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젊은 커플들이 결혼 장소로 선호하는 스코틀랜드의 그레트나(Gretna)는 2천 7백 여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아담한 마을이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서부 국경에 위치한 이곳에는 딱히 경제 활동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로맨틱하고 특별한 결혼을 원하는 젊은이들이 쓰고 가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간다.
브룩스 마일슨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
이러한 마을에 있는 축구 팀이 1부리그까지 올라가 유럽에서도 유명한 강 팀들인 셀틱과 레인져스를 상대한다는 것은 ‘풋볼매니저’와 같은 게임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비현실적인 일을 실제로 이뤄낸 축구에 미친 백만장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브룩스 마일슨(61).
잉글랜드 선덜랜드 출신인 그는 건설업, 보험업, 부동산 사업 등을 통해 약 1,500억 원의 자산을 갖고 있는 사업가다.
2002년의 어느 날, 꽁지머리와 청바지로 멋을 낸 채 그레트나에 모습을 드러낸 마일슨은 아마추어리그에 있던 그레트나 FC에 유소년 발전 기금으로 4천 만원을 건네며 인연을 맺었다.
이후 마일슨은 그레트나를 스코틀랜드리그 디비전 3 (4부리그)에 편입시키며 구단주로서의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그 이전부터 70여 개의 아마추어 축구팀에 적지 않은 돈을 기부하며 축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보여 왔던 마일슨이었지만, 정작 자신의 팀을 갖게 된 것은 처음이었기에 그레트나에 대한 사랑은 뜨거울 수 밖에 없었다.
하루 5갑의 담배를 태우는 애연가였던 그는 일반 관중석에서 푸른 연기를 내뿜으며 팬들과 함께 응원을 했다. 경기 전에는 구단주라는 신분도 잊은 채, 티켓 오피스에서 직원들의 티켓 판매를 돕기도 했다. 그레트나 선수들은 “마일슨 회장은 진공청소기로 라커룸 바닥까지 청소할지도 모르는 분”이라며 마일슨의 털털함을 설명하기도 했다.
물론 마일슨은 자신의 본업인 구단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그는 1~2부 리그에서 뛰던 은퇴 직전의 베테랑들을 데려오며 스쿼드를 강화했으며, 타구단에서 기회를 얻지 못한 선수들과 신인을 발굴해 제대로 된 팀을 만들어나갔다. 또한 스코틀랜드 남부지역 유소년 선수들에게 무료 레슨을 제공하는 등 축구를 통산 부의 환원도 잊지 않았다.
이러한 마일슨의 노력은 2004-05시즌 첫 성공을 이루어냈다. 그 해 그레트나는 디비전 3(4부리그)에서 32승 2무 2패라는 대단한 성적을 거뒀는데, +101의 골득실차는 그레트나가 이미 4부리그 수준의 팀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줬다.
디비전 2(3부리그에)서도 인구 2,700명의 마을 그레트나를 당해낼 자는 없었다. 그레트나는 2005-06시즌 2위를 승점 18점차로 따돌리며 또 다시 우승, 디비전1(2부리그)로의 승격을 확정 지었다. 그 해 그레트나는 스코티시 FA컵 결승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결승전에서는 SPL의 강호 하츠(Hearts)를 만나 승부차기에서 패했지만, UEFA컵에 출전하는 영광을 누렸다.
2006-07 시즌에도 기적은 계속 됐다. 프리미어리그 바로 밑에 있는 디비전1은 전혀 만만한 무대가 아니었지만, 19승 9무 8패를 거둔 그레트나는 2위 세인트존스톤을 승점 1점차로 누르고 3시즌을 연속 1위로 승격하는 믿기 힘든 역사를 만들어냈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단 50~60명의 관중 앞에서 경기하던 아마추어 클럽이 UEFA챔피언스리그에도 나가는 팀들인 셀틱, 레인저스와 한 리그에서 경기하게 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 전체는 그레트나의 믿기지 않는 행보에 열광했고, 브룩스 마일슨과 선수들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그러나 2007-08시즌은 꿈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산산조각 난 슬픈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가 EPL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고는 해도, 단돈 몇 백만 파운드의 자금으로 정복할 수 있는 무대는 아니었다. 32경기를 치른 현재 그레트나가 거둔 성적은 4승 4무 24패. 여기에 법정관리에 들어가며 얻은 -10의 감점으로, 승점 6점의 그레트나는 이미 강등이 확정됐다.
브룩스 마일슨 ⓒGettyImages/멀티비츠/나비뉴스 |
현재 그레트나의 모습은 최악을 넘어 비극에 가까울 정도다. 그레트나를 여기까지 끌고 온 장본인 마일슨이 지난 달 심장마비와 뇌척수염으로 쓰러지자, 구단의 운영자금이 하루 아침에 뚝 끊겨버렸다. 주급이 나오지 않자 코치진을 비롯한 주축 멤버들이 팀을 떠났고, 구단의 업무는 마비되기 시작했다.
10명의 선수가 무급으로라도 경기에 나서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드러냈지만, 4월 5일 인버네스전을 앞두고는 선수단 교통비도 없었던 것이 ‘기적의 팀’ 그레트나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리그 일정을 끝까지 준수하겠다는 SPL당국의 의지에 따라 경기는 진행됐지만, 5일에 열린 그레트나와 인버네스전에는 단 431명의 관중이 입장, SPL 역대 최소 관중수 기록을 갈아치웠다. 그레트나의 벤치에는 후보 골키퍼도 없었고, 풀백으로 뛰던 카일 노턴은 스트라이커로 출전해야만 했다.
브룩스 마일슨과 그레트나 FC의 꿈은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끝나가고 있다. 마일슨의 병세는 호전되지 않는 것으로 전해졌고, 그가 병상에서 일어나더라도 그레트나가 다시 회복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최악의 경우에는 그레트나FC가 공중분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병상에 누워 이런 소식들을 접하는 마일슨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팬들과 함께 담배를 피우며 그레트나의 응원가를 부르던 시절을 떠올리고 있지는 않을까?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그리워하는 사람의 쓸쓸한 미소와 함께.
병마와 싸우는 마일슨은 그레트나에서 손을 뗀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다고 아주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기반을 둔 한 비즈니스 컨소시엄이 80만 파운드(약 16억 원) 정도의 가치로 평가 되는 그레트나의 인수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리그를 막론하고 한 팀이 공중 분해되는 상황을 반길 축구 팬은 아무도 없다. 그레트나 FC가 최악의 상황을 면하고 2,700 그레트나 주민들의 자랑거리로 남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그들이 프리미어리그에 올라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레트나의 지난 4년은 스코틀랜드 축구의 전설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첫댓글 와 대단 ㅡㅡ.;
진짜..FM에서나 일어나는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다니
우왕ㅋ..ㄸㄸ!
눈물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