느껴 8월 16일 아침 일찍 이곳 충주를 출발했다. 먼저 망미산 효손(시조 총이 1세, 효손 할아버지는 26세,저 충실은 41세) 할아버지와 할머니 묘소에 큰절을 올리고 작은모실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나뭇갓 증,고조부 내외분께 불손(不孫)의 불찰을 용서해달라고 무릎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조금은 마음의 빚을 갚은 느낌이었다. 기왕이면 고향 주유소에서 주유를 하고싶어 동섬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넣고 귀가를 서둘렀다. 산소에 들리는 시간과 오가는 시간이 최소 열 서너시간은 걸리기에... 지금으로 부터 대략 560여년전 구성리 마을을 여신분은 망미산(망미당) 진사공 효손 조부시다. 휘 효손은 어사공 안길 할아버지의 손자가 되신다. 따라서 우리 구성리 자손들은 순김 12개 파중 하나인 어사공파에 속한다. 휘 안길의 조부는 바로 우리의 hope 양경공 승주 할아버지이시다. 공께선 제 2차 왕자의 난때 좌군총제로 출동하여 난을 평정 조선조 3대 임금이신 태종이 왕위에 오른데 공을세워 익대좌명공신의 반열에 올랐으며 여산군으로 봉해졌다. 그 후 공조와 병조의 판서를 역임했다 . 기우제를 공께서 주관하면 비가 왔다고하여 태종임금은 공에게 승주라는 이름을 내려주셨다. 동시대 한쪽에선 묵재공 종한과 절재공 종서 형제분들이 쭉쭉빵빵 잘 나가시다, 계유정난으로 멸문지경에 이르렀으나 (영조임금때 복권됨.) 우리의 hope 양경공께선 처신을 잘하셔서 우리 순김의 가문을 오늘 날 이 정도에 이르게 한 장 본인이시다. 망미당 효손 할아버지는 계유정난의(조선조 단종 원년, 세종임금의 둘째 아들인 수양대군과 한명회 권람등 일당들이 어린 단종을 허언으로 속이면서 고명대신 좌의정 김종서, 영의정 황보인등 수 많은 사람들을 비겁하고도 악날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 역사는 이것을 계유년에<1453년> 일어났기에 계유정난 혹은 세조 찬탈 사건이라 일컬음.) 화를 피해 남은공 효우형과 함께 형제가 남행하여 형은 계곡면 방축리에 정주하시고 동생은 한반도 최남단 구석진곳에 정착하시어 마을 이름을 아홉구에 별성자, 구성리라 지었다. 중국의 고대전적에는 아홉구자는 대(大)와 만(萬)의 뜻이 있는 실수가 아닌 허수다. 성균관에서 수학하셨던 진사(과거시험 초시 합격자로 성균관 유생을 일컬음. 혹은 초시에 합격은 했으나 대과 보기를 포기한 학덕을 갖춘 사람에게도 진사 호칭을 함) 효손 할아버지는 아홉구자와 별성자의 심오한 뜻을 너무도 잘 아셨기에 자손들의 앞날과 마을의 미래가 번성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아마도 마을 이름을 그와 같이 지었으리라... 따지고 보면 우리 순김은 희소성씨다. 전국에 모두 6만여명이 있을 뿐이다. 4촌격인 광주(광산) 이씨가 3만여명이고... 그렇지만 조선시대 인구대비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최고 수준이다. 문과(대과)급제자만 45명에 이른다. 그중 단연 우리의 자랑은 절재공 종서 할아버지고 다음은 임진란때 왜장 고니시유끼나가를 맞아 용맹히 싸우다 충주 탄금대에서 총사 신립과 남한강으로 뛰어내려 장열히 최후를 맞이하신 여물조부다.(무관이 아니고 선조때 문과 알성시< 임금이 친히 과거장에 나가 시험을 주관. 따라서 시험중 최고 권위가 있음. >에서 장원 급제한 수제임. 후에 영의정에 추증됨. 충주 탄금대에는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비석이 3개나 있음. 여물 할아버지의 존함에 가슴 뿌듯함.) 사실은 신립장군이 여물 할아버지의 조령방어의 조언을 몇 가지 이유를 들어(1.급조된 병력들이 오합지졸이라서 산악지형에서 매복작전을하면 야간에 도주해버린다. 2.기마부대의 작전을 극대화하려면 산악지형은 안되고 평지여야한다. 3.대부대인 일본군을 당하려면 죽기살기로 싸워야 하는데 그 장소가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싸울 수 있는곳 즉 탄금대가 최적지다.) 거절했기에 8천여 귀중한 인명을 손실당하고 거의 전멸하다시피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지만.... 여물의 아들 "유"(북저공)는 인조 반정을 이끈 핵심중 핵심세력으로 광해군을 제거한 1등공신 이었기에 영의정을 수차례 역임하신 어르신이다. 그 분도 광해군 시대와 정묘호란, 병자호란등 워낙 난세에 사셨기에 반대파의 모함으로 영욕을 두루 맛보셨다.유 할아버지는 서인이셨기에 대북파들의 견제를 받았으며 여물과 아들 유, 그리고 그 손자며느리들까지 4대에 걸친 여인들이 병자호란을피해 강화도에 있다가 전쟁이 청에 패하자 지조를 지키기위해 네 명이 한날 한시에 강화도 푸른 바다물로 뛰어내려 유명을 달리하신 사건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커다란 감명을 준다. 이는 우리 가문은 물론 나라의 슬픈 역사적 사건이지만 한편 우리의 자랑이기도하다. 경기도 안산땅에는 당시 4대에 거친 여인네들의 충절을 기리고저 사세충렬문을 세우고 시에서 관리하고 있다.
유할아버님의 독자 경징은 과거에 급제하여 한성부판윤(서울시장)을 하시다,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 방어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당시 강화도엔 왕족을 비롯하여 많은 대신들 가족들과 백성들이 피신한 곳으로 매우 중요한 섬이었다.인조는 청군이 이미 길을 막아 강화도 피신에 실패하고 할 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급히 피신했다. 경징할아버님은 결국 강화도 방어에 실패하여 사약을 받고 한 많은 세상을 하직하셨는데,인조는 김유의 공로를 생각하고,독자임을 감안하여 죽임을 반대했으나 대신들의 거듭된 상소로 할 수 없이 사약을 내렸다.경징할아버님(나의 11대 방계 조부님)에 대해서는 강화도 방어 실패 책임 때문에 역사적 평가가 다양한데 주로 악평이지만 반대파의 지나친 공세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더 올라가면 신라왕손이자 태봉국(후고구려-마진-태봉으로 국호개명)을 개국하신 궁예가 우리의 직계 조상님 이시다.(47대 헌안왕 아들 경주김. 역사는 승자의것이라고 궁예를 고려사에서는 악평하고있으나 사실과는 거리가 있다고 오늘날 일부 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고려사를 편찬한 집현전 학사들이나 그 것을 총 감독한 절재공 종서 할아버지는 <계유정난 사건으로 고려사,고려사 절요, 세종실록을 총 감독하시고 감수하신 절재공 김종서는 모조리 삭재해버려서 김종서가 고려사등을 편찬한것 조차도 오늘날 모르고있음.>궁예에 대한 비평에 별 이의를 달지 않았다는것. 궁예의 부하 왕건이 역성혁명으로 나라를 찬탈하여 고려조를 개국한것에 대하여 호평한것을 보면서 절재공께서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면서 고려사를 감수하여 세종임금께 바쳤을까?) 그 손자 "총" 은 우리가 시조로 모시고 있다. 총의 아버지 청광은 할아버지 궁예에게 신광과 함께 죽임을 당하셨으며. 신광의 후손은 후에 광산 이씨가 되었다.. 어머니도 이때 화를 당하셨다. 태봉국이 왕건에게 망한뒤, 시조 총은 신라말기 당시 왕권 다툼으로 할아버지 궁예를 죽이려고 한 신라로도 갈 수 없고, 더더욱 궁예의 후손들을 찾아내 씨를 말리려고 한 왕건 밑에 있을 수도 없는 급박한 처지에서 할 수 없이 후백제로 가서 견훤 밑에서 인가별감(引駕別監 :왕의 경호<호위>책임을 맡음) 직을 맡았으며 신라와 후백제의 전투에서는 그 직책이 오늘날의 야전군 사령관은 아니지만 상당한 전공도 세웠다. 우리 순김은 어찌 보면 다서개의(신라, 태봉국, 후백제, 고려,조선) 왕조와 깊은 인연을 맺고 때로는 역사의 주체로, 때로는 역사의 객체로 살아온 한(恨) 많은 사람들이다. 우리는 고려시대에 세보(世譜)에 눈을 뜬 할아버지들이 본향을 경주에서 순천으로 바꾸지지 않으면 아니되었던 고뇌를 이해해야 하지않을까? 이런 내력을 갖고있는 마을- 열심히 땅을 일구며- 거기서 고생의 댓가를 보상 받고- 대대손손 마을을 지키려는- 우리 형제들이 성실하고도 우직하게 사는 땅이 J- project 니 뭐니하여 골프나 치고 먹고 마시고 노닥거리는 패륜의 땅이 된다니 실로 서글픈 마음 금할 수 없으나 한편으론 보상금을 바라는 분들은 하루 빨리 공사가 이루어지길 기대한 분들도 있다니......어찌 해야 할것인가? 내가 보기엔 그 사업은 물건너 간것 같기도 한데...... 어디까지나 나의 판단이고, 나의 바램임을 ........끝으로 언제나 마을 발전을 위해 꿋꿋이 고향을 지키면서 애쓰신 형제분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을 전하며 또한 "구성리 내고향 사람" 까페를 방문하시는 제위분들의 행운을 빌고 본 까페의 발전을 기원하면서......... 望美堂 進士公 諱 孝孫 15代孫 忠實(行列字;忠源). 망미당 진사공 휘 효손 15대손 충실 (항렬자;충원)삼가 올림. |
첫댓글 우리 문중 갑부는 한화 김승연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