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동부교회 원로 강성찬 목사를 뵙고 인사를
8월 14일 순천 최광수 목사 모친상 조문 중에
8월 14일 정오 무렵, 순천 최광수 목사 모친 상 조문 중에 남면 안도교회 출신인 강성찬 목사를 뵐 수 있었다. 함께 한 분들은 부산에서 목회를 하는 강 목사의 형제가 되는 강정찬 목사(은진교회)의 모습이다.(사진) 강성찬 목사는 전주동부교회를 20년 넘게 사역한 원로목사로 교회 역사에 대해 훤하게 알고 있다. 전주동부교회는 1932년 당시 서문 외 교회에 출석하던 최순집 집사의 인도로 강주현 집사 가정에서 6명이 모여 예배를 시작으로 동부교회가 설립됐다. 동부교회는 교회 설립 후 지역의 복음화와 열방을 향한 세계복음화 위해 달려왔다.
교회 역사 가운데 질곡의 역사도 있었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사명을 다해왔다. 성도 간 화목과 친교를 바탕으로 다음세대를 위한 주일학교 교육, 새 신자 신앙성장 반 교육, 성경대학원 교육을 통해 신앙성숙을 도모하고 있다. 해외선교 후원 및 농어촌 의료선교, 미 자립교회 후원, 선교단체 후원, 다문화가족선교 등에 힘썼다.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더불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전주동부교회로 개칭하고, 1968년 봄까지 3차례 예배당 증축, 종각과 부속건물 등을 완료했다.
1975년 교회가 자원하는 마음으로 헌금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자 라디오 수리 상을 경영하던 영세상인의 한 청년이 건축헌금을 드렸다고 한다. 그 당시 50만원을 드린 것이 계기가 돼 온 성도들이 동참하게 됐다는 것이다. 1981년까지 800,000만원의 재원이 확보되자 1982년 봄에 진북동 322번지 내에 9필지 780평을 구입하고, 1983년 11월 1일 새 성전 건축(연건평 1672평)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건축이 완공하고 1985년 11월 13일 새 성전으로 이전했고. 새 성전으로 이전하고 부흥의 물결이 일어난 것이다. 어릴 적에 안도교회 주일학교를 다녔다. 그 후에 군대에 입대하기 전에 성경과 찬송을 준비했다.
신앙생활에 열심을 다하기 위해 가진 다짐이었다. 군대생활 하면서 입대동기와 열심을 다해 신앙생활을 사수했다. 그 친구도 현재 목회를 하고 있다. 1989년 동부교회에 부임하신 후 추구하신 목회방침은. 교육과 선교, 봉사 그리고 사랑을 더해 목회의 중점을 가졌다. 특히 성도 간에 화목도 강조했다. 여천공단에 소재한 화치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화치교회에서 손양원 목사님이 순교한 애양원까지 도보로 오가곤 했다. 그 거리를 ‘십리방죽이라고 했다. 손 목사님의 사랑의 정신을 흠모했다. 남몰래 실천한 선행을 통해 소외된 사람들의 벗이 되고자 모범을 보였다.
성도들에게 강조하신 교육이념은 성경말씀과 삶의 일치를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목회자의 본연의 자세라고 강조했다. 교육과 선교, 봉사도 조화가 필요하다. 균형이 행복이다. 결국 예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이다. 작금에 발생한 교회 내에 갈등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참고 인내한 결과 합의가 됨으로써 일단락되는 것을 보게 됐다는 것이다. 2016년 1월 9일 강성찬 목사 후임인 김중경 목사와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7월 5일 양측 대표들과 중전주노회장 김형래 목사가 만나 합의서를 작성하고, 이를 7월 13일 재판국 전체회의에 보고하면서 전주동부교회 재판 건은 사실상 종결이 됐다는 것이다.
김중경 목사 측은 새로운 예배처소를 정해 7월 15일부터 자체적으로 주일예배를 시작했으며, 양측의 극한대립으로 혼돈이 계속됐던 전주동부교회당은 오랜만에 평온을 되찾게 돼 감사하다고 말하고 있다. “사태 종결 과정에 원로목사로서 어떤 특별한 중재자 역할을 했느냐?”고 묻는 말에 강성찬 목사는 “누구보다 교회를 사랑하는 원로로서 지켜보자니 말로 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아픔이 컸지만 이런 저런 말들을 하게 되면 오히려 더 큰 어려움이 올까봐 아예 침묵하면서 계속기도만 했는데 이런 좋은 결과를 맞이하게 돼 감사했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여수=정우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