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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 <2>만남지금까지 28년을 살아오는 동안 강한은 딱 두 여자를 겪었다. 스치고 지나간 여자는 많다, 저쪽에서는 대단한 비중을 두고 있었더라도 이쪽이 아닌 경우 또한 제외했다, 그 두 여자는 이제 이름도 거론하고 싶지 않지만 모두 강한을 버렸다. 하나는 대학 1학년 때부터 2년을 사귄 과 동기였는데 입대하고 나서 다른 수많은 커플처럼 끝났다. 아예 말이나 말지 제 입으로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고 수백 번 먼저 약속을 해대면서 눈물을 짜내더니 석 달이 못갔다. 입대 석 달만에 연락이 끊긴 것이다, 두 번째 경우는 복학하고 만난 여자. 졸업반이었던 그 여자는 1년 반 동안 머물다가 신한그룹 뉴욕 지사원의 아내가 되어서 한국에서도 떠났다. 첫 번째 여자는 강한이 옆에 없었기 때문에 떠난 경우가 되어서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지만 두 번째는 힘들었다. 여자가 여러 가지를 비교하는 바람에 강한도 초라한 제 몰골을 되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이제 좀 낫네요." 스웨터 단추를 두 개나 풀었던 이장미가 단추를 채우면서 말했다, KTX는 또 터널 속을 달리는 중이었다. 그때 수레를 밀고 이동매점 종업원이 다가왔다. "저기, 그거 두 병 주세요." 이장미가 음료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음료수 병을 받아든 이장미가 가방에서 돈을 꺼내 지불하더니 곧 강한에게 한 병을 내밀었다, "드세요." "고맙습니다." "집이 어디세요?" 병 뚜껑을 비틀어 열면서 이장미가 물었다, 다시 시선이 똑바로 향해져 있어서 강한은 외면하지 못했다. 이제는 이장미의 눈빛이 전혀 차갑게 느껴지지 않는다. 깊고 잔잔하다. "사당동입니다." "어머, 저하고 가깝네요, 전 방배동인데." "그런가요?" 병 뚜껑을 연 강한이 두어 모금 음료수를 삼켰다, 이장미가 맛있다는 듯이 음료수를 다 마셨으므로 강한도 마저 마셨다. "저기, 여자친구 있으세요?" 하고 다시 이장미가 물었으므로 강한은 심호흡을 했다. 꿈을 꿀 때는 언제나 멋진 대사를 늘어놓지만 현실은 다르다. 그러나 이때 그런 것을 따질 정신이 있겠는가? 있다면 노련한 탤런트 정도나 될 것이다. "아직 없습니다." "저도 남친 없어요." 이장미의 목소리가 은근하게 들렸다. 마치 먼 곳에서 울리는 음악소리 같다. "물론 전에는 있었죠." KTX의 좌석은 등받이의 안정감이 좋다. 특히 강한에게는 머리를 받치는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이장미의 말이 이어졌다. "바쁘다 보니까 어느새 주위에서 사라져 있는 것을 뒤늦게 알아 차리기도 하고." 강한은 의자에 머리를 붙였다, 그러자 온몸이 나른해지면서 저절로 눈이 감겼다. 그때 이장미가 소근대듯 말했다. "어떤 경우에는 약속을 잊기도 하니까요. 그러니까 남자가 참아 주겠어요?" 강한은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다. 약속을 까먹는 여자. 자존심이 상한 남자가 펄펄 뛰어야 정상이다. "때로는 남자 친구하고 여행이나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죠. 아주 멀고 한적한 곳으로…." 강한은 자신이 이장미하고 멀리 떠나는 장면을 떠올렸다. 눈 앞에 넓고 푸른 초원이 펼쳐져 있다. 사진에서 본 몽골초원 같다. 초원에 선 이장미가 웃음띤 얼굴로 강한을 보았다. 이장미는 더 짧은 치마에 민소매 셔츠를 입었다. 예상했던 대로 S자 몸매였다. 섹시하다. "이리와요." 이장미가 손짓으로 불렀다, "안아줘요. 어서." 그때 남자의 목소리가 하늘에서 울렸다. "어서 일어나시라니까." 강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손님,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어깨가 거칠게 흔들렸다. 눈을 뜬 강한은 앞에 선 역무원을 보았다. 이곳은 몽골 초원이 아니었다.
강한 여자] <3> 만남 "뭐라구?" 와락 이맛살을 찌푸린 고동표가 강한을 노려보았다. 눈이 가늘어졌고 엷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어서 섬뜩한 분위기가 풍겨졌다. 고동표의 별명은 살모사다. 남대문 일대의 사채업자 중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이 있지만 지금도 10년이 넘은 국산 똥차를 타고 25평짜리 연립주택에 사는 지독한 구두쇠 살모사다. "너, 정말이야?" 하고 고동표가 확인하듯 잇사이로 물었을 때에야 뒤쪽에서 작은 소음들이 났다. 강한의 보고에 놀라 모두 숨을 죽이고 있었던 것이다. "예, 사실입니다." 시선을 내린 강한도 잇사이로 말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그러니까" 고동표가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KTX에서 자는 사이에 돈가방을 날치기 당했단 말이지?" "예, 사장님" "네. 옆에는 누가 앉았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그럼 그 여자가 가져간 건가?" 그러자 머리를 한쪽으로 기울인 강한이 시선을 내렸다. 이장미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고 저절로 어금니가 물려졌다. 음료수 병에는 성분은 모르지만 강력한 수면제가 섞여 있었던 것이다. 그년은 이동매점 직원한테서 음료수 두 병을 사고는 한 병은 바꿔치기 해서 건네 주었다. 물론 그년이 준 명함은 가짜였다. 서울역에서 전화로 확인했더니 삼승전자에 이장미란 여직원은 존재하지 않았다. "좋아." 어금니를 질근질근 씹던 고동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책임을 져야겠다. 그럼 그 돈을 네 월급에서 깐다." "예, 각오하고 있습니다." "750만원이니까 한 달에 100만원씩 일곱 달하고 마지막 달은 50만원이다." "예, 사장님." "이 자식아, 직원이니까 봐주는 거야." 눈을 치켜뜬 고동표가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병신같은 놈. 돈을 옆에다 두고 자? 잠이 온단 말이냐? 현금을 옆에 놓고?" "죄송합니다. 사장님." "보기 싫다. 내 앞에서 꺼져." 강한은 허리를 꺾어 절을 하고는 몸을 돌렸다. 회전자금이 300억대가 되는 사무실이었지만 사무실 안의 직원은 대여섯명 뿐이었다. 모두 수금을 나간 것이다. 말이 영업사원이지 수금원인 것이다. 사무실 밖 복도로 나온 강한이 비상계단 옆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고 있을 때 김양희가 다가와 동전을 넣었다. "알바 하실래요?" 자판기를 향한 채 김양희가 물었으므로 강한이 옆모습을 보았다. "무슨 알바인데?" 강한이 고동표의 대성금융에 입사한 것은 1년쯤 되었으니 영업사원 중에서 고참 축에 들었다. 대성금융은 약 20명 정도의 영업사원이 있었는데 그중 팀장급이 5명이었고 강한은 팀장 급에 드는 것이다. 특히 강한은 대졸사원인데다 영어가 유창해서 외국인 고객 전문이었다. 커피를 뽑은 김양희가 강한을 똑바로 보았다. 살결이 우유처럼 희고 매끄럽다. 눈이 맑은데다 항상 물기가 배어 있어서 가냘픈 인상이었는데 팀장 중의 한 명인 백기철이 은밀하게 말해준 바에 의하면 김양희는 고동표의 첩이라는 것이다. 속된 말로 세컨드가 아니고 첩이다. 그것은 아예 단골로 데리고 노는 사이라는 뜻이었다. "저기, 유경금융에서 돈 떼어먹고 도망간 부동산업자 한 명이 우리 손님하고 친해요." 김양희가 눈 주위를 붉히면서 말을 이었다. "그건 유경금융 미스 최하고 저만 알고있는 비밀이죠. 같이 서류 정리를 하니깐요." 강한이 머리를 끄덕였다. 김양희가 옆쪽 사무실 유경금융의 미스 최와 친구지간이라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도망간 놈을 찾아내고 보상금을 받을 수가 있다. 강한 여자] <4> 만남 (4)요즘은 공중전화를 잘 안 쓴다. 그래서 항상 공중전화 부스가 비어 있다. 역삼 지하철역의 공중전화 부스에는 인조지만 꽃화분까지 놓여 있어서 장미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오후 5시 반. 아직 퇴근시간 전이라 지하도 안은 한산했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곧 신호가 간다. 한 번, 두 번, 세 번. 딸깍. "여보세요." 동생 장선의 목소리. 그러나 장미는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심호흡을 세 번 하고나서 다시 전화기를 든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신호가 또 간다. 한 번. 딸깍. "언니." 대뜸 장선이 장미를 불렀다. 둘 사이의 약속이다. 장선 주위에 경찰이나 수상한 사람이 있을 경우에는 이쪽 전화를 받지 않기로 한 것이다. 물론 처음 전화가 갔을 때 받자마자 끊은 것은 장미라는 표시다. "어디니?" 장미가 묻자 장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응? 여기 동네 슈퍼. 라면 사러 나왔어." "엄마는?" "집에." 그러자 장미가 전화기를 고쳐 쥐었다. "엄마 오늘 시장 안갔어?" "경비하고 싸웠대." "왜?" "자리 때문에." 어깨를 늘어뜨린 장미가 숨을 들이켰다가 뱉으면서 말했다. "선아." "응?" "나, 누가 찾아오지 않았어?" "뻔하지 뭐." "뭐가 뻔해?" "경찰이 오늘도 다녀갔어." "……." "내가 엄마 모르게 나가서 이야기했더니 집에 들어오지는 않았어. 엄마는 모를거야." "……." "좀 이상한 남자 둘이 어제 집 앞에서 차 받쳐놓고 저녁 때까지 있다가 갔어. 경찰은 아닌 것 같았는데…." "선아." "응?" "저기, 네 학교 앞에 오뎅집 있지? 너하고 같이 먹었던 그 맘씨 좋은 경상도 아줌마집." "아, 우정집. 근데 왜?" "내가 내일 오전에 그 아줌마한테 봉투를 맡길 테니까 찾아가." "뭔데?" "현금 500만원." 놀란 장선이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장미가 또박또박 말했다. "순대 싸갖고 가는 것처럼 갖고 가면 돼. 그 아줌마한테는 너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할 테니까. 돈인줄 모를거야." "……." "그 돈으로 엄마 한약 지어드리고 네 용돈 하고 생활비 써. 그래, 네가 알바해서 번 돈이라고 하면 되겠다." "언니." "돈은 잘 숨겨두고. 네 친구들한테 나눠서 맡기든지. 넌 머리가 좋으니까 잘 할거야." "언니, 그 돈은…." "나쁜 돈 아냐." 자르듯 말한 장미가 낮게 웃었다. "진짜야. 그러니까 걱정 안해도 돼. 이 돈은 깨끗해. 그럼 끊는다." 그리고는 장선이 더 이상 잔소리를 하지 않게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전화 부스를 나온 장미가 서너 걸음을 걷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는 핸드백을 뒤져 명함 한장을 꺼냈다. '대성금융 영업부 제3팀장 강한.' 명함에는 그렇게 박혀져 있다. '흥, 영업팀장?' 혼잣소리로 말한 장미가 쓴웃음을 짓더니 다시 발을 떼었다. 강한의 가방에는 수금표와 이자 계산한 낙서장도 들어있었던 것이다. 사채업자의 장부들이었다 강한 여자] <5> 만남 (5)"아버지, 주무세요?" 강한이 묻자 강기섭은 눈을 떴다. 눈만 감고 있었던 모양으로 눈동자의 초점이 금방 잡혔다. 그러나 휑한 느낌이 들만큼 공허한 표정. 누렇게 변한 피부에 광대뼈가 돌출될 정도로 마른 얼굴이다. "응, 왔니?" 아버지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말이 갈라지고 부러질 것같은 느낌. 그러나 입술 끝이 비틀리며 웃는다. "오늘은 일찍 왔구나." "통닭 사왔어요. 소주도." "응 그래?" 했지만 아버지는 누운 채 일어나지 않는다. 아버지는 병은 없다. 기력이 소진되었을 뿐이다. 먼 친척뻘 되는 의사 아저씨가 찾아와 진찰을 하고나서 붙여준 병명은 '의욕 상실증'이다. 그것은 '화병'이 한 단계 더 발전된 형태라는 알쏭달쏭한 진단을 해주었다. 주방에 있던 강민이 소반 위에다 통닭과 소주를 올려놓고 들고왔다. 동생 강민은 돌아가신 어머니를 닮아서 섬세한 용모에 마음도 여리다. 아버지가 기력을 잃고 반년 가깝게 누워만 있는 동안 강민이 시중을 다 들었다. "자, 오랜만에 아버지." 강기섭을 부축해 일으킨 강한이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부자간에 한 잔 하십시다." 저녁 8시반이다. 오늘 KTX 를 타고 오다가 거금 750만원을 날치기 당했다는 것을 강기섭이 안다면 어떻게 될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으므로 강한은 헛기침을 했다. "아버지, 한잔 드세요." 잔에 소주를 채운 강한이 권하자 강기섭이 정맥이 불거진 손으로 술잔을 들었다. 그리고는 강한을 물끄러미 본다. "한아, 내가 한심하지?" "아뇨." 쓴웃음을 지은 강한이 강민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견디시는게 대단하세요, 아버지." 강기섭은 한 모금 소주를 마시고는 힘들게 잔을 내려놓았다. 2년 전만해도 강기섭은 중견기업인 근화기계의 전무이사였다. 그러나 갑자기 근화기계가 세원기계에 합병되면서 퇴직을 당했고 1년전에는 전재산을 투자해서 창업한 회사가 순식간에 공중분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공동창업자인 친구한테 철저하게 사기를 당한 것이다. 강기섭의 친구 윤채호는 처음부터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고 사기를 쳤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활보하고 있다. "아버지, 어디 여행이나 다녀오시죠." 한 모금에 소주를 삼킨 강한이 강기섭에게 말했다. "기분 전환을 하고 오세요. 아버진 아직 젊으세요. 한창 때라구요." 그리고는 강한이 강기섭 앞에다 봉투 하나를 내려놓았다. "여기 100만원요. 회사에서 수당 받았어요. 여행 경비로 쓰세요." 퇴근 전에 김양희한테서 가불 형식으로 빌린 돈이다. 대성금융에서 받는 월급은 다 떼고 120만원 정도, 여기에다 영업팀에 배당된 수금액에 대한 실적 기준으로 받는 수당이 한달 평균 100만원 안팎이 되었지만 업무의 스트레스는 엄청났다. 은행처럼 그냥 원금 이자를 받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악랄해야 돈을 받았다. 인정사정 가렸다가는 한푼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채무자 대부분이 상환 능력이 없는 극빈자인 것이다. "한아." 강기섭이 불렀으므로 강한은 시선을 들었다. 반 잔도 마시지 않은 강기섭의 눈주위가 붉었다. "민이를 부탁한다." 낮게 말한 강기섭이 술잔을 들더니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그러자 온 얼굴이 주름투성이가 되었다. "넌 강한 놈이야. 꼭 네 할아버지를 닮았어." "아버지 닮은 거죠." 머리를 저은 강한이 정색했다. "아버지가 술기운을 빌리지 않으시려는 그 자세를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아버지는 강합니다. 꼭 재기하실 겁니다." 강한 여자] <6> 만남 (6) 강한이 청평의 모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3시 반. 약속 시간보다 30분 늦은 것은 오다가 차가 고장났기 때문이다. 회사차를 끌고 왔는데 갑자기 엔진이 꺼져버리는 바람에 길 가에다 두고 택시를 불러탄 것이다. "205호실." 주차장에 세워진 검정색 승용차 조수석에 앉자마자 운전석에 앉은 천상태가 말했다. "넷이 다 들어갔는데 방에서 떼로 하는지 모르겠어." "문 사장이 데리고 들어갔다면서?" 강한이 묻자 앞쪽에다 시선을 준 채로 천상태가 머리를 끄덕였다. "여자 대는거지. 하나는 제 애인이고." 천상태는 강한의 팀원으로 추적 담당이다. 대성금융 영업부는 5개 팀으로 나뉘어 있었고 그중 1개는 정보팀이다. 정보팀은 채무자에 대한 모든 자료 수집이 주업무로 수사기관 출신의 팀장이 지휘한다. 그리고 각 팀은 행정, 추적, 수금 담당으로 세분화되었다. 행정은 서류 확인 및 증거 확보를 맡고 추적은 미행, 도청, 촬영 전문이다. 수금 업무는 팀장이 한두 명 정도의 악질과 함께 수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문 사장이 나올 때가지 기다리자구." 그렇게 결정을 내린 강한이 의자에 등을 붙였다. 문영수 사장은 대성금융의 고객으로 신용이 아주 좋았다. 1억대 단기 자금을 자주 빌려 썼는데 거래를 튼지 6개월이 넘었어도 실수 한번 하지 않았다. 중국과 무역을 한다고 했지만 밀수업자라는 소문이었다. 그 문 사장이 유경금융에서 돈을 떼어먹고 잠적한 부동산업자 임윤호를 보증인으로 한번 세웠던 사실이 대성금융 직원이자 고동표 사장의 애첩인 김양희에 의해 발견된 것이다. 유경금융과 대성금융은 경쟁관계였고, 때로는 전쟁 일보직전까지 간 적도 있다. 안전빵인 대기업 동호그룹 어음을 서로 할인해 주려고 다퉜을 때가 그렇다. 어쨌든 김양희가 유경금융에서 임윤호 사건을 알아내어 이쪽 자료와 검토해본 것은 서로 정보 교환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유경금융 쪽에 정보 제공자가 있을 것이었다. "형, 얼마라고 했지?" 불쑥 천상태가 물었으므로 강한은 생각에서 깨어났다. 며칠전 KTX에서 약을 먹인 이장미를 떠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뭐가?" 강한이 묻자 천상태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고 턱으로 모텔을 가리켰다. "저기, 저 자식이 떼어먹은 돈 말야." "3억." "우리한테 얼마 준다는데?" "공식 대가는 받아야지." "몇 급?" "최하 2급." 받기를 포기한 상태는 1급으로 그 돈을 받아냈다면 받은 금액의 절반이 공식 요금이다. 2급은 확률이 반반인 경우로 받은 금액의 20%가 수당이다. "그렇다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던 천상태가 강한에게 물었다. "김양희한테는 얼마 주기로 했지?" "걔하고는 아직 이야기 안했어" "나한테는 얼마 줄건데?" 강한이 잠자코 천상태를 보았다. 26세, 고아, 고졸, 나이트크럽 웨이터 경력 3년, 심부름 센터 경력 2년을 거친 후에 대성금융으로 옮겨왔고 군에는 가지 않았다. 강한이 겪어본 바에 의하면 눈치가 빠르고 민첩하지만 입은 무겁다. 믿을만했다. 그래서 이 일을 맡긴 것이다. "20퍼센트." "20?" 눈을 치켜떴던 천상태가 곧 시선을 내리더니 머리를 끄덕였지만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5등분이야." 앞쪽을 향한 채 강한이 말했다. "김양희, 그리고 우리 네 명까지" "아니, 그럼." 천상태가 머리를 돌려 강한을 보았다. "택수하고 용철이까지?" 황택수와 백용철도 팀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