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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처럼 금남로에 뿌려진 너의 붉은 피
두부처럼 잘리워진 어여쁜 너의 젖가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갔지?
망월동의 부릅뜬 눈 수천의 핏발 서려 있네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산 자들아 동지들아 모여서 함께 나가자
욕된 역사 투쟁없이 어떻게 헤쳐 나가랴
오월 그날이 다시 오면 우리 가슴에 붉은 피 솟네
"공수대원들은 시민들을 무작정 두들겨팬 뒤 기진맥진한 상태의 사람을 질질 끌어다 트럭에 실었다. 트럭에는 더 이상 실을 수 없는 상태가 될 때까지 사람들을 트럭에 던져댔고, 공수대원 2명은 트럭 위를 걸어다니며 사람들을 차 바닥에 바짝 엎드리게 하면서 꼼짝하지 못하게 했다. 공수대원은 총을 들고 서서 마치 짐승 다루듯 군화발로 지근지근 밟았다. 사람들은 차 바닥에 엎드려 신음했고, 옷은 갈기갈기 찢어져 등까지 살이 벗겨졌다."
"젊은 여성이나 양복이라도 반반히 입은 청년들에 대한 계엄군의 폭행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젊은 청년이 계엄군에 발각되면 일단 워커발로 짓이기고 몽둥이 찜질을 한다. 생명의 위험을 느낀 청년이 달아나면 끝까지 추척, 그 청년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더 이상 운신을 못할 때까지 갖은 폭력을 행사했다. 내가 목격한 장면 중 한 청년은 금남로 중간에서 계엄군에게 붙들려 얻어맞다 옆 골목으로 도주해 무등고시학원으로 도피했는데, 뒤쫒던 계엄군은 고시학원 계단 위를 무장한 채 따라가기에는 거추장스러워지자 소총에 장착된 대검을 뽑아 청년의 등 뒤에 던졌다. 이어 합류한 한 무리의 병력은 학원 안에서 공부하고 있던 수험생들을 무자비하게 내갈겼다."
".... '저놈 잡아라' '저기 간다'는 소리와 동시에 '아이구' '억' 소리가 터져 나와 거리는 삽시간에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횡단보도 바로 옆, 북동 276번지 3층 건물 2층에 있는 동아일보 광주지사도 예외가 아니었다.
2명의 공수부대원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는 듯한 자세로 뛰어 올라왔다. 두 사람 모두 대검이 꽂혀 있는 M16소총을 앞으로 내밀고 서슬이 퍼렇게 되어 있었다. 마치 총검술시범을 보이는 자세처럼 착검한 M16소총을 앞으로 겨누고 있었다. 곧 아무에게라도 방아쇠를 당겨 버릴 자세, 아니면 금방 찔러 버릴 듯한 그러한 모습이었다. ……
마침 일요일인데도 출근한 정은철 총무는 바깥의 시끌벌적한 사태와는 관계없이 자기 책상에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쓰고 있었다. 그는 '시위를 한일도 없음은 물론 구경조차 하지 않았던 터라 무슨 상관이 있으랴'는 듯 태연하게 자기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뿐이었다. 그런데 두 군인은 다짜고짜로 정 총무의 뒷 덜미를 낚아챘다. 정씨는 의자와 함께 뒤로 벌렁 넘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자 두 군인은 정씨를 마구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짓 이기는 것이었다.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큰 일이었다. …… 정 총무는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반항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었다. 두 군인은 사무실 바닥에서 기진맥진해 찍 소리도 못하는 정 총무의 두발을 양쪽에서 하나씩 붙잡고 끌고 내려갔다. 바닥에 끌린 채였다. 마치 죽어있는 짐승을 끌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2층 계단을 내려갈 때도 그대로 끌고 내려갔다. ……이 날 그는 자기가 맡은 구역의 수금실적이 나빠 하루 전날 지사장으로부터 질책을 받고 일요일인데도 출근했다가 당한 것이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담당구역 수금을 하기 위해 출근한 배달학생 박준하군(광주공고 1년)도 수없이 맞고 짓밟혔다. 그리고나서 끌려나가다 계단에서 실신해버렸다. 그러자 비로소 그들은 그대로 팽개쳐 두고 내려가 버렸다. ……동아일보 광주지사 바로 앞쪽에는 2대의 트럭이 유동 3거리 쪽을 향해 정차해 있었다. ……
그 차량에는 길거리와 건물 안팎에서 붙잡혀 끌려온 사람들이 가득가득 실리고 있었다. 얼마나 맞고 밟혔는지 머리와 코, 입에서 피를 토해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그들의 하얀 옷자락은 피에 젖어 엉망으로 되어있었다. 어떤 사람은 기진한 듯 눈만 껌벅껌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사람이 붙잡혀왔다. 그의 머리나 코에서는 피가 줄줄 쏟아져내렸다. 웃옷은 갈기갈기 찢겨진 채 핏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끌고 온 군인이 대기 중인 군인에게 인계하면 또 한 차례 군화발이 날아오고 몽둥이 세례가 쏟아졌다. 그리고 짐짝 실리듯 트럭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그러면 거기에 있는 또 다른 군인이 '이 새끼 머리 숙여'라며 군화발로 머리와 등을 짓밟는다. 숨소리 조차 들리지 않아야 끝이 난다. ……
그때 마침 택시 한대가 지나가려다가 이들에게 붙잡혔다. 감색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젊은 남자와 색동 저고리에 빨간 치마를 입은 예쁜 새색시가 차에서 끌려 나왔다. 한 눈으로 보아도 신혼부부임에 틀림 없었다.……
이 길은 시내 중심가에서 광주공항이나 고속버스 터미널 또는 광주역으로 빠져나가는 길목이다. 그래서 이 신혼부부는 공항이나 역쪽으로 가고 있는 듯했다. 그들 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택시에서 끌려나오자마자 신랑은 무자비한 몽둥이와 장작개비 그리고 군화발 세례를 받았다. 이유도 없었다. 순식간에 일이었는데 신랑은 '아이구, 눈이야'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붙잡고 땅바닥으로 뒹굴고 있는 것 이 아닌가 ……
신부도 군화발로 채였는지 한복은 엉망이 된 채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사람 살려!" 신부는 자신의 몰골은 돌아보지도 않고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신랑을 붙잡고 엉엉 울며 절망적으로 울부짖었다. "이 쌍년" 군인들은 또 다시 신부를 걷어차며 욕지거리를 하더니 '빨리 꺼져'라고 소리를 질렀다.... "
"..... 젊은 여성들의 경우 계엄군은 다짜고짜 블라우스 등을 찢어 걷어내거나 대검으로 바지와 치맛자락을 찢어 여자를 거의 나체 상태로 만든 다음 폭행을 가했는데, 방망이나 구둣발길이 날아가는 신체의 부위가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다…. 젊은 여자, 그것도 옷맵시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고 예쁘장한 여자일수록 가해지는 폭력은 더 심했고 옷을 찢어발긴다는지 가격하는 신체부위가 여체의 특정 부위들에 집중되었을 때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되겠는가? 백주겁탈, 폭력난행, 성도착적 무력진압 등의 표현들이 얼핏 떠올랐으나 그것 역시 광주 상황을 전하기엔 적절치 못하였다.... "
".....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 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와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개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 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 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 11대 군용트럭의 대열 맨 마지막 차량 위에서는 22~23세 가량의 처녀인 듯한 여성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하얀색 투피스 스타일의 윗옷은 피투성이가 된 데다 갈기갈기 찢겨진 채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젖가슴이 보일 정도로 걸처져 있었고 아랫도리는 완전히 벗겨진 채였다. 아가씨는 얼굴을 가리고 흐느끼고 있었다. 처녀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위해 두 다리를 소아마비 환자처럼 구부리고 있었다.
발 아래에는 그녀가 입었던 팬티며 스커트가 피로 얼룩진 채 함부로 버려져 있었다…. 그녀를 차량 옆에서 군홧발로 채이고 진압봉으로 두들겨 맞아 쓰러져 있었다. 그러자 군인들이 '이년 봐라'하면서 옷을 붙잡고 일으키다 옷이 찢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고나서 군인들이 다시 '쌍년 올라가'라고 욕지거리를 하며 군홧발로 걷어차자 차 위로 올라갔는데 또 다시 발길질로 군인들이 그녀를 맞았던 것이다. 윗옷마저 거의 찢겨져 완전히 나체 상태로 바뀌기 직전이었다.... "
".... 이때 한 40대가 남자가 하얀 가운을 들고 나와 이 아가씨에게 던져 주려다 군인들에게 붙잡혔다. 공수부대원들은 이 남자에게도 군홧발과 몽둥이 세례를 여지없이 가했다. 그는 바로 옆에 있는 서석병원 사무장이었다. 병원장 김상수(45) 박사로부터 가운과 팬티를 구해다 주라는 지시를 받고 병원 간호사의 것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16시 45분쯤이었다. 이 같은 광경은 행인을 물론 이 건물 저 건물 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 보고 있었다. 시민들은 살기등등한 공수부대원들의 행패를 이미 겪었거나 눈으로 직접 목격했던 터라 감히 나와서 만류하거나 재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공수부대원들의 만행에 대한 탄식은 자신도 모르게 이입 저입에서 튀어나왔다.... "
"... 공수부대원들의 몽둥이와 군홧발길은 이곳에서 100m도 안 떨어진 광주제일고등학교에도 들이닥쳤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진원지로 일본 경찰도 함부로 드나들지 않았던 교실. 그들도 학생들을 연행할 때는 교장실에 들러 교장에게 사전 양해를 구한 후 교실로 들어가 이른바 '불량선인'을 연행해 갔었다.
그러나 우리의 국군은 군화를 신은 채로 교실에 들어가 수업을 받고 있던 학생들을 아무런 이유도 없이 짓밟아버렸던 것이다. 이날 교실에서는 정규 고등학교를 다니지 못한 젊은이들이 고등학교 과정을 이수하기 위해 방송통신고교에 적을 두고 수업을 받고 있었다. 이들도 시위대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들이다...."
".... 전일빌딩 옥상에 진을 친 공수들은 광주경찰서 방향에 있는 시위대를 향해 총을 쏘고 관광호텔 옥상에 배치된 공수들은 금남로 5가 쪽을 향해서 무작위로 쏘아댔다. 이때 광주경찰서 건너편에 있는 진주다방 주방장이 2층 옥상에 올라가서 구경을 하다 총에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광주은행 옆에 있는 수미호텔 앞쪽에서는 중고생으로 보이는 학생 30여 명이 죽거나 치명상을 당했다. 관광호텔 옥상에서 공수들이 쏜 총에 시민, 학생이 맞고 쓰러지면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시체와 부상자를 옮기려고 길가로 뛰어나갔다. 그러면 또 총을 쏴버렸다.
나는 가톨릭센터 뒤쪽 사거리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면서 사망자가 발생할 때마다 땅바닥에다 '바를정'자로 표시했다. 약 30여 분 사이에 12명이 사망했다. 12명까지를 표시한 후 산수동에 있는 여자친구 집으로 갔다. 당시 자취를 했기 때문에 거의 여자친구 집에서 밥을 가져다 먹었다 . 혹시나 그날도 시내의 위험한 상황을 모르고서 밥을 가지고 올까봐 시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알려주기 위해 그곳으로 갔다.
시위대들이 화순에서 무기를 탈취해 왔다는 소식은 산수동에서 처형을 통해 들었다. 후에 들은 얘기로 그날 나와 함께 가톨릭센터 뒤쪽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수를 땅바닥에 표시하던 동네 선배는 37명까지 표시하다 지워버렸다고 한다...."
".... 관을 구하기가 힘들어서 적은 관에다 시신을 겨우 넣어두면 나중에 관 밖으로 손과 발이 삐죽삐죽 나왔다. 내가 입관을 했던 시신이 열네 구였다. 병원에 있을 때 가끔씩 시위대 차량이 그곳으로 왔다. 대개 부상자를 싣고 오거나 의약품을 얻으러 왔다.
한번은 차를 타고 온 시민군들이 교도소 부근에서 계엄군들에 의해 시민들이 무참히 살해됐다면서 그들을 구하러 가자고 소리쳤다. 우리는 "그곳으로 가면 모두 죽는다" 면서 말렸으나 시민들이 죽는 광경을 목격하고 온 그들은 뜻을 같이했던 시민군들을 태우고 교도소를 향해서 갔다.
그때 떠난 후로는 그 차와 차에 탔던 사람들이 다시는 그곳으로 오지 않았다. 아마 교도소 쪽으로 가다가 계엄군들에 의해 차량과 함께 박살났을 것이다...."
".... 갑자기 공수부대가 충장로 쪽으로 쫓아왔다. 시민들은 우르르 도망갔다. 나도 죽어라 달음을 쳐서 셔터가 조금 열려 있는 동해물약국 옆 건물로 뛰어들어 막 셔터를 내리는 순간 네거리에 나타난 공수부대가 그것을 봐버렸다. 건물 맨 위층 화장실에 몸을 숨겼으나 곧 쫓아 들어온 M16을 착검한 공수부대원 한 명이 목에 칼을 대며 "손 들어" 했다.
그 뒤 그는 나에게 달려들어 무차별 구타를 가했다. 정신없이 맞으면서도 나는 필사적으로 외쳤다. "난 동구청 미화요원이오. 학생이 아니오. 이 제복을 보면 알 것이 아니오?" 청소복을 그대로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막무가내였다. 곧 허리띠를 풀고, 상의와 신발은 벗은 채로 동해물약국 사거리로 끌려나왔다. 갑자기 거기서 공수부대 한 놈이 군화발로 내 턱을 강타했다. 입술이 터졌다. 그런 상태에서 원산폭격을 시켰다. 그 찰나에 충장로파출소 쪽에 있던 시위군중이 공수부대에 돌을 던졌다. 공수부대가 그쪽으로 갔다.
순간 나는 우체국 쪽을 향해 죽어라고 뛰었다. 공수부대가 나를 잡으러 뒤쫓아왔으나 그들을 향해 계속 돌을 던지는 시위군중으로 인해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 그때까지 나는 공포탄만 쏘는 줄 알았다. 잠시 후, 곳곳에 숨어 있던 시민들이 하나둘씩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고, 시위군중이 대열을 맞춰 또다시 도청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그때 나는 총에 맞았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고 꼬집히는 듯한 경미한 통증을 느꼈을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도망가려는데 다리가 움직여지지 않아 그 자리에 쓰러졌다. 주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쓰러졌다. 순간 '아! 총에 맞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심한 통증으로 다리를 절룩거리며 기다시피 인도로 나왔다. 탕탕거리던 총소리가 일시에 멎었다. 거리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시민들은 경악스런 눈으로 쓰러져 신음하는 우리들을 눈물로 바라봤다. 총에 맞은 왼쪽 발목에서 피가 솟구쳤다.
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나를 보고 군중 속에 있던 고등학교 동창생이 뛰어와서 지혈시키기 위해 수건으로 복숭아뼈를 묶어줬다. 몸에서 쏟아져나오는 피를 본 후부터 이성을 잃고 나는 절규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이여! 이대로 당하고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모두 힘을 합쳐 저놈들을 몰아냅시다."
그렇듯 절통하고 피 끓는 심정을 표출했다. 나는 4명의 학생들에게 팔다리를 의지하고 병원을 찾아다녔다. 당시 금남로 3가 광주은행 부근에 숨어 있었던 사람이면 단장의 아픔을 토해 내는 나의 절규를 들었을 것이다. 병원을 찾아 헤매는 동안 이마에 정통으로 총알을 관통 당해 지하상가 도로 옆에 기대어 있는 한 시민을 목격한 후 더욱 격한 분노가 치밀었다. 친구들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타일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병원을 향해 가는 동안 계속해서 피 끓는 음성으로 시민들의 동참을 호소했다.
한참을 헤매다닌 끝에 충장로 3가에 있는 한일정형외과로 들어갈 때 한 구의 시체를 시민들이 들것에 실어 들고 있는 것을 봤다. 역시 태극기로 시신을 덮어놓은 상태였다. 병원으로 들어가자 병원측에서 '지금은 계엄상태라 총상환자들은 받을 수 없다'면서 무척 꺼렸으나 그곳에 있던 시민들의 완강한 주장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응급실로 들어가 곧바로 수술대 위로 올려졌다. 나를 들것에 싣고 간 4명의 동료가 의사의 지시에 따라 팔과 다리를 붙들자,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수술이 시작됐다. M16 총알의 관통상이었다. 마취도 하지 않은 채 생살을 찢고 꿰매는 수술을 견딘다는 것은 마치 활활 타오르는 불속에 앉아 있는 것과 같은 고통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당하는 가장 힘든 상태였다. 소요시간은 불과 5분-10여 분 정도였겠지만 고통으로 일그러진 나는 연신 소리를 질러대며 뼛속 깊이 전해 오는 공수에 대한 분노를 느꼈다. 수술은 총알이 뚫고 들어간 쪽에서 한 바늘, 뚫고 나간 쪽에서 세 바늘을 꿰매는 것으로 끝났다. 수술 후, 입원실이 없어서 보조의자에 누워 있었다. 왼쪽 다리의 상처 부위는 붕대로 감겨진 채였지만 계속되는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었다. 몸은 한치도 움직일 수 없을 만큼 나른했고, 왼쪽 다리는 끝에서부터 시퍼렇게 멍들어가면서 퉁퉁 부어 올랐다."
".... 19일 오후 3, 4시쯤이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 있는데 공수부대 원 50여 명이 갑자기 시외버스공응터미널 안으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무조건 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을 곤봉으로 내리쳤다. 바로 얼마 전 고속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학생들이 도로를 돌면서 시위를 했었다. 나는 그때 공수부대의 곤봉에 맞아 피투성이가 된 채로 끌려가는 젊은이를 몇 명 보았다. 그러나 정확한 상황은 알 수 없었다. 우리 기사들도 도망가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그때 기사 중 한 사람이 곤봉에 머리를 맞았다. 정확한 날짜를 기억할 순 없지만 20일경이었다.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는 터미널다방이 하나 있었다. 내가 지하다방에 있는데, 지하에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는 말을 듣고 가보니 계단이 꺾어진 한쪽 모퉁이에 있는 청소함에 사람들이 처넣어져 있었다. 10여 명 정도였는데 누워 있는 사람도 있고 앉아 있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몰골은 한결같이 말이 아니었다. 온통 피투성이였고 부상당한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중에는 죽은 사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공수부대가 한번 휘젓고 간 뒤였다.
딴은 사람들의 생활터전인 시외버스공용터미널에까지 들어와서 그런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그것을 보고 시민들은 많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조차 그런 짓을 했다면 더 외진 곳에서는 얼마나 더 심하게 굴었을까를 생각하고 분함을 금치못했다."
".... 갑자기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순간 누가 내 가슴을 탁 하고 내리치는 것 같았다. 고개가 저절로 뒤로 돌려지는 순간이었다. 분수처럼 내 가슴에서 피가 솟아나지 않는가. 나는 얼른 손으로 가슴을 막았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만은 조건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끈끈하고도 뜨끈뜨끈한 피의 감촉이 손바닥에 느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 쓰러져 버렸다. 그날 나는 빨간 티를 입고 있었다. 빨간색이라 유난히 띄었을 것이다.또 175센티미터의 큰 키였기 때문에 더 잘 띄었을게다. 총알이 내 가슴을 뚫었다는 것은 조준사격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큰 키에 빨간 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 쉽게 띄어 나는 피해를 입었다고 할 수 있다.
국회 청문회를 보니까 위협사격을 했다고 했다. 그런데 혁띠 아래를 맞았으면 모를까 나는 혁띠 위를 맞았다. 그것도 어느 쪽에서 날아왔는가 하는 것은 확실치 모르겠다. 아마 도청 쪽이었을 것이다. 그때 분수대 위에 서있는 공수부대도 있었는데 분명 그곳에서 쏘았을 것이다. 나는 도청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 1980. 5. 18. 조선대학교 의과대학 4학년에 재학 중이던 이민오 씨는 광주일고에서 있었던 동문 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주변에서 쫓아온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광주일고 교장관사까지 도망쳤다. 하지만 교장관사의 안방까지 추격해 온 공수부대원들에 의해 구타당한 뒤 광주 서부경찰서를 거쳐 상무대로 연행됐다. 5. 19. 밤 상무대 영창에서 심각한 복통과 구토를 호소한 그는 이날 24:00경 광주국군 통합병원으로 옮겨졌다. 후송 당시 구타 후유증으로 췌장 및 비장 파열, 복막염 등이 발생하여 위험한 상태였다."
"..... 김경철 씨는 귀가 들리지 않고 말을 할 수 없는 장애인이었다. 갓 백일이 지난 딸이 있는 평범한 가장이었던 그는 친구들과 점심식사 뒤 집으로 돌아오던 중 공수부대의 눈에 띄어 무차별 구타당했다. 부상당한 그는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졌으나 19일 03:00에 사망했다.
검찰 검시조서에는 후두부 찰과상 및 열상, 뇌안상검부열상, 우측 상지전박부 타박상, 좌견갑부 관절부 타박상, 진경골부, 둔부 및 대퇴부 타박상 등이 사인이며, 사망진단서에는 후두부타박상에 의한 뇌출혈이 직접사인었다. 그의 시신은 군 당국에 의해 광주통합병원 영안실로 옮긴 후 상무대 내 101사격장에 매장됐다가 가족들에 의해 망월동에 안장했다."
"..... 19일인지 20일인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시내를 돌다 돌아와 보니 조선대 교정에는 군인들에게 잡혀 온 수백 명의 학생들이 있었고, 그 넓은 운동장에서 수십 명의 군인들에게 사정없이 맞고 짓밟히고 있었다. 그들은 군인들이 시키는 대로 시궁창을 기어야 했고, 운동장선착순을 수십 번씩 해야 했고, 그중에서도 늦는 이들은 군홧발과 진압봉에 채이고 맞는 수모를 당하고 있었다.
또 20일인가 그 다음 날인가도 확실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헌병대가 쓰고 있던 체육관 건물에서 두 명의 젊은이가 하얗게 죽어 넘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아마 차량에 실려 오던 도중이나 아니면 그런 와중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일 것이다. 매맞고 부상당한 학생들을 군용 트럭으로 수송하면서 그 속에 몇 발씩 가스탄을 터뜨린 군인들도 있었다 하니, 그런 와중에 죽지 않은 게 다행이라면 다행일 그런 처참한 상황들이 계속되고 있었다.... "
"..... 김춘례는 23일에 할아버지 제사를 가려고 기숙사 동료인 고영자와 함께 시민군들한테 찾아갔다. 사정을 들은 백대환은 데려다주기로했고 17명과 함께 도청에서 출발해서 화순으로 향했다. 그 때 군인 한 명이 도로변에 나와 차를 멈춰라 그랬다. 버스는 그걸 무시하고 세게 달렸다. 그렇게 무시하고 달리니 산쪽에서 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 차 안에 있던 젊은이 2~3명은 산에다 총을 쐈다. 남학생들은 머리에다가 총을 들고 항복했고 여학생들은 손을 흔들고 살려달라고 했다. 그래도 총알이 계속 날라왔고 사람들은 엎드렸다. 총알은 계속 날라왔고 15명이 사망했다. 3명이 살아남았다.... "
".... 처음 총소리가 연이어 들리는 순간 배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거리에 팍팍 고꾸라지는 것을 봤다. 머리에 총을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들도 있었다. 고막을 찢을 듯이 울려대는 총소리 때문에 멍청하게 있던 나는 정신이 들자마자 도망치려고 일어났다. 마음과는 달리 아무리 달리려고 해도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제야 내가 총에 맞은 사실을 깨달았다. 옷은 이미 피로 낭자해 있었다. 나는 배를 움켜쥐고 혼신의 힘을 다해 무등극장 맞은편에 있는 조그만 병원문을 열고 들어간 후 쓰러져버렸다.
의식이 가물거리는 상태에서 간호원들이 와서 침대로 나를 옮기는 것을 느꼈다. 간호원이 지혈시키기 위해 상처부위를 붕대로 조이자 숨도 쉬지 못할 전도로 배가 아프고 뜨거웠다.
수술 후 열사흘 정도 지난 날이었다. 밤 9시경에 갑자기 하혈을 하기 시작했다. 조금 과장해서 수돗물이 쏟아지듯 밤새 피를 쏟았다. 간호원이 이 소식을 원장에게 전화로 알리자 하혈이 멈출 때까지 수혈을 시키라고 했다. 양팔을 통해 계속 수혈을 하면 괜찮다가 수혈이 끝나면 다시 세숫대야에 가득 피를 쏟았다. 내가 재수술을 받던 날 오후 4시가 되어도 수술실에서 나오지 않자 어머니는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했다고 한다.... "
".... 지하실에 숨어 있는데 군인들이 집으로 쑥 들어와서 방이고 화장실까지 다 뒤지고 이불까지 다 내려서 깔아놓고 난리를 치더니 큰방으로 들어와 서랍을 열어서 담배하고 라이터하고 시계 같은 것을 가져가 버리고 모두 나오라고 소리를 질러요. 그래서 손을 들고 아들하고 김승후, 임병철이가 밖으로 나갔지요.
군인들은 젊은 사람 셋만 데리고 나가 말 좀 들어본다고 했대요. 지하실에 있던 나는 이런 사정도 모르고 밖에 나가보니까 사람들이 하나도 없어요. 그래서 노인들 보고 '우리 아들 어디로 갔소' 했더니 밖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디다. 우리 영감은 저기 경상대학 입구에 가서 농사를 짓는데 영감도 안 돌아오고 아들도 없지, 그래서 이 계단에 앉아서 영감도 죽고 아들도 죽고 어찌해야 좋을까 하고 울고 있으니까 영감이 들어 오대요.
영감하고 나하고 둘이서 아들을 찾으러 나갔는데 군인들 차 두 대가 불에 타고 있고 철뚝 너머 바로 근처에 김승후란 사람이 쭉 뻗어 있어요. 그래서 저 사람은 죽었는데 우리 아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허둥지둥 신작로 길을 걸어 나가보니까 고랑에서 우리 아들은 여기 손이 끊어져서 덜렁덜렁하고 등을 맞았는지 피를 흥건히 흘리고 병철이와 함께 똑 같이 엎어져 있대요....."
첫댓글 518 민주 항쟁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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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군인들도 위에서 시켜서 어쩔수없이 했었는데 갈수록 정신적이상이생겼대 나도 처음엔 진짜 혐오했는데 지금은 나쁘긴한데 그사람들도 힘들었겠구나하고있아...
@이니는 내가 지켜 면죄부!
진짜 개새끼들이네 정말 너무마음아프다..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사람들을 탄압하는 나라 ..
개새끼들 진짜 미친새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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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아직도 빨갱이 빨갱이거리는 사람들 정신좀 차리면 좋겠다.
일본군이랑 다를바없는새끼들 대대손손 고통받으며 살길 니들이 사람이냐 ..
저게 어쩔수없이죽인거야? 나도 저새끼들 어쩔수없이 죽여버리고싶은데 저군인새끼들 죽여버리고 군인새끼들 엄마 아내 딸 아들 다 어쩔수없이 죽여버려도돼?
ㅅㅂ 군인놈들 전두환 시발놈 진짜 전두환 뒤져라
저 군인들 개쳐맞아야함 사람이냐? 피코 작작해라 씨발ㅋㅋㅋ
역겹고 더러운 문어대가리새끼
볼수록 군인들 존나 역겹다ㅋㅋㅋㅋㅋ 저 군인들 다 조사해서 잡아넣고 처리해야함 ㄹㅇ...
씨발놈들진짜....
ㅅㅂ.....읽다가 멈추고 다시 읽고.....진짜 역겨워....진심으로
으 씨발 제발 좀 뒤져라;
개새끼들
ㅇ?존나 눈물나
아 눈물난다.. 이따 참배가는데 그때도 엄청 울 것 같다
저때 사람들 죽인 군인새끼들 자기들도 난데없이 혼자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기가 한것처럼 똑같이 당해야함
저때 참여했던 군인들 다 다시 잡아내서 집어쳐넣어야한다고;;;;
헐 미친 씨발새끼들
진짜 존나 읽는 내내 화나고 눈물남 씨발 저 군인들도 똑같이 당해야함 ㅡㅡ
지시한 사람과 지시대로 한 사람들 다 고통속에 살아야해
진짜 잊지 말자
저 일에 가담한 공수부대원 전부 전두환과 같이 사형선고 내려야 한다고 생각해. 아무리 마약에 취하고 상부에서 명령을 해도 사람으로 할 일이 있고 해선 안 되는 일이 있지……. 저기 글로 적힌 일들은 사람이 아니라 악마가 한 짓 같아. 저런 인간들은 실제로 똑같이 해줘야 한다. 쓰레기 새끼들
전두환 개새끼 진짜 온갖 욕을 다 해도 한이 안 풀릴 놈
하 시발 잊지않겠다
전대갈 제발디져라 개씨벌 극혐새끼 광주쳐와봐라제발 똑같이햊ㄷㆍㄹ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