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통절한 아픔
주일 준비 부담은 한 짐이라 늘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한다.
주말에 아내만 어머니 집에서 자고 나와 새벽 기도 후 안부를 물었다.
호흡이 빠르고 기침이 멎지 않아 서둘러 어머니 집으로 갔다.
기침할 때 옆구리의 통절한 아픔을 손으로 누르셨다.
동생이 119 불러라 기에 신고하고 기다렸다.
구급 대원 세 명이 들어와 인적 사항을 물었다.
체온, 혈압, 맥박 체크하며 증상을 손 비닐장갑에 썼다.
보훈병원 응급실 진료 여부를 알아봤다.
가정 간호 받은 사실을 확인하고 마음의 준비할 환자로 여겼다.
입원실 없다는 말에 호스피스 병동을 요구했다.
대기자 순이라 응급실 통해 들어갈 수 없었다.
의료 파업으로 대학병원 진료도 어려웠다.
가까운 현대병원 갈 채비하는데 어머니가 물고기 밥을 줬다.
구급 대원은 주차장까지 거들고 떠나 승용차로 모셨다.
현대병원 응급실 담당 의사가 나왔다.
호흡기 내과가 없다는 이유로 내밀었다.
진료 기록 보유한 보훈병원이 낫다며 문전 박대했다.
난감한 현실에 울며 겨자 먹기로 요양병원 원무실장에게 알렸다.
주일 휴무라 입원이 어려웠다.
호스피스 병동은 말기 암 환자 증명이 필요하고 기다린 시간이 길었다.
문제는 죽어 나간 사람으로 심적 부담이 크다는 사살을 알았다.
또 간병인을 붙이면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결국 어머니가 싫어한 요양병원을 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펐다.
2인실 예약 후 하루만 버텨 주시길 원했다.
어머니가 집으로 가자고 우겨 마음이 무거웠다.
현관에서 침상 거리가 몇 걸음 안 되는데 너무 멀어 숨이 차올랐다.
어머니의 부드러운 손을 붙잡고 기도드렸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어머니가 더 울먹거렸다.
일본 동생에게 전화 연결을 시켰다.
‘엄마 미안해요. 비행기표 알아보고 나갈게요.’
딸의 목소리 듣고 이제 ‘괜찮다’며 빨리 가란다.
‘어머니! 이런 상태로 오늘 예배 나오실 수 없어요.
집에서 기독교 방송으로 드리세요.’
챙겨 주신 헌금 봉투만 들고 하나님께서 지켜 주실 것 믿고 나섰다.
두 동생에게 어머니 형편을 알렸다.
시간 내서 일찍 오겠다는 반응이었다.
오전 9시, 어머니 전화였다.
‘교회 가서 앉아 있고 싶어’ 하셨다.
‘죽어도 예배당에서 죽겠다’는 어머니 강한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어머니와 교회에서 마지막 예배가 될 성싶어 가슴 아팠다.
하나님의 위로와 성도들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임 권사님이 눈물을 훔쳤다.
중흥동 성국이, 윤정이 엄마를 어머니 집으로 불렀다.
그 아들이 ‘네 어머니 같다’며 승용차로 모셨다.
세 분이 어머니 손을 잡고 눈물 바람 하셨다.
이웃하며 살 때 너무 잘 섬겨 주신 분이라고 흐느꼈다.
어머니가 힘을 받았다.
안정을 찾고 말씀도 잘하셨다.
아내가 부엌에서 점심 준비에 바빴다.
서로 나서서 거들었다.
장로님께서 주신 보름 찰밥을 나눠 먹었다.
홍어 무침이 양동 시장치 보다 맛있단다.
건강 되찾아 영산포 홍어 집 가서 제대로 한번 맛보잔다.
화기애애한 자리에 웃음꽃을 피웠다.
어머니도 덩달아 잡수시고 그 정신에 커피를 타셨다.
내 딸 식구 넷이 들어왔다.
기다린 아이들 보는 즐거움이 컸다.
난 중흥동 어르신 세 분을 모셔다드렸다.
익산 동생 내와가 들어왔다.
광주 여동생도 함께 시간을 보냈다.
떡과 다과로 준비한 것 나누며 의견을 모아 어머니를 설득시켰다.
여동생이 그 밤을 어머니 곁에서 돌보기로 남고 나섰다.
전화하고 싶어도 행여 잠을 깨울까 참았다.
급하면 동생이 전화하겠지?
밤잠을 설쳤다.
새벽 기도 마치고 찾아갔다.
심한 기침으로 가래를 뱉었지만 소고기 죽을 드실 정도였다.
집안 정리하며 병원 갈 짐을 챙겼다.
예약이 9시인데 어머니가 주무셨다.
나 역시 1분이라도 더 머무르고 싶었다.
원무과 연락받고 오전 중으로 미뤘다.
11시에 진료실로 들어가 의사 소견을 들었다.
폐 사진을 건강한 사람과 비교할 때 심하게 망가졌다.
기침할 때 옆구리 통증을 호소한 이유를 알았다.
한순간 운명할지 모를 정도였다.
입원실로 올라갔다.
지갑은 원무과에 맡겼다.
은행 카드, 신분증, 목걸이는 간호사에게 돌려받았다.
환복하고 누워 산소마스크를 썼다.
침상 곁에 머무르며 점심 시중을 들었다.
한 시간 지나자 간호사 눈치가 보여 나왔다.
다음 날 일찍 안부를 물었다.
‘사지 성하고 눈 멀쩡히 떴는데 기저귀에 소변봐 라니 나가겠다’ 하셨다.
동생 카톡이 울렸다.
‘오빠! 잠도 안 오고 늘 엄마랑 함께 못한 거 가슴이 아리네요.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것 같네요.
병상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계시면 바로 와상 환자 되는데..
참 마음이 씁쓸하기만 하네요.
면회 자주 가면 간호사들 눈치에 자유롭지 못할 것 같고요.
휠체어도 밀어줄 수 없는 상활일 것이고..’
바로 핸드폰을 눌렀다.
동병상련으로 말없이 흐느꼈다.
‘집에서 임종 지키더라도 어머니 마음 편하게 하자’ 서로 결의를 굳혔다.
의료용 침대와 산소 대여도 서둘렀다.
출근한 원무 실장에게 통보하고 퇴원 승낙을 받았다.
간호 과장 전화였다.
빈혈 수치가 6.3이라 수혈받지 않으면 그대로 돌아가신단다.
염증 수치도 패혈증 환자 수준인데요,
체온 정상 유지가 이상할 정도라고요.
한 걸음 물러서서 동생과 교대로 면회를 갔다.
‘살 만큼 살았는데 하루 더 살면 뭐 한다냐’는 말씀이 괴로웠다.
삼일절 선친 추도일! 병원에서 자녀들이 만났다.
허락을 득하고 엘베 앞에서 어머니와 함께 예배드렸다.
좀 늦은 여수 누님 식구들과 위로의 시간을 가졌다.
어머니의 식사를 돕고 일어섰다.
샤브 향으로 옮겨 동생의 대접을 받았다.
어머니 집에서 향후 맞이할 사안을 논의하고 일어섰다.
2024. 3. 2 서당골 생명샘 발행인 광주신광교회 이상래 목사 010 4793 01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