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10.29. - 엘브루즈(5642M)원정 메모리 -.hwp
엘브루즈 산행기 -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1.
07.7.12~22 서울시청 산악회 암벽팀 신순일
길 머리
“떠날 때 모습 그대로 가족들 곁으로 돌아와 줘!”라는 아내의 말을 작별하고 길을 나선다.
산행을 위해 짐을 꾸릴 때면
‘가방을 싸는 남자! 재미있어?’
‘짐 싸는 기분이 좋아?’
‘애들 소풍처럼 마음이 설레는가?’ 라며
산행준비를 거들던(?) 말과는 사뭇 다른 표현이다.
‘너무 염려 하지 마. 내년 원정을 위한 준비과정이야!’
나이 지긋하신 대선배님들도 함께 하실 정도로 엔간하면 오르는 곳이라며 걱정을 눙쳐본다.
아내의 걱정은 그 뿐만이 아님을 알지만 애써 돌려놓고 무거운 짐에 비해 발걸음을 가볍게 보이며 작별한다.
지인, 동지, 동료들의 격려에 대수롭지 않던 일이 나만의 호사를 위한 것 같아 미안해지고 한편으로 자못 어깨가 무겁다.
7/12(목)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모스크바로>
약속시간 보다 늦게 공항에 도착하였다.
시청 팀 7명, 홍대오비 팀 5명, 둘 또는 개별 참석자 6명과 가이드 까지 총 19명이다.
RA항공의 SU600 여객기는 예정보다 30여분 연착된다.
인천공항에서 모스크바까지 비행거리는 10시간이다.
비행이 잦은 사람은 10시간의 지루함을 앞세운다.
평생 한두 번인 경우는 기대와 설렘이 앞선다.
인류문명 교류의 한 축을 형성해온 게 실크로드일 것이다.
여행가에게 인류문명의 역사적 코드가 담겨있는 비단길의 여행은 누구나 한 번쯤 꿈꿔볼 것이다.
그리고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대한 동경도 마찬가지다.
한반도를 연결하여 유라시아 대륙을 관통하는 철의 실크로드!
유랑의 본능, 노마드의 충동을 채워주기에 충분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갈라진 남북이 철길이 이어지고 시베리아가 됐건 몽골초원이 됐던 유럽으로 연결되는 철의 실크로드 여행을 해보는 꿈을 갖고 있다.
점점이 늘어선 섬들을 벗어난 기체는 서해상공을 거쳐 발해만의 검푸른 바다를 지난다.
바다를 건너자 중국연안의 항구도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발해- 만주-몽골을 거쳐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항로이다.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깬 사이 어딘지 알 수 없는 대 초원 위를 날고 있다.
어느 벌판일까?
고조선, 고구려, 발해로 이어져온 역사의 무대를 지나는 것일까?
중국사학계의 동북공정으로 고대 우리민족의 역사를 왜곡하는 현장이 발아래 펼쳐지는 것 같아 감회가 든다.
역사에 가정은 성립되지 않은 것이지만,
근대 초기에 선조들의 수난의 역사현장에 대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구한말 대한제국으로 명맥을 유지하던 나라마저 주권을 잃게 되는 시기.
독립을 위해 옛 조상들의 고토로 망명하여 내일 기약하는 독립운동의 터전 되었다가,
일제의 압제를 피하여 고국산천을 등지고 새 삶의 터전을 일구러 떠나온 유민들,
역사의 수레가 우리민족의 기상이 꺾이지 않는 곳으로 굴러 갔었더라면 하는 가정을 해본다.
그리하여 아직도 우리가 이 땅과 주인 없는 시베리아까지도 자연히 아우를 수 있었다면...
지금 남의 영토의 상공으로 지나고 있지 않으리라는 상상으로 번진다.
스탈린과 일제의 간계로 꾸며진 연해주에 살던 고려인 이주정책도 발생하지 않았으리라.
남북분단도, 남한에 들어와 생계를 유지하려는 조선족들의 안타까움도 없을 것이라고...
동북공정이라는 말은 생성될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이 시베리아 상공을 지난다.
동유럽의 변방에 위치한 러시아제국은 어찌하여 아시아를 향한 동진정책을 펼쳤을까?
아시아뿐이랴 연해주와 캄챠카를 거쳐 알라스카까지 진출하여 캐나다를 경계로 태평양 연안까지 진출했으니 말이다.
단지 부동항을 얻기 위한 염원이 그 멀고 먼 시베리아를 아우르고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하자 북미대륙에 까지 뻗어간 것일까?
무주공산에 깃발을 꽂듯이 안으로 내치에 허덕이던 동북아 지역에 무임승차를 하다시피 한다.
그렇게 쉽게 얻은 땅들이라서 알라스카쯤은 720만 불이라는 헐값에 팔아 넘겨도 땅부자의 지위는 흔들리지 않았던 것일까?
흥정이 오가자 속전속결로 양놈 지갑 줍듯이 본토의 1/5이나 되는 숨은 보석을 거저 얻은 미국의 재주는 북극곰보다 한 수 위였던 셈이다.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호가 행여 눈에 들어올까 하여 내려다보았지만 이미 지나온 것인지 항로가 다른 것인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땅에 대한 인간 욕망의 허실은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작품 <인간에게 얼마나 많은 땅이 필요한가>라는 단편소설로 대변한다.
지주(성주)가 농부 파홈에게 해가 지기 전에 제 발로 걸어서 돌아올 수 있는 만큼의 땅을 주기로 약속한다.
농부는 전력을 다해 달려 넓은 땅을 밟고 해 지기 전에 제 자리로 돌아왔으나, 너무 지쳐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만다.
결국 그 농부에게 필요했던 것은, 죽은 몸을 뉘일 여섯 척 크기의 땅이라는 우화이다.
소설의 허구가 이미 비판의 대상에서 빗겨난 지주의 신분은 건드리지 않고 있다.
신자였던 작가도 구약성서의 주인과 종이란 신분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톨스토이 자신도 귀족 출신으로 일생동안 부귀영화 등 복락을 다 누린 후 그럴 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한 빈천한 농부의 본능적 욕심을 폄하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지주나 영주에게 땅은 하나의 신분이나 사치일지 모르나 농부에게는 생존 그 자체이다.
생존의 가치를 폄하한 제정러시아의 운명이 나폴레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는 저력을 지녔으나,
내부의 환부를 다스리지 못해 결국 볼세비키 혁명의 내란을 겪은 후 소비에트연맹으로 태어나게 된 것인지 모른다.
그런 질곡의 세계사는 이념 갈등을 극복하지 못한 우리에게도 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아픔을 이어오는 고리가 되고 있다.
고대와 근, 현대에 이르기까지 결코 이방이 될 수 없는 인연으로 광야의 시베리아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몇 시간의 비행을 해도 잿빛 광야와 구릉의 연속이다.
여름보다 긴 동토가 녹은 자리에 구릉을 따라 실처럼 늘어진 메마른 강줄기가 무인의 흔적이나마 남기고 있다.
기압골을 지나는지 솜사탕으로 부풀어 오른 끝없는 구름바다 위를 난다.
10시간에 가까운 거리를 지루하지 않게 나는 비행기 안에 좁은 공간이 답답하지 않도록 지상에는 볼거리를 제공한다.
라벨의 볼레로처럼 단조로운 리듬의 연속인데도 지루하지 않은 것은 무엇일까?
그리움일까? 부러움일까?
황무지를 벗어나니 침엽수의 툰드라가 보이기 시작한다.
황무지도 지나고 솜이불 상공도 지나니 이제는 대 초원이다.
숲의 영향인가?
실낱같은 물줄기가 뱀처럼 늘어지는 곳에 초원이 펼쳐진다.
초원을 이루고 물줄기가 살아나는 곳에 농가가 보인다.
그런 작은 집들이 몇 차례 지난 곳에 물가를 따라 하나 둘 마을을 이룬다.
목축을 위한 초지가 끝없이 이어지고 이미 수확한 듯한 밀밭이 황금빛으로 드문드문 보인다.
청명하늘에 수제비처럼 둥둥 떠가는 구름이 있고,
햇빛을 가린 구름의 그림자가 지상에 드리워진다.
구름이 만들어주는 지상의 파노라마도 흑백영상 필름처럼 한 참을 흐른다.
비행시간이 길어질수록 모스크바는 가까워지고 있다.
낮은 물줄기가 제법 강물을 이루는 곳에 호수가 만들어져 있다.
호숫가에는 농가와 마을이 모아진 도시가 된다.
그런 호수가 도시를 몇 개 지나자 고도를 낮추며 기압차를 느끼게 한다.
눈 아래 숲으로 둘러싸인 별장 같은 도회가 펼쳐진다.
멀리 첨탑과 고층의 건물이 밀집되어 눈에 들어온다.
마침내 선체가 좌, 우로 선회한다.
서서히 고도를 낮춘 기체는 사라메티예보 공항에 안착한다.
얼마 전 동남아 비행기 추락사고 항공기가 같은 기종이라는 얘기에 염려를 했던 사람들이 이심전심 일제히 안도의 박수를 보내며 웃음바다가 된다.
모스크바 북동쪽에 위치한 사라메티예보2 공항 도착(18:25)
5시간의 시차로 아직은 밝은 저녁시간이다.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2
모스크바
백야가 계속되는 계절
낮이 가장 긴 하지 때는 11시 반이 되어야 해가 진다고 한다.
하지가 지난 지금도 10시 반이 되어야 해가 지고 그 뒤로 저녁놀로 한참이나 밝은 땅거미가 계속된다.
루스키(러시아 인) 가이드 발레리아 모자가 공항에 우리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라는 영화를 떠올리는 곳!
언젠가는 한 번 오고 싶었던 곳에 첫 발을 내딛은 것이다.
‘모스크바에서는 울어봤자 소용없다’는 곳에 <모스크바의 눈물>을 만들어버린 ‘블라디미르 맨쇼프’ 감독의 영화!
구소련의 붕괴과정에서 모스크바에 온 여인 셋이 얼어붙은 북극곰들의 눈물샘과 웃음, 사랑, 회한, 비정을 멜로작품으로 그린 걸작으로 6900만 명이라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그 영화의 현장에 내가 도달한 것이다.
원정대원 중 한 분의 따님이 이곳에 거주하고 있다한다.
상사 선배직원과 함께 부친을 마중 나와 있다.
이곳에 유학을 온 뒤 대학원을 마치고 이곳 한국지사에 근무하고 있는데 과년한 딸의 혼사걱정을 앞세운다.
오랜만의 부녀 상봉이어선지 딸의 표정이 싱글생글이다.
무심한 루스키들의 표정에 비해 더욱 반갑다.
공항에서 모스크바 시내 호텔까지도 평일인데도 1시간이 넘게 걸린다.
러시아워시간에 시내가 밀리면 2시간이 넘게 걸린단다.
귀국하는 날 밤 비행기를 타기 전, 낮 시간동안 시내 관광이 예정되어 있어 가는 길목이 더 설렌다.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철의 장막’ ‘죽의 장막’등으로만 배웠던 시절의 교과서는 흘러간 역사이다.
지금 지나는 모스크바의 여름 거리는 다시금 부활하는 ‘브룩스’(브라질,러시아,인도,중국)의 한 축을 이루는 대국 러시아의 힘이 느껴진다.
백색의 자작나무는 가로수 차원이 아닌 숲을 이루며 길가에 펼쳐진다.
광활한 영토를 자랑하는 숲 사이로 듬성듬성 집과 마을 상가 등이 들어있다.
시내에 가까워질수록 나무보다 건물의 밀도가 높아지기는 하지만 숲의 도시다.
길가의 차들 중에 국산 차들이 하나 둘 눈에 띤다.
길이나 건물 광고판에도 국내 유수의 전자회사 간판들이 세계적인 상표들과 어깨를 겨루고 있다.
빌딩들이 가로수 나무들보다 높아지기 시작한지 얼마큼 지난 뒤 우리가 묶을 코스모스 호텔에 도착한다.
서비스나 친절보다는 아쉬워서 찾아온 것 아니냐 식이라고 한다.
무뚝뚝함과 사무적인 인상이다.
여장을 풀고 저녁식사를 호텔 뷔페식으로 마친다.
뷔페 식단은 우리와 비교해 부족한데도 가격은 비싸다.
물가가 비싸기로는 모스크바가 서울을 제치고 세계 제1위란다.
9시가 되었는데도 아직 밖은 환하다.
객실 안에서 봤던 로켓 발사 탑과 멀리 방송탑이 하늘을 찌르며 솟아있다.
반원의 병풍처럼 세워진 호텔 건물 앞 꼭지 점에 군인 동상이 서 있다.
어느 장군의 동상인데 나중에 들으니 드골 장군상이라 한다.
제 2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 드골정부가 연합국으로써 전쟁의 승리를 도운 소련에게 이 호텔을 지어 기증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에 대한 보답으로 드골장군의 동상을 호텔 앞마당에 세워줬다는 것이다.
도심지 호텔주변이라지만 서울의 밤거리처럼 휘황하거나 화려하지 않다.
근처에는 공원과 그리스 정교회 건물이 보인다.
장시간 비행의 여독과 시차로 근처 거리를 돌아보다 쉬 어둠이 오지 않은 모스크바의 첫 날 밤을 뒤척이며 잠을 청한다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3.
7/13(금)<모스크바에서 민버디를 거처 이트콜로>
4시경에 잠을 깼다.
5시에 호텔 로비에 모인다.
5시 반경 너무 이른 시간이라서 아침도 비닐 도시락에 든 간단한 러시안 햄버거로 해결했다.
출근시간의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새벽같이 출발한다.
6시 10분 호텔 출발, 7시 반경에 남쪽 공항에 도착했다.
모스크바 주변에는 5개의 공항이 있다한다.
어제 내린 사라메티예보2공항은 북동쪽에 있고, 러시아 남부로 향하는 지금은 브노코바 공항이다.
9시 10분 출발인 비행기는 다시 남쪽으로 두 시간의 비행을 거쳐 민버디까지 간다.
2시간이면 백두에서 한라까지는 족히 가고도 남을 시간이다.
남북을 가로지는 시간동안 러시아 대평원은 가도가도 끝이 없다.
광대한 평야엔 이 또한 곡식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2시간 10분여 비행 끝에 민버디의 미너럴리 버디 공항에 도착한다.
메인 가이드 블라디미르가 나와 있다.
우리 가이드 박성종대리가 소개를 한다.
로스께 답지 않게 영어구사가 유창하다.
영어소통이 우선돼야 가이드조건이 된단다.
아직 24살인 풋풋한 총각이다.
역사가 우리네 시골 버스터미널 수준이다.
남쪽으로 이동해서인지 햇살이 더 덥다.
개찰구 쪽엔 화장실도 없다.
러시아남부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공화국들과의 분쟁지역이 가까워서인지 군인들의 경호가 삼엄하다.
국내이동에도 절차가 복잡하다.
청 내에 없는 화장실을 가고자 하는데도 여권을 챙긴다.
100여 미터를 걸어서 간 곳에 육중한 체구의 여인이 입구에서 8루블의 화장실 사용료를 받는다.
320원이다.
일자리를 만들어 내지 못하니 서비스와 좋은 이미지로 선보여야 할 항목이 오히려 이들의 생계자원으로 쓰인다.
꿀꿀한 공항을 벗어나 하늘에서 봤던 벌판을 5시간가량 달려야 한단다.
시내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앞줄에 앉아 있던 조대장의 카메라가 없다한다.
사진 촬영조차 금지된 곳에서 서둘러 나오다가 미처 잘 챙기지 못한 것이다.
버스는 길가에 세우고 노상 택시를 타고 머물던 곳에 가 봤으나 찾지 못하고 돌아온다.
잃어버린 카메라도 아깝지만 이럴 때는 이미 찍어 논 사진들의 아까움으로 속이 더 쓰리다.
일행들은 이구동성으로 위로를 해준다.
이미 지나간 일 빨리 잊어버리는 것이 상책이라며 기다리던 이들의 마음을 바꾸려 한다.
혹시 하고 마침 아이들것 까지 두 대의 디카를 준비한 것을 하나 조대장에게 건넸다.
점심도 거른 채 달려오는 사이 우여곡절보다도 배고프다는 민생고가 아우성일 무렵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기막힌 우리 속담을 내세우며 점심 민원이 높아진다.
우리네 휴게소나 가든 정도도 없는 허허들판에 외딴 집 앞에 차를 세운다.
잡화점에 미용실 식당을 함께하는 열 살짜리 ‘이안느’소녀의 집이다.
샤슬릭(장작을 화덕에 직접 태워 거기서 나온 살아있는 숯불에 직접 고기를 열기와 더불어 훈제시키는 이 곳 요리법)이라는 일종의 숯불구이 요리를 내온다.
미리 예약을 했지만 간단한 요리를 준비하는데도 30여분이 걸린다.
닭고기 샤슬릭에 오이와 도마토를 잘게 썰어서 소스에 버무린 야채샐러드가 전부다.
오이도 크지 않은 단단한 것으로 무르지 않고 찰지다.
사과와 천도복숭아가 디저트로 나오지만 비료를 쓰지 않은 듯, 알이 굵지 않다.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이보다 어려 보이는 천사의 미소처럼 티 없이 맑아 보이는
이안느의 살인 미소에 일행들은 마음을 빼앗긴다.
가게 안에서 할아버지와 놀고 있는 아이에게 가위 바위 보를 했다.
가위 바위 보는 세계 공통의 바디랭귀지다.
제가 이겼다고 먼저 내 이마에 손가락 벌을 먹인다.
우리와 다를 것 없는 놀이다.
손을 맞잡고 ‘쎄쎄쎄~’ 를 해 보았다.
그러자 주먹위에 손바닦, 손바닦위에 주먹을 제 손 내 손을 번갈아 가며 노래를 한다.
낯선 놀이라서 잘 모르겠기에 손을 맞잡고 흔들며,
“쎄쎄쎄~ 아침 바람 찬 바람에 울고 가는 저 기러기......”를 노래했더니
워매나!
우리의 손동작과 하나도 틀리지 않는 손 놀이를 하는 게 아닌가?
천사의 미소도 놀라 더욱 환하게 웃는다.
너무도 능숙한 동작에 내가 더 서툴다.
누군가 스페인에 갔을 때 매운맛을 먹고 싶어 세계 어느 도시에나 있는 중국식당에 들어 핫소스를 달라고 영어로 아무리 해도 못 알아듣기에,
매운 것을 먹고 입이 뜨거워 손 부채질하는 바디 랭귀지를 했더니 금방 핫소스가 나오더란다.
‘말이 안 통하면 몸짓으로 통하고 그래도 안 되면 마음이라도 통하면 된다.’는 여행 고수들의 이야기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잠깐이었지만 마음이 통했을 <이안느>와의 작별이 떠나는 버스 향해 손을 흔드는 시골 소녀의 마음에도 길가는 나그네의 마음들이 전해졌으리라!
버스로 다섯 시간의 거리는 식사시간 한 시간을 포함한 것이라 한다.
남은 시간 한 시간 반 정도.
목적지 이트콜에 들어서는지 산줄기가 보인다.
산록을 따라서 마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너른 들녘보다는 배산임수의 산자락이 인간의 보금자리에 적합한 모양이다.
길을 따라 늘어선 마을에는 길가에 연료용 가스파이프라인이 노출 배관으로 이어져 있다.
한 참을 들어서니 수려한 경관을 자랑하듯 코카사스 산군의 골짜기가 흐르고 좌우로 병풍같은 산 자락과 기암절벽이 즐비하다.
산 구릉을 따라 방목하는 소떼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다.
그 중에 일부는 차량이 지나는 길목을 가로지르거나 아스팔트 위를 지나는 소들로 인해 소들 사이로 차가 피해 지나간다.
한 식경이나 산골을 향해 달린다.
멀리 산꼭대기에는 만년설과 빙하가 흰 모자를 쓰고 있다.
그 눈과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은 위로 갈수록 급류를 이류며 흐른다.
물빛은 미처 정화되지 못하고 우유빛 석회수로 뿌옇다.
이렇게 흐르는 강 이름이 ‘박산리버’란다.
길가에 차를 세우고 생리를 해결한다.
일행 중에는 행인지 불행인지 홍일점조차 없다.
쉬는 참에 그림 같은 풍경을 담아내느라 카메라 셔터가 분주하다.
길가에 숲을 거치며 속도를 늦추어 실개천으로 흐르는 물줄기는 수정처럼 맑다.
그렇게 맑은 물이 흘러 숲속의 작은 호수를 이룬 곳에 캠핑족들의 진을 친 모습들이 숲 사이로 보인다.
장시간임에도 지루하지 않다.
이국의 정취와 산이 가까워지면서 수려한 경관에 시선이 지칠 줄 몰랐을 것이다.
구릉지의 초원을 지나오니 삼림지대에 들어선다.
춘양목 빛깔을 띤 아름드리 적송지대가 우리의 식물분포대와 비슷하다.
자작나무 숲과 적송지대가 번갈아가며 스쳐간다.
길가의 초목도 모양과 크기가 색조가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질경이도 흔하고 엉겅퀴도 보인다.
산꼭대기의 설원이 눈앞에 들어오고 계곡의 냉기가 더위를 씻어낸다.
제법 선선한 기운을 느낄 때가 되니 이트콜 마을이 들어온다.
체켓봉 바로 아래 산기슭을 끼고 있는 에센호텔에 여장을 푼다.
2170M의 고산지대다.
여장을 풀고 마을광장을 지나 시메르까 라는 카페에서 저녁을 먹는다.
주식이 양고기나 닭고기를 장작불을 태워 숱을 만들고 그 숯불에 훈제로 구운 요리가 주다.
거기에 빵이나 쌀을 볶아 밥을 만들어 준다.
그리고 야채로 나오는 것이 도마토와 오이를 썰어 만든 샐러드가 전부이다.
좁은 땅에서 다양하게 맛보던 음식에 비해 넓은 땅에서 생산되는 단조로운 식단이 대비된다.
저녁 후 보드카를 기울이며 각자 자기소개를 하였다.
가이드 블라디에게 소주를 주며 맛을 물어 보니 술맛이 아니고 음료수라고 한다.
독주를 길들여진 입맛을 대변한다.
뉘 늦게 들어와 옆자리에 앉은 일행들을 보니 얼굴이 벌겋게 익어있다.
덴마크 원정대로 엘브루즈 정상등반을 마치고 내려와 자축파티를 한다고 한다.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4.
7/14(토)<체켓봉;3050 고소적응 트레킹>
일정 : 에센호텔-Ai 카페 체켓봉 산장; 엘브루즈 조망 - 리프트 하산
<사진>
이트콜 도착 첫날 아름다운 박산계곡 트레킹 고소적응 체켓봉(3050) 등산.
체켓산장에서 보는 여인의 하얀 가슴으로 불리는 엘브루즈쌍봉(좌: 서봉5642, 우: 동봉5621)
리프트 하산
줄거리 생략: 일정표에 가름함.
7/15(일)<테츠콜 아자우역에서 배럴산장;3900m으로>
일정 : 에센-테츠콜- 아자우역- 올드뷰 포인트-미르역-가라바쉬- 배럴산장.- 오후 퓨리웃 산장 고소적응 훈련
<사진>
고소적응 2일차 아자우역(2180m) 미르역(3500)거쳐 가라바쉬역(3800)에서
배럴산장 도착
줄거리 생략: 일정표로 가름.
7/16(월)<배럴에서 파스트쵸프 락;4690m 왕복 고소적응 훈련>
일정 : 오전/배럴산장- 퓨리웃산장(4160m)- 파스트쵸프(4690m)- 배럴 귀환
고소적응: 배럴(3900)~퓨리웃 산장(4160) 훈련 = 무리, 처음으로 고소시작
오후/휴식 및 정상등정을 위한 이른 취침
줄거리 생략 : 일정표 참조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 5. -여섯째 날.(1)
7/17(화)<엘브루즈 5642m 등정>
일정 : 배럴-파스트쵸프(설상 차)-수직 능선(동봉정상: 5621m)- 수평능선- 새들(안부5300m)- 서봉급경사- 정상(서봉:5642m)- 하산
여섯째 날.
헉! 흐~. 헉! 흐~. 헉! 흐~흡…….
다들 거친 숨을 몰아쉰다.
가슴이 자꾸만 막힌다.
가쁜 숨이 턱밑에서 맴돈다.
숨을 깊게 마셔 아랫배로 호흡하고 싶은데 생각뿐이다.
바람은 폭풍으로 산비탈을 스친다.
춥고 바람이 강한 급경사 오르막길 약 2시간 예정을 배가되는 4시간가량 올랐다.
동봉아래 경사면을 횡단하는 데 안내서에는 2시간으로 나와 있으나 지금은 두 배나 걸린다.
메인 가이드 블라드미르(이하 블라디)의 등 뒤에서 줄 곳 선두를 이루던 조성균 대장의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이어서 돌쇠 고상욱님이 두 번째고 그 뒤를 내가 이었다.
앞에 선 고사장은 출발 전에 일을 봤는데도 힘을 쓸 때 마다 뒤가 쏟아질 것 같다고 중얼거린다.
날리는 눈보라에 지친 대원들이 잠시 쉬는 동안 블라디에게 사정한다.
쉬지 않고 먼저 가서 급한 일 좀 보겠노라고…….
블라디는 보조 가이드를 한명 대동하여 앞서 보낸다.
그러나 이로 인해 ‘페이스 오버’가 됐는지 고소증세를 느껴 최종 정상 등반 조 선발에서 정상의 꿈을 접는 빌미가 된다.
조 대장의 발걸음도 무뎌져 간다.
몇 차례 허리를 꺾어 피켈에 얼굴을 묻더니 앞자리를 내준다.
선두에서 좁은 비탈길을 따라가며 발밑의 눈길이 계속 무너지니 체력 소모가 그 만큼 컷 던 것이다.
결국은 앞서간 고사장에 이어 블라드 뒤를 내가 따르게 됐다.
그렇게 거친 숨을 토하며 따르다 보니 나 또한 체력의 한계가 느껴진다.
눈보라 속에서도 안부가 가까이 보이는 데도 쉬 발길이 닿지 않는다.
앞서갔던 고사장과를 합류하면서 나도 모르게 주저앉는다.
새들(Saddle)을 앞두고 휴식. - 위에 보이는 것이 올라가야 할 서봉이다.
정상 등정을 마치고 늦은 점심이라도 먹겠다던 생각으로 제대로 먹을거리 준비도 못했다.
초콜릿과 사탕을 번갈아 입에 녹이며 간다.
입안이 달다.
쉬면서 사진을 찍고 주저앉아 있는 사이 중간에 섰던 대원들이 하나 둘 스쳐간다.
김용래, 김동운, 이상학, 김대실, 정진만님, 임동혁, 성백열님 등
그리고 노장그룹인 우정상 교수님이 옆에 앉는다.
그러더니 담배를 먼저 꺼내신다.
불과자 보다는 알사탕이라도 드시는 게 맞지 않느냐고 여쭸더니
그래도 담배가 태우고 싶다고 하신다.
지극한 애련가(?)시다.
고산에 오르시려면 금연하시는 게 좋지 않으냐는 물음에
숨이 다하는 날이 담배를 끗는 날 이시란다.
약주는 입에도 대지 않으시면서 즐기는 담배이니 그럴 법도 하다.
오히려 ‘흡연은 나의 힘!’이라도 되는 듯 한 심리요법이다.
기다렸다가 설원에 꽁초를 비비는 것을 보고 함께 일어선다.
먼저 새들에 도착해있는 일행들과 더불어 3분의 2정도 중반 그룹이 집결하니 11시경이다.
박성종대장이 정상 등반 조에 결단을 묻는다.
정상까지의 시간도 지금까지의 시간에 비추어 3시간은 걸린다는 것이다.
조 대장이 나의 의사를 묻는다.
한계를 느꼈지만 쉬고 나니까 나아진다.
함께 가자는 뜻으로 간다고 했다.
그랬더니 자기는 대기를 하겠다고 한다.
내가 포기 한다고 했으면 대신 나섰을 것을 무심코 말한 것이다.
김용래, 김대실, 정진만, 김동운, 이상학, 임동혁, 성백열, 정진수, 강성일, 신순일, 그리고 박성종까지 19명중 11명이 정상등반조로 준비했다.
짐을 줄이고자 배낭을 두고 가기로 했다.
카메라와 깃발을 챙기는데 암벽팀 깃발은 미처 챙기지 못했다.
새들에서 팀을 정비, 이원화하여 정상등반조 출발!
배럴 헛(산장)에 도착한 연 이틀간 하늘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좋지 않았다.
정상조망은커녕 지루한 눈발과 진눈개비로 한 겨울 폭설 속에 갇힌 것 같았다.
그런 날씨가 개었으니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일이다.
하루 앞서 도착한 국내 다른 여행사 팀도 오늘의 예비 일을 놓치지 않는다.
김동운 대원의 예감처럼 결국 이들과 같은 날 정상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정상을 등정하더라도 배럴 산장의 예약 관계로 이트콜까지 곧바로 하산해야 한다.
우리 보다 앞서 설상차를 탓 던 그들 중 선두가 하나 둘 내려오고 있다.
앞서 중도 포기한 여성 하나는 꿈자리가 안 좋았다며 하산을 한다.
2시경 배럴 숙소를 출발하여 30여분 설상차로 파스트쵸프락(4690M)까지 이동하였다.
새벽 1시에 기상하여 준비를 하였지만 잠을 설쳐 졸음을 느끼기 시작한다.
‘파스트쵸프’ 바위지대부터 걸린 시간이 벌써 8시간을 지난다.
애초 예정대로라면 이미 정상에 도착했을 시각인데 이제야 서봉과 동봉사이 안부에 도착한 것이다.
아직도 후미는 언제 도착할지 알 수가 없다.
멀리서는 완경사로 보였었다.
막상 발을 디디니 경사 7~80의 가파른 비탈이다.
바닥은 빙하와 얼음이다.
그 위에 바람에 실려 온 눈발이 하얀 밀가루처럼 미끄럽다.
곳곳에 바위가 검은 이를 드러내고 있다.
안부 골짜기를 매섭게 넘어서던 바람이 이곳에는 정상 쪽으로 치받는다.
200여 미터쯤 올랐을까?
하산 하던 혜초 팀과 만나 좁은 길을 비키며 눈보라 속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고 오른다.
얼음비탈과 바위틈새 사이에 크램폰(아이젠)을 장착한 이중화 보행이 쉽지 않다.
일행 중에는 크램폰을 처음 착용하는 이들이 몇이 있다.
(사실 빙벽등반을 해보지 않고서는 경험을 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간혹 한겨울이나 초봄 인수봉을 크램폰을 차고 등반하는 전문산악인을 보는데 원정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바위 돌출부가 많아지는 너덜지대를 오르는데,
앞선 대원 한 명이 비탈에서 미끄진다.
마침 경험 많은 홍대 오비팀 김대실님이 추락을 막아낸다.
(내년 히말라야 ‘초오유’등반 예정이라는 그는 강인한 체력을 보이며 이번 등반을 준비차원으로 가볍게 오르내린다.)
순간 얼굴빛이 흑 빛이 되고 두려움이 엄습한다.
급경사 바위 비탈에 수백 미터 아래 추락을 상상하니 강풍과 추위 속에서도 식은땀이 흐른다.
제동을 못하고 같이 미끄러진다면 굴비두름으로 연쇄추락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놀란 토끼처럼 얼음 속에 크램폰을 연거푸 찍어 밀리지 않도록 박고 스틱이나 피켈로 받친다.
아래쪽을 보니 등골이 오싹하다.
안내하던 메인가이드 블라디미르도 다급해진다.
자유등반으로 시간을 절약하려 했는지 모르나, 일단 운행을 중지시킨다.
추락을 겪은 성의원님은 강한 체력에도 불구하고 중도 하강을 결정한다.
기약할 수 없는 발걸음이 안타깝다.
체력에 문제가 없으면 마음을 진정시킨 후 함께 가자고 권해본다.
하지만 낮선 경험의 놀람과 동지들에게 피해를 줘서는 안 된다며 미련을 버리고 돌아선다.
추락의 겪고 대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겠다며 하산을 결정한 성의원님
블라드는 배낭에서 스크류(얼음 나사)를 꺼내 빙하 속에 박고 위로 올라 자일을 설치한다.
기다리는 시간에 몰아치는 강풍은 추락의 따른 놀람을 더욱 초조하게 만든다.
두 번 이어지는 자일을 설치하고 차례를 기다려 안자일렌으로 등반을 하다 보니 지체시간은 더 길어진다.
급경사로에 줄줄이 오르던 길을 한사람씩 등반을 한다.
선두와 후미 사이 시간이 30여분이상 벌어진다.
두려움을 씻어내며 비탈길에 올라서니 멀리 희끗한 정상이 보인다.
바람은 반대편 산기슭에서 치솟아 하늘로 오르며 가히 폭풍이다.
폭풍 속에 섞인 눈발이 바라클라바를 침투하여 볼을 때린다.
4년 전에 다녀간 알프초이님의 말이 허언이 아니다.
안면 마스크를 두 겹으로 하라는 조언이 실감난다.
순간 폭풍에 몸이 휘청거린다.
몸이 날아갈 것 같은 공포가 스친다.
앞서던 일행이 가까운 봉우리가 정상인 줄 알고 올랐다가 헛걸음을 하고 돌아내려온다.
일껏 올랐는데 “여기가 아닌게벼?” -정진만님!,
뒤 따르던 김동운씨 지친 몸에 억울한 소리를 내지른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발걸음 옮길 적마다 바람은 몸을 막아서며 옆으로 밀어낸다.
정상에 흔적 없이 사라질 발자국 한 번 내고 내려오자는 의미는 무엇일까?
다시금 원초적인 의문이 든다.
누가 말 했던가?
죽음의 반대말은 ‘욕망’이라고.......
회오리바람처럼 욕망에 끌려 머리속도 회오리가 친다.
헛짚은 봉우리도 지나온 지 20여분, 바람과 눈보라를 막아내며 오르니 ......
오! 엘브루즈!(5642m)
한 순간, 온 몸이 감전된다.
시청산악회 팀- 김동운, 이상학, 강성일, 필자(시계방향)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6. 여섯째 날 (2)
아! 드디어 해냈구나!
바람에 날리지 않으려고 아이젠을 눈 속 깊게 찍으며 걸어온 천근같던 걸음이 홀가분해진다.
새벽 2시20분에 출발한 산행이 12시간의 사투 끝에 정상을 밟은 것이다.
예정보다 갑절의 시간이 걸린 것이다.
하지만 정상등정의 성취감도 잠깐이다.
눈보라에 가려진 시야는 정상에서 느낄 수 있는 장관을 허락하지 않는다.
카프카스 여신의 사나운 심술은 자신의 정수리를 밟은 이방인들의 발걸음을 오래 허락하지 않는다.
감동의 순간도 잠깐!
악천후 속에 기념과 감격을 위한 촬영을 부탁하여 기록을 담는다.
빙하와 눈으로 덮인 봉우리는 뚜렷한 표식이 없다.
온몸으로 오른 이들이나 이곳이 정상임을 알 수 있다.
다만 화산 돌로 된 석인상 하나 눈 더미에 반쯤 묻혀 오가는 이들의 배경이 된다.
보기보다 강골인 정진만님은 30분이나 머물렀다며 손이시려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다며 서두른다.
정상등정의 기쁨과 여유를 즐기고자 했던 마음은 폭풍 앞에 사라진다.
악다구니로 휘몰아치는 폭풍설을 벗어나서 안전 하산하는 것이 더 다급하다.
사진을 찍고 정리하는 사이 선두는 이미 한참 앞서 내려간다.
정상을 향한 욕망으로 기를 쓰고 오르던 내리막길 또한 험난하다.
이미 오르면서 소진한 기력이 제대로 먹지 못해서인지 더 떨어진다.
일정에 따르면 이시간이면 하산하여 점심을 먹을 시간이다.
그래서 행동식도 변변히 준비를 하지 않았다.
이런 악천후와 지체된 시간에는 행동 식을 보충할 여유도 마땅치 않다.
새벽1시에 죽과 누룽지로 한 끼를 채워 넣은 것이 다행이다.
운행 중 간식으로 마리암(식당 주인)이 싸준 초콜릿 봉지는 그대로 있다.
두꺼운 장갑을 벗고 꺼내 먹기가 귀찮다.
강성일 형은 초콜릿을 먹기 좋게 비닐을 벗겨 놓고도 손을 대지 못했다.
그래도 어쨌든 먹어야만 했었다.
그래야 탈진과 졸음을 이겨내는 힘이 되는 것이다.
비탈의 가파름은 오를 때보다 내려올 때 더 예각이 된다.
바위 봉우리라면 레펠(로프하강)을 하면 힘이나마 덜 들 것 같다.
‘블라디’는 오를 때처럼 한 사람씩 안자일렌으로 내려 보낸다.
고정 로프의 확보가 추락 시 둘 이상의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맨 후미에 남아 하산 할 때 강형과 함께 내려온다고 했다.
블라디에게 ‘아이스 클라이머’라고 얘기했더니 받아준다.
안부에 내려오니 먼저 출발한 로프의 거리만큼 선두와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져 있다.
남겨진 배낭에서 사탕을 꺼내 나눠먹고 어깨에 들춰 멘다.
얼어있던 배낭의 한기가 우모 복을 뚫고 전해온다.
빈 몸으로도 기력이 다 했는데 무겁지 않은 배낭이지만 어깨가 쳐진다.
발바닥은 서서히 허공을 맴돈다.
동봉을 끼고 내려오는 수평사면 오른쪽 비탈은 아스라한 벼랑이다.
가파른 비탈의 하산길...
스키어에게는 환상적인 슬로프겠지만 발을 헛디뎌 굴러 내리기라도 한다면……?
실제 정상이나 안부에서 활강 하는 스키어들이 있다.
오를 때 우리를 앞질러 가던 러시아 스키어들은 이미 스키활강으로 내려갔다.
얼마쯤 내려오다가 추락의 두려움과 탈진 상태가 되어 보행이 잘 안된다.
뒤 따르는 보조 가이드에게 손짓 발짓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뒤에서 로프확보를 부탁했다.
잘 알아듣지 못하는 사이에 블라디가 뒤 따라와 파워젤리를 꺼내 주며 휴식을 취해준다.
발을 가볍게 해 보려고 크램폰도 풀어냈다.
보조가이드를 1:1로 붙여주고 다시 출발을 한다.
마음은 안심이 되나 얼마가지 못해 무릎이 꺾이며 주저앉는다.
발밑이 고르지 못하면 발자국이 무너지면서 몸도 따라 무너지는 것이다.
10여 미터 앞에 선 강형도 상태는 나와 비슷하다.
그 앞 20여 미터 앞에는 이상학대장이 가고 있다.
그 거리 나마 좁혀서 나란히 가고 싶은데 힘을 쓰고 발을 디디면 몸이 먼저 무너져 주저앉을 뿐이다.
주저앉기를 십여 차례 하다보니 이제는 일어서는데도 힘이 부친다.
그러면 가이드 알베르트가 등 뒤에서 배낭을 들어올려 준다.
아! 그러기를 또 십여 차를 한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수평사면을 2시간가량 내려오니 수직사면에 다다른다.
여기서는 글리세이딩(눈썰매)으로 하강하면 좋을 것 같다.
그러나 블라디의 허락이 나지 않는다.
누군가 시도 하려다가 제지를 당했다고 한다.
수직사면에 이르니 수평사면에 비해 안심이 된다.
기진한 몸에 비상식으로 준비한 사탕만을 깨물었더니 목이 탄다.
구르고 싶은 유혹을 느끼며 걸어보나 발목, 무릎, 허리 등 하체가 꺾일 때마다 주저앉는다.
기력은 쇠잔하고 긴장은 풀린 탓인가?
이제 주저앉으면 졸음이 온다.
몇 번을 주저앉고 몇 번을 졸았는지 모르겠다.
해는 설원의 산을 넘어 뉘엿뉘엿 기우는데 눈앞에 보이는 산 아래 목적지는 멀고도 멀다.
이제 쓰러져서 조는지, 졸려서 쓰러지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5천M대 산에서도 쩔쩔 매는데 7천, 8천은 어찌들 해 내는지 모르겠다.
무수한 반복을 하니 비탈의 경사가 좀 완만해져 온다.
이쯤이면 글리세이딩을 할 만하다 싶었다.
저 아래 파스트쵸프 바위가 보이고 우리를 기다리는 설상차가 눈에 들어온다.
눈 아래로 보이지만, 저 길이가 이제 얼마나 먼 곳인지 느껴진다.
결코 손에 잡히는 거리가 아니다.
졸음이 어느 정도 가신다.
정신이 들어오니 꾀가 생긴다.
힘들어도 그냥 걷겠다는 강형을 꼬드겨 글리세이딩을 하자고 붙들었다.
우선 안심을 시키기 위해 확보 줄을 서로 연결하였다.
강형을 등 뒤에 앉히고 엠보싱 방석을 꺼내 엉덩이 깔고 앉았다.
그러나 엠보싱의 요철이 생각처럼 미끄러지지 않는다.
궁여지책이다.
발뒤꿈치로 앉은뱅이 걸을 걷는다.
미끄러지지 않으니 걷는 속도나 다를 바 없고 허리에 힘이 든다.
엉덩이를 빗겨난 방석만이 바람 따라 눈길 언덕을 굴러 낙하한다.
결국 강형을 풀어 놓고 다시 걷는다.
그렇게 엎어지고 뒤집어 지며 눈앞의 보이는 거리를 좁힌다.
발바닥으로 손바닥으로 엉덩이로 그렇게 온몸으로 부서지며 내려왔다.
마침내 동지들이 기다리는 설상차에 올라 뜨거운 포옹을 받는다.
깊은 한숨을 토하며 생의 진저리를 친다.
쉬운 길을 어렵게 한 것인지, 실제 그렇게 어려운 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토왕폭빙벽 이후 사지에서의 생환의 의미를 다시금 진하게 맛 본 것이다.
설상차 캐터필더(체인) 감아 도는 소리가 개선행진곡 말발굽소리가 되어 엘브루즈 산자락을 울리며 내려간다.
온 몸은 파김치가 되어 늘어지지만 삶의 진한 욕망이 목 젓을 타고 흘러내린다.
<엘브루즈 산행기,- 러시아 여행 데카메론>7.
7/18(수)<배럴산장-이트콜산장>
일정 : 오전 휴식, 청명한 엘브루즈 조망, 기념사진
배럴- (리프트 고장으로 걸어서 하산 트레킹 겸 풍경 감상) 가라바쉬- 미르역- 올드뷰포인트- 아자우역- 이트콜 에센산장.
<사 진>
줄거리 생략 : 일정표 참조
7/19(목)<노천 온천, 낚시 체험>
일정 : 이트콜 -아우쉬케르 노천 온천욕; 세계 3대 노천 온천이라는 기대와는 달리 허름한 노천탕- 날칙(큰 도시, 점심)- 이트콜-테츠콜 낙시터 카페(저녁; 카페에서 춤추는 집시 여인 유혹.)
줄거리 생략: 일정표 참조
7/20(금)<다시 모스크바로>
일정 : 이트콜- 민버디로 가는 길; 해바라기 평원과 중세풍의 농부 모습에 진한 연민의 감정 솟아오름- 민버디-모스크바
줄거리 생략 : 일정표 참조
<엘브루즈 산행기>8.- 모스크바 (1) 붉은 광장
7/21(토)<모스크바의 하루>
일정 : 코스모스 호텔- 국민경제 달성 박람회장- 붉은 광장(성바실리 성당-붉은 광장-단두대 처형장-크램린 궁- 국립박물관-레닌 묘 -무명용사의 묘-굼 백화점) - 모스크바 강을 따라 펼쳐지는 시내풍경- 피터대제 상- 모스크 양식의 그리스정교회 사원-모스크바 국립대학- 참새언덕 조망-전승기념공원과 탑- 개선문- 아르바트 거리(푸쉬킨 생가, 부부동상, 국민가수 동상, 빅토르 최 기념 담벼락, 등 예술과 관광의 거리)- 모스크바 공항.
보람과 아쉬움이 남는 러시아 여행이다.
전날 늦게까지 호텔 앞 카페에서 마신 술도 모자랐다.
가게에서 사온 보드카로 모스크바의 마지막 밤을 달랬다.
술에 약한 나는 먼저 골아 떨어졌다.
무거운 몸을 억지로 추스르며 아침을 먹고 전세버스에 여장을 챙겨 넣었다.
외국인 가이드에게 말이 잘 통하지 않다가 한국인 가이드 김홍숙씨를 보니 귀가 탁 트인다.
코스모스 호텔 앞에 보이는 넓은 광장과 공원은 구소련시대 국민경제달성 박람회장이라 한다.
공원 입구에는 우주선 발사를 형상화한 탑이 멀리 방송 송신탑과 더불어 하늘로 솟구친다.
미,소 냉전시대에 서로 강대국 이미지를 보이려고 모든 분야에서 경쟁을 벌일 때 소련이 앞서던 분야 중에 하나가 우주개발과 우주선분야였다.
최초의 우주인 유리가가린은 지금도 국민의 영웅으로 추앙되고 있다.
담담한 인상과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하는 김홍숙여사의 안내는 학교선생님 같다.
모스크바라는 지명은 모스크바 강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한다.
1147년 돌고루키 공이 러시아 대평원을 흐르는 모스크바 강과 네그린나야 강의 삼각지대에 세운 조그마한 성채가 그 시초이다.
구시가는 좁고 굴곡이 있는 수로와 목조 가옥뿐이었으나 1935년 에 소련 정부의 도시 개조계획으로 일변하였다.
제2차 대전 후에도 대규모적인 개조가 잇따라 고리키 도로와 모스크바 대학 주택지구 등이 건설되었다.
현재의 모스크바 시는 12세기의 성채가 발전한 크렘린(성채라는 뜻)을 중심으로 철도, 지하철, 도로가 방사형(사방) 으로 늘어져 환상의 도로가 있으며 지하철로 둘러싸인 원형도시로 되어있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이며 동시에 기계, 전기, 과학, 등의 공업도시이기도 하다
모스크바의 인구는 약 1,100만 명이라고 한다.
상주인구 850만에 유동인구가 250만이 된단다.
도시의 구조는 방사환상형 도시의 전형이다.
모스크바는 크렘린을 중심으로 하여, 맨 안쪽에는 볼바르노예 순화도로가 위치해 있고,
이 도로를 다시 사도보예 순환도로가 둘러싸고 있다.
마지막으로 3번째 자동차 순환도로가 불바르 순환도로와 사오보예 순화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환상구조다.
우리의 내부 순환도로와 외곽순환도로가 연상되지만 여기는 보다 기하학적인 구조다.
이것을 그림으로 나타내어 보면 마치 과녁판과 같은 구조가 되기 때문에 '과녁도시'라고도 한다.
레닌, 스탈린, 차이코프스키, 푸쉬킨, 톨스토이 등 세계사와 문학, 예술사를 뒤흔든 인물들의 동상이 곳곳에 세워져 있고 7개의 스탈린식 건물과 크레믈린 궁전의 장엄함이 도시를 압도하고 있다.
모스크바는 어디를 가도 극장, 콘서트홀, 박물관, 미술관이 있는 예술의 도시이다.
도시 자체의 규모만큼이나 볼 것들이 무궁무진하여 다 돌아보려면 며칠을 투자해도 모자란다고 한다.
버스는 먼저 붉은 광장 앞에 멈춘다.
붉은 광장
'붉다(크라스나야)'라는 말은 러시아어로는 아름답다는 뜻을 함께 가지고 있다.
‘붉은 광장’의 원뜻은 곧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이라 한다.
17세기때부터 "붉은 광장"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게 되며, 지금과 같은 모습(길이 695m, 평균 폭 130m,넓이는 73,000㎡)으로 된 것은 19세기 말 무렵이다.
혁명 기념일에는 온통 광장이 붉은색으로 넘쳐나기 때문에 지금의 붉은 광장의 이미지가 각인 되었으리라. 우리가 최근까지 알고 있던 사회주의 색깔의 의미일 것이다
크램린 궁의 성벽 앞에 있는 레닌 묘, 바실리사원, 국립역사 박물관, 굼백화점(모스크바 최대)등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광장에 깔린 돌이 붉은 색 일거라는 생각은 착각이다.
광장의 돌들은 자연의 화강석들이다. 쑥색을 띠고 있다.
크레믈린과 붉은광장으로 모스크바 여행은 시작되며, 정치 중심지이기도 한 이곳을 중심으로 모스크바 도로는 방사선처럼 뻗어 있다.
성 바실리 성당
모스크바에서 가장 독특한 건물인 성 바실리 사원은 8개의 둥근 양파머리 지붕이 불균형 속에 아름다움을 내뿜고 있다.
붉은 광장 진입로로 들어서는 모든 관광객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아 버리는 아름다우면서도 묘한 느낌을 주는 성바실리 성당...
200여년간 러시아를 점령하고 있던 몽골의 카잔 한(汗)을 항복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해 황제 이반 4세의 명령으로 지어진 건축물이다.
성 바실리 성당 - 이반 4세는 완공된 성 바실리 성당의 모습에 반해 이런 아름다운 건물을 두 번 다시는 못 짓게끔 건축을 담당했던 포스토닉과 바르마의 눈을 멀게 했다고 한다
사원의 이름은 이반 대제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 수도사 바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1555년에 착공해 1561년에 이르러서야 완성되자 이반 대제는 그 아름다움에 탄복, 더 이상 이와 같은 성당을 짓지 못하게 하기 위해 설계자인 포스토닉과 바르마의 두 눈을 뽑아버렸다는 잔혹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크레믈린 궁전
크렘린이란 ‘성채’라는 뜻인데 오랜 역사를 통해 영고성쇠를 겪으며 오늘날 20개의 탑을 가진 2,235미터의 성벽을 자랑하고 있다.
붉은 광장의 크고 둥근 지붕 위에 꽃혀 있는 붉은 깃발은 러시아의 상징이며, 과거 세계 정치의 반은 이곳에 모여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움직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입구의 하나인 79m의 트로이츠카야 탑은 나폴레옹이 입성한 곳으로 유명하며,
우스펜스키키 사원은 러시아 국보 제 1호이다.
아름다운 이미지의 붉은 광장은 크레믈린 북동쪽의 붉은 성벽과 붉은 벽돌 건물의 국립 역사 박물관, 굼 백화점, 성 바실리 사원에 둘러싸여 있다.
크램린 궁 성벽 앞 광장 왼편 중앙에는 1924년에 숨진 레닌이 방부처리 되어 잠들어 있다.
레닌 묘
종교를 공식적으로는 부정하는 소련에서도 레닌만은 신격화된 존재이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에 숨을 거두었는데, 그 3일 후에는 최초의 레닌 묘가 알렉세이 시추세프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29년에는 적토색의 화강암 건조물로 다시 지어졌다. 피라밋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유서 깊은 크렘린의 건물들과 잘 어울린다.
크레믈린 궁과 레닌의 묘
레묘 - 혁명을 통해 소비에 성공한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심장마비로 사망
체제가 붕괴된 후 현재까지도 참배하려는 사람들로 1~2시간씩 걸리는 장사진을 이룬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그 행렬에 동참하지 못했지만 체험을 하기 위해서는 기다림을 마다않고 참배를 해 보고 싶다.
그저 사진과 기록을 위한 관광이나 여행은 여행의 초보 수준이다.
체험으로 느낄 때 여행의 맛은 배가 될 것이다.
그렇게 사진 남기기 관광으로 국립역사박물관의 현관을 지나 무명용사의 묘의 꺼지지 않는 불꽃을 담아왔다.
러시아 최대의 굼 백화점
붉은 광장 내 레닌 묘 맞은 편에 길게 세워져 있는 베이지 색의 건물이 러시아 최대의 국영백화점인 굼(GUM)이다.
1890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지만 1950년대에 대폭적인 수리가 이루어져 오늘날까지도 러시아에서는 최고급 백화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3층 높이의 이 건물의 1, 2층에는 200여점에 이르는 최고급 외국산 상점들이 위치하여 고급 손님들을 끌고 있다.
우리가 갔을 때도 일부는 보수를 하고 있었다.
<엘브루즈 산행기>9.- 모스크바(2);참새언덕, 아르바트
전승기념관
1985년부터 10년간 건설하여 1995년 5월 전승 50주년을 기해 완공했다. 이 곳은 과거 러시아 군대의 출정식과 승리 후 귀환 시 기념행사를 하던 곳으로, 나폴레옹 전쟁 후 쿠투조프 장군(나폴레옹을 물리친 러시아의 성장)이 여기에서 기념식을 가졌다.
기념관 앞의 탑에는 게오르기라는 러시아정교 승리의 신과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격전지 이름이 조각되어 있다.
탑의 높이는 141.7m. 전승기념관은 지하와 1,2층으로 되어 있으며, 2층 에는 전승 50주년을 기념하여 정부에서 제작한 칼과 방패가 있다.
39년 독소 불가침 조약부터 일본의 항복문서에 이르기 까지 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유품들을 전시하고 있다고 한다.
2층 중앙 홀은 지름이 50m, 높이가 25m이며, 11만 7천명의 훈장 수여자들의 명단이 각인되어 있다.
모스크바 대학
모스크바 대학의 창설자는 학자 로마노소프이다.
원래 대학 건물은 크렘린 북쪽에 있었으나, 1953년 스탈린 양식의 새 캠퍼스가 완성되면서 지금 장소로 이전하였다.
건물은 높이가 240m이고 정면의 길이가 450m나 되어 스탈린 양식의 건축물 가운데 가장 크다.
중앙의 30층 짜리 건물 부분은 대학의 관리부가 있는 관리탑이고 이 양 옆의 17층짜리 날개 부분은 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고 있다.
모스크바 대학 전경
참새언덕
모스크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오스탄키노 텔레비젼 중계 탑을 제외하고는 이 레닌 언덕이 제일 높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높아 해발 115미터로 우리의 기준으로는 언덕도 아니지만 산(山)을 보지 못하는 모스크바인에게는 산(山)인 것이다.
여름이면 이곳에서 날씨가 좋으면 모스크바 시내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주말이면 무명용사의 묘에 헌화를 한 신혼 부부들이 이 곳으로 이동을 하는데, 이 또한 러시아의 결혼풍속도를 알 수 있는 좋은 구경거리가 된다.
주말이라서 결혼식을 마친 신혼부부들이 바실리성당에서부터 전승기념공원, 참새 언덕에 오면서 줄 곳 마주쳤다.
최근 레닌 언덕이라는 이름에서 1924년 이전에 불려졌었던 참새의 언덕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모스크바 대학에 재학 중이었던 게르첸과 오가료크가 이곳에서 러시아의 혁명가가 되기를 결심한 곳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 강 건너 정면에 보이는 루즈니키 경기장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때 주 경기장을 쓰였으며, 여러 종목을 한꺼번에 수용할 수 있었던 곳이다.
총 수용인원수는 10만 명 정도란다.
젊음과 문화의 상징= 아르바트 거리
우리 나라로 보면 인사동 거리나 대학로와 같은 곳으로 입구에서 외무성 건물까지 약 2km정도이다.
거리가 생긴 것은 15세기이며 더 유명한 것은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이 이 거리 No.53 의 2층 집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옛날에 아르바트 거리는 귀족들의 저택이 한적하게 들어서 있던 곳으로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들이 어린 시절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주변으로 각종 전문 직업인들이 모여들어 골목마다 목공골목, 대장간 골목, 과자와 빵 골목, 음식점 골목, 식탁보 골목 등의 이름이 붙여 있다.
아르바트는 번화한 거리로 변모하여 한쪽에서 소규모의 악단이 연주를 하는가 하며, 시를 낭송하기도 하고,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한다.
그러나 노브이 아르바트 거리에는 지금 거의 외국 브랜드 상점과 외국인을 상대로 하는 기념품 가게와 노점상 등이 있어 러시아의 현주소를 잘 말해 주고 있다.
아르바트 거리는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이 가장 먼저 인 곳이자, 개혁과 개방의 거센 바람을 주도했던 곳이라고 한다.
모스크바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이 거리는 러시아 젊은이들의 혼이 숨쉬는 곳이다. 무명화가들의 고향이자 이름없는 화가, 연극배우, 가수들의 안식처이자 전시장이고 무대이며 히피들의 마음의 고향이다.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하는 재즈음악을 배경음악으로 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그림처럼 지나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무명화가들, 배우들, 브레이크 댄스를 추는 소년들, 노천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 친구들, 연인들, 모두 풋풋한 젊음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젊은이들의 자유 영혼이 숨쉬는 아르바트 거리 한쪽에는 우리에게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는 이름을 딴 거리가 있다.
아르바트 거리의 빅토르 최 기념벽 빅토르 최 동상
바로 '빅토르 초이! 아르바트 거리 한쪽, 길이 100m가 채 안되는 골목에는 빅토르 초이의 성전(?)이 있다.
이 골목은 초이가 무명가수일 때 노래를 부르던 곳이었다.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등진 이후 이곳은 초이를 위한 성전이 되었다.
골목 담벼락에는 초이를 기리는 낙서들과 사진으로 가득했다. '초이를 사랑 한다.' '초이는 영원하다'... 같은 내용들이라고 한다.
한 구석에는 누가 갖다두었지 싱싱한 장미꽃이 한다발 놓여져 있고, 담배불이 향처럼 피어오르고 있다.
빅토르 초이는 한국인 3세로 아버지 쪽이 고려인이다.
한인 성을 앞세울 만큼 조상에 대한 의미를 부여할 것은 없다고 한다.
그는 러시아의 정서에 맞는 러시아 젊은이였다.
락밴드 '키노'를 이끌었고 글도 쓰고 영화도 만들었다.
영화를 사랑했던 초이는 영화를 직접 감독하고 출연까지 했었다.
그의 노래 모두는 4장의 앨범으로 나왔다.
그 앨범 모두가 러시아 젊은이들의 가슴에 강하게 자리잡았고, 1991년 33세의 젊은 나이로 자동차 사고로 요절하면서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신화가 되어 러시아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
예술의 도시
모스크바에서는 발레, 오페라, 클래식 음악, 연극, 뮤지컬, 서커스 등 일류 예술을 접할 기회가 많다.
각종 공연 중에서도 무엇보다도 유명한 것은 발레와 서커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볼쇼이 발레의 본고장이 이곳이다.
발레와 더불어 서커스는 화려한 곡예와 풍자, 장식으로 관중들의 눈을 현혹한다.
모스크바의 서커스는 힘과 기술 뿐 아니라 신체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기능으로 인식되어 세계 최고의 경지를 자랑한다.
톨스토이는 '러시아 인이라면 누구나 모스크바를 어머니처럼 느낀다' 라고 했다.
그의 표현처럼 모스크바는 이방인의 마음까지 강하게 끌어당기는 강한 매력이 있다.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지지만 이내 친근감이 드는 것이 모성을 느끼기 때문인가 보다.
그러나 모스크바의 겨울은 가혹하다고 한다.
겨울을 지낼 수 있으면 모스크바에 살 수 있다고 한다.
[날씨]
대륙성 기후로 해마다 기후변동이 심하다.
겨울은 10월 말 첫눈이 내리면서 시작되어 4월 초까지 계속된다.
햇빛을 보기 거의 힘들고 쉴새없이 눈이 내린다.
보통 눈이 내리는 날은 영하 15 ∼ 20℃이고, 해가 나는 날은 그보다 더 춥다.
1월 평균 기온은 -11℃정도. 상대적으로 봄·가을이 짧으며 4월 말부터 기온이 올라가 서서히 여름에 들어선다.
하지만 모스크바의 날씨는 워낙 변덕스럽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 이러다 갑자기 눈이 오기도 한다.
심지어 5월에도 눈이 날릴 정도이다.
5월은 본격적인 봄이다.
추위의 기습, 또는 이상기온을 대비해 따뜻한 외투를 항상 입고, 안엔 차근차근 벗고 다닐 수 있도록 짧은 소매 옷과, 스웨터를 입고 다니는 것이 좋다.
6, 7, 8월은 가장 행복한 계절이다. 사람들은 긴 휴가를 떠나고 소나기를 뿌리고 지나가지만 청명한 하늘과 구름들을 볼 수 있다.
기온은 이상기온이 아니라면 18 ∼ 25℃ 정도이고 가장 더울 때는 30 ∼ 31℃까지 올라가기도 한다.
7월 평균 기온은 19℃정도이다.
모스크바 시가지는 어딘가 무겁고 가라앉아 있다.
실제로 모스크바는 장중하게 무거운 느낌을 주는 도시이다.
무엇보다도 중후한 건물들이 이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고 있다.
러시아 국민소득 6000불의 두 배인 12000불의 소득수준을 보이는 부의 불균형의 도시.
사회주의 체제에서 극복되지 못한 인간 ‘불평등기원론’의 산 증거를 보여주는지 모른다.
|
첫댓글 대장정 길이었네그려. 잘 보았네.
이 낡은 몸은 상상으로...... 엘브루즈 산행 후 보드카 한잔 마시네. 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