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내 군대식 문화 다시 기승]
취업난·해외연수 등 이유로 학교 오래 다니는 학생 늘어
"취업 못한 고학번 선배가 존재감 나타내려 군기 잡기" 과거악습 전승하는 데 앞장
과가(科歌) 가사를 틀리자 바닥에 머리를 박는 '원산폭격' 얼차려를 주고, 목소리가 작고 허리를 구부정하게 앉았다고 "놀러 왔냐, XX 새끼들아"라는 폭언을 퍼부으며 '전원 엎드려뻗쳐'를 시키는 곳. 과거 군대의 모습이 아니다. 올해 열린 서울 S대 토목공학과 신입생 환영회(새터)와 개강총회 때 있었던 일이다. 이 같은 대학의 군기(軍紀) 잡기와 학번 서열을 빙자한 폭력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최근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다. 또 다른 S대 생활체육학과·S여대 체육학과·H대 기계정보공학과에서도 일부 선배가 신입생들에게 '군기 잡기' 매뉴얼 등을 가르치고, 얼차려를 주고 성희롱을 해 물의를 빚었다. 10~11일 본지가 접촉한 이 학과 학생들은 "이 같은 일이 매년 반복되고 있다"며 "개인의 잘못이 아니라 과 전체 분위기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과 학생회장으로부터 "과 특성상 위계질서·군대문화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얘기를 들었고, 일부 선배는 술을 마시기 전 자기소개를 작게 한 후배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과가를 외우는 시간엔 신입생들이 틀리자 2·3학년들에게 '원산폭격'을 시켰다.
최근 또 다른 S대·S여대 체대에서는 '다·나·까(로 끝나는) 말투 사용' '염색·파마·화장·반바지·매니큐어 금지' 등 신입생의 자율성을 무시하고 생활을 강제하는 규율로 군기를 잡았다. 2008년 용인대 동양무예학과 학생이 신입생 훈련을 이유로 선배들에게 구타를 당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하면서 좀 수그러들던 대학 내 군대식 문화가 요즘 다시 기승을 부리고 있다.
대학가에서는 취업난, 학점 세탁, 해외 연수 등으로 4년 만에 졸업하지 않고 학교를 오래 다니는 선배가 많아지면서 이런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대부분 학교에서 올해 입학한 14학번과 8~9살 차이가 나는 05학번, 06학번들이 학교를 함께 다니고 있다. 김수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취업을 못한 고학번 선배가 신입생이 모인 자리에서라도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군기를 잡았을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졸업을 유예한 고학번 학생들이 과거의 악습을 전승하는 데 앞장선다는 것이다.
특히 체대나 공대 등 남학생이 많은 학과에서 잘못된 군대식 문화를 끌어들이는 일이 잦다. 조광민 연세대 스포츠레저학과 교수는 "체대 학생들은 '자기들이 당했으니 후배들에게 갚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며 "후배의 군기를 잘 잡으면 선배를 잘 모신다고 보는 잘못된 문화도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병식 연세대 교육학과 교수는 "과에서 만난 선배들이 사회에 나가서도 같은 업계에 종사할 가능성이 높은 전공일수록 그릇된 관행이 지속된다"고 말했다.
놀라운 점은 일부 신입생과 교수가 "전공 특성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는 점이다. 올해 문제가 된 대학의 한 교수는 "규율을 잡는 문화는 안전과 예절이 중요한 학문이므로 어느 정도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새터에서 얼차려를 당한 한 신입생(19)은 "선배들이 사고 나지 말라고 강하게 한 것으로 이해했다"며 "원래 과 분위기가 그렇다고 알고 있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