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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에 인생 건 남자 박청화(2012년 인터뷰)
뭐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푸근한 동네 형님을 몇 십 년 만에 만났을 때의 느낌? 세상에 꽤나 이름을 날리고 있는 부산의 역술인 박청화(46)를 만나러 갈 때, 사실 좀 긴장이 됐다. 입구에 들어서니 병원 차트처럼 꽂혀 있는 수도 없는 고객 파일이 반긴다. 깡마른 사내가 생활한복을 입고,
속마음을 단칼에 꿰뚫을 듯 날카로운 눈빛을 쏘아대는 장면이 떠올랐다. 하지만 웬걸. 풍채 좋고, 거무스름하지만 넉넉한 얼굴에 넥타이를 한 '직장인'이 앉았다. 동양의학 철학 역사 인문학… 전문출판, 청화학술원㈜ 대표이사 박청화. 손에 올려진 명함에 그렇게 씌어 있다.
그 누가 '점집'을 키워 주식회사까지 만들 생각을 할까. 그는 그걸 실행에 옮겼다. 인터넷 미디어 '홍익TV'를 만들어 동양학 강좌도 하고, 책도 내고, 온갖 것을 다 한다.
열아홉 나이에 운명학을 접하고, 30년 가까이 역술가의 삶을 걸어온 사람. 수시로 휴대폰이 울려댄다. 하루에 전화 50통은 받는단다. "아 네 사장님~ 허허." 구수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 것이 신참 영업사원처럼 깍듯하다. 펜을 잡은 그의 손가락은 굽어 있었다. 오랜 세월 일일이 사주를 써 주다 보니 생긴 직업병이다. 요즘에는 옆에 앉아 타이핑하는 직원을 따로 두고 있다.
청화(靑花)는 그의 본명이 아니었다. 종덕(鍾德)이 부모님이 주신 이름이다. 군대를 다녀온 그가 다시 철학관을 열려고 고민하던 어느 날, 온통 파란 꽃이 가득한 정원이 꿈에 나타났다. 그리하여 내건 간판이 청화철학관이었다. 청화는 세월이 지나면서 필명이 돼 버렸다.
세상사의 멘토, 박청화 원장과 두 번 만났다. 한 번은 지난 5일 부산진구 양정동에 있는 그의 상담실이었고, 또 한 번은 지난 10일 저녁 광안리 횟집에서 만났다. 밤이 깊도록 소주잔을 기울이며 오랫동안 속 깊은 얘기를 나눴다. 이제 그와 마주앉아 진득한 문답을 시작한다.
고등학교 자퇴 후.......................... 丁 庚 辛 丙
검정고시 준비하러 상경 ............ 亥 寅 丑 午
학원 끝나면 동대문 헌책방서
닥치는 대로 역술서 읽어…
부산대 사학과 입학 후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쪽방에 전세 얻어
'총각도사' 철학관
가족 생계 꾸려가며 학업
10년 만에 졸업
#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다
-흑룡의 해, 임진년 새해가 다가왔으니 묻지 않을 수 없네요. 올해 운은 어떤가요?
역술에선 한 해의 기준이 설날이 아니라 입춘(2월 4일)입니다. 壬辰년에는 혼란과 압력, 변화가 많아요. 이합집산, 모든 것이 뒤섞여 새로 꾸미는 속성이 있어서 사람들의 운세도 변화가 많습니다.
강한 에너지를 가진 괴강(신살의 하나로 북두칠성을 뜻함)이란 별이 머무르기 때문에 그해에 태어난 아이들은 잘 풀리면 엄청 좋고, 안되면 고생을 많이 한다 정도로
요약되겠네요. 그래도 출세를 하려면 무기를 차고 오는 것이 낫겠지요.
-그렇다면 올해 총선거와 대통령 선거에서도 변화가 있겠네요.
당연하죠. 그런 징조가 벌써 나타나지 않습니까. 새해에는 대표성을 가지는 자리, 즉 대선은 독주를 할 겁니다. 편차가 크다는 얘기죠.
-도시 부산의 운은 왜 이런가요. 뭐가 문제지요.
옛날에 가야 백제 왜국이 1천 년에 이르는 남부 문화권을 형성했어요. 그걸 복원하면 부산은 융성할 겁니다. 그런데 정치적 의도로 인해 갈기갈기 찢어져 그걸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새 전략으로 문화권을 복원할 공감대를 형성해야지요.
-가벼운 질문 하나. 신문에 연재 중인 '오늘의 운세'를 어느 정도나 믿어야 할까요. 같은 띠라도 천차만별이잖아요.
평균 30에서 60%의 신뢰도라고 보면 됩니다. 딱 맞진 않아도 그날 운의 흐름이 그렇다는 걸 참고하면 되는 거죠.
-사람의 운명이 정해져 있는 겁니까.
운명이 정해진 영역과 정해지지 않은 영역이 개인마다 비율이 다릅니다. 가변성 때문에 운명학이 필요한 겁니다.
-역술인도 자신의 운세를 봅니까.
그날 운세는 어떠하다는 정도는 습관적으로 알죠. 한 해도 예측을 하고요. 자기 것도 모르 는데 어떻게 남의 걸 이야기하겠어요. 나를 통해서 검증할 때 확실히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렇다면 운명을 극복하려고 노력도 하나요.
흐름을 봐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예요. 큰 물결, 운명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어요. 예를 들자면, 90년인가 써 놓은 일기장을 다시 봤어요. 제 결혼운이 92년과 95년에 있는데,
92년에 결혼하면 94년생 딸을 낳고 97년이나 98년에 아들을 낳을 것이다 예측을 했어요. 그때는 꼭 피해야겠다고 써 놓았더라고요. 근데 92년에 결혼하고 94년에 진짜로 딸을 낳았잖아요. 피임약 회사에 소송을 할까 농담도 했어요.
-대체 사람의 운을 예측하는 원리가 뭐죠?
생년월일시는 기본이고 큰일을 할 사람인가 따지려면 어떤 산천의 영기를 지니고 태어났는지, 조상은 무엇을 했는지 참고합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골기(骨氣)가 다르기 때문이죠. 사주간지는 우주에 뿌려진 파장인데, 한날 한시에 태어나 같은 파장을 받아도 사람마다 운명은 다른 겁니다.
-정말 좋지 않은 운을 타고 났거나 딱한 사람을 우연히 발견하면 어떻게 하지요.
※타인의 업보에는 관여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업을 만들기 때문이에요. 현생이든 전생이든 이유가 있는 겁니다. 고객의 경우 정말 큰 손재수가 있다면 기부를 권하죠. 어차피 나갈 돈이면 사기 당하는 것보다 착한 일 하는 게 낫지요. 우주의 기운은 늘 들고 나는 것인데, 늘 삼키려고만 해요. 한꺼번에 내놓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겁니다.
#설단생금(舌端生金) -혓바닥 끝에서 재물이 나오다
어릴 때도 점치는 걸 좋아했어요. 손바닥에 침 뱉어 어디로 갈지 점쳐보기도 하고. 전 1966년 전남 벌교에서 태어났어요. 아버지 직장을 따라 돌이 되기 전에 부산에 왔어요. 3형제 중 제가 장남인데, 집안 형편이 썩 넉넉하진 않았어요. 그런데 당감동 집 인근에 화장터와 선암사가 있었어요.
그 나이에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살다 갈까 생각했어요.
인생에 큰 회의감과 의심을 가지게 된 배경이 됐어요.
고등학교 때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을 통틀어 열일곱 번을 읽었더라고요.
-어린 시절에 그런 생각을 가진다는 게 가당찮은 것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에요. 고등학교를 자퇴했어요. 학교가 의롭지 않은 모습들을 많이 보았어요. 잔잔한 것들이 자꾸 쌓이니까 참을 수가 없었어요. 1984년 고3 나이에 검정고시를 서울에서 준비했어요.
학원을 다니다가 한강둔치 벤치에서 두 시간씩 앉아 있는 게 일과였죠. 어느 날, 벤치에서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된 한의사 분이 사주팔자라는 걸 한번 공부해보라고 권하셨어요. 그길로 동대문 헌책방 골목에 가서 책을 사서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어요.
몇 년간 제 운이 좋지 않았는데, 뒤늦게 아버지께서 뇌암으로 투병 중이시란 걸 알았어요. 더더욱 운명학에 관심을 두게 됐지요.
-스무살 꽃다운 나이에 철학관을 열었다면서요.
부산대 사학과에 입학한 그해 여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두 동생과 어머니까지 제가 생계를 책임져야 했고, 학교도 다녀야했어요. 부산대 정문 근처 작은 상가 2층 쪽방에 전세를 냈어요. 간판은 '총각도사'였지요. 손님이 있으면 학교 수업을 못 갔으니, 친구들이 다 알게 됐어요.-
-세상에, 1년 정도 책만 보고 개업을 했단 말입니까.
당시에는 책에 나온 내용이 절대적이었어요. 당장 먹고살아야 하는데 어쩝니까. 어떻게든 잘해 보려고 대가들을 찾아 점을 보면서 공부했어요. 정성을 다했더니 제법 잘되었어요. 한 달에 200만 원 벌이는 한 것 같아요. 그걸로 동생들 학교도 보냈는데, 전 돈을 벌어야 하니까 휴학과 복학을 되풀이해서 10년 만에 대학을 졸업했어요.
-역술로 먹고살 거라는 사주가 나오던가요.
운명적 인자가 많은 거예요. 저는 설단생금, 혀끝에서 돈이 나오는 운명을 타고났어요. 그래서 언론인이 되려고 했어요. 근데 면접에서 자꾸 떨어지는 겁니다. 월급쟁이나 조직에 속하지 못하는 게 제 팔자인 거죠. 다시 역술업으로 돌아왔어요.
-그렇다면 역술업이 부끄러운 일인가요.
'병신 육갑한다'는 말이 있죠. 육갑이 60간지니 사주를 본다는 말이죠.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는 이중잣대를 가지고 역술업을 대합니다. 자기가 운세를 보면 신중한 것이고, 남이 보면 의지력이 나약하다고 말하죠. 그런 문화적 천대가 있는 게 현실이죠. 역사적으로 역술은 결코 부끄러운 게 아니에요.
어머니가 예순을 넘지 않아 생계를 책임지면서도 입대를 했어요. 삼척에서 복무를 했어요. 정신적으로는 정말 좋았죠. 동해안에서 초소 근무를 서면서 밤새 생각에 몰입할 수 있었거든요. 군대에서 어느 날 이게 아니다 싶어 책을 전부 불에 태워 파묻어버렸어요. 책이 현대 사회를 반영하기에는 무의미하니,
자연의 변화와 인간의 운명을 설명하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보자 감히 이렇게 생각한 거죠. 1987년 여름, 일순간에 옛사람들이 하신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게 되더라고요. 一以貫之, ‘하나의 원리로 전체를 알 수 있게 된 겁니다’ 학문적으로 나름 자유를 얻은 거지요.
-사람이 사랑을 빼놓고 살 수 없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집사람은 관상 훈련을 하다 만났어요. 1989년부터 해마다 여름방학이 되면 공부를 하러 산에 들어갔었어요.
예비군 훈련 때문에 잠시 부산에 왔다가 지하철에서 친구와 관상 분석에 한창이었죠. 한 여자가 양정역에서 탔는데, 저 사람은 이러저러해서 선생님을 할 관상이라고 했더니 친구가 아닌 것 같다는 거예요. 시비가 붙었죠. 결국 서면역에서 따라 내려서 물었더니 속셈학원
선생이라고 하는 겁니다. 저와 동갑이었어요. 그렇게 인연이 시작됐고, 스물일곱 살에 학생 신분으로 결혼했어요. 집사람이 보습학원을 하고 있어서, 거의 '마누라 장학금'으로 학교를 다녔지요.
# 이로공명(異路功名) -엉뚱한 길에서 뜻을 이루다
-역술인이라는 직업이 결혼에 걸림돌은 아니었습니까.
집사람도 처갓집에서도 역술에 관심이 많나 보다 정도였지, 어릴 때부터 재능을 가지고 경력을 쌓아 왔다는 걸 몰랐어요. 티를 안 내려고 과외도 하고, 집사람이 하는 학원에서 강의도 했어요.
94년에는 딸이 태어났어요. 동생들도 돕고 다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상황이 온 겁니다. 돈은 없었지만 둘이 함께 유모차 끌면서 웃고 다녔어요. 사는 이치라는 게 마음 쓴다고 되는 게 아니란 걸 안 거죠.
-어떻게 난관을 돌파했나요.
그때 제가 말했죠. 내가 옛날부터 배운 도둑질이 있다. 장모님께 돈 1천만 원만 빌려 와라. 그렇게 금정구 남산동에 다시 철학관을 열었어요. 설마 하던 집사람도 저의 실체를 알게 된 거예요.
-다시 필드로 나오니 후련하시던가요.
1995년에 첫 지방선거가 있었는데 제가 좀 차별화가 됐어요. 다들 떨어진다는데 제가 붙는다고 한 분이 당선되니까 입소문이 금방 퍼진 겁니다. 문 앞에 줄을 서더라고요.
-돈 많이 버셨겠네요. 다들 평생 먹고살 돈을 모아놓았을 거라고들 하던데요.
많이 벌었지요. 1985년부터 한 47억 원 정도가 호주머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근데 모아놓은 건 몇 억 원이 안 되는 거예요. 생활하고, 직원 11명 인건비 등 유지비만 해도 엄청나지요. '다 함께 잘살자'고 외치다 보니 작은 병원 수준이라 보면 되지요. 이로공명이랄까, 제도권에서 바라는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에서 뭔가 이뤄낸 것에 불과합니다.
-굳이 법인을 만드신 건 왜일까요.
27년간 대강 고객이 9만 명 정도는 되는 것 같아요. 고객 40%가 서울 사람들이고, 부산 밖 사람들로 치면 60%가 외지인이에요. 일본이나 미국에서도 오거든요.
제가 손님이 많다고 소문이 나면서 세무조사를 좀 받기도 했지만, 사업도 제대로 하기 위해 청화학술원이라는 법인을 만들었어요. 이제는 신용카드를 쓰시는 분이 절반이 넘어요.
-세간에선 청화학술원이 지나치게 상업화한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있어요.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런 구조를 만들지 않아요. 동양학 서비스에 집중하는 이유는 제도권 교육이 산업을 키우려고 지식노동자를 기르는 데 신경 쓰고,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의미가 무엇이고, 인간은 왜 인격적으로 살아야 하나 고민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 준비를 반드시 누군가가 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겉으로 보기에 세상사에 찌든 직장인과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만.
인간적이시기도 하고요.
제가 겉보기와는 좀 다르죠. 저녁에 첫 식사를 하고 있어요. 2000년부터 밥을 하루에 한 끼만 합니다. 해마다 단식을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스물네 번을 했군요. 경지에 오르면 사실은 음식이 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실제로 기업체 신입사원 면접에서 관상도 보고 그러시나요.
영업비밀이긴 한데, 그렇게 합니다. 임원인 것처럼 들어가는 거죠. 복이 많은 인재를 고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경영인이 꽤 계시는 편이죠. 아예 사원 전체의 사주를 봐 주기도 합니다.
면접에 참여한 한 IT 회사는 10년 전 매출 10억 원이 지난해에 600억 원 수준으로 성장했어요. 복 많은 사람들이 모이면 복된 조직이 되는 겁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 -재물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까.
전혀요. 학문으로서 명리학이 최고봉이에요.
제갈공명을 누가 천한 사람이라 합니까.
피터 드러커나 앨빈 토플러만 미래학자가 아닙니다.
제 목표는 사주명리학의 자리매김과 세계화입니다.
-지금 한류처럼, 그 꿈이 진짜 이뤄지면 좋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겨울이 길면 석 달 열흘이요. 짧으면 100일이죠.
고통도 기쁨도 결국 일정한 시간을 채우고 오고 가는 겁니다.
부지런히 선행과 독서, 수양을 해야 합니다.
학술원 화장실에 무재칠시, 재물이 없더라도 일곱 가지나 베풀 수 있다
는 문구를 붙여 놓았어요. 겨울이 짧길 바라고 봄이 길기를 바라지만 부질없는 허욕이에요.
부귀도 영화도, 영원한 건 없는 겁니다.
무재칠시(無財七施)-재물이 없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안시(眼施): 따뜻한 눈빛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 -화안시(和顔施): 부드러운 얼굴로 사람을 대하는 것 -언시(言施): 남에게 좋은 말을 해주는 것 -신시(身施): 힘든 일을 내 몸으로 때우는 것 -심시(心施): 마음의 온정을 주는 것 -좌시(座施): 먼저 잡은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 -찰시(察施): 남의 마음을 헤아려 그가 원하는 바를 도와주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