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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말씀 말씀/ 시편 15: 1-5 참 그리스도인이란? (주의 장막에 유할 자)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오늘은 어떤 그리스도인이 참 그리스도인인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그리고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어떤 점에 유위 해야 할까 생각하며 배우는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본문 시편 15편을 읽어보면 예루살렘 성전 앞에 출입을 통제하는 문이 있어 성전에서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은 통상 제사장들인 성전 문지기의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즉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과 들어갈 수 없는 사람(신명기 23)을 가리는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당연 자격이 되는 사람은 들어가 가고,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성전 문지기에 의해 제재를 받았습니다. 그러다보니 나름대로 성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왔다가 들어가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싫어하시는 예배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자를 찾으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시편 말씀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자인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참 예배자가 어떤 사람인가 알게 되면 오늘날 참 그리스도인이 어떤 사람인가 알 수 있습니다. 첫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입니다. 1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나온 사람이 이렇게 스스로 하나님께 질문합니다. “과연 제가 성전에 들어가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이 말씀은 예배하러 나오는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물었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자격있는 사람인가? 과연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실까?”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참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늘 문제의식을 갖었다는 뜻입니다. 평상시 하나님 앞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 늘 생각하고 고민하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은 철학자들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을 해야 질문을 하게 되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바른 길을 선택하며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바라볼 때 우려가 되는 점은 사람들이 생각하며 살려고 하기 보다는 느끼는 대로 감각적으로 살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성적인 판단을 하면서 살기보다는 감정에 충실하게 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가 대세입니다. 많은 청소년들의 꿈이 유명 유튜버가 되는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세계를 보면 얼마나 자극적이고 충동적입니까? 생각없이 받아들이도록 유도하고 있는 거짓 찌라시 뉴스가 천지입니다. 몇일 전 기독교 단톡방에 이런 글이 올랐습니다. "박근혜 사망"이라는 CNN 기사를 유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최순실 사건과 관련. 우려되는 댜한민국”이라는 제목 이메일 북한에서 어제 제작한 악성코드가 담긴 메일, 열어본 순간 휴대폰이 북한에 해커에 접수 돕니다. 주변 분들에게 홍보 부탁, <경기 남부 경찰청 사이버안전 계장 경정 이영필> 빨리 기도하고 전달해서 기독교인들이 피해를 안 입도록 해야겠지요? 목사님 사모님 장로님 집사님들 알려야겠지요? 여기서 올바른 사고의 그리스도인이라면 먼저 충동이 아닌 생각이 작동되어야 합니다. 근거가 어디이며 사실일까 거짓일까? 그리고 관심 있으면 출처를 알아보겠지요? 알아보니 남부경찰청에 그런 사람없고 그런 글을 올린 사람도 없습니다. 이 글은 2020년에도 뜬 글입니다. 북한험오를 주장하는 사람이 만든 거짓 뉴스입니다. 그런데 생각없는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소식을 퍼나르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가서 어떤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을까요? 그리고 거짓된 세상에 어떻게 선도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인간을 학명으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바로 생각할 줄 안다는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러니 만일 우리가 생각 없이 산다면 인간다운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파스칼은 [팡세]에서 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나는 발도 없고 팔도 없고 머리도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있지만 생각하지 않은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리고 “나는 오직 신음하면서 추구하는 자만을 인정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나아가 고뇌하며 사는 인간이야말로 인간다운 인간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믿기만 하라는 말만 있지 않습니다. 무려 300여 곳에서 “생각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한 곳을 찾는다면 시 94:8입니다. “백성 중의 어리석은 자들아 너희는 생각하라 무지한 자들아 너희가 언제나 지혜로울까?”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생각 없이 시류에 떠밀려 살아서는 안 됩니다. 느낌대로 감정에 따라 살아서도 더욱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속에 사탄이 놓은 덧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근거해서 깊이 생각하면서 살는 훈령을 해야 합니다. “과연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라고 묻고 또 답을 찾아야 합니다. 다윗이 그랬잖습니까? 올라가리이까? 우리가 싸우면 하나님이 우리 손에 적을 붙여주시겠습니까? 물으니까 하나님은 대답해주시고 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 때마다 백전 백승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달랐습니까? 급하다고 당장에 제사장 사무엘이 안 보인다고 왕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어리석은 행동을 했습니다. 아말렉을 철저히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짐승 중에 좋은 것을 남겨두었습니다. 사무엘이 이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하나님께 드리려고 좋은 것을 남겨두었다고 대답했습니다. 사무엘이 얼마나 열불이 났겠습니까?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왜 이런 불순종이? 무엇이 옳고 그른지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민규 교수 생각의 각도 1%만 바꾸어도 달라진다고 합니다. 생각의 훈련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매일 아침 말씀 앞에 큐튜티를 하고, 독서 모임을 가지면서 책을 읽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생각을 녹슬지 않게 훈련시키는 것입니다. 생각이 바르게 되어야 삶이 바르게 교정되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깊어야 삶도 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 묵상하고 인문 고적 최고의 사유를 공유하다 보면 생각이 업그레이드 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행전에 베뢰아 성도들의 특징이 무엇이었습니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다고 하였습니다. 깊이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결과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들도 많이 믿었다고 하였습니다(행 17:11) 슈트트가르트 홍여호수아 선교사님이 아침 사사기 드보라 말씀 큐티를 하시다가 답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것처럼 후계자를 지정해 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호수아 이후에도 인도 하지 않으셨을까? 하는 의문을 갖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드보라 말씀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믿음 안에 성숙하여져서 스스로 지도자를 세우고 그와 함께 하나님을 더욱 영화롭게 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생각을 해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서로 높아지려고 하는 이 때에 사람을 키워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타나길 기도하고 자신이 먼저 그런 자가 되기를 간구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훌륭한 묵상이라고 칭찬해주었습니다. 이렇게 말씀 앞에서 생각하며 배우고 성장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로마의 유숙영 선교사님도 주일 말씀을 듣고 답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좀 주저하고 있었는데 말씀을 듣고 마레나 전화하고 서로 소식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서로 열린 마음으로 대화하게 되어 기쁘다고 감사하다고, 말씀으로 용기를 주셔서 실천할 수 있었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며서 실천하는 것이 참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깊이 생각하면 깊이 있는 삶을 살게 되지만 생각을 안 하면 되는 대로 살게 됩니다. 사사 시대의 문제가 소견대로 자기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멋대로 생각 이런 생각을 무엇으로 콘트롤 할 수 있습니까? 말씀으로 자신이 생각을 붙들어 통치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물론 쉽지 않습니다. 생각하기 싫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나은 생각으로 생각을 바꿔서 높은 사유의 시선을 만들지 않면 우리 삶도 바꿀 수 없고 세상을 달라지게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생각만이 다는 아닙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 뜻을 세우는 그리스도인.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성전에 들어와 예배할 수 있는 사람의 자격을 포괄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정직하게 행하고, 둘째 공의를 일삼고, 셋째는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것.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 세 가지 동사가 시제상 모두 분사형이라는 것입니다. 세가지 모두 일시적 행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행동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지속적인 행동을 할 수 있을까요? 은 마음에 뜻을 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좋은 생각을 해도 뜻을 정하지 않으면 실행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다음에 뜻을 정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대표적으로 다니엘을 들 수 있습니다. 다니엘 1:8을 보면 “뜻을 정하여”라고 했습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포로로 끌려갔지만 어떤 경우에도 믿음을 잃지 않겠다고 뜻을 정했습니다. 그가 포로 생활하면서 믿음을 지키기 가장 어려웠던 점이 식생활 이었습니다. 우상 신전에 바쳐졌던 음식을 먹어야 했습니다. 다니엘이 볼 때 이것은 곧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신앙 양심을 지키기 위해서 왕이 내린 음식을 거부하기로 뜻을 정했습니다. 포로가 왕명을 거역한다는 것은 죽기를 각오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부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들을 관리하는 환관장에에 은혜를 구하였습니다. 환관장 역시 책임이 있는 자라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 없었지만 다니엘의 간곡한 부탁을 들어주였습니다. 그것은 10일의 채소만 먹도록 허락하고 결과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과 비교해서 결정해달라는 것입니다. 10일간의 테스트를 해보고 나서 결정을 따르겟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열흘을 시험해 본 결과 다니엘과 친구들의 얼굴이 아름답고 살이 더욱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 좋아보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다니엘가 친구들은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깨끗한 채식을 하며 신앙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뜻을 정한다는 것은 꼭 결단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작심 삼일이라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어떤 뜻을 정하려면 공과 정성을 들여야 합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글자 그대로 이룰 성(成)과 공들일 공(功) 즉 공을 들여 이룬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이라면 앞 뒤 안 가리고 행동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지혜가 필요하고, 또한 공들이는 노력과 수고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믿음이 덕이 되고, 사람들에게 감화감동의 영향력을 끼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니엘은 신앙을 지켰을뿐 아니라 지켜본 환관장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고, 또 나중에는 왕을 감동시키기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의 삶에서 좋은 생각을 하였다면 뜻을 정하고 공을 들여야 수준 높은 신앙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면 뜻을 정한 다음 다음 단계가 무엇입니까?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실행이 답이다! 셋째는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인. 오늘 본문 3-5절을 살펴보면 성전에 들어갈 구체적인 자격에 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의 2절이 포괄적인 자격을 말하고 있다면 이 부분에서는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자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3절을 보면 이웃과의 관계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간단히 말하면 이웃을 비난이나 조소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이웃의 불행을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 4절을 보면 두 집단에 대한 태도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여호와를 경멸하는 자들과 단절하며 반대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과 깊은 교제를 가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5절은 금전관계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고리대금을 하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실천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자가 성전에 들어갈 자격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를 보면 위에 세가지 기준대로 성정에 들어가 자격 있는 자가 어마나 될까요? 머리로 알고 깨닫고 실천적인 신앙이 얼마나 될까요? 그 주간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삶 속에 적용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된다고 생각합니까? 일주일 한번 씩 왔다갔다 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많습니다. 예배 따로 삶 따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아마 많을 것입니다. 글쎄요. 참 그리스도인들은 주일 성수 십일로 신앙으로도 평가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의 예배 상항을 지켜본 어느 영국 청년이 두 번 놀랬다하지 않습니까? 성전 안에서 뜨거운 열기에 놀랬고, 또 한번은 그 많던 기독교인들에 밖에 나와 보이 하나도 안 보여서 놀랬다. 실천이 없는 기독교인의 모습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독서를 하고 말씀을 큐티하면서 삶을 강조하는 것은 바로 실천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는 것은 아니 아는 거이 아니고 삶 속에 실천이 되어야 비로서 아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아무리 많이 알고 배었어도 솔선수범 배려하고 베풀고 섬기고 받아주는 사랑이 없다면 관념적 지식에 불과한 것입니다. 간디도 영국에 유학생활중에 하나님을 알고 싶어서 교회를 찾아갔다가 다 거부를 당하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그런데 그는 실제 삶 속에서 아주 모범적인 실천을 행한 사람입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아들을 데리고 간디를 찾아왔습니다. “선생님,제 아이가 사탕을 너무 많이 먹어 이빨이 다 썩었어요. 사탕을 먹지 말라고 아무리 타일러도 말을 안 듣습니다. 제 아들은 선생님 말씀이라면 무엇이든지 잘 들어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런데 뜻밖에도 간디는 “한달 후에 데리고 오십시오. 그때 말해주지요”라고 말했습니다. 아이 어머니는 놀랍고도 이상했으나 한달을 기다렸다가 다시 간디에게 갔습니다.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또 한 달이나 기다려야 하나요?” “글쎄 한 달만 더 있다가 오십시오” 아이 어머니는 정말 이해할 수 없었으나 참고 있다가 한 달 후에 또 갔다. “애야, 지금부터는 사탕을 먹지 말아라” “예! 절대로 사탕을 안 먹을래요” 소년의 어머니가 간디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말씀 한 마디 하시는데 왜 두 달씩이나 걸려야 했나요?”“실은 나도 사탕을 너무 좋아해서 사탕을 먹고 있었어요. 그런 내가 어떻게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할 수가 있나요. 내가 사탕을 끊는데 두 달이 걸렸답니다” 간디가 존경을 받았던 것은 많은 지식보다도 이처럼 실천하는 삶의 모법 때문 이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만큼 실천할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다면 그것은 지식이나 교리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입니다. 사실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성경을 보면 위대한 신앙인들은 한결같이 실천의 사람들입니다. 구약을 보면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준행했다고 하였습니다. 12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방주를 지으며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나이 75살에 고향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모세도 순종해서 바로 앞에 섰습니다. 신약을 보면 베드로와 제자들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즉시 그물과 배와 부친을 버리고 따랐습니다. 이렇게 참 그리스도인의 삶을 산 사람들을 보면 모두가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참그리스도인이 되는 길? 이민규교수의 책이 생각납니다. 실천이 답이다. 결론적으로 하나님은 오늘날도 참 예배자, 참 그리스도인을 찾으십니다. 참 그리스도인의 기준은 오늘 말씀을 비추어보년 첫째 생각하는 그리스도인, 둘째, 뜻을 정하는 그리스도인, 셋째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저와 여러분들 모두가 하나님 앞에 생각부터 바르게 하고, 뜻을 정하고, 실천하기까지 세상을 선도하는 모범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첫댓글 안녕하세요. 저 김해영 목사님 책을 구하고 있는데요. 방법이 있을까요? 검색해도 안나오는 책들이 있어서요. ㅠㅠ
핸펀으로 연락 주세요 010 2684-9068 김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