移家怨 (이가원)
이달(李達:1539~ 1612)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익지(益之), 호는 손곡(蓀谷)·서담(西潭)· 동리(東里).
최경창(崔慶昌), 백광훈(白光勳)과 더불어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렀다.
허균(許筠), 허난설헌(許蘭雪軒)의 스승이다.
서얼이었기에 벼슬에 관심이 없었다. 그 재능이 아까워 특별히 한리학관(漢吏學官)이 됐지만,
그것도 잠시, 벼슬을 버리고 팔도를 유람하면서 민중의 삶과 자신의 처지를 시로 읊었다.
그는 일흔이 넘도록 자식도 없이 살다가, 평양의 한 여관에서 쓸쓸히 죽었다.
그의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 수가 없다.
저서로는 제자 허균이 간행한 『손곡집』 과 또 한명의 제자인 유형이 간행한 『서담짐(西潭集)』이 있다.
할배는 솥을 지고 숲으로 들어가고
老翁負鼎林間去 노옹부정림간거
할멈은 손주를 데리고 가느라, 따라가지 못하네
老婦携兒不得隨 노부휴아부득수
사람을 만날 때마다 이사 다니는 괴로움을 말한들 무엇하랴
逢人却說移家苦 봉인각설이가고
여섯 해가 넘도록 군에 간 아들과 아비는 생이별이라네
六載從軍父子離 육재종군부 자리
*
손곡 이달(李達)의 삶은 말 그대로 파란만장하다.
신분제도가 엄격한 봉건사회에서
그는 얼자(孼子)로 태어났다. 어머니가 관기(官妓) 었다.
아버지가 누구냐도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어머니가 누구냐에 따라서
운명이 정해졌다.
본처 정실부인의 자식들은 벼슬길이 열려있지만
서얼(庶孽)은 아무리 재주가 뛰어나더라도 벼슬길이 막혀 있었다.
같은 첩(妾)이라도 양반가문의 어머니에게 태어나면 서자(庶子)가 되고,
어머니가 기생이나 종이 거나 천민이면 얼자(孼子)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서자(庶子)나 얼자(孼子)를 서얼(庶孼)이라 말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는 아픔이 있다.
생각해 보면
조선의 양반들이 흔히 말하는 ‘백성’은 자신들을 지칭하는 말이지
노비나 천민들은 사람이 아니라, 가축이었다.
노동의 가치가 있을 때 데리고 있다가, 병들면 쫓아내는 것이 흔한 풍습이었다.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전쟁터로 끌려가고, 온갖 부역에 죽을 때까지 일만 하다가 죽었다.
구한말(舊韓末) 조선이 망해도 조선을 위해 우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외세에 침략당하고 자신의 운명이 슬퍼서 운 것이다.
조선의 양반이라는 작자들은
몸은 조선의 것인데
사상(思想)과 몸짓은 중국인이었다.
글도 제 나라 것을 버리고
제 조상도 부정하고
공자왈 맹자왈 한문으로 글을 쓰는
중화에 미쳐버린 양반나부랭이었다.