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3:1-5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1 룻의 시어머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내가 너를 위하여 안식할 곳을 구하여 너를 복되게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
2 네가 함께 하던 하녀들을 둔 보아스는 우리의 친족이 아니냐 보라 그가 오늘 밤에 타작 마당에서 보리를 까불리라
3 그런즉 너는 목욕하고 기름을 바르고 의복을 입고 타작 마당에 내려가서 그 사람이 먹고 마시기를 다 하기까지는 그에게 보이지 말고
4 그가 누울 때에 너는 그가 눕는 곳을 알았다가 들어가서 그의 발치 이불을 들고 거기 누우라 그가 네 할 일을 네게 알게 하리라 하니
5 룻이 시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다 행하리이다 하니라
본문은 룻기의 절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룻은 2장에서 보아스를 만나고 그 만남을 시모인 나오미에게 나눕니다. 그러자 시모인 나오미는 룻과 보아스를 결혼시키기로 작정하고 룻에게 조언합니다.
나오미가 룻을 보아스와 결혼시키기 위해 조언(1-4) 나오미는 룻을 볼 때마다 늘 빚진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 시모인 자신을 무턱대고 따라온 며느리 룻, 타국인으로 이방 땅에서 살아가는 며느리 룻에 대한 고마움과 안쓰러움이 나오미의 마음을 늘 무겁게 누룬 모양입니다. 어떻게든 젊은 룻에게 길을 열어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 짙게 배어나옵니다. 그러나 사실 나오미도 남편을 잃고 자식을 잃은 허망한 처지이고, 몸종처럼 자신의 뒷바라지를 해주는 룻이 없다면 나오미의 삶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을 텐데 나오미는 며느리 룻을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나오미는 보아스와 함께 새 출발을 할 수 있도록 조언합니다.
룻은 나오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를 결정(5) 룻은 나오미의 진정성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나오미가 그녀를 부르는 호칭을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나오미는 룻을 딸이라고 부릅니다(1:11, 12; 3:18). 히브리어에는 분명 며느리(창 38:11)라는 단어 칼라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오미는 룻을 딸이라는 뜻인 바트라고 부릅니다. 자신을 딸로 대하는 시모를 볼 때마다 룻은 결심했을 것입니다. ‘나를 그렇게 받아주는 저 어른을 내가 평생 모시리라’라고 말입니다. 사람은 자신을 받아주고 용납해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자신을 다 줄 수 있는 것입니다. 룻도 그런 시모의 조언이 고맙고 또 고마웠을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예수님이 한없이 우리를 받아주시는 그런 용납과 수용의 모습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적용: 오늘 만나는 사람(가족, 일터 동료)을 나오미가 룻을 용납해준 것처럼 받아주면 어떨까요?
화는 습관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화를 가장 편하고 쉽고 화를 내도 자신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곳에서 제일 화를 많이 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한 사람에게 가까운 사람에게 화내고 있지 않은지를 더 많이 돌아봐야 합니다. 혹시 그 사람들이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우리가 너무 편하고 쉽게 우리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지 않은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습관은 쉽고 편안하면 나옵니다. 나는 나를 사랑하고 나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가족을 너무 편하게만 대하고 있지는 않은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