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오신 날 아침 일곱시, 우리학교와 이웃 학교의 미국인 친구들과 함께 포항 나루끝에서 황포 돛배가 아닌 뉴카렌스 차를 타고 출발했다. 주룩주룩 내리는 늦봄 초여름 비가 시원하게 산하를 적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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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화 심곡지. 산그림자가 수면에 얼비친다. 바람이 자고, 번뇌가 끊어진 자리, 바른 견해를 가지고, 삼매에 들면 마음 거울은 만상을 있는 그대로 비춘다. 6근을 청정히 지켜 6식은 성소작지로, 마나식은 아견, 아집, 아착을 벗고 평등성지로, 업식으로 가득한 아뢰야식은 대원경지(大圓鏡智)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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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길을 접어들어 아화 심곡지에 이르니 잠시 비가 그치고 길가의 못에서는 선경이 펼쳐진다. 섬처럼 산이 물 위에 떠 있고, 물빛은 티없이 맑아 만상을 얼비추는 거울이 되고, 수면 위로 그림자를 흔적없이 남기며 인기척에 놀란 잿빛 왜가리 홀로 비행을 하고, 멀리 건너편 물가엔 종이로 접은듯 하얀 왜가리 한 쌍이 평화로이 있다. 멀리 오봉산은 불이 난듯 연기같은 비 안개 구름에 묻히고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평소에 볼 수 없던 심곡지의 몽환적인 풍경이었다. 사진가가 있었다면 이 날 좋은 작품을 얻었을 것이다.
문득 매월당(梅月堂)의 시 한 편이 생각난다.
아화역에서 묵고 새벽 길을 나서며
새벽닭 꼬끼오 울어댈 때
문을 나서 말 몰아 긴 길을 간다.
숲 으슥하고 달빛 어둡고
삼성(參星-오리온자리)만 반짝 반짝.
찌륵찌륵 풀벌레 울어대고
나그네 적삼은 시냇가 풀 이슬에 젖는데
분주하던 십년 일이 꿈같이 아득하고
주머니 속엔 일천 수의 시고(詩稿)뿐.
늙고 병들어 남에게 얽매이고 보니
공을 일찍 거두지 못한 것이 한스러워라.
명예와 이익을 마음에 두지 말고
돌아가네 동산의 오디를 먹는 게 좋으리.
阿火驛早行。望參星有感。
曉鷄喔喔鳴一聲。出門策馬行長道。
林深月黑
路無人。但見參星明皓皓。
啾啾喞喞草蟲鳴。征衫涴濕溪邊草。
十年奔走杳如夢。只有囊中千首藁。
而今老病被他牽。却恨收功苦不早。
莫將聲利掛胸懷。歸去食汝園葚好。
梅月堂詩集卷之十二詩 遊金鰲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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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같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숲속 길을, 새 소리를 들으며 우산쓰고 오른다. 그림 속을 걷고, 구름 속에서 헤엄을 친 하루였다. 티끌 세상을 여의고 청정법계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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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영산전 현판 글씨가 아래 주사암 현판 글씨보다 훨씬 달필이다. 영산은 영취산, 그리드라쿠타, 기사굴산, 굴산, 독수리봉이다. 법화경이나 반야심경의 설법 무대이기도 하다. 인도 라즈기르에 있다. 이 산 정상에는 여기 오봉산처럼 독수리 모양의 신령스런 바위가 있고, 명상하기 좋은 바위굴이 있다. 이 오봉산 정상의 영산전이 있는 모습은 부처님이 설법하고 명상하며 오래 머물렀던 그리드라쿠타와 많이 닮았다. 부처님께 귀의했던 빔비사라왕이 있던 마가다국은 당시 갠지스강 유역 16개 도시국가 중 남쪽의 강대국으로 문화가 발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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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마 끝에서 주룩주룩 빗물이 쏟아져 내리고, 우리는 손바닥 만한 영산전 법당에서 참배를 하였다. 관음전에는 스님의 목탁 치는 소리, 청신사 청신녀들이 가득 모여 앉아 독경하는 소리 낭랑히 들려왔다. 팔상성도 비람강생.... 이고득락이라는 스님의 설법 목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신라시대 의상대사가 창건한 일천삼백년 역사에서
이들이 부처님 오신 날 법요식에 참석한 최초의 서양인일 것이다.
맛있는 쌀밥 비빔밥으로 점심 공양을 하자니, 우리 할머니들이 이 미국에서 온 청년들을 보고 마치 손자 손녀처럼 귀여워해주었다. 젊은 날에 카투사병으로 동두천에서 군복무를 하고 아드님이 공학박사인 팔십대의 노거사님은 코리안 케키를 먹으라고 권하고, 육십 중반의 한 보살님은 코리안 비빔밥 이즈 굿이라고 소리치고, 팔십이 훌쩍 넘은 할미는 먹던 흰 절편 떡을 말 없이 건네주고, 미국인 아가씨는 우리말로 맛있어요 하며 받아 물었다.
내가 겨우 세살 때 우리 어머니가 이 암자에 날 데리고 왔고, 돌아가시기 전까지 해마다 사월 초파일이 오면 여기 암자에 올라 밤새 등불을 지키며 자식들을 위해 가정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였다는 사연을 나는 들려주었다.
신라 누리에 인간으로 하생한 미륵불의 화신,
화랑을 따르던 용화향도 득오실이 죽지화랑을 그리워하며 부른 향가 모죽지랑가의 탄생 무대,
간 봄 그리워함에
모든 것이 울어서 시름하는구나
아름다움을 나타내신
얼굴이 주름살을 지니려 하는구나,
눈 깜짝할 사이에
만나보게 되오리.
죽지랑이여,
그리운 마음의 가는 길에
다북쑥 우거진 마을에 잘 밤인들 있으리오?
이곳 오봉산 기슭에는 목월 선생의 생가가 있고,
너무나도 한국적인 정서를 읊은 시 윤사월의 무대이다.
영화 서편제를 생각나게 한다.
시공을 초월해 모죽지랑가와 윤사월과 서편제가 같은 정서를 노래하고 있다.
진달래 지고 송화가루 날리고
다북쑥 우거진 산골 마을
뻐꾹새 우는 늦봄이 간다.
윤사월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이고
엿듣고 있다.
고려시대 경주의 문장가 김극기의 시가 생각난다. 고려시대에 이미 바위 위에 봉수대가 있었던가 보다.
멀고 먼 구름 끝에 절이 있으니
티끌세상 떠난 경지가 거기 있구나.
새가 날아오를까 굽어 오른 하늘가에
봉수대가 바위 위에 올라앉았네.
우뚝한 천길 뫼
높직한 층층 바위도 한 개 돌이로다.
깎아지른 사방 둘레 험준한데도
그 위는 방석처럼 편편하구나.
티베트 불교 수행자인 이 미국인 불자들은 웅장한 산 봉우리에 곰과 무스를 비롯한 야생 동물을 쉽게 볼수 있는 몬태나주에서 왔다. 남자 법우는 새벽마다 일어나 수행을 한다.
題破山寺後 파산사 뒤의 선원에 적다
常建 상건(당의 시인)
淸晨入古寺 맑은 아침 오래된 절에 들어가자
初日照高林 갓 오른 해가 높은 숲을 비춘다
竹逕通幽處 대숲 길은 그윽한 곳으로 통하고
禪房花木深 선방에는 꽃나무가 깊어라
山光悅鳥性 산빛은 새의 성정을 기쁘게 하고
潭影空人心 연못빛은 사람 마음을 텅 비게 한다
萬뢰此都寂 일만 소리가 여기 모두 적막하고
但餘鐘磬音 다만 풍경 소리가 남았을 뿐
The clear dwn creeps into the convent old,
The rising sun tips its tall trees with gold,
As, darkly, by a winding path I reach
Dhyana's hall, hidden midst fir and beech.
Around these hills sweet birds their pleasant take,
Man's heart as free from shadows as this lake;
Here worldly sounds are hushed, as by a spell,
Save for the booming of the altar bell.
-translated by H. A. Giles, Chinese Litera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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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오르고 내려오다가 본 자주빛 꽃인데 이름을 잘 모르겠다. 아시는 분 좀 가르쳐 주세요. 산옥잠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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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잡고 걷는 뒷모습, 얼마나 아름다운 젊은 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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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짝 비온 뒤 싱그런 못둑에는 애기똥풀이 평화의 공화국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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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 냄새, 풀 향기, 사람 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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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똥풀꽃의 꽃말을 미국인들은 뭐라고 했더라? 들어도 기억이 나지 않군요.
미국인 아가씨는 미국에서도 노란 민들레는 많이 보았지만
여기서 흰 민들레꽃은 처음본다고 하였다.
고향 몬태나는 인구 밀도가 아주 낮은 한적한 주인데
5월까지 눈이 쌓여있고 겨울과 여름 두 계절이 주를 이루고
봄과 가을은 그저 보름 정도 있다고 하며 한국의 뚜렷한 사계절이 정말 아름답다고 하였다.
피어시그의 선과 모터사이클을 읽어보면 몬태나 주의 습지에 야생 조류가 아주 많음을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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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진리와 자비의 꽃비를 흠뻑 맞으며 걸은 오늘 사월 초파일을 세세생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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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그럽고 싱그럽고 싱그러운 정경이다. 못물은 투명한 거울이 되고, 공기는 청량하고, 푸르른 숲빛은 깨끗하고, 비구름은 하얗고, 마음은 청정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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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로의 빗방울을 머금은 토끼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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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향기로운 사람임에 분명하다. 나비가 아내의 향기에 취해 날아가지 못한다. 아내는 선덕여왕도 시샘할 한 송이 모란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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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이 보리를 널어 말렸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져오는 지맥석 마당 바위. 드라마 선덕여왕 마지막 촬영지. 여왕이 저 바위 위에 앉아 최후를 맞는 장면... 어린이날에 올랐을 때와 달리 바위와 암자는 백운에 휩싸여 그곳이 곧 두솔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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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편 사람도 짐승도 다니는 오솔길에 피어난 구슬봉이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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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날 오르며 본 서편 천촌 주사골 길가에 피어난 현호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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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핀 꽃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아시는 분 좀 가르쳐 주시길.
첫댓글 빗속 뜻깊은 나들이였군요. 즐감하고 갑니다. ^*^
초파일 즐거우셨겠지요? 심곡지 풍경을 보고 사진예술가, 자운영 샘이 계셨더라면 좋은 작품을 얻었을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주사암. 내 고향 뒷산의 절이어서 어린시절 진달래 따고 산딸기 따 먹으면서 엄마 다라 많이도 다녔습니다. 아, 내고향.
주사암 아래 아화가 고향이시군요. 저는 북안 명주가 고향이어요. 반갑습니당 ^^
첫번째사진..반영이 멋지네요..정말 날씨 좋은 날 담아보고 싶은 비경입니다.. 글..사진 잘 보았습니다.
초여름비 속에 우연히 맞닥뜨린 환상적인 풍경이었어요. 치자꽃향기가 얼마나 좋은지....^^
어링불님의 사진 찍는 솜씨도 사진 작가 못지 않으시네요.
멋진 풍경, 아름다운 이야기... 감동입니다. ^*^
미소천사, 감성이 항상 살아있는 피터팬....서라벌에서 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나중에 차 한 잔 음미할 수 있을런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