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길
조 경 진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사랑을 하고 사랑받는 환희의 봄을 기다린다. 움츠렸던 몸과 마음을 한껏 펴고 새로움과 희망의 계절을 맞이함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봄은 해마다 오고가는 계절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기다림의 대상이요 그리움이다.
겨울의 끝자락에 설 때면 기다림에 지쳐 몸살이 날 것 같아 봄 마중 길을 나선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봄은 어김없이 찾아오련만 그새를 못 참고 길마중을 나간다.
작년 이맘때는 선운사 동백수림에서 봄을 기다렸는데 올해는 봄이 온다는 소식에 남해안으로 곧바로 내달린 길이다. 매년 이렇듯 마음의 빛이 바래지지 않고 봄맞이 길을 나설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오동도 동백나무가 붉게 물들었다. 지난밤 내린 눈으로 첫날밤 흔적 같은 선홍의 신비가 남아있다. 과년한 처녀의 가슴같이 탱탱한 꽃망울이 기다림의 시간 속에 기도하는 자세다. 동백꽃이 수줍은 듯 붉은 볼을 감싸고 그윽한 눈길로 나를 맞이한다. 동백 숲에는 동백꽃이 벙긋이 피어나는가 하면 성미 급한 꽃송이는 그새 생의 끈을 놓고 땅에 누워있다. 무심히 지나는 사람들 발길에 차이며 무슨 생각을 하며 시간 속에 자신을 묻고 있는 걸까. 때가 아닌 때에 피어나 일찍이 생을 거두는 동백꽃에 말 못할 사연이라도 있는 것 같아 마음에 알싸한 바람이 인다.
모진 해풍과 차가운 눈발에도 내공을 담아 꽃망울을 키워내고 꽃을 피워내는 힘이 경이롭다. ‘봄은 온다’는 믿음 하나로 봄이 오기 전에 꽃을 피워내는 뜻을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겨울의 긴 터널을 지나면서 봄으로 달려가는 마음을 꽃으로 피워냈을 것이다. 동백 숲을 걸으며 잠시 동백꽃의 마음이 되어 봄의 햇살을 한껏 안는다.
시린 가슴열고 하늘 뜻 받아들여 인고의 꽃을 피우는 동백에서 내 삶의 여정을 돌아보게 된다. 겨우내 목마름으로 기다리던 봄. 내 인생의 봄은 얼마나 찬란한 꽃을 피워내려고 했던가. 꽃이 피지도 못하고 진 것은 얼마며 열매로 익지 못한 것은 얼마이던가. 마디마디 옹이진 지나간 인생의 봄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계절의 봄을 맞는 기쁨에 벅차있다.
세상 모든 것은 생긴 대로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큰 뜻을 품고 인생길을 갈고 닦아 입신하면 좋겠으나 그런대로 세월에 묻혀가는 것이 범인들의 인생살이가 아니던가. 나는 올해도 남녘으로 봄을 맞으러 왔고 내년에도, 그 다음 다음해에도 그러하기를 바라면서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주워들고 가수 ‘유계영’이 부른 ‘인생’이란 노래를 흥얼거린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월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이런저런 하고 싶고 이루고 싶은 것들이 모두 시간에 기대어 있었다. 젊은 날 한 때는 목마름으로 시간이 빨리 지나가 주기를 바란 적이 있다. 목적한 바를 빨리 이루기 위해서, 현실의 고뇌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절실하여 시간에 매달렸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너무 빠른 시간의 흐름에 호흡마저 가빠지는 느낌이다. 빨리 지나가주기를 바라던 것들이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기를 바라게 되었다. 꽃피고 잎 돋는 봄의 생기를, 한 여름 푸르름의 힘찬 맥박을, 가을의 고독과 별리의 서글픔도 그 시간 속에 한 참 머물렀으면 좋겠다. 그런데 겨울만은 빨리 지나갔으면 한다. 봄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을 욕망에 사로잡힌 몸부림으로 아픔을 자초했던 것 같다. 칠순이 가까운 이제야 아등바등한 삶이 덧없음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인생길이 안개 속에 묻혀 길을 찾기 어렵더니 세월이 약 이런가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내가 지금 서 있는 지점은 길모퉁이 돌고 돌아 하늘 끝닿은 외길이 가까웠음을 안다. 오랜 세월 아집에 갇혀 사회속의 나와 자연속의 나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속절없이 세월만 흘려보낸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풀이나 나무들도 자신만의 특성을 드러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며 종을 유지한다. 자기의 길을 개척하여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아마도 겨울 동백꽃이 눈 속에 붉디붉은 꽃잎을 피워내고 꽃송이를 떨어뜨리는 것도 자신의 삶을 자신에 맞는 방법으로 살아가는 지혜일게다. 어찌 보면 동백꽃이 봄이 오기 전부터 시작하여 봄이 한창인 4월까지 피는 것은 누구보다 먼저 봄을 맞이하고 오래 누리려는 욕망일지도 모른다. 남다른 삶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고의 시간을 감수하고 있는 동백나무에서 마음공부를 한다.
아직 동백꽃에 잔설이 남아있는데 동백 숲에 든 내 마음속엔 이미 화창한 봄날이 들어와 있다. 기나긴 엄동 설한풍을 맨 몸으로 맞으며 맺어놓은 사랑의 꽃망울이 모두 활짝 피어나서 세상사에 지치고 좌절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으면 한다. 겨울 동백꽃이야 말로 봄의 전령이며 사랑의 전도자임에 틀림없다.
바다를 차고 밀려오는 바람결에서 봄의 향기를 맡는다. 라일락이나 만리향보다 더 짙고 그윽한 향기가 가슴가득 밀려드는 느낌이다. 동백꽃이 봄을 전하며 내뿜는 사랑의 향기인 것 같다. 봄의 향기를 맡으며 사랑을 꿈꾸라는 뜻이리라. 인생의 주제는 사랑이라고 어느 철학자가 하지 않던가. 사랑이 싹트고 희망을 안겨주는 계절을 위한 축배를 준비해야겠다. 나의 오랜 연인 같은 사랑의 계절을 위해 동백꽃을 가슴에 한 아름안고 봄 마중을 한다.
첫댓글 봄마중을 나선 마음이 문학의 아름다움으로 다가옵니다. 붉은 동백꽃이 지는 바닷가에서 인생의 봄을 돌아보며, 지난세월을 얼마나 찬란한 꽃으로 피워내었던가를 생각하고 있는 작가가 봄맞이를 나선 마음도 느껴집니다. "마디마디 옹이진 지나간 인생의 봄이야 어쩔 수 없지만 계절의 봄을 맞는 기쁨에 벅차있다." 함이 아름답게 다가옵니다. 이 봄밤은, 오랜 인연같은 동백꽃을 가슴에다 한 아름안고 봄마중을 나선 작가의 마음을 훔쳐가고 싶습니다.
오동도 까지 봄마중을 가셔서 빨간 동백 아가씨와의 아름다운 만남이 행복 하셨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