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살행과 깨달음
일반적으로 보살행은 대중이 원하는 것이고, 깨달음은 부처님께서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살(菩薩)의 원래 뜻은 깨달음을 구하는 자다. 그래서 보살이 깨달음을 원하지 않으면 보살이 아니다. 보살을 보디삿따(Bodhisatta)라고 한다. 이는 깨달음을 향한 존재, 깨닫기로 정해진 존재, 깨달음을 구하는 자, 부처가 되기를, 서원을 세우고 공덕을 쌓는 자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도 오랜 세월을 보살로 지내시다가 깨달음을 얻은 이후 붓다가 되셨다. 그래서 부처 이전은 보살이라고 부르고, 깨달음을 얻은 뒤에는 붓다로 부른다. 이런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뒤에 45년 동안 설법을 하실 때 보살행을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오직 일관되게 사념처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으라고 하셨다.
유언도 “모든 것은 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서 완성하라”고 하셨다. 이때의 완성이 열반이다. 하지만 대중은 깨달음이 무엇인지 가치를 몰라 간절히 원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얼마간 관심이 있다면 막연한 호기심에 불과하다. 대중은 우선 자기에게 편한 공덕을 쌓는 일을 더 가깝게 느낀다. 어떤 의미에서 깨달음을 얻는 무상, 고, 무아는 두려움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가로막는 것은 나라고 하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며, 유신견을 가진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 깨달음은 무아를 안 것이고 깨닫지 못한 사람은 계속해서 자아를 가지고 산다. 무아는 지혜고 자아는 어리석음이다. 이때 어리석음의 두꺼운 벽을 뚫고 나오려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어야 한다. 괴로움이 있으면 막연한 호기심에서 적극적인 관심으로 바뀌어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이때 선업의 공덕이 있는 사람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 하지만 이런 선업의 공덕이 없는 사람은 괴로움을 해결하는 대체 수단으로 다른 감각적 욕망을 추구한다. 이때의 욕망이 타는 목마름으로 갈애다. 하지만 갈애로 만족하지 못해서 더 깊은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집착을 한다. 이때 무아와 자아 중에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보이지 않는 공덕의 힘이 결정한다.
그간 쌓은 공덕이 있으면 무아로 가고 공덕이 없으면 자아를 선택한다. 이때 공덕의 힘이 내가 가지고 사는 과보심으로 만들어진 잠재의식이다. 그러나 대중이 원하는 공덕 행은 바람이 있는 공덕 행이라서 깨달음을 얻는데 직접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공덕 행이 나쁜 것은 아니다.
인간은 처음부터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할 수 없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머묾이 없는 보시는 이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나마도 이렇게 바람이 있는 공덕을 쌓아야 공덕을 쌓은 일을 시작할 수 있어서 이것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바람이 있는 공덕 행을 하다 보면 공덕의 이익을 알아 언젠가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공덕은 완전한 공덕이 아니지만 반쪽이라도 차지하고 있어서 그런대로 가치가 있다. 무슨 일이나 바람이 있을 때는 그 바람을 구현하기 위해 윤회해야 한다. 그러나 아무런 바람이 없을 때는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 윤회가 끝난다. 이때 보살은 바람이 있는 공덕 행을 하고, 부처님께서는 바람이 없는 공덕 행을 한다.
이런 차이가 보살과 부처님의 차이고 대중과 깨달음을 얻은 자의 차이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바람이 있는 공덕 행은 공덕을 시작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아는 인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공덕을 쌓지 않는 행보다 바람이 있더라도 공덕을 쌓은 일을 하면 깨달음으로 가까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욕망을 가지고 태어나서 처음부터 바라지 않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보살행과 깨달음은 양립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